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읍성으로, 성의 둘레에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기 때문에 탱자성이라고도 했다. 읍성은 지방 행정 관청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며,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갖는 형태로서, 평시에는 행정 중심지가 되고 비상시에는 방어기지가 되었다.
해미는 태종 14년(1414)부터 효종 2년(1651)까지 군사의 중심지였는데, 이 성은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하여, 성종 22년(1491)에 완성되었다. 동문·서문·남문의 3문 가운데 남문인 진남루만 원래의 모습이고, 동문과 서문은 1974년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성 안의 시설은 1980·81년에 일부가 발굴·조사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 1,000여 명을 처형시켰던 곳으로, 김대건 신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천주교인을 처형한 회화나무와 사형대 등이 남아 있는데, 이 회화나무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서 고문을 하였으며, 그 흔적으로 지금도 철사줄이 박혀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읍성으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 되며,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 ![]() | |||||
관련 자료 |
http://corea3000.com/tour/myungsung.htm
해미읍성『사적116호』 : 충남 서산 해미면
▲ 읍성의 정문으로 진남문
천호대교 남단에서 132km, 서하남~판교~서서울~서해안고속도로~해미IC로 나가면 바로 읍성이다. (도로비 1,100 또 1,100 그리고 4,400원)
역사:
태종 7년(1407년) 충청도 감사가 겸임하는 공주와 인근 예산군 덕산면에 두었던 충청 지역 병마절도사영 중 덕산 병영을 태종 18년(1418년) 이 곳으로 옮긴 뒤 축성을 시작하여 성종22년에 완공했다.
규모:
5만9천평의 넓은 벌판에 이 고장에서 나는 화강암으로 성 외곽을 쌓고 안쪽을 흙으로 쌓아 올려 높이 5m, 둘레 1천8백m의 성곽을 만든 뒤 성벽 밖에 깊이 2m의 연못을 파놓았다.
이상은 서산시청에서 옮겨옴
높이 5m, 길이 1,800m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이조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인 울 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 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만 남아 있다.
그 감옥터 옆에는 지금도 늙은 호야나무가 서 있다. 신자들을 끌어내어 머리채를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줄에 움푹 패이도록 옛 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이상은 http://catholic2.paolo.net/~haemi 에서 옮겨옴
▼ 읍성 진남문으로 들어가 보이는 전경으로 호야나무가 맨먼저 시야에 들어 온다
▲▼ 東軒 : 고을의 수령(守令) 등이 정무를 집행하던 건물.
현감(縣監) ·수사(水使) ·병사(兵使) ·감사(監司)가 주재하는 관청의 본건물로, 수령이 사무를 집행하던 건물의 일곽, 즉 대청을 이르기도 한다.
조선 중종 때 태인현감(泰仁縣監)이 공사금 3,000냥으로 창건하였다는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현의 동헌을 보면, 정면 6칸, 측면 4칸, 건평 45평에 이르는 목조평가인 주심포팔작(柱心包八作) 지붕이다. 현청의 동헌은 대개 정면이 6∼7칸, 측면이 4칸으로 된 장중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며, 여기에 내아(內衙) 등의 부속건물이 따른다.
▼ 東軒 오른쪽으로 계단을 올라 높은곳에 서 있는 정자
▼ 성 안에서 자주 보이는 감나무
기을이 탐스럽구나~!
▼충남 서산시 운산면(雲山面) 신창리(新昌里) 상왕산(象王山)에 있는 절.
해미읍에서 8km. 읍성에서 647번도로 따라 가다가 개심사 표지판 보자마자 오른쪽으로 들어 가면 고속도로 다리 아래로 지나 저수지를 끼고(물이 많이 빠져 내년 봄이 걱정된다) 서산종축목장의 한우들을 보며 저수지 따라 돌아 올라 가면 주차장 넓다.
이곳 개심사의 대웅전은 보물 143호라 하고, 크지않은 사찰로 사찰 부근의 노송이라든지 배롱나무와 연못 등은 무척 아름다우나 절 전후 좌우가 산으로 전망이 막힌것이 흠이라면 흠이겠다만 어느분은 아늑해서 오히려 좋다고 한다.
많은 화가들이 낙엽진 고목의 벗나무를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개심사는 전형적인 산지 가람으로 백제 의자왕 14년(653)에 혜감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개원사였으며 고려 충정왕때 처웅대사가 중건하면서 개심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현재의 절집은 1941년 해체 수리시 발견된 묵서명으로 보아 1484년에 새롭게 중창된 것이다. 이점에서 개심사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의 전화를 입지 않았던 가람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웅보전과 심검당, 무량수전, 설선전이 팔을 두르고 에워싸듯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절 마당에는 5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보물 143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단정한 품위가 돋보이는 맞배지붕의 건축으로 이 건축은 주심포 계통과 다포식 건축 수법이 혼재되어 있어 주심포에서 다포식으로 변화 하던 시기의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개심사의 또 다른 건축적 특징은 입구에서 대웅전까지의 동선체계가 다른 절들처럼 직선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돌아서 진입하게 되어 있어 한결 친숙한 느낌을 연출하고 있다. 안양루 옆의 해탈문을 통하여 절마당을 들어서면 대웅전과 심검당, 요사체가 서로 어깨를 기댄채 아늑하게 감싸안고 있다. 거기에 맘껏 휘어진 나무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살려낸 요사체의 기둥과 문지방나루는 눈길을 사로잡는다.
등을 구부린 사람처럼 힘겹게 받치고 있는 범종루의 기둥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흐름을 한치도 거스르지 않고 거기에 멋을 부리고 지혜를 얻고자 했던 선인들의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다.
올망졸망 붙어 있는 절집을 구경하고 개심사의 진면목을 느끼기 위해서는 명부전을 지나 산신각까지 올라야 한다. 이곳에 오르면 개심사의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서해바다까지 흘러가는 산자락을 바라볼수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개심사는 이름난 스님네의 명리를 내세우지도 않고 화려한 수사의 법문도 강요하지 않는다. 마음처럼 머물렀다 흘러가는 계절과 솔바람소리가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점이 개심사를 가장 아름다운 절로 만들어 내는지도 모른다. 그 분위기만으로도 이미 감불(感佛)의 경지인 곳, 그곳이 개심사이다.
http://myhome.shinbiro.com/~emile/gaesim.htm에서 옮겨 옴
해미읍성에 관한 자세한 역사 이야기
해미성지 홈페이지 : 여러곳의 사진과 설명 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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