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기초,기술테크/Emotion Story

[스크랩] Sophia Loren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18. 06:40













Sophia Loren



소피아 로렌(Sophia Loren)
1934-09-20 이태리 출생
본명 Sofia Villani Scicolone



배우로서 존재하는 여배우

보통의 여배우는 영화나 가십을 통해 우리들의 머리들에게 '환상'으로 다가온다. 그 아름다운 외모와 영화를 통해 나타난 여러모습으로 그녀들은 사람들의 이상적 여성상, 즉 여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상태로 이미지 지어진다.

하지만 소피아 로렌은 그 인형같고 환상같은 여배우로서의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실재감이 넘치는 한 여인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영화속에서 많은 변신을 함으로써 여성만의 특유한 다면성을 물씬 풍긴다.

나폴리의 태양과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밝음과 활력을 뿜어내는가 하면 때론 더없이 애처로움 여인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이렇듯 한없이 변모해 가는 그녀의 모습은 유리장 속의 인형같은 여배우나, 가십거리에나 오르내리면서 연명해 가는 여배우들과 차별되어진다.



그녀에게는 여자 특유의 가식이나 내숭이란 없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보여 줄 뿐이다. 여배우라기보다는 배우로서 존재하는 존재. 그것이 여배우 소피아 로렌이다.

소피아 로렌을 바라보는 팬들은 그녀로부터 막연한 탐욕과 광기 그리고 행방감, 본능적이지만 윤리적인 이중성의 유혹을 받는다. 그녀가 육체의 선이 뚜렷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초원을 달려가면 대개의 남성은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그 유혹은 불륜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닌 생명의 활력으로부터 다가오는 이율배반적인 유혹이다.

그러기에 소피아 로렌은 의외로 열광하는 여자팬을 많이 가진 여배우이기도 한다. 그녀의 몸짓은 당시 여자들의 답답한 가슴을 대신 풀어주는 대상이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여성들은 그녀를 갈구하고 그녀가 되기를 갈망한다.



소피아 로렌은 이탈리안 리얼리즘의 어두운 이미지가 사라진 때부터 영화 속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안 리얼리즘이란 2차대전 중에 레지스탕스와 패전이 가져다 준 영화예술의 새로운 영역이었다.

여기에서 로베르토 롯셀리니와 같은 감독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야성적인 여배우에서 세계적인 여배우로 발돋음하는 소피아 로렌의 여정에서 페데리코 페리니의 <길>은 그녀를 기억하게 해주는 첫 작품이다. 일종의 뮤지컬인 <나포리의 향연>이후, 그녀는 <하녀>에 출연한다.



이 영화는 1954년대의 아주 우수한 칼러영화였다. 장어 통조림 여공으로 나온 그녀는 핫팬티를 입고 관객을 압도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크고 두툼한 입술의 붉은 빛과 강렬한 육체는 마냐니의 음습한 어둠, 망가노의 토속적 내음속에서 관객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된다.

이탈리아 팬들은 여성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야성미적 관능미를 만끽하게 된다.겨드랑이의 털을 깍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는 여러차례에 걸쳐 스커트를 펄럭이며 자전거를 타거나 맘보 춤을 추면서 21살에 걸맞지 않는 과감하고 강렬한 연기로 관객들을 압도해 갔다.



그녀의 자연적이고 야성적인 에로티시즘은 남성들에게 그녀를 갖고 싶다는 느낌과는 다른 오히려 압도 당하는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 당시 프랑스에서 로 뒤카라는 사람이 편집한 <영화의 에로티시즘>이라는 사진집이 출판되었다. 영화의 베드신과 여배우의 누드를 모은 것인데 여기에는 브리짓드 바르도와 함께 소피아 로렌의 초기 영화의 누드가 몇 장 실렸다. 소피아는 프로듀서의 요구가 정당하면 서슴없이 옷을 벗었다.



남자의 눈 앞에서 수줍게 혹은 요염하게 유혹적으로 다가오는 여성의 누드가 아니라 그녀의 글래머 이상의 육체는 오히려 그녀를 바라보는 남성을 압도하는 누드였던 것이다. 이 사진집에서 남자를 유혹하려는 듯 나약하지만 도발적인 B.B와는 달랐던 소피아 로렌의 모습은 남자들에게 더욱 큰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나날이 시들어 가는 다른 여배우들과는 달리 그녀는 그녀의 사진들이 자주 실리는 팬 잡지 <그라비아>에서 나날이 활력을 뿜어내는 모습으로 더욱 아름다워져 갔다. 카르로 폰티는 그녀를 스타로 키워낸 사람이다. 이 폰티의 제의로 소피아는 미국의 헐리우드로 진출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두 산, 마침내 미국으로 이동하다." "소피아 로렌 달러에 팔려가다." 라는 기사가 곳곳에 실렸다. 스웨터를 입은 채 가슴을 유난히 강조한 그녀의 사진은 그러한 문장들 옆에 실렸다. 미국으로 진출한 그녀는 아버지뻘인 카르로 폰티와 결혼한 후, 카르로가 중혼(이중 결혼)죄로 고소까지 당했으나 결코 흔들리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성공으로 가는 길



