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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1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1. 08:47

처용무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명     칭 처용무(處容舞)
분     류 무형유산 / 전통연행/ 무용/ 궁중무용
수량/면적
지 정 일 1971.01.08
소 재 지 서울 서울전역 
시     대
소 유 자
관 리 자 처용무보존회
설     명 처용무란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을 말한다. 궁중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오방처용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헌강왕(재위 875∼886) 때 살던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 : 전염병을 옮기는 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처용무는 5명이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향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추는데 동은 파란색, 서는 흰색, 남은 붉은색, 북은 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이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기초로 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다. 춤사위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당당하고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씩씩하고 호탕한 모습을 엿볼 수 있고, 가면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후기까지는 한 사람이 춤을 추었으나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다섯 사람으로 구성되었고, 성종(재위 1469∼1494) 때에는 더욱 발전하여 궁중의식에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 노래의 가사나 음악을 바꾸어가면서 전승되어 왔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면서 중단되었던 것을 1920년대 말 이왕직 아악부가 창덕궁에서 공연하기 위해 재현한 것을 계기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처용무는 가면과 의상·음악·춤이 어우러진 수준높은 무용예술로, 우리 조상들의 덕망있는 모습을 바탕으로 하며, 춤사위나 반주음악 또는 노래에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전승자 정보
보유구분 이름 성별 기예능 인정일 해제일 이력사항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  김 용 ( 金 龍 ) 남자   무용(舞踊) 19710108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  김천흥 ( 金千興 ) 남자   무용,가면제작 19710108 20060313 이력사항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  봉해룡 ( 鳳海龍 ) 남자   무용 19710108 19950531 이력사항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  김태섭 ( 金泰燮 ) 남자   무용 19710108 19930324 이력사항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  김기수 ( 金琪洙 ) 남자   무용 19710108 19861021 이력사항
  보유자후보  김중섭 ( 金重燮 ) 남자   무용(舞踊) 19870105 이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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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란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을 말한다. 궁중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오방처용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헌강왕(재위 875∼886) 때 살던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 : 전염병을 옮기는 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처용무는 5명이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향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추는데 동은 파란색, 서는 흰색, 남은 붉은색, 북은 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이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기초로 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다. 춤사위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당당하고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씩씩하고 호탕한 모습을 엿볼 수 있고, 가면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후기까지는 한 사람이 춤을 추었으나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다섯 사람으로 구성되었고, 성종(재위 1469∼1494) 때에는 더욱 발전하여 궁중의식에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 노래의 가사나 음악을 바꾸어가면서 전승되어 왔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면서 중단되었던 것을 1920년대 말 이왕직 아악부가 창덕궁에서 공연하기 위해 재현한 것을 계기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처용무는 가면과 의상·음악·춤이 어우러진 수준높은 무용예술로, 우리 조상들의 덕망있는 모습을 바탕으로 하며, 춤사위나 반주음악 또는 노래에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 보충설명


처용무는 다섯명의 무희(舞戱)가 처용가면을 쓰고 오방(五方)에 서서 추는 춤이다. 처용무는 본래 나례(儺禮)와 같은 벽사진경(벽邪進慶) 의례에서 연행되던 것이 뒤에는 궁정과 관아의 연향에서 추었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에 신라 헌강왕(憲康王)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만난 용왕의 아들이 처용이며 처용은 자기의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 앞에서 처용가를 지어 불러 벽사의 기능을 가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용무는 신라 때부터 연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용齋叢話) 에 보이는 대로 처용무는 애초에 한 사람이 흑포(黑布)를 입고 흑사모(黑沙帽)에 적색면(赤色面)을 썼던 것이었으나 조선 세종 때에는 다섯 사람이 추는 오방처용무로 추어졌다고 한다. 성종 때 나온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처용무가 학무(鶴舞)와 연화대무(蓮花臺舞)와 합설(合設)해서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로 나례에서 연행된 것을 볼 수 있다.

처용무는 궁중 나례를 비롯하여 관아의 연향에서 연행되었으나 조선 말기에 전승이 끊어졌던 것을 1930년대에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 아악사(雅樂師) 김녕제(金寗濟)함화진(咸和鎭)이수경(李壽卿)이 『악학궤범))의 기록에 의거하여 재현한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처용무의 보유자는 주로 구왕궁아악부 출신인 김기수, 봉해룡, 김태섭, 김천흥, 김용이 인정되었다.

현행 처용무는 다섯 무원이 각각 청, 홍, 황, 흑, 백의 단의(緞衣)를 오방에 맞추어 입고 서서 처용가면과 사모를 쓰고 홍록흉배(紅綠胸背), 초록천의(草綠天衣), 남오군(藍오裙), 홍방슬(紅方膝), 황초상(黃초裳)에 금동혁대(金銅革帶)를 띠고 백한삼(白汗衫)을 끼고 백피혜(白皮鞋)를 신고 춤을 춘다. 수제천(壽齊天)에 맞추어 두 팔을 허리에 붙이고 청, 홍, 황, 흑, 백의 차례로 들어와 일렬로 북향하여 서서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 . ' 하고 처용가를 가곡(歌曲) 언락(言樂)가락에 맞추어 부르고 나서 향당교주(鄕唐交奏)에 맞추어 오방으로 마주 서서 춤추다가 소매를 들어 안으로 끼는 도돔춤을 추고 나서 발을 올려 걸으며 무릎을 굽히는 발바딧춤을 추며 북향하여 섰다가 가운데 황과 사방은 반대로 향하며 춤을 춘다. 오방무원은 제마다 발을 들어 올리며 다른 방향으로 들어서는 발바딧 작대무(作隊舞)를 추고 황은 북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무릎디피춤을 추고 청, 홍, 흑, 백은 중앙을 향하여 춤을 추되 처음에 흑과 황이 대무(對舞)하고 다음은 청과 홍과 백이 차례로 대무한 다음 중앙을 등지고 추다가 제자리를 향하여 춘다. 회선(回旋)으로 서로 드나들며 일렬 횡대로 북향하여 선 다음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 . . ' 하고 창사(唱詞)를 가곡 우편(羽編)에 맞추어 부른다. 윗도드리가 시작되면 한삼을 좌우 어깨에 차례로 메었다가 뿌리는 동작으로 낙화유수(落花流水)를 추다가 차례로 돌아서 나간다.

