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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8. 00:02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연보의 원칙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헌금'이라는 단어는 단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도 구약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신약 누가복음에서만 나오고 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누가복음 21:1)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4)
 
이 두 구절에서만 헌금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헌금'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다니!
구약에서는 왜 헌금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돈으로 드리는 헌물에는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으신 것을 알 수 있다. 십일조도 그렇고 다른 예물들도 돈으로가 아니라 물품으로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가령 죄를 속하는 희생 제물을 돈으로 대신해서 드릴 수 있다고 한다면 제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을 돈으로가 아니라 소와 양으로 드리도록 한 데는 '죄는 피로써만 씻을 수 있다'는 구속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 외 다른 뜻들도 있을 것이다.
십일조도 돈으로 내지 않고 토지 소산의 물품으로 내도록 한 데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본 그런 이유들 이외에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돈으로 헌금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저희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나아가 전에 하나님의 전에 연보한 돈을{???? ?????}(하케? 함무바)  {즉 거둔 ????(아쎄프)에게 붙이니 이 돈은 문을 지키는 레위 사람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다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라. (역대하 34:9)  
헌금이라는 단어 대신에 연보라고 되어 있다. 그 돈을 대제사장은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는 자에게 주고, 그 사람은 그 돈을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성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게 하였다.  
이 돈은 십일조와 전혀 관계가 없는 그야말로 헌금에 해당하는데, 어떤 목회자들은 이 구절을 들어 십일조가 성전 수리비로도 쓰였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십일조는 양식이기 때문에 성전 수리비 같은 것으로 쓰일 수가 없다.  
사실 성전의 주수입원은 역사적으로 볼 때 십일조가 아니라 성전세였다. 십일조는 창고에 얼마간 쌓아두었다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양식으로 나눠주고 나면 없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성전세는 20세 이상 된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로부터 각각 은전(銀錢) 반 세겔을 받았기 때문에 그 돈이 전국에서 모아지면 엄청난 액수가 되었다. 그 돈으로 성전 건물이 관리되고 유지되었다.  
다른 헌금들보다 십일조가 한국 교회의 주수입원이 되고 있는 사실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역대하 34:14)  
힐기야 제사장이 연보궤를 기울여 그 안에 있는 돈들을 쏟을 때에 율법책도 함께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요시야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율법책을 읽고 회개하였다.  
이렇게 헌금과 관련된 구절이 구약에서는 역대하 34장에서 두 번 나올 뿐이다. 그 동안 헌금이 계속 들어와 성전 금고에 쌓였지만 성경이 그런 것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스라엘에서 헌금을 하는 것은 세금을 내는 것과도 같아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그리 강조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헌금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모양이다.  
앞에서 보듯이 역대하 34장에 헌금{즉 거둔  ????(아쎄프) 이라는 말 대신에 연보  {???? ?????}(하케? 함무바)   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연보라는 단어가 열두 번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구약의 두 번하고 합하여 성경 전체에서 연보라는 말이 열네 번 나오는 셈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 성경 번역자들이 그렇게 번역을 해 놓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개역 개정판에서는 연보궤를 헌금함이라고 바꾸어놓긴 했지만 연보라는 말을 헌금으로 바꾸어놓지는 않았다.  
여기서 '연보(捐補)'라는 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연보의 연(捐)은 원래는 '버린다'의 뜻으로 쓰인 말인데 '주다, 바치다, 내놓다, 기부하다'라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하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줄 수도 있고 바칠 수도 있는 법이다. 연보의 보(補)는 원래는 '깁다'라는 뜻을 지닌 말인데 '고치다, 보태다, 돕다'라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연보를 원래의 단어 뜻대로 해석하면 자기 것을 버려서 해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 된다. 돈과 관련해서는 돈을 기부하여 돕는다는 뜻이 된다. 이런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성경 번역자들이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보라고 번역을 해놓은 헬라어 원어들은 각 경우에 따라 다른 단어가 쓰이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로기아'로 쓰는 경우{ logia }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고린도전서 16:1)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린도전서 16:2)
위 두 구절에서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는 '로기아'이다. '로기아'는 영어로 컬렉(collection), 즉 모금이라는 뜻이다. 사실 고린도전후서의 연보는 성전이나 교회에 바치는 헌금이라기보다 흉년을 만나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라 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들이 바울이 권면을 따라 힘을 다하여 모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린도전서 16:2에 의지하여 현재 거의 모든 교회들이 매주일 첫날(주일날) 헌금 시간을 가지고 헌금을 하고 있다. 켄덜 목사 같은 십일조주의자는 '이를 얻은 대로'라는 말이 바로 십일조를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매주일 첫날에 '이를 얻은 대로'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 연보를 준비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십일조주의자들의 습관을 말씀에 투사(投射)해 넣은 억지 해석에 불과하다.  
공동번역은 '자기 형편을 따라 얼마씩을 미리 저축해두십시오'라고 풀어서 번역해놓음으로써 십일조가 끼여들 여지를 미리 차단하고 있다. 
그런데 개역성경이든 공동번역이든 중요한 구절을 빼놓고 번역을 하고 있다. 그것은 '파르 헤아우토'라는 헬라어 문구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자기 곁에'라는 뜻이 된다. 《뉴 킹 제임스 버전》영어성경에서는 'by himself'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영어로는 '자기 스스로, 혼자서'라는 뜻이 된다. 각각 자기 곁에 저축을 해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공적인 헌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준비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매주일 공적인 헌금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각 사람은 자기가 번 것 중에서 얼마를 주를 위해 사적으로 저축을 해두었다. (《주석서》제3권, p.334, Eerdmans)
 
