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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3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1. 08:53

나전장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명     칭 나전장(螺鈿匠)
분     류 무형유산 / 공예기술/ 목칠공예/ 칠공예
수량/면적
지 정 일 1966.06.29
소 재 지 기타 전국 
시     대
소 유 자
관 리 자
설     명 나전(螺鈿)은 고유어로 ‘자개’라 하며, 여러 무늬의 조개껍질 조각을 물체에 붙이는 것을 말한다. 나전칠기는 나전 위에 옻칠을 해서 만들어 낸 공예품을 말하며, 이러한 기술이나 만드는 사람을 나전장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나전칠기 기술은 중국 당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칠기는 신라의 고분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으며 백제·삼한시대의 칠기도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르러 일반적인 생활용기로 널리 사용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전칠기의 제작과정을 보면, 먼저 나무로 화장대, 교자상 등의 기본틀인 백골을 짠다. 이어 백골의 표면을 사포로 문질러 고르게 한 다음 백골의 틈을 메우기 위해 칠죽을 발라 자개를 백골에 붙인다. 그 후 연마, 옻칠, 광내기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자개로 무늬를 만드는 방법에는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자른 ‘상사’를 백골에 붙여 직선 또는 대각선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어내는 끊음질과, 자개를 실톱, 줄로 문질러서 국화, 대나무, 거북이 등의 각종 도안 문양을 만들어 백골에 붙이는 줄음질이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는 모란·국화·연꽃 등의 식물무늬가 주요 소재로 활용되었고 조선 중기에는 화조·쌍학·포도 그리고 사군자 등의 무늬가 대부분이었다.

나전칠기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재료는 옻나무 수액인 칠과 자개인데, 자개는 전복, 소라, 진주조개가 주로 쓰이며 남해안과 제주도 근해에서 나는 것이 가장 곱고 우수하다. 현재 나전칠기로 가장 유명한 지역은 경남 통영이며 강원도 원주는 우수한 옻칠 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전장은 인내를 요구하는 복잡한 전통공예기술로 가치가 크며 기능보유자로는 끊음질에 송방웅, 줄음질에 이형만 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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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설명

나전(螺鈿)은 고유어로 ‘자개’라 하며, 여러 무늬의 조개껍질 조각을 물체에 붙이는 것을 말한다. 나전칠기는 나전 위에 옻칠을 해서 만들어 낸 공예품을 말하며, 이러한 기술이나 만드는 사람을 나전장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나전칠기 기술은 중국 당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칠기는 신라의 고분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으며 백제·삼한시대의 칠기도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르러 일반적인 생활용기로 널리 사용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전칠기의 제작과정을 보면, 먼저 나무로 화장대, 교자상 등의 기본틀인 백골을 짠다. 이어 백골의 표면을 사포로 문질러 고르게 한 다음 백골의 틈을 메우기 위해 칠죽을 발라 자개를 백골에 붙인다. 그 후 연마, 옻칠, 광내기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자개로 무늬를 만드는 방법에는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자른 ‘상사’를 백골에 붙여 직선 또는 대각선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어내는 끊음질과, 자개를 실톱, 줄로 문질러서 국화, 대나무, 거북이 등의 각종 도안 문양을 만들어 백골에 붙이는 줄음질이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는 모란·국화·연꽃 등의 식물무늬가 주요 소재로 활용되었고 조선 중기에는 화조·쌍학·포도 그리고 사군자 등의 무늬가 대부분이었다.

나전칠기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재료는 옻나무 수액인 칠과 자개인데, 자개는 전복, 소라, 진주조개가 주로 쓰이며 남해안과 제주도 근해에서 나는 것이 가장 곱고 우수하다. 현재 나전칠기로 가장 유명한 지역은 경남 통영이며 강원도 원주는 우수한 옻칠 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전장은 인내를 요구하는 복잡한 전통공예기술로 가치가 크며 기능보유자로는 끊음질에 송방웅, 줄음질에 이형만 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칠기의 기원이 언제인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중국의 기록에는 한(漢)대에 있었다고 보이고, 우리나라에서는 낙랑고분(樂浪古墳)에 칠기가 보이고 신라의 관직제도에 칠전(漆典)이 보이니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고 할 수가 있겠다.

