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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보물 1338호 옥천 용암사 쌍삼층석탑-2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1. 14:29
1735 옥천용암사쌍삼층석탑 보물 1338호 충북 옥천군 고려시대
 
용암사는 신라 진흥왕 13년(552) 때 의신(義信)이 세운 사찰이다. 이 석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달리 대웅전의 앞이 아니라 사방이 한 눈에 조망되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있다. 석탑이 사방의 조망권이 확보된 위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행했던 산천비보(山川裨補)사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천비보사상이란, 탑이나 건물을 건립해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것이다.

같은 모양의 석탑 2기는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자연암반 위에 건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층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동탑은 4.3m, 서탑은 4.1m로 규모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탑의 경우 2층과 3층 탑신의 몸돌이 결실되어 새로이 보충해 놓은 것이다.

각 부의 양식과 석재의 결구 수법에서 매우 간략화된 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탑은, 현재까지 확인된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석탑 중 유일하게 쌍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관련 자료 

http://kr.blog.yahoo.com/hansung7/4911.html?p=9

 

장령산 용암사

종파        대한 불교 조계종
창건시기  진흥왕 13 ( 552년)
창건자     의신(義信)
소재지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沃川邑) 삼청리 장령산(長靈山)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써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천축(天竺:인도)에 갔다가 귀국한 의신(義信)이 552년(진흥왕 13)에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경내의 용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한다고 하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용바위에서 서라벌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였다는 설이 있다문화재로는 마애불(충북유형문화재 17)이 있는데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형태이며높이 3m로,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의태자가 신라 멸망을 통탄하며 유랑하던 중에 이곳에 머물다가 떠나자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조성하였다고 하여 마의태자상이라고도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고 전한다. 또, 같은 형태의 석탑 2기가 자연 암반 위에 나란히 서 있는 쌍삼층석탑(보물 1388호)이 있다.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거의 체감 없이 비슷한 비율로 올린 특이한 형태이다.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높이는 약 4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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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 쌍삼층석탑 (보물 1388호)


이 석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달리 대웅전의 앞이 아니라

사방이 한 눈에 조망되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있다. 석탑이 사방의 조망권이 확보된 위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행했던 산천비보(山川裨補)사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천비보사상이란, 탑이나 건물을 건립해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것이다. 같은 모양의 석탑 2기는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자연암반 위에 건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층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동탑은 4.3m, 서탑은 4.1m로 규모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탑의 경우 2층과 3층 탑신의 몸돌이 결실되어 새로이 보충해 놓은 것이다.


각 부의 양식과 석재의 결구 수법에서 매우 간략화된 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탑은, 현재까지 확인된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석탑 중 유일하게 쌍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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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 마애불 (충북유형문화재 제17호)


용암사(龍岩寺) 뒤편에 있는 암벽을 감실(龕室) 모양으로 파고, 그 안쪽에 도드라지게 새긴 얕은 부조(浮彫)의 마애불입상(磨崖佛立像)이다.

암벽의 색깔이 붉은 색이어서 불상이 더욱 인상적으로 보인다.

발을 좌우로 벌리고 연꽃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데 신라말·고려초에 유행하던 마애불의 수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즉,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가는 코 등으로 묘사된 불상의 얼굴은 파격적인 미소에도 불구하고 도식적(圖式的)인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넓은 어깨, 늘씬한 하체 같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표현에도 불구하고, 갖다 붙인 듯 한 팔과 V자형의 규칙적인 옷 주름, 좌우로 힘없이 늘어진 옷자락 등 갖가지 세부 표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마애불은 세련된 신라의 조각이 점차 형식화해가던 시대에 조각된 불상으로 추측된다.


이 불상은 마의태자와 관련이 있어 마의태자가 신라 멸망을 통탄하며 유랑하던 중에 이곳에 머물다가 떠나자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조성하였다고 하여 마의태자상이라고도 하는데 신빙성은 없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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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http://blog.empas.com/yks1215/10526452

 

 

장령산 용암사

산행 겸해서 장령산 용암사를 찾아 나섰다. 옥천역에서 기차를 내렸다.