당시로는 상당히 큰 키였던 170cm의 그녀는 미국에서도 당당했다. 그녀는 <잃어버린 전설>에서 존 웨인, <느릅나무밑의 욕망>에서 앤소니 퍼킨즈, <나폴리 해안>에서 클라크 케이블, <흑란>에서 안소니 퀸, <엘시드>에서 찰톤 헤스톤과 연기함으로써 대형 배우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그녀의 또다른 특징 중에 하나는 흔히 말하는 베스트 드레서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배우로서 자신을 꾸밀 줄 알았다. 멋진 옷과 멋진 배경이 어울리는 배우인 것이다. 사실 그녀는 어떤 배경에 갖다 두어도 배경과 잘 어울리는 여배우였다.

다른 나라에서 성공을 거두고 헐리우드로 진출한 배우들은 특히, 여배우들은 헐리우드식에 와서 오히려 빛이 바래고 사라져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인기가 있을 때, 여러 곳에서 우려내 먹는 상업적인 성격의 구조때문이었다.



그런데 소피아 로렌은 그러한 배우들과 차별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연기력이었다. 그녀는 육체파 배우이기전에 연기파 배우였던 것이다. <나는 그런 여자>라는 영화에서 첩으로 나와서 마침내 참된 사랑에 이르는 연기는 배우보다는 영화를 살리는 헐리우드식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연기력은 빛을 발휘했다.

소피아 로렌은 헐리우드가 자신의 연기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남편 폰티와 헐리우드에 집착하지 않고 세계 각국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그러한 영화들 중에서도 소피아 로렌은 역시 이탈리아 영화속에서 더욱 빛나 보였다. 특히 빅토리오 데 시카라는 명감독을 만나 그녀는 완벽한 연기파 여배우로 변신했다.



1961년 시카가 감독한 <두여인>에서 마냐니대신 출연한 소피아 로렌은 점령하의 로마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다 교회에서 병사들에게 모친과 윤간을 당하는 비참하고 냉혹한 삶의 여인을 연기한다.이 영화에서 소피아 로렌은 감정을 잃어버리고 단지 살기위해 살아가는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한다. 이후, 시카의 영화 <보카치오 '70>, <아르토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아아, 결혼><해바라기><여로>에서 연이어 뛰어난 연기를 보이게 된다. 이 중 몇몇 영화는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소피아 로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까지 했다.



그녀는 영화에서 늘 생명력이 강한 여인의 역을 했다. 가련하고 애처롭게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다른 배우와는 달리 소피아 로렌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개척해 나가는 강한 여인의 이미지를 심어갔다.

소피아는 격렬하고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그녀의 사생활은 처음 폰티가 이중혼을 한 것을 제외하면 전혀 가십거리를 제공하지 않을 만큼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소피아는 늘 자신감과 행복감이 넘치는 얼굴로 폰티와 사랑을 이어 갔다. 사생아나 다름없는 자신의 태생에 대한 컴플렉스를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그녀는 일과 가정에 충실했다. 이로써 그녀는 글래머의 연기파 배우, 그리고 선량한 아내로서 영원히 기억되게 하였다.


가난과 극복의 여정



1934년 9월 20일 로마태생인 그녀의 본명은 소피아 빌라니 시코로네(Sophia Villoni Scikolone)였다. 사족이지만 평생을 그다지 어려운 줄 모르고 산 브리지드 바르도는 그녀보다 8일 늦은 9월 28일 태어났다.

당시 20세였던 어머니 로밀다 빌라니니는 갓 태어난 소피아를 데리고 조부인 도메니코 빌라니의 집으로 가야만 했다. 그것은 당연히 가난때문이였다. 그 곳에서 성장한 소피아 로렌에게 어린시절은 없었다. 그녀는 그 곳에서 매일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 로밀다는 그레타 가르보를 많이 닮아서 미인대회에서 우승하여 여배우가 될 수도 있었지만 부모의 반대로 좌절하였다. 건축기사였던 소피아의 아버지는 리카드 시코로네였다. 로마의 집에 이미 아내가 있었고 두 아들도 있었다. 그는 소피아 모녀를 거의 찾아 오지 않았다. 소피아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녀도 둘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다.



