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빛바랜 사진이야기

[스크랩] 길 위의 삶_ 보성_ 장터 음식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2. 27. 23:34

보성 장터 음식
길 위에서 삶을 비벼 먹는 맛

 

 

 

“날씨 한번 ‘지랄’맞네.” 보성으로 가는 길, 고운 찻잎도 보고 따스한 봄날 장터 풍경도 보려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덜컥 이런 상소리가 나온 것은 순전히 ‘눈’ 때문이었다. 달력은 명백히 3월 중순을 가리키고 있건만, 전라북도로 들어서자 하늘에서는 하얀 눈발이 펄펄 흩날렸다.


1 율포만과 보성 차밭이 한 눈에 보이는 언덕에 서면 전쟁터 같은 마음에도 순식간에 평화가 찾아온다.
2 따스한 봄볕을 받고 더 야들야들해진 장터 곶감.
3 남도의 정과 맛이 뚝뚝 묻어나는 장터 국밥.

기가 차서 잠시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자니 눈발이 점점 굵어져 엄지손가락만 한 함박눈이 하늘에서 연신 떨어졌다. ‘알 한번 굵네. 실하다.’ 기가 찬 마음은 이제 구경꾼의 심정이 되어버려 눈 감상으로 이어졌다. 전라남도로 들어서면 좀 낫겠지 싶었으나 보성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하자 잠시 앞뒤 구분도 없이 눈이 몰아친다. 봄 날씨란 이런 것이다. 삽시간에 찬 바람을 몰고 기습하듯 거침없이 오는 겨울과 달리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오는 것이 봄이다. 그야말로 ‘지랄’맞은 것이 봄이 오는 신호다. 사진가와 망연자실 눈을 바라보다 밥이나 먹자며 보성 장터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생동감 있는 맛 투어를 하자고 호기롭게 장터 취재를 외치며 떠나왔는데, 겨우내 맛보지 못한 매운바람과 만난 것이다.

새벽에 출발했건만, 보성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정오였다. 시장기가 모든 걱정을 뒤로하게 했다. 국내 여행 취재 경험이 많은 사진가와 우연히 동행하게 된 후배는 성큼성큼 시장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어리버리 그들의 뒤를 따르던 나는 스쳐 지나가는 장터 풍경이었지만 모든 것이 마냥 새로운 마음에 걸음이 주춤주춤한다. 엄마 따라 시장 나온 아이 걸음이 이렇겠지.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보고 싶고. 그렇게 ‘성큼성큼’과 ‘주춤주춤’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춘 곳이 있었으니, 바로 보기만 해도 ‘포스’가 뚝뚝 흘러넘치는 ‘우성식육점식당’이었다.

 

알지 않는가. 자고로 시장통 가장 안쪽 정육점을 낀 고깃집과 국밥집의 맛이 어떤지. 우리 셋은 약속이나 한 듯 ‘저기다’라고 이구동성 외치며 씩씩하게 국밥집 문을 드르륵 열었다. 역시나.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는 고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걸려 있는(재료에 자신이 있다는 거다) 국밥집 안은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열기 그리고 국밥 끓는 온기가 자욱했다. 메뉴판도 없다(그러면 그렇지. 메뉴판 따위, 구차하다는 거다. 신뢰 점수 50점 가산!). 창문에 비뚤비뚤 쓰인 국밥, 선짓국, 머리 고기.

 

이게 다다. 국밥과 선짓국을 주문하니, 신기하게도 커다란 곰솥에서 퍼 내주는 것이 아니라 중솥 정도 되는 냄비에 기본 국물 베이스를 넣고 선지며 머리 고기, 각종 내장들을 넣은 다음 양념 통에 손을 쑤욱 넣어 간을 한다. 대충대충, 듬성듬성 넣는 것 같은데 신기하기도 하다. 한상 떡 벌어지게 나온 장터 국밥은 ‘레이아웃’부터 예사롭지 않다. 해부학 시간처럼 소와 돼지의 내장들이 사기 그릇 안에 오밀조밀 예쁘게도 담겨서 나온다. 잠시 후 국밥을 맛본 우리 셋은, 일동 기절. 국물 맛은 하룻밤 우려낸 듯 진하고 깊었으나, 국물에 몸을 담근 콩나물과 내장들은 탱탱하게 살아 있다.