옥천읍내는 본래도 조용한 곳이지만, 어제따라 더욱 더 한산해 보였다.

삼청리에서 버스를 내려 산길을 걸어 올라간다. 들판에 나락들이 익어가는 모습이 완연하다.

약간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갔다. 고갯길 중간에서 명절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인데도

밭에 서둘러 일하러 나오셨다는 전씨 할머니(80세)를 만났다.

상삼마을에 사신다는 할머니는 비가 내리면 베어놓은 깻단이 썩을까봐 묶으러 나오셨다 한다.

자식이 넷이라는데 아무도 할머니를 따라나서지 않았다는 건 몇 번을 생각해봐도 씁쓸한 일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요새 세상에 부모 일하러 간다고 따라나서는 자식이 어딨냐?"고 하신다.

▲ 용암사 전경. 좌측으로부터 범종각, 대웅전, 관음전 순이며 윗쪽에 있는 전각은 천불전이다.
ⓒ2005 안병기


▲ 대웅전 본존불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충북도 유형문화재 193호로 지정돼 있다.
ⓒ2005 안병기


삼청리 사람들의 각별한 용암사 사랑

진흥왕 13년(552년), 인도에 갔다가 귀국한 의신대사가 이곳의 산천경개에 반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용암사는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이다.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고, 그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1880년 복장을 열었을 때 '순치 8년 신묘년'에 만들어진 다라니경이 발견됨으로써 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조선 효종 2년(1651)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뒤편에 있는 개금한 목각탱은 20여년 전에 조성된 것이라는데 근래에 만든 것치고는 제법 솜씨가 괜찮다.

▲ 천불전 위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 충북지방 유형문화재 제 17호.
ⓒ2005 안병기


마애불로 가기 위해 대웅전 왼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천불전을 지나 마애불로 가는 길 좌우엔 작은 대숲이 있어 제법 운치가 있다. 마애불은 바위의 중간, 마치 공중에 뜬 것같은 형태로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높이 297cm. 머리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발이며 양눈, 코, 입 등 얼굴의 형상은 매우 단정하다.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불은 신라 멸망의 비애를 품고 유랑하던 마의태자가 이곳에 머물다 떠나자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고 소문나 있다.

삼청리 사람들의 용암사 사랑이 매우 각별한 것 같다. 전씨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예전엔 절 살림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계를 조직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겨울에 눈이 내리면 자기네 마당보다 절로 올라가는 이 고갯길을 먼저 쓸 정도였다고 한다.

아름다운 운해는 구경도 못하고

언제 칠했는지 모르지만, 마애불에는 붉은 채색을 칠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붉은 채색이 나의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어설프긴 하지만, 한 편의 즉흥시를 읊조려 보았다.

용암사 돌부처님,
어려서부터 숫기라곤 아예 있지도 않아
상삼마을 하삼마을 아낙네들 찾아와
떡두꺼비같은 아들 하나
점지해 주십사 치성드릴라치면
"고런 음양 이치 따윈 난 몰러"
얼굴 빨개진 채 뒤돌아 서고 말았지.

상삼마을에 짖궂은 아낙 하나 있어
어느 날 부처님께 물어봤지.
"부처님은 왜 맨날 그렇게 얼굴이 붉으신감유?"
"사는 게 부끄러워서 그랴. 진세나 도솔천이나
사는 건 왜 그리 부끄러운 일 투성인지 몰러."

용암사 돌부처님
나이든 지금에도 부끄럼타는 모습 그대로시지.
내 얼굴이 붉은 건
남여상열지사 아닌 석양 탓이라고
둘러대는 버릇 또한 여전하시지.

