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구 기도
전능하신 온 우주의 하나님께서 왜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법을 택하시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그것은 그의 자녀들이 간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즐거워하신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통해 뜨거워진다.
간구 기도와 중보 기도
우리가 구하는 것이 우리 자신들을 위한 것일 때 그것을 간구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일 때 그것을 중보라고 한다. 구하는 것은 그 두 가지 경험의 핵심부를 차지한다. 예를 들면, 영적인 통찰력이 적은 사람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도와 달라는 기도를 하지만 진정 영적인 사람들은 간구의 기도를 넘어서서, 필요한 것을 구하거나 요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찬양한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에 의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구하는 기도는 더 유치하고 미숙한 형태의 기도인 반면, 찬양과 묵상의 기도는 자기 중심적인 요구가 아니기 때문에 더 성숙하고 고상한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잘못된 영성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간구의 기도는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일생 동안 우선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초월할 수 없으며 또 초월하기를 원해서도 안된다.
한스 울스 폰 발타자르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마치 소리 내어 하는 기도는 초보자들에게 더 어울리고 묵상 기도는 수준 높은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것인 양 생각하고, 혹은 말하는 것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열등하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 둘의 관계는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을 결정짓고 전제하기 때문이고, 전자는 후자의 결과를 직접 가져오기 때문이다.“
간구 기도의 두가지 문제
첫 번째 문제는 매우 합리적인 질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아시는데 왜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고 구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거기에 대한 가장 정직한 답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하는 행위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간구의 기도와 관련된 두 번째 문제는 여린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생긴다. 그것은 영적인 공손함으로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내 생활의 사소한 문제들로 하나님을 괴롭히지 않겠다. 이 세상에는 사소한 내 요구 사항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얼마든지 있지 않는가?”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들을 뒤로하고 나누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겸손이다. 우리가 말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상처를 입는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서 우리 생활의 가장 작은 문제들까지 듣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나눌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포어시드 “언젠가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위대한 거절이 때때로 우리의 가장 진실된 기도에 대한 진실한 응답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근시안적인 입장에서 우리에게 최선이 아닌 것들을 구할 때가 많다. �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거나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거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는 다른 사람들과 나의 기도 모두에 대한 거절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자기 모순에 빠질 때도 더러 있다. “저에게 인내심을 빨리 주시옵소서”하는 식의 기도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은사를 보류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더 깊은 의도를 이해하시고 우리의 보다 큰 필요에 응답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특정한 관심사를 정한 때에 정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다.
죄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의도하는 바는 일반적인 내용과 아주 다르다. 내 의도는, 우리의 죄가 그 본질상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민감성까지 둔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점점 근시안이 되어 가고 우리의 귀는 점점 어두워져 간다는 뜻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잘못된 간구와 하나님의 마음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듯이 (약4:3), 우리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게 되고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일단 내가 사랑을 준다면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후보자가 된다. 두 손을 펴면 받을 수 있다. 성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빈손을 발견할 때 주신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들 가운데 복수를 위한 외침만이 들린다면 화해가 있을 수 없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좁아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범죄한 것만을 본다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범죄했는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구할 필요성도 알지 못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마음속으로 늘, 이런 저런 사람이 우리의 권리를 얼마나 많이 침해했는가 계산하고 있다면 사태의 본질상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수 없을 것이다.
인간 만사에 보복의 악순환이 있다. 공격당했을 때 그 대가로 보복하는 대신 용서하는 자가 되자 우리가 용서할 때, 바로 그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용서의 은혜도 강물처럼 흘러 넘치게 한다. 용서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당연히 우리는 용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서 큰 혼동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어떤 것이 용서가 아니냐 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용서는 우리가 더 이상 아파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상처가 깊을 경우에는 아주 오랫동안 아파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감정적인 고통이 우리가 용서하지 못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잊어버린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 기능을 손상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제 3개국인 나치의 암흑 시대에 살았던 독일의 목사 헬무트 틸리케(Telmut Thielicke)는 이렇게 말했다. “용서한다는 말과 잊어버린다는 말은 한꺼번에 해서는 안된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하기는 하되 용서한 후에 더 이상 그 기억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용서는 그 잘못이 실제로 대수롭지 않았다고 가상해 주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상황이 그 잘못을 저지르기 전과 똑같다고 취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용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로 말미암는 기적으로서, 용서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분열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용서란 실제적인 상대방의 큰 잘못이 우리를 분열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가하면서 서로의 사이를 분열시키는 그 잘못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우리를 결속시키는 사랑의 힘이 우리를 분리시키는 과실의 힘보다 큰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용서이다. 용서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묶여 있지 않게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을 해방시켜 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한다. 그리고 그들을 초청하여 우리의 교제권 속으로 다시금 들어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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