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종교이야기

[스크랩] 투명한 마음으로 벽을 허무는 것… 그게 활불(活佛)이지요"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2. 20. 06:50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자비를 실천하는 한낱 승려로서의 생활이 뿌듯할 뿐, 지난 삶은 후회스럽지 않아요"라고 했다.
삿된 마음조차 허하지 않을 듯한 청정 고산지대, 인도 북서부의 망명지 다람살라에서 지난 4~6일 사흘간 그를 만났다.
달라이 라마는 이곳 남걀사원을 찾은 한국 불자(佛子) 130여 명을 위해 법회를 열었고, 매일 아침 짬을 내 인터뷰에 응했다.
그를 친견하려는 이들과의 빼곡한 일정 탓에 길게 듣지 못한 그의 답변을 법문 내용에서 보충했다.

成佛은 중생 덕에 하는 것

―우리는 왜 불행을 느낍니까?

"불행은 번뇌에서 비롯되고, 이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불행·고통을 살피는 게 자비의 시작이며, 자비는 다시 내게 행복을 돌려주지요. 성불(成佛)은 남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타심, 중생(衆生)을 가깝게 여기는 마음이 확대됐을 때 이뤄지니, 성불은 중생에 의해 이뤄지는 거지요."
▲ 인터뷰 중간에 달라이 라마가 석천사 주지 진옥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날도 세계 곳곳에서 온 불자 수천 명이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박영석 기자
―어떻게 하면 증오심을 없애고 적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훈련과 명상이 필요하지요. 무조건 참거나 대응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슬기롭게 대처하라는 뜻입니다."

―소년 법왕(法王), 망명 지도자로서 평범한 삶에 대한 동경은 없었는지요?

"나는 대승불교의 평범한 일개 승려고, 자비심과 보리심(菩提心)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남을 이롭게 하고 산다는 게 뿌듯한 것이지요.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항상 종교간 교류·화합을 강조하시는데요.

"나는 무엇이고, 어디서 비롯됐으며, 끝은 어떤 모습일까를 탐구한다는 면에서 모든 종교는 근본이 비슷합니다. 세계 모든 종교는 연민·사랑·인도주의란 공통 분모를 뒀지요."

(달라이 라마는 "타인에게 불교 개종을 권하거나 교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인류사의 분쟁이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은 슬픈 일이며, 인류의 경험과 문명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이(異)종교간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해 왔다.)

올림픽이 신뢰 퍼뜨리길

베이징올림픽이 성공하길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죠?

"올림픽은 지구촌이 우정과 신뢰를 도탑게 하는 조화의 장입니다. 13억 중국 인구가 고대해 온 행사고, 나는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부터 베이징을 지지했어요. 신뢰를 위해선 겉과 속이 같은 투명한 마음, 마음의 벽을 허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중국과 전 세계가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하는 계기로 삼길 바랍니다."

(그는 "붓다가 말한 '적이라고 여기는 이는 친구보다 소중하다. 친구가 가르칠 수 없는, 이를테면 인내 같은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는 교훈을 마음 속에 새겨두고 있다"고 자서전에 적어 놓았다.)

―'티베트 자치(自治)'를 주장하시는데요.

"과거는 과거고, 앞으로가 중요하지요. 티베트의 물질적 풍요를 위해 독립 대신 (외교·국방만 중국에 맡긴) 자치가 현실적으로 더 좋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태로 가다간 티베트 불교와 언어가 소멸될 겁니다."

(그는 티베트·중국 모두 득이 되도록 중국의 틀 안에서 티베트의 완전 자치 보장이라는 해법을 1974년부터 고수하면서 "티베트의 미래를 결정할 궁극적 권리는 물론 티베트인에게 있다"는 전제를 뒀다. 중국측은 그를 "승복 입은 늑대" "평화주의를 가장한 폭동 사주자·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私益은 사회 앞에 굴복해야

―한국 방문이 이뤄진다면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까?

"1960년대부터 방한을 추진했지만 여러 이유로 지금껏 연기돼 뭐라 말할 수 없군요. 만약 가게 된다면 제가 어디서건 강조했던 두 가지, 선행(善行)과 종교간 화합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화해와 용서'를 갈등 속의 한국 사회에 이식할 수 없을까요?

"사회·종교적 여러 분파들이 편협한 이익을 벗고 전체 사회를 넓게 바라봐야 합니다. 한국은 역사와 전통이 깊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민주주의·교육을 발전시켰으므로 자기 힘으로 갈등을 극복해 낼 걸로 봅니다."

달라이 라마는 "나를 활불(活佛)이라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언짢은 오해"라고 말해 왔다. 주황색과 자색 가사(袈娑)를 입은 그는 간간이 영어를 섞었지만 주로 티베트어로 말했으며, 법문 중 눈이 마주친 신도에게 엷은 미소나 손동작으로 알은체했고, 통역 시간엔 선하품을 하거나 전후·좌우로 몸을 움직이곤 했다. 한국인을 위한 법문임에도 각국 불자 4000여 명이 사원을 메웠다. 폭우 속에 법문을 듣던 티베트 청년의 셔츠 등허리는 몸에 척 달라붙었고, 거기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포기 말라. 연민은 친구에게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가져라"는 달라이 라마의 설법이 적혀 있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의 영적·정치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본명 텐진 갸초)는 1935년 티베트 암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네 살에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지명됐다. 1950년 10월 마오쩌둥 군이 티베트를 공격했고, 그 해 11월 15세의 달라이 라마는 통치권자로 즉위한다. 중국은 이듬해 5월 '17조 협약'을 맺은 뒤 티베트 지역을 시짱(西藏) 자치구란 이름으로 통치해 왔다.

달라이 라마는 주권 회복에 힘쓰다 1959년 3월 수행자 80여 명을 이끌고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 이듬해 4월 영국 식민지 시절 휴양지인 다람살라에 정착한 뒤 티베트 망명 정부를 세웠다. 그는 ▲티베트 평화지대화 ▲중국인 이주정책 포기 ▲인권·민주주의 보장 ▲핵폐기물로부터 환경 보호 ▲협상 개시 등을 중국측에 요구해 왔으며, 비폭력 운동을 벌인 공로로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다람살라 한국인을 위한 법회는 여수 석천사(石泉寺·주지 진옥 스님)가 주관해 2000년부터 거의 매년 열려왔다.


 
 

 

 

<출처;eroom.korea.com/bssk>

 

 

 

 

 

 
출처 : ..
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