이곳 용암사는 물안개와 운해가 빚어내는 풍경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날씨가 잔뜩 흐린 탓에 운해를 볼 수 없으니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들판 쪽에서 생기기 시작한 운해가 눈앞에 솟은 도덕봉 산능선을 휘감으며 슬슬 움직이는 풍경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볼 뿐이다.

그런 순간엔 이 돌부처님도 마치 천상의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형상일 것이다. 흔히 부석사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산 연봉들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곳 용암사에서 바라보이는 풍경도 그에 못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마애불을 조성한 석공은 아마도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넣었을 것이니 비록 돌을 다루는 석공일망정 그 지혜가 반야의 경지에 들어섰다 할만하다.

▲ 보물 제 1338호 쌍석탑
ⓒ2005 안병기


계단을 되짚어 내려와 대웅전 앞을 지나 북쪽 기슭에 있는 쌍석탑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 쌍석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를 따르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산천비보사상에 따라 대웅전 앞이 아닌 북쪽 낮은 봉우리에 탑을 세운 것이다. 산천비보란 탑이나 건물을 세워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보충해준다는 사상이다.

이 두 석탑은 거의 같은 형태이다.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상륜부를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옥개받침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인 3단이다. 기단부에서도 고려 석탑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고려중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 우리가 취나물이라 부르는 참취의 꽃
ⓒ2005 안병기


▲ 명감나무. 어린 시절 산에 나무하러 가면 가장 많이 따먹던 열매이다.
ⓒ2005 안병기


▲ 가을을 대표하는 꽃 중의 하나인 구절초
ⓒ2005 안병기


산길엔 이미 가을이 깊어

석탑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산을 올라간다. 벌써 붉나무는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명감나무 열매도 덩달아 붉어졌다. 돌부처님이 얼굴이 빨간 것은 혹 이 산에 있는 명감나무 열매를 많이 따드신 탓인가.

산길에는 가을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다. 참취꽃, 구절초, 잔대꽃, 어수리꽃, 쑥부쟁이꽃 등이 내가 장령산 산길에서 만난 녀석들이다. 걷다가 싫증나면 용암사 쪽 풍경을 바라봐도, 산이 첩첩하게 쌓인 군서쪽 풍경을 바라봐도 좋다.

안내판을 보니 용암사에서 해발 650m 지점에 있는 장용산 전망대까지는 2.3km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을 느긋하게 잡고 갖은 해찰을 다하면서 걸어도 한 시간 반이면 족히 전망대에 닿지 않겠는가.

▲ 장용산 능선을 따라 전망대로 가다보면 나타나는 '좁은문'이란 이름을 가진 바위.
ⓒ2005 안병기


▲ 전망대 못미처에 있는 왕관바위
ⓒ2005 안병기


그러나 장령산은 만만찮은 산이 아니다. 마냥 느긋하게 사람을 풀어 놓지 않는 것이다. 군데 군데 난코스가 기다리고 있어 그때마다 등산화를 단단히 묶게 한다. '좁은 문'이라는 바위를 간신히 통과한다.

한참을 더 가니 이번에 '왕관바위'라는 이름을 가진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 위에 바위가 걸쳐져 있어 멋있기는 하지만 어쩐지 위태롭게 보인다. '왕관' 혹은 '권력'이란 저런 것이리니.

12시 경, 전망대에 다다르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전망대 안에 들어앉아 먼저 도착한 등산객이 부어주는 커피를 마신다. 얘기도 좀 나누다가 일행이 되어 산을 내려간다.

용암사를 지나 고갯길에서 다시 전씨 할머니를 만났다. 아무래도 묶어 놓은 깻단이 젖을까봐 밭 옆에 있는 정자로 옮겨 놓으려고 가는 거란다. 할머니에게 있어 깻단과 자식은 동일한 물성을 지닌 것이다. 그대로 놔두면 썩을까봐 걱정이라는 점에서.