식리총(飾履塚), 호우총(壺우塚), 무녕왕능(武寧王陵) 등에서도 이미 출토된 예가 있는데 그것들은 포심(布心)이나 목심 칠기(木心漆器)들로서 주(朱)흑칠(黑漆) 외에도 채화(彩畵)한 것이 대부분이나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나전칠기가 있었다는 흔적은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호우총에서 출토한 가면(假面)은 목심(木心)에 흑칠을 하고 눈알을 유리로 상장(嵌裝)한 것과 같은 예가 칠기의 선편(先鞭)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고도 생각된다. 고려에 이르면 기록이나 유례(遺例)가 앞 시대에 비해 많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많다.

현재의 나전칠기장 김봉룡(金奉龍)은 경상남도 충무시 태생이다. 최초의 나전장 보유자로 인정된 고 김봉룡은 17세 때부터 충무에서 당시의 명장(名匠) 박정수(朴貞洙)에게 사사하고 뒤이어 근세 나전칠기 제작의 개척자의 하나라 할 김성규(金成圭) 문하에서 수업을 거듭하였고 1994년 사망으로 보유자 인정이 해제되었다. 특히 그의 기능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당초문(唐草文)으로서 가늘고 길고 아름다운 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해방 전부터 일본, 불란서 등지의 박람회에 출품하여 수상하였고, 조선미술전람회에 14회에 걸쳐 입선을 거듭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국전추천작가로서 후진 양성과 우리나라 나전칠기공예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나전칠기는 목심(木心)인 경우 다음과 같은 공정(工程)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소목장(小木匠)이 만든 바탕을 해어피 나 사포로 문지르며 사포질을 하고 돼지털솔로 생칠(生漆)을 하여 하룻밤을 재운다. 생칠에 톱밥과 밥풀을 섞어 백골 바탕의 이음새나 트집이 난 데를 메운다. 생칠과 쌀풀을 섞어서 삼베나 무명천을 백골에 씌워 바른다. 그 위에 뼈가루나 숯가루 또는 황토(黃土)를 고열에서 구워 얻은 가루들을 생칠과 풀을 섞은 것으로 반죽하여 베위에 발라서 바탕이 곱게 한다. 이를 고래바르기라 한다. 고래바르기를 마친 바닥을 물을 주면서 숫돌로 갈아 바닥이 고르고 반드럽게 다스린 다음 한 번 고래바르기를 하고는 아교를 바른 자개를 인두로 지지며 자개붙임을 한다. 이 공정을 자개붙임이라고 하며 주로 근해에서 잡힌 전복껍질을 많이 사용한다. 자개붙임이 끝나고 풀이 마르면 자개 밖으로 묻어난 풀을 열탕(熱湯)으로 재빨리 문질러 없앤다. 자개를 붙인 곳에 생칠을 한 번 더 올리고 고래바르기를 또 하고 숫돌로 갈고 중칠을 바른 다음에 숯으로 갈아내고 하는 작업을 두세 번 거듭한 끝에 생칠로 마지막 칠(漆)을 한다. 상칠(上漆)이 마르면 숯으로 또 갈고 솜에 콩기름을 묻혀 초광(初光)내기를 하고 재광(再光)과 삼광(三光)을 낸 다음에 솜으로 닦아낸다. 이때야 비로소 나전칠기는 완성이 된다.

끊음질나전칠공예에 있어서 나전상감(螺鈿象嵌)은 여러가지로 나뉠 수 있으나 나전의 후박(厚薄)과 감입(嵌入)의 방법에 따라 크게 나뉘며, 제각기 공정에 차이가 있다. 두꺼운 자개를 사용할 경우가 있고 얇은 자개를 쓸 경우가 있으며, 드물게는 두 가지 종류를 병용하는 수도 있다. 감입의 방법도 상감할 자리를 음각해서 거기에 자개를 끼우는 경우와 자개를 먼저 붙여 놓고 그것을 칠(漆)로 발라 감입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나전으로 무늬를 다듬는 방법에도 끊음질과 줄음질의 두 가지가 있다. 끊음질은 자개를 거두로 가늘고 길게 따내어 상사를 만든 다음 날카로운 상사칼 끝으로 상사를 잘게 끊으며 기하문(幾何紋)이나 산수문(山水紋), 초화문(草花紋) 등을 표현하는 우리의 고유하고 전통적인 기법이다. 줄임질은 화조(花鳥), 십장생(十長生) 등을 가위로 오려내고 줄로 문질러 얻은 무늬를 붙이는 기법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이 따로 쓰이기도 하고 함께 쓰이기도 한다. 끊음질은 1910년대 이후 실톱이 사용되면서 그 간편함 때문에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고 줄음질이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전통적인 나전칠공예가 지녔던 고유색과 특질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심부길은 서울 태생으로 편성규 문하에서 쇠멸하려 했던 끊음질을 수업하여 평생을 전념해오고 있으며 특히 그의 끊음질로 된 기하학적인 연속문양의 미는 당대의 제일인자라 할 수가 있다.