소피아는 사생아인 셈이였다. 그것은 소피아가 폰티를 만날 때까지 컴플렉스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가족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로 인해 늘 부끄러워했다.

소피아는 어렸을 때 별명이 '잔가지'라고 불릴 정도로 야윈 몸을 가지고 있었다. 14세가 되어서 그녀는 지금의 몸매를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소피아는 각종 미인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일등은 못했어도 매번 입상했기에 그 상금으로 배우를 뽑는 다른 대회 여행 경비를 할 수 있었다. 엑스트라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소피아 로렌은 거기서 번 돈으로 아주 작은 아파트 하나를 빌릴 수 있었다. 그녀는 단지 빵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소피아 로렌이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우연히 이탈리아의 유명 잡지인 "프멧티'의 모델을 하고 난 후이다. 소피아 로렌은 이후 단역에 출연하게 되었고 1910년 12월 11일 미라노 출신인 카르로 폰티를 만난다. 이때 소피아 로렌의 나이는 17세였다. 이후 폰티는 명제작자가 되었고, 둘의 관계는 가까워 졌다. 폰티는 소피아 로렌을 로마 영화 실험학교에 보내어 연기의 기초를 배우게 했다.

18세의 소피아 로렌은 폰티로부터 로렌이라는 예명을 받고 <해저 아프리가>의 주연이 된다. 이 영화로 인해 소피아 로렌은 헐리우드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뒤어 여러개의 영화에 출연하고 <하녀>에 이르자 헐리우드는 더이상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지 않게 되었다. 핫팬티에 고무장화 170cm 키에 96-61-96의 몸매로 스크린에 나타난 그녀는 헐리우드의 큰 돈벌이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피아 로렌은 23세에 아버지같은 온정으로 그녀를 보살펴온 47세의 폰티와 결혼하였다. 폰티는 문제가 되었던 전부인과 이혼하였다. 소피아 로렌은 폰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폰티는 제 생명입니다. 그 이 말고는 세상에서 내게 필요한 것은 없어요. 나는 그의 아이를 일곱쯤 낳고 싶어요."



사생아나 다름없는 출생에서 지독한 가난으로 이어지는 유년시절에서 벗어난 소피아 로렌은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폰티만을 세상의 전부로 여기며 영화배우로서 그리고 성실한 가정주부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60대인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나이를 먹을수록 아름다워지는 여성'으로 사랑받고 있다.




대표작품

1950년 쿼바디스(Quo Vadis)
1951년 안나(Anna)
1952년 해저 아프리카(Afria Sotto I Maril)
1953년 아이다(Aida)
1953년 나폴리의 향연(Carocello Napoletano)
1954년 하녀(河女:해녀와 비슷한 의미)
1955년 여자의 운명(La Fortuna di Essere Donna)
1958년 느릅나무 밑의 욕망(Desire Under the Elms)
1958년 열쇠(The Key)
1959년 흑란(The Black Orchid)
1959년 나는 그런 여자(That Kind of Woman)
1960년 서부에 건 여자(Heller in Pink Tights)
1961년 두 여인(La Ciociora)
1961년 엘시드(El Cid)
1961년 복카치오 '70(Boccaccio '70)
1963년 어제 오늘 내일(Ieri, Oggi, Domani)
1964년 로마제국의 멸망(The Fall of the Roman Empire)
1969년 해바라기(I Girasoli)
1972년 라만차의 사나이(Man of La Mancha)
1973년 여로(The Vogage)
1974년 사랑의 종말(Verdict)

수상경력

1961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두 여인(La Ciociora)
1990년 아카데미 공로상
1991년 레지옹도뇌르 훈장- 프랑스에서 수여










19세기 독일의 작곡가 구스타프 랑게의 작품으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랑게는 살롱용 피아노 속을 많이 썼는데 <꽃노래>는 그 대표작이다. 바장조, 6/8박자로서 아르페지오 반주 위를 부드러운 선율이 노래하듯 연주된다. 중간부의 2 개의 melody도 성격이 뚜렷하고 매력적이어서 특히 여성들이 즐겨 연주하는 곡이다. 기묘한 피아노 음율은 청순하고 가련한 꽃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으며 랑게 자신의 서정적인 성격이 자연스럽게 그 곡상에 나타나 있다.


출처 : 사랑의보물섬
글쓴이 : 진실과지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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