매주일 첫날 각 가정에서 가정 헌금 형식으로 연보를 모아 두었다가 바울이 올 때에 그 동안 모아진 것을 가지고 연보를 하라는 말이었다. 요즘 같으면 바울 같은 지도자가 왔을 때 큰 부흥회를 개최하여 넘치게 헌금을 거두었을 텐데, 바울은 성도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오히려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16:2이 이런 뜻일진대 매주일 교회에서 헌금 시간을 가지는 근거를 이 말씀에서 찾는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여기서 '로기아', 즉 모금은 즉흥적으로 하는 것보다 각각 준비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각각, 혹은 각 가정에서 매주일 첫날에 연보를 모아두었다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연보일을 정하여 그 동안 모아진 것을 가지고 연보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2) '하플로테토스'로 쓰는 경우 { aplothtoV}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린도후서 8:2)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9:11)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린도후서 9:13)
이상 세 구절에서 나오는 연보가 '하플로테토스'이다. '하플로테토스'는 영어로 '리버럴리티(liberality)'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 관용, 관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연보'를 꾸미는 말들이 '풍성한', '너그럽게', '후한' 등으로 관용과 마음을 나타내는 문구들로 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후한 연보'인 경우는 헬라어 원문에는 '후한'이라는 형용사가 없다. '하플로테토스'를 성경 번역자가 '후한 연보'라고 풀어서 번역을 해놓은 것이다.
사실 너그러운 마음 없이 인색한 마음으로는 연보를 하기가 쉽지 않다. 이 너그러운 마음만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이웃을 위해 물질을 내어놓을 수 있는 법이다.
 
3) '하드로테스'로 쓰는 경우{ adrothti }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고린도후서 8:20)
여기서 연보는 '하드로테스'이다. '하드로테스'는 '풍성, 성숙'이라는 뜻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거액의'라는 형용구가 없고, '하드로테스'를 '거액의 연보'라고 풀어서 번역을 해놓은 것이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얼마나 풍성하게 연보를 했던지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오해를 받지 않도록 바울이 극히 조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너그러운 마음('하플로테스')으로 모금('로기아')을 하면 거액의 연보('하드로테스')가 되어 큰일에 보람되게 쓰일 수 있는 법이다.
 
4) '유로기아'로 쓰는 경우{ eulogian }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고린도후서 9:5)
이 구절에 두 번 나오는 연보가 '유로기아'이다. 헬라어에서 '유'라는 접두어는 '좋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핵심 단어인 복음, 즉 좋은 소식도 '유'라는 접두어를 지니고 있다. '유'에다가 소식이라는 '앙겔리온'이라는 말이 붙어 좋은 소식, 복음이라는 뜻이 된 것이다.
이 '유'는 영어로 넘어가서도 여전히 '좋은'이라는 뜻의 접두어로 쓰이고 있다. '유포니(euphony)'라고 하면 '듣기 좋은 소리'라는 뜻이 되고, '유제닉(eugenic)'이라고 하면 '우생학적인, 즉 우수한 성질을 이어받은'이라는 뜻이 된다. 유럽(Europe)도 '좋은 단결, 좋은 연합'이라는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유로기아'는 좋은 모금이라는 뜻이 된다. 본문에서는 '참 연보'라고 번역을 해놓았다.
바울은 믿음의 형제를 보내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전에 약속한 연보를 준비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준비를 해야 '유로기아', 즉 좋은 모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모금이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다고 인정하실 만한 모금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금의 액수나 모금을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시지 않고 모금을 준비하는 그 마음 중심을 보신다.
아무리 거액의 연보가 모였다 하더라도 '유로기아'가 아니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이상에서 고린도전후서에 나오는 연보라는 단어들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다양한 의미들이 합해진 것이 연보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헌금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누가복음 21:1-4에 나오는 헌금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도론'이라고 하는데, 그 말 뜻은 원래 '선물, 예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의 돈이기 때문에 헌금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도론'을 드렸다는 말이 일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제사와 예물이 폐지된 사실을 선포하는 히브리서에서 '도라'{dwra}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히브리서 9:9에서는 '도라'을 {dwra}예물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히브리서 10:5, 8 등에서는 헬라어 '프로스포라'를 {prosforan}예물이라고 번역을 해놓았다.