끊음질의 재료는 주로 근해에서 잡히는 전복 암컷의 껍질을 쓴다. 끊음질에 쓰이는 연장이나 재료로는 숫돌, 인두, 자개솔, 자톱, 탄철, 집게, 줄, 송곳, 거두, 상사칼, 각도, 칠긁기칼, 사포, 솜, 소나무솔, 붓물감 등을 갖추어야 한다.

공정(工程)은 거두로 자개를 썰어 상사를 따내고 백골 바탕에 아교를 칠한 다음 칫수를 풀어 자로 간격을 맞추어 송곳으로 눈금을 친다. 백골에 칠한 아교를 혀로 핥으며 상사가 잘 붙도록 하여 오른손에 상사칼을 쥐고 왼손으로 상사를 집는데 상사의 끝을 검지손톱 끝에 살짝 끼고 상사의 중간을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르면서 안에서 바깥쪽으로 칼질을 하며 끊어 나간다.

끊음질이 끝나면 무늬에서 벗어난 상사를 칼로 잘라낸다. 이를 누꼽을 뗀다고 한다. 그리고는 뜨끈한 물을 손에 묻혀 배어나온 아교를 닦아내고 말린 다음 얇게 칠을 올린다. 숫돌로 갈아내고 말려서 옻칠을 다시 한 다음 숯으로 갈고 솜에 콩기름을 묻혀 닦아낸 후 화조(花鳥), 수구(水龜) 등 무늬나 꽃잎, 깃털, 거북 등과 같은 곳은 살을 친다고 하여 각도(刻刀)로 새긴다.

심부길이 끊음질에 즐겨 쓰는 무늬는 다음과 같다. 국화(菊花), 거북, 미자구문, 싸리짝, 백문, 백문, 회포문, 반자문(회포꽃문), 동근수자싸리짝문, 대나무, 쌍희자, 아홉끝뇌문, 성틀뇌문, 거북뇌문, 국화뇌문, 세끝뇌문, 다서끝뇌문, 관사무늬, 삼각산무늬, 세모싸리문, 네모부자문, 네모귀자문, 산수문(山水紋) 등이 있다.






관련 자료 

http://blog.daum.net/dospark/9033830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18>칠(漆)과 나전장(螺鈿匠)

우리나라에서 처음 옻칠을 사용했던 흔적은 낙랑지역에서 발견된 칠기(漆器)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칠 공예는 중국 당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고, 조선시대에 많은 생활용품들이 만들어지면서 오늘날까지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 주칠(朱漆)을 한 왕비(王妃)용 두침(頭枕). 국보164호 공주 무령왕릉 출토.

▲ 오늘날에는 나전칠기 기법을 최대한 살려서 현대인의 개성과 취향에 맞춘 다양한 제품으로 응용되고 있다.

▲ 황칠을 입힌 용. 봉황 문양의 노리개.

▲ 옻칠은 목기에 칠하면 갈라지고 터지는 결점을 보완하고 수분의 침투를 막아 오랜 기간동안 사용할 수 있고 인체에도 무해하다.(나전장 이형만 작품)

▲ 나전호족반(螺鈿虎足盤). 유연한 S자형을 이룬후 발끝이 밖으로 살짝 내밀린 형태가 호랑이 다리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호족반이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나전장롱에는 백색의 야광패보다 청록 빛깔을 띤 전복을 많이 썼다. 빛을 받으면 무지개와 같은 다양한 색을 내며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색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신비로움이 있다.