4 장터에 나와 몸을 말리고 있는 이 생선들은 보성산도 있고 이웃한 남쪽 바다 도시들 것도 있다.
5 시골 장터를 둘러보는 재미 중 하나는 이런 믿거나 말거나 ‘만병통치약’을 파는 풍경이다.
6 회천, 득량, 율포의 뻘밭은 단순한 바다가 아니라 보성 사람들의 다 삶터이다. 아직 출항하지 못한 빈 배에서 만선의 바램이 느껴진다.



딸려 나온 반찬은 어떤가. 토하젓에 손으로 쭉쭉 찢어 먹는 묵은 김치. 구차한 말잔치가 필요 없는 맛이다. 식당 안은 갑작스러운 추위에 몸을 녹이러 온 상인들부터 동네 사람들, 오일장을 맞아 나들이 나온 촌로들로 조용하게 들썩였는데, 벌써부터 막걸리 몇 사발에 거나하게 취한 분위기다. 막사발에 막걸리 한잔 들이켜면 딱 좋을 기분이었지만,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서둘러 장터로 걸음을 옮겼다. “서울 사람들은 딱 표가 난당게. 희멀거니. 모 땀시 왔는지 모르겄으나, 구경 잘하쇼이.” 우성식육점식당 아저씨의 인사를 뒤로하고 희멀건 서울 촌놈들은 보성 장터로 나섰다.

서울 촌놈 왈, “이건 뭐예요?”
배가 두둑해져서일까, 눈이 그쳐서일까. 오후 햇살이 길게 내리쬐는 보성 장터는 1시간 전에 비해 훨씬 더 따듯해졌다. 봉긋하게 솟은 배를 어루만지며 장터 음식 취재는 어찌 해야 하나 하는 좀 나른한 고민을 하면서 걷자니, 신기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본적인 야채나 생선 외에 좌판에 널려 있는 생전 처음 보는 생선 몸통, 광주리에 담겨 있는 낯선 야채들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무식한데 궁금한 것은 많은 나는 천진하게 묻는다.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듣고 있던 장터 사람들은 기가 차나 보다. 장터에서 “얼마예요?”도 아니고 뻔한 재료들 앞에서 이건 뭐냐고 묻는 서울 촌놈이. 서울 무지렁이가 그런 것이다.

 

조리된 음식, 손질된 음식만 먹어봤지 실제로 갓이 어떻게 생겼는지, 양태가 어떻게 생겼는지 통 모르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후배는 선배의 무지함을 참지 못하고 끝내 이런 말을 내뱉었다. “아, 선배 취재의 필살기는 바로 이거였군요. 이건 뭐예요?” 뒤통수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장터를 돌아다니다 보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서 조용히 했다. 저 사람들에게는 치열한 삶이고 밥이고 양식인 것들인데, 나에게는 단순 호기심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1 돼지의 몸이 해체되어 머리와 다리가 이렇게 전시되고, 팔리는 것은 서울 사람에게는 진기한 풍경일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자연스런 삶의 양식일 뿐이다.
2,3 보성에서는 녹돈과 녹차이외에도 기름진 뻘밭에서 나온 해산물 맛도 일품이다.