헌금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도라'가 제사와 함께 폐지되었다고 히브리서는 증거하고 있다. 물론 히브리서의 '도라'이 헌금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헌금을 포함한 모든 예물이라는 의미인 것만은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는 십일조 예물만 폐지된 것이 아니라 헌금 예물도 폐지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십자가 상에서 대신 치러주실 때 우리가 일생 동안 바쳐야 할 십일조와 헌금까지도 다 바치심으로써 십일조 예물과 헌금 예물을 폐지하셨다.
그냥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셨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돈을 일체 바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가?
구약에서도 그렇지만 신약에서는 더더구나 하나님께 돈(화폐)을 바친다는 관념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돈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예수님의 줄기찬 메시지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알고 있는가?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이웃과 나누는 공동 생활로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사도행전 2:44-45)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사도행전 4:32-35)
신자들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내어놓았지만 그 어디에도 헌금이라는 개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할 때의 '두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티두운'{ etiqoun}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단순히 '놓다, 두다, 차려놓다, 저축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헌금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기부 행위는 헌금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연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가운데 생활이 어려워 굶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하기 위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풍성하게 내어놓아 좋은 모금('유로기아')이 되게 한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으로 주시는 물질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만이 남게 되었다. 인색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바로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위로부터 성령을 부어주신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야만이 그 일이 가능한 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다. 우리가 돈을 들고 와서 바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더군다나 돈을 바치면서 그 대가로 복을 기대하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신다.
그런 하나님을 자꾸만 신자들에게 소개하는 자들은 기독교 무당들에 불과하고, 거룩한 하나님을 복채를 챙기는 우상신으로 전락시키는 발람의 후예들이다.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는 샤머니즘적인 관념부터 우리 머리 속에서 뽑아내야 한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태복음 25:45)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하나님 자신에게 한 것으로 여기신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는 샤머니즘적인 관념을 버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즈음 컴퓨터 통신에서 기독 청년들이 한국 교회는 이단인가 아닌가 하는 토론들을 벌이고 있다. 하나님을 물신(物神)으로 섬기고 있는 한국 교회는 매머니즘(mammonism), 즉 배금주의 혹은 물신숭배주의에 빠져 있으므로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 이단이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한국 교회가, 기독 청년들이 이런 토론을 벌이는 지경까지 되었는가?
헌금 예물이 폐지되었으면 십일조 예물이 폐지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헌금과 십일조는 '연보'라는 개념으로 변역(變易) 내지는 개혁되어야 마땅하다. 아니, 이미 사도행전 2장에서 개혁되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도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9:9)
헌금 예물이 폐지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로서는 너무도 충격적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사안이기 때문에 나중에 좀더 논의하기로 하고, 다시 십일조 문제로 돌아와보자.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 십일조 시대가 지났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은 원래부터 십일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면 중세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출교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많은 신학자들도 성경 연구를 통하여 십일조 시대가 지났음을 확신하면서도 교단의 눈치를 보며 양심적으로 학설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레니우스와 오리겐, 에피파니우스 같은 초대 교부들에 의해 십일조가 폐지된 것으로 결론난 지도 이미 1800여 년이나 지났는데 지금까지도 한국 교회는 그런 논의조차 기피하고 있는 형편이다.
보수적인 기독교 백과사전을 들쳐보아도 십일조는 폐지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들을 내리고 있는데 언제까지 한국 교회는 신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을 것인가?

