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테크/파랑새의원( 제주도)과 섬이야기

[스크랩] 포차에서 홍콩 국민배우를 만나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2. 7. 23:04

제주 포차에서 만난 첨밀밀의 증지위


  제주의 밤은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실업자가 되고 난 후의 숱한 고민을 뒤로 하고 떠난 마지막 여행. 갓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떨어진 후의 해안도로는 서늘하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길 위를 달리는 난 싸늘하게 외로웠다.

 

  제주에서만큼은 자유롭고 싶었다. 그래서 124cc의 스쿠터를 빌렸다. 혹시 스쿠터 위에서 만나는 세상은 다를까 해서. 걷는 길 위나 차 속에서의 세계와는. 체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따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던진 질문만큼은 언젠가 한 번 흉내 내고 싶었다. 해변가 펜션에 대충 잠자리를 정한 후 스쿠터를 달렸다.

 

  언제나처럼 제주의 식당과 술집들을 원망했다. 마음 편하게 먹고 마실 곳이 없었다. 관광객들을 위한 곳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불편했다. 그렇지 않은 곳들은 편했지만 불안했다. 공항에서 서부두까지 이어진 길을 달리다가 내키는 곳에 멈추기로 했다. 서부두 방파제 끝까지 달려갔다 막 포기하고 돌아오던 길,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유명 야시장.’ 왜 그 곳이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처럼 느껴졌을까? 돌이켜 생각해도 모르겠다. 몇 사람이 길가에 내놓은 자리에 앉아 소주를 들이키던 모습이 정겨워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여러 메뉴를 조금씩 선보인 실내 포차의 풍경이 관광지답지 않아서였을까?

 

  그 곳에 자리를 잡고, ‘한라산’ 소주와 모듬회를 시켰다. 고등어와 갈치회가 포함돼 있지만 가격은 2만원. 제주만큼이나 착한 모듬회였다. 짜릿한 소주 두어 잔이 목젖을 타고 흐를 무렵.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중 두 사람이 유독 눈에 띄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우리나라 사람은 아니었다. 여자는 진한 화장에 치파오를 입고 있었다. 워낙 화려한 존재여서 누구라도 궁금해 할 그런 사람이었다. 일순간 실내 포차의 모든 시선이 그이에게 쏠렸다.

 

 

  정작 내 눈길이 더 오래 머문 존재는 그 여자 앞의 후줄근한 한 남자였다. 반백의 머리에 흰색의 티셔츠, 청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낯이 익었다. 그 편안한 차림새며 표정이라니. ‘저 사람이 누구더라?’ 스스로 한 참을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마침내 떠올렸다. 그 사람의 이름보다도 먼저 영화 제목을. 

 

  첨밀밀(甛蜜蜜). 지금도 영화보다는 영화 주제곡의 리듬부터 떠오르는 영화. ‘첨밀밀’이란 노래도 좋았지만,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은 또 얼마나 멋졌던가. ‘저 달 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는구나!’ 게다가 영화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 희한한 운명의 변주곡. 운명이 허락한 사랑은 결국 언젠가는 맺어진다는 희망을 심어준 영화였다. 그 영화에서 마사지 걸이었던 장만옥을 웃겨주기 위해 일부러 ‘미키마우스’ 문신을 등에 새겨 넣었던 조폭 두목. 그래, 그 이름이 뭐였더라?....음....그래. 한침. 정작 배우의 이름은 안 떠오르고 극중 배역의 이름만 떠올랐다. 장만옥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명대신 자신을 죽도록 사랑했던 그를 따라 미국으로 떠났지.

 

  그 후에도 한 참 동안 배우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잔의 소주를 더 들이키면서 줄곧 생각했다. 이름 대신 떠오른 것이 또 ‘무간도’라는 영화였다. 1·2·3편을 보고도 아쉬워 헐리우드 리메이크판인 ‘디파티드’까지 보고야 직성이 풀렸던 그 영화. 그래, 그 영화에서 유덕화를 경찰 조직에 심었던 조직의 보스. 그 사람이다. 그러고도 그 영화배우의 이름을 기억해내기까지는 한 참이 더 걸렸다.

 

 

 

  증지위(曾志偉). 맞다. 증지위. 1980년대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주역으로 즐기고, 90년대 쇠락기를 조역으로 견디고. 2000년대 다시 홍콩 느와르의 부활을 온 몸으로 선언한 그. 언제부턴가 홍콩의 국민배우로 불린 그. 그런 그가 내 뒷자리에서 이제 막 소주 한 병을 더 시킨 참이다. 여느 연예인처럼 왜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느냐는 태도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신기했다. 그를 데리고 온 한국인 스탭들이 오히려 안절부절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그가 제주에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인터넷을 통해 알았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고 나서 몇 차례 망설였다. 사진을 찍자고 하는 일이 결례는 아닐지. 차라리 사인을 받는다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면 덜 어색했을 것이다. 정적과 취기만 흘러넘치는 이곳에서 어떻게 먼저 말을 붙일까? 몇 차례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다 용기를 내어 사진을 청했다. 우려와 달리 그는 선뜻 사진 촬영에 응해 주었다. 못내 아쉬워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찍을 때조차도 웃으며 응해 주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봤는지, 알고 있는지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했다. 자연스러웠다. 언어나 동행인이란 장벽만 없었더라면 그냥 소주 한 잔쯤 건넸을 만큼,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사람이란 그렇게 별 일 아닌 일에 감동받는 존재일까? 속이 쓰리도록 마셔보자던 그 자리는 이미 그 일로 훈훈한 자리가 돼 버렸다. 남들이 그랬다면 비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막상 내가 그런 일을 겪고 보니 예상과는 달랐다. 세상은 예기치 않은 일과 자연스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사소한 이해를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해야 직성이 풀리던 이들은 소수일 뿐이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고 보니, 차가운 이성을 위해 사소한 감정쯤은 버리라던 체의 인간관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증지위가 훨씬 더 현실적인 체온을 간직한 인간형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소주잔을 뒤집고, 다시 스쿠터에 올라탔다. 해안도로를 달리는 내내 뺨을 스치던 제주의 찬 공기는 여전히 매서웠다. 그러나 제주의 밤 풍경은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내 마음에 그렇게 내 인생의 그리운 한 순간이 자리 잡았다.

 

 

 

증지위를 만났던 제주의 포장마차 '유명야시장', 술이 절로 들어가는 안주들

 

 

 

 

 

 

출처 : Lifestyle & Trend Report
글쓴이 : 여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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