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기도
고난의 기도에 관한 것 기도의 형태 중에 전적으로 다른 사람 중심의 형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고난의 기도이다. 고난의 기도는 우리의 필요나 소원관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우리의 변화와 하나님과의 연합과도 거리가 멀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구속하여 사용하시기를 구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애통을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 속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대속적인 고난
우리는 고난 중에 기도함으로써 변화된다. 우리의 마음이 모든 사람들을 수용하고 용납하기 위해서 넓어진다. ‘그들’이라는 말이 ‘우리’라는 말로 바뀐다. 그것이 지적이건 문화적이건 영적이건 간에 우리가 우위에 두었던 모든 것들이 가만히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 함께 서 있는 것이다. 대속적인 고난 뒤에 숨어 있는 억누를 수 없는 힘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다. 그것은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요, 순교자가 되는 길을 찾으려고 함도 아니다. 이것은 불행을 위한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보다 더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
고난의 기도의 가치는 무한하다.
윌리암 펜(William Pemm)의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토마스 켈리(Thomas Kelly)“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향을 좇아 거룩한 순종에 길에 십자가를 심어 놓으셨다”. 그 고난은 무익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그리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휠씬 뛰어난 것으로 여기시고 또 그렇게 사용하신다. 고난의 순간에 우리는 여기저기서 마치 반사된 달빛과 같은 희미한 불빛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가리개가 제거되고 비늘이 떨어져 나가서 고난 속에서도 대낮의 햇빛처럼 빛나는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솔직하게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 말씀을 덧붙이신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고난의 기도의 또 하나의 가치는, 고난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고 민감해진다는것이다. 헨리 누웬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는 `상처 있는 치료자들‘이다. 모든 것을 좋게 하는 꼭맞는 해답은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고난을 겪는다. 글렌 힌슨이 말한 대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사포로 닦아 매끄럽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속에서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인식하게 도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역의 출발점이 된다.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
.고난의 기도에는 소극적인 측면도 있고 적극적인 측면도 있다. 오늘날 절망과 궁핍을 견뎌 낼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난의 기도야말로 이런 능력을 배양시킨다. 장 니꼴라 그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위해 참고 견디어라. 복종과 인내로 고난을 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고난을 당하라. 그러면 당신은 매우 탁월한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또 모든 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시고 또 모든 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들을 바르게 하실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마르게 하실 것이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신비하게도 우리의 슬픔을 옮기시고 그 슬픔을 사용하여 세상을 치유하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짐을 양 어깨에 계속해서 짊어질 필요는 없고 오히려 그 짐을 하나님의 품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짐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워 마음속에 낙심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짐을 질 필요는 없다. 실제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작은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그들이 스스로 그 문제에서 벗어날 때까지만 붙잡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함께 모든 일을 하나님께 위임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 드리는 회개
고난의 기도의 참된 의미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회개하는 은혜를 받을 때 가장 두드러진다. 우리가 원수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그들의 좌절과 빈곤, 그리고 그들의 죄책과 지옥의 형벌을 우리 자신이 짊어지고 하나님께 그들을 대신하여 탄원하는 것이며, 그들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대신하여 우리 자신의 문제로 알고 대리적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씨름
터툴리안은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거룩한 폭력”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복을 받을 때까지 놓아 주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은 그의 공의로 우심보다는 그의 긍휼을 얻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투쟁은 사랑과 병행한다. 왜냐하면 투쟁이야말로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노가 아니다. 애처로운 울음도 아니다. 그것은 마틴 루터가 표현한 대로, “영혼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하는 끊임없는 격렬한 행동이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열심을 아시기를 원한다. 우리는 높은 곳에서 우리의 소리가 들리기를 원하기 때문에 찬양의 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고뇌한다. 그리고 울부짖고 큰소리로 외친다. 우리는 흐느낌과 눈물로 기도한다. 우리의 기도는 발버둥치는 믿음의 신음이 된다. 찰스 스펄전이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처럼 “기도는 하늘과 싸워 이길 수 있고 전능자를 기도의 소원대로 움직일 수 있다.”
금식은 우리의 투쟁의 한 표현이다. 금식은 격렬한 영적 활동을 위하여 스스로 정상적인 기능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심각함과 강렬함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금식이란 우리가 고난을 기쁘게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더 큰 유익을 얻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무게를 가지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몸은 비록 쇠약해졌지만 믿음은 강해져서 하나님의 약속을 손에 쥐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씨름은 고통스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최종 결과는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우리도 이기고 하나님도 이긴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했다. “의로운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과 싸워 이기며 하나님도 거기에서 이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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