▲ 옻의 채취는 초여름부터 3~4개월간 나무에 수액이 줄기까지 내려왔을 때 시작하여 이른 새벽에서 아침까지 채취한다.8~15년간 키워 한 그루에서 맥주 반 컵 정도의 양을 얻는다.

▲ 나전 주칠 이층장은 삼국시대부터 옻칠에 색을 넣은 채화칠기의 특징인 깊은 맛과 고결한 느낌을 나타낸 작품이다.(이대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살림집’展 7월31일까지 전시)

▲ 우리의 전통 칠에는 짙은 적갈색이 나는 옻칠이 대부분이나 황금빛을 낼 수 있는 황칠(黃漆)도 있다. 황칠나무 껍질에 상처를 내어 수액을 채취하고 이 수액을 정제하면 황칠이 얻어진다.(황칠장 구영국)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고 이구(李玖)씨의 장례식에 사용된 조선왕궁의 관인 재궁(梓宮). 창덕궁 의풍각에 보관됐던 재궁은 소나무 중에서도 속이 노란 빛을 발하는 황장목(黃腸木)으로 짜여졌으며 수십 차례에 걸쳐 옻칠을 했다.

옻나무는 한자로 쓰면 칠목(漆木)이다 ‘옻’은 ‘漆(칠)’이다. 옻칠이란 말은 ‘역전앞’처럼 같은 말이 중복 사용된 경우이며 전통 칠의 대명사처럼 쓰여진다. 옻칠을 한 그릇에 음식물을 담아두면 쉬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예로부터 목조식기에 옻칠을 사용하여 왔다.

옻칠은 순수한 칠뿐만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빛 때문에 색채옻칠로도 쓰여왔다. 일본의 옻칠공예가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첫눈에 사람을 압도한다면, 우리 옻칠공예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은한 깊이가 있다.

옻칠공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전칠기(螺鈿漆器)이다.

나전칠기는 주로 옻칠바탕에 영롱한 무지갯빛 자개를 붙이거나 박아넣어 그림과 무늬를 놓는 공예 기법이다. 패각뿐만 아니라 대모(거북등껍질), 상아, 호박, 보석 따위를 새겨 넣어 장식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나전이라고 한다.

나전칠기에 그려지는 것은 자연이다. 언제나 자연을 가까이 두고자 했던 조상들의 신념이 그대로 드러난다. 때로는 오동나무 숲을, 때로는 계곡과 폭포를, 때로는 정자와 연못을 만들었다. 장수를 바라는 마음에서 십장생을 담았고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 사군자의 모습을 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전칠기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공간에서 또다른 자연세계를 품을 수 있게 하였다. 나전의 아름다움과 칠기의 실용성이 접합되어 찬란한 빛을 발하는 빼어난 공예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 “아교 혀로 핥아 세말 먹어야 숙련공”

▲ 무형문화재 나전장 송방웅
나전칠기의 재료인 전복껍데기는 색이 고운 남해안산을 으뜸으로 친다.

일찍부터 통영은 나전의 고향으로 불려왔다. 뭍에는 충무공이 만든 12공방이, 물에는 오색영롱한 전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방웅(65)씨(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기능보유자)는 17세 때 통영칠공예의 명장이던 부친(송주안·81년 작고)으로부터 자개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글과 기술은 원수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엄격한 스승 아래서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선친의 가르침이 있었단다.

자개를 칼로 끊어 붙여 무늬를 내는 끊음질과 실톱으로 그림대로 오려서 무늬를 만드는 줄음질은 자개를 붙이는 기술이다.“아교를 혀로 핥아 서말을 먹어야 숙련공이 된다고 배웠어요.” 끊음질 나전의 대가(大家)인 송씨는 무늬를 낼 때 따뜻한 수분을 주어 아교의 풀기를 살리기 위해 일일이 혀로 침을 바른다. 그는 나전칠기가 소목·나전·칠 등 복합적인 45가지의 기술 공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종합예술품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한때는 기능공만 1500명까지 있었지만 10명도 안 남았어요.”라며 찬란했던 민속공예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사진 글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기사일자 : 2006-03-21

 
 
관련 자료 

 http://blog.empas.com/wopark/
 
 
나전칠기





















































 
<출처;blog.empas.com/wopark>
 
 
 
관련 자료 

 
 
채화칠기와 나전칠기 전통공예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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