처용무는 남무(男舞)로서 장엄하고 씩씩하며 신비스러운 춤이다.



관련 자료 

http://kr.blog.yahoo.com/gjtmsla1000/2247.html?p=1

처용무 處容舞
 

 

 


▒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 지정연월일 : 1971년 1월 8일
▒ 보 유 자 : 처용무보존회, 김천흥(金千興), 봉해룡(奉海龍),
김태섭(金泰燮), 김용(金龍)
▒ 전 승 지
: 서울특별시

처용무는 춤추는 사람 다섯 사람이 처용가면을 쓰고 5방(五方)에 서서 추는 춤으로 신라 헌강왕(憲康王, 875∼885) 재위 때 발생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만난 용왕(龍王)의 아들이 처용이며 처용은 자기의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 앞에서 처용가(處容歌)를 지어 불러 벽사의 기적을 가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처용무는 신라 때부터 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 충혜왕조와 신우조에는 처용희(處容戱)의 기록이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齋叢話)≫에는 처용무는 원래 한 사람이 흑포(黑布)를 입고 흑사모(黑沙帽)에 적색면(赤色面)을 쓰고 추었으나 세종 때에는 다섯 사람이 추는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추어졌다고 한다. 성종 때 나온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처용무가 학무(鶴舞)와 연화대무(蓮花臺舞)를 합설해서 학연화대처용무(鶴蓮花臺處容舞)합설로 나례에서 연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처용무는 궁중 나례를 비롯하여 관아의 연향에서 연행되었으나 조선말기에 전승이 끊어졌던 것을 1928년에 구황궁아악부(舊皇宮雅樂部) 김영제(金?濟), 함화진(咸和鎭), 이수경(李壽卿)이 ≪악학궤범≫과 장악원에서 쓰던 정재홀기(呈才笏記)를 참작하여 새로 안무한 것이다.
처용탈은 모시 또는 옻칠한 삼베로 껍질을 만들고 채색은 적면유광(赤面油光)으로 후덕한 모습으로 한다. 사모는 대〔竹〕로 망을 얽어 종이를 바르며, 두 귀에는 주석고리와 납주(?珠)를 걸고 복숭아 열매와 가지를 단다.
춤은 다섯 무원(舞員)이 각각 청(동), 홍(남), 황(중앙), 흑(북), 백(서)의 단의(緞衣)를 오방에 맞추어 입고 서서 처용가면과 사모를 쓰고 홍록흉배(紅綠胸背), 초록천의(草綠天衣), 남오군(藍?裙), 홍방슬(紅方膝), 황초상(黃?裳), 금동혁대(金銅革帶)를 띠고 백한삼(白汗衫)을 끼고 백피혜(白皮鞋)를 신고 춤을 춘다. 수제천(壽齊天, 빗가락 정읍)에 맞추어 두팔을 허리에 붙이고 청·홍·황·흑·백의 차례로 들어와 일렬로 북향하여 서서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천하태평나후덕(天下太平羅候德)…"하고 처용가를 가곡(歌曲) 언락(言樂)가락에 맞추어 부르고 나서 향당(鄕唐) 교주(交奏)하면 처용 5인이 모두 허리를 굽힌 다음 5방으로 마주 서서 춤추다가 소매를 들어 안으로 끼는 홍정(紅程) 도돔춤을 추고나서 발을 올려 걸으며 무릎을 굽히는 발바딧춤을 추며 북향하여 섰다가 가운데 황(黃)과 사방은 반대로 향하여 춤을 춘다. 오방무원은 각기 무진무퇴(舞進舞退)하여 다른 방향으로 들어서는 발바딧작대무〔作隊舞〕를 추고 황은 북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무릎디피춤을 추고 청·홍·흑·백은 중앙을 향하여 춤을 추되 처음에 흑과 황이 대무(對舞)하고 청·홍·백이 차례로 대무한 다음 중앙을 등지고 추다가 제자리를 향하여 춘다. 회선(回旋)·우선(右旋)으로 흑(黑)이 먼저 나오고 황은 백과 홍 사이에 들어가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흑은 뒤로 물러서고 홍은 앞으로 나가 처용 5인이 가지런히 서면 일제히 북향하고 선 다음 노래를 한다.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 가기울총총(佳氣鬱??) 하샷다 / 금전구중(金殿九重)에 명일월(明日月)하시니 / 군신천재(君臣千載)에 회운룡(會雲龍)이 샷다 / 희희서속(熙熙庶俗)은 춘대상(春臺上)이어늘…"하고 창사(唱詞)를 가곡 우편(羽編)에 맞추어 부른다. 윗도드리가 시작되면 한삼을 좌우 어깨에 차례로 매었다가 뿌리는 동작으로 낙화유수(落花流水)를 추다가 청·홍·황·흑·백·처용의 순서로 퇴장한다.
처용무는 본디 나례(儺禮)와 같은 벽사진경(?邪進慶) 의례에서 연행되던 것이 뒤에 궁중과 관아의 연향(宴享)에서 추어졌으며, 남무(男舞)로서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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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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