 화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누가복음 11:52)

 목회자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헌금과 십일조에 관한 진리들을 풀어 허심탄회하게 신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연보의 패러다임(paradigm)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헌금과 십일조라는 장애물 때문에 전도의 문이 닫혀 수많은 영혼들을 잃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연보의 패러다임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제시한 연보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후서 8:11-12)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고린도후서 9:5)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7)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으니라. (고린도후서 8:14-15)

 앞의 말씀들을 기초로 연보 원칙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있는 대로 하라
②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라
③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
④ 즐거운 뜻으로 하라
    ⑤ 평균하게 나누는 뜻으로 하라
 
이 다섯 가지 원칙 이외에 다른 원칙이 있겠는가. 이것은 철저히 신자들의 자율적인 믿음을 존중하는 연보 원칙인 셈이다.
특히 '평균하게 나누는 뜻으로 하라'는 원칙은 깊이 새겨야 할 사항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많은 물질을 맡기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맡기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서로 평균하게 나누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많은 물질을 맡은 자는 그 물질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말고 나누는 일에 기꺼이 내어놓아야 한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6:17-19)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면서 잘못 이해한 말라기 3:10 같은 말씀들을 기초로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하는 것은 이기적인 신앙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십일조 간증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런 이기적인 동기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주실 적에는 나누어야 하는 책임도 동시에 안겨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되어 자기 중심적인 십일조 간증 같은 것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연보 원칙은 요즈음의 십일조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 십일조 이외의 헌금을 할 때는 이 자율적인 원칙을 적용시키고 십일조를 할 때는 율법적인 원칙을 적용시키는 것은 상호모순이며, 신자들을 계속해서 혼란스럽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런 바울의 원칙대로 하면 신자들이 방자해져서 제대로 연보를 하지 않을 것이므로 십일조가 폐지되었건 어찌 되었건 반드시 십일조라는 명목의 헌금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신자들을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갈라디아서 4:2) 있는 어린아이들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의 관점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헌금을 거두어온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며,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이때껏 헌금을 내어온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회자들은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 십일조 시대가 2000년 전에 골고다를 기점으로 이미 지났으며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와 아무 상관이 없음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성전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도록, 할례나 십일조의 멍에를 메지 않아도 되도록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음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속죄의 제사를 다 드리셨으며, 우리 대신 예물까지도 이미 다 바치신 사실을 선포해야 한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의 사업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더욱 기꺼이 연보를 하게 될 것이다. 새삼 초대 교회 이레니우스 교부의 권면이 생각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자들로서 이제 주님을 위하여 (십일조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유를 구별하여 떼어놓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분량을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연보로 드립니다.  
예수의 피로 사신바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소식은
십일조 노이로제에 걸린 이 땅의 수많은 신자들을 자유케 하고 멍에를 꺾는 그야말로 '복음'이 될 것이다. 그러면 신자들은 수십 년 동안 무의식 속에 쌓였던 십일조에 대한 죄의식(도둑 의식)을 떨쳐버리고 생기에 넘쳐 헌신에 헌신을 더할 것이다.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으면 두려움의 영에 눌려 지낼 것이라고 한 켄덜 목사 같은 십일조주의자들의 말이 얼마나 거짓말인가 하는 것을 산 체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선포는 예수를 믿고는 싶으나 교회 나가면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소식이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더 넘치는 영적 물질적 축복 속에서 활짝 열린 전도의 문을 통하여 수많은 젊은이와 불신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하지만 목회자들은 수많은 이해 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굳어진 사고 방식을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십일조가 이미 폐지되었음을 확신하게 된 신자가 십일조를 고집하는 목회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그 교회에서 자신의 확신한 바를 다른 신자들과 나누어야 한다.
 
목회자들의 고집으로 인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진리 아닌 것으로 쓸데없이 계속 갈등하게 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한국 개신교에서도 십일조 시대가 이미 지났음을 선포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일어서고 있다. 왜 이런 시점에 그런 교회와 목회자들이 하나 둘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은 상태가 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사야 1:11-15)
 
바울이 제시한 연보의 원칙으로 돌아가 새로운 연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교회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는 누가복음 6:38 상반절 말씀이 한국 교회에서 널리 선포되어, 신자들이 실생활 속에서 이웃에게 주는 희생과 기쁨과 축복을 체험하는 가운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자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인 공동체안에 속해 있는 사람은 공동체 운영비를 위한 기부금 형식으로 힘에 지나칠 정도로  풍성하게 해야 할것이다. 
                                                 -  모셔온 글 -
출처 : 은혜(恩惠)
글쓴이 : 은혜 (恩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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