할머니가 사시는 마을이 궁금해서 일부러 상삼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간다. 뜻밖에도 마을 안에도 대궐만한 절이 한 채 들어서 있다. 어찌보면 담도 생명이 있는 유기체가 아닐까. 집집마다 돌담들이 지고 있는 표정이 다르니 말이다.

유료 낚시터가 있는 소정리 저수지 옆길을 따라 걸어간다. 마을을 지나고 철길을 건너고 4번 국도를 거슬러 옥천역을 향해서 걸어간다. 장용산 전망대부터 환산하면 거의 20리 가까이 되는 거리다.

말없이 삶을 가르쳐주는 벼 이삭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황금색 들판이 후줄근하게 젖어간다. 벼가 쓰러진 논들이 많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와서 벼의 쓰러짐 현상이 많은가 보다. 전씨 할머니 말로는 자기네 마을에서만 올해 9번이나 쓰러진 벼를 묶어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니 말이다. 그렇긴 하지만 벼가 익어가는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여전히 흐뭇한 일이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이성부 시 '벼' 전문(우리들의 양식, 민음사, 1974)

이성부 시인의 시 '벼'는 언제 읊어봐도 절창이다. 인간이 가꾸는 일개 식물인 벼가 이룩한 대동 세상을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이룩할 수 있을까.

옥천역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반가운 풍경과 해후했다. 옥천군에서 만들어 놓은 토종잡곡을 심어논 테마공원이 바로 그것이다. 수수는 이미 모가지들이 까맣게 익어 있었고 뒤늦게 핀 오이꽃은 저 홀로 피어 분주히 흘러가는 시절을 희롱하고 있다.

▲ 옥천읍에서 조성한 토종잡곡 테마공원 중 목화밭
ⓒ2005 안병기


목화송이를 바라보며 근원을 생각하다

길을 따라 길게 조성된 목화밭을 바라보노라니 감회가 무척 새롭다. 하얀 솜을 잔뜩 머금고 있는 목화송이들이 치약 거품을 잔뜩 입에 물고 양치질하는 소년같다. 이렇게 넓은 목화밭을 본 것은 초등학교 시절 이후 처음인 것같다.

해가 길어 배고픈 여름엔 군것질 삼아 목화나무 열매인 다래를 따먹기도 했다. 할머니를 도와 씨아틀로 목화씨를 뽑아내기도 하고 풀먹인 무명실을 실꾸리에 감기도 했던 기억도 어제런듯 새록새록하다.

무명짜기는 재배에서부터 짠 무명천을 삶아 말리기까지 구비구비 고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목화밭을 바라보노라니 또 다시 고향 생각과 할머니 생각이 떠오른다. 가난한 동네이다보니 중학생이 된다는 것은 동네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았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동네 동생 병일이와 함께 나누던 이야기 한 토막이 그 먼 세월을 건너와 한 폭의 풍경화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둘이 동네 뒷산에 앉아 늦가을의 황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음메"하는 소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병일이가 입을 열었다.

"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뭔지 알아?"
".........."
"우리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형, 누이, 고향, 이런 말들이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그러더란 게. 근디 그런 말들이 왜 아름다운 걸까? 형은 중학생이니까 알제?"

나는 그때 병일이에게 왜 그런 말들이 아름다운지 설명해주기엔 어린 나이였다. 혹 지금이라면 이렇게 설명해 줄는지 모르겠다.

"병일아, 그건 말이야. 그 말들이 아름다운 건 우리네 삶의 근원에 닿아 있는 말들이기 때문일 거야."

내 삶의 근원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을 한 지 오래 되었다. 근원이 병들면 전체가 병이 드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다. 옥천역에 가까워 오자 빗발이 좀 더 거세졌다. 마음이 점차 홍건히 적셔진다.




①경부고속도로 옥천 나들목→영동 방향 4번국도→ 삼청리→용암사
②옥천역 앞 터미널에서 가풍리행 시내버스를 타고가다 삼청리서 내린다. 하루 5회 운행(07:00, 08:00, 10:30, 14:0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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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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