보성장은 보성 시외버스 터미널과 역전을 사이에 두고 조그맣게 열리는 오일장이다. 2일, 7일, 12일, 17일, 22일, 27일. 닷새 간격으로 징검다리 건너듯 열린다. 조선조 말엽 보성읍 용문리에 우시장이 생기면서 정기 시장으로 발전한 것이 보성장의 짧은 역사인데, 1930년대 경전철 서부선 철도가 개통되자 편리한 교통에 따라 역 주변으로 옮겨졌다가 1950년 군의 도시 정비 계획에 따라 지금의 원봉리로 옮겨졌다. 큰길가에는 주로 외지 상인들이, 장 안에는 보성 토박이 상인들과 근처 도시에서 온 상인들이 몰려 있다. 장터를 돌면서 크게 놀란 것은 보성 하면 녹차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바다 냄새 물씬거리는 해물상과 소나 돼지 머리를 파는 식육점(정육점)이 많다는 거였다. “회천, 득양, 율포 것이 유명하제. 지금은 겨울이라 이게 다 외지에서 오지만, 뻘밭이 차져서 여름에는 바지락·서대·찔기미(칠게)가, 가을에는 낙지·새꼬막·주꾸미가 아주 실하제. 그때는 손님들도 여기치(여기 것) 찾지 다른 데 건 찾지도 않는당게.” 아하, 몰랐다. 녹차를 여물게 하는 율포가 잔모래 섞인 갯벌이라는 걸 . 그리고 율포가 회천, 득량과 이웃하고 있다는 걸 . 그래서 보성장에는 꽤 커다란 해물전이 여럿이고, 소문난 득량만의 차진 뻘밭에서 나온 서대와 맛(맛조개), 바지락은 이 지역 대표 선수들이다. 그래서 보성장에는 차 茶 자랑보다 뻘밭 자랑이 대세다. 저녁때는 꼭 해산물을 먹으리라 다짐한다.


보성장은 휘휘 둘러보면 30도 채 안 걸릴 정도로 작다. 담양이나 구례, 곡성 장에 비하면 소꿉놀이 규모다. 그러나 그 분위기나 나오는 물건들은 큰 장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실하고 알차다. 게다가 작은 골목골목 사이로 들어가면 오래된 오란씨 병, 만병통치약, 치질과 이질에 효과 만빵이라는 특효약 등, 이제 서울에서는 다 사라지고 없어진 지 오래된 추억들이 숨어 있다. 또 전문 상인이 아닌 시골 촌부들이 손수 농사지은 각종 곡식과 채소들을 한 움큼씩 내놓고 팔고 있는 풍경을 볼라치면 가슴이 짠해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30년 동안 뻥튀기만 튀겨서 팔았다는 한 할아버지의 “뻥이요~”라는 구성지고 아름다운 위협의 소리를 즐길 수도 있다. 시골 겨울 살림이 뭐 별거 있겠나. 남은 쌀과 떡, 곡식들을 주섬주섬 싸와서 장날에 이 뻥튀기 할아버지에게 갖다 주면 커다란 자루에 한 가득 차도록 만들어주니 이런 마술이 없다. 뻥튀기가 터지면서 내는 자욱한 안개를 찍으려고 할아버지 앞에서 한없이 기다리던 우리는 얼떨결에 구수한 뻥튀기 몇 개를 얻어먹었는데, 그 맛이 꿀맛이다.

 


1,4 옛날만큼 북적북적하지 않은 한 낮의 장터에는 오후 햇살과 촌로들의 사는 얘기가 쓸쓸하게 흐른다.
2 한 계절 지나면 저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 채소가 되어 다시 이 장터로 나오게 될 것이다.
3 율포의 기름진 물비늘. 저 찰랑이는 바닷바람이 보성의 녹차를 키운다. 

사실 장터 음식을 취재한다고 왔지만, 장터 음식이란 건 없다. 흔히 말하는 거리 음식이 있을 뿐이다. 붕어빵, 오뎅, 호떡, 뻥튀기. 그러나 이상도 하지. 군것질거리밖에 안 되는 음식들이지만 정신을 팔고 장터를 한참 돌아다니다 붕어빵을 먹으니 그 맛이 별미다. 서울의 세련된 잉어빵에 비하면 팥도 턱없이 부족하고, 계란도 조금만 넣어 목이 멜 만큼 퍽퍽하지만, 그게 장터 음식의 맛인 것이다. 정말 장터 음식이란 없다. 장터에서 파는 재료와 장터로 나온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아직 봄나물이 나오기는 이른 시기고 그나마 장터 안에서 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곰취와 봄동, 쪽파 정도다. 그래도 보성의 작은 논과 밭에서 나온 보성산 찹쌀과 보리, 수수쌀, 녹두, 수수는 그 알이 곱고 단정해 빨간 고무 ‘다라이’에 얌전히 담긴 모양이 쉽게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보성산은 아니지만 보성 인근에서 나온 목포 젓갈, 완도와 해남의 멸치, 고흥 마늘 등 지역의 대표 특산물들도 한 자리씩은 차지하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팔도 장보기도 가능하다. 또 시골에서만 소화 가능한 알록달록 통치마와 통바지 패션, 각종 씨앗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민간요법으로 제조된 만병통치약 등은 시골 장터에서만 볼 수 있는 쏠쏠한 재미다. 게다가 대낮부터 만취해 거리에 쓰러진 노인들과 상인들끼리의 작은 다툼과 자랑, 구성진 욕설 등은 이런 장터 풍경과 완벽한 궁합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손바닥만 한 장터지만 한나절 구경하고 있으면 인생의 생로병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녁까지 전깃불 켜놓고 장사하던 호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후 4시면 서둘러 짐을 싸는 사람들이 많아 파장이나 다름없는 풍경을 연출하는 것이 시골 장터의 현실이다. 그래도 보성 장터 사람들은 여전히 건강하고, 자부심도 대단하다. 서로 욕하고 다투고 경쟁하지만 자신들의 정직한 노동을 이곳 장터에서 사고팔며, 덤으로 정을 나눈다.

1 보성의 녹차는 담담하지만 오랜 음미하면 단맛이 배어나온다.
2철 지난 바닷가처럼 쓸쓸하고 운치 있는 보성만 수문 해수욕장. 
3 율포와 수문 해수욕장 주변으로는 횟집이 즐비한데, 어느 횟집을 선택해도 회를 먹기 전부터 배를 봉긋하게 불려주는 엄청난 ‘스키다시’의 행렬이 이어진다.
4 서울에서 파는 녹차 아이스크림처럼 달지는 않지만 보성 녹차의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5 5일마다 보성 장터에 ‘뻥’ 고함을 만들어내시는 뻥튀기 아저씨.

생각보다 일찍 파한 보성장을 뒤로하고 율포만을 아늑하게 끼고 있는 푸르디푸른 녹차 밭을 보면 보성 사람들이 왜 그리 강하면서도 순한지 알 수 있다. 4월이면 연둣빛 순한 기운을 반드르르 흘려보낼 녹차 잎은 아직은 칼바람에 짙은 초록색의 두꺼운 잎을 가지고 있지만, 곧 야들야들한 햇차를 내놓을 것이다. 투박하고 거친 말투 속에 여린 심성을 감추고 있는 보성 장터 사람들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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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go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회덕 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광주 제2순환도로에서 화순·보성 방향으로 29번 국도를 타고 가면 보성읍이 나온다. 서울 용산역에서 보성역까지 매일 1회(오전 10시 5분 출발) 무궁화 열차가 운행된다.

what to eat 보성 시장 안에 있는 ‘우성식육점식당’(061-852-3422)은 장터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국밥을 자랑한다. 저녁때에는 머리 고기에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여도 좋다. 서울에서도 쉽게 맛볼 수 있는 녹돈보다는 율포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조용한 횟집을 추천한다. 관광객들보다 보성 토박이들이 즐겨 찾는 ‘남해바다횟집’(061-852-8008)과 ‘푸른바다횟집’(061-853-2225)도 좋다.

where to stay 율포해수욕장 뒤에 80여 개의 객실을 갖춘 ‘다비치 콘도’(061-850-1100)가 있다. 콘도 시설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율포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해수 녹차탕을 꼭 이용해봐야 한다. 과장을 좀 보태면 10년 묵은 피로가 바닷물과 녹차의 절묘한 결합에 거짓말처럼 풀린다. 모텔치고는 녹차 밭과 율포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다향 모텔’(061-852-5087)도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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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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