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장터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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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한번 ‘지랄’맞네.” 보성으로 가는 길, 고운 찻잎도 보고 따스한 봄날 장터 풍경도 보려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덜컥 이런 상소리가 나온 것은 순전히 ‘눈’ 때문이었다. 달력은 명백히 3월 중순을 가리키고 있건만, 전라북도로 들어서자 하늘에서는 하얀 눈발이 펄펄 흩날렸다. |
알지 않는가. 자고로 시장통 가장 안쪽 정육점을 낀 고깃집과 국밥집의 맛이 어떤지. 우리 셋은 약속이나 한 듯 ‘저기다’라고 이구동성 외치며 씩씩하게 국밥집 문을 드르륵 열었다. 역시나.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는 고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걸려 있는(재료에 자신이 있다는 거다) 국밥집 안은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열기 그리고 국밥 끓는 온기가 자욱했다. 메뉴판도 없다(그러면 그렇지. 메뉴판 따위, 구차하다는 거다. 신뢰 점수 50점 가산!). 창문에 비뚤비뚤 쓰인 국밥, 선짓국, 머리 고기.
이게 다다. 국밥과 선짓국을 주문하니, 신기하게도 커다란 곰솥에서 퍼 내주는 것이 아니라 중솥 정도 되는 냄비에 기본 국물 베이스를 넣고 선지며 머리 고기, 각종 내장들을 넣은 다음 양념 통에 손을 쑤욱 넣어 간을 한다. 대충대충, 듬성듬성 넣는 것 같은데 신기하기도 하다. 한상 떡 벌어지게 나온 장터 국밥은 ‘레이아웃’부터 예사롭지 않다. 해부학 시간처럼 소와 돼지의 내장들이 사기 그릇 안에 오밀조밀 예쁘게도 담겨서 나온다. 잠시 후 국밥을 맛본 우리 셋은, 일동 기절. 국물 맛은 하룻밤 우려낸 듯 진하고 깊었으나, 국물에 몸을 담근 콩나물과 내장들은 탱탱하게 살아 있다.
조리된 음식, 손질된 음식만 먹어봤지 실제로 갓이 어떻게 생겼는지, 양태가 어떻게 생겼는지 통 모르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후배는 선배의 무지함을 참지 못하고 끝내 이런 말을 내뱉었다. “아, 선배 취재의 필살기는 바로 이거였군요. 이건 뭐예요?” 뒤통수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장터를 돌아다니다 보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서 조용히 했다. 저 사람들에게는 치열한 삶이고 밥이고 양식인 것들인데, 나에게는 단순 호기심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
1,4 옛날만큼 북적북적하지 않은 한 낮의 장터에는 오후 햇살과 촌로들의 사는 얘기가 쓸쓸하게 흐른다.
2 한 계절 지나면 저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 채소가 되어 다시 이 장터로 나오게 될 것이다.
3 율포의 기름진 물비늘. 저 찰랑이는 바닷바람이 보성의 녹차를 키운다.
사실 장터 음식을 취재한다고 왔지만, 장터 음식이란 건 없다. 흔히 말하는 거리 음식이 있을 뿐이다. 붕어빵, 오뎅, 호떡, 뻥튀기. 그러나 이상도 하지. 군것질거리밖에 안 되는 음식들이지만 정신을 팔고 장터를 한참 돌아다니다 붕어빵을 먹으니 그 맛이 별미다. 서울의 세련된 잉어빵에 비하면 팥도 턱없이 부족하고, 계란도 조금만 넣어 목이 멜 만큼 퍽퍽하지만, 그게 장터 음식의 맛인 것이다. 정말 장터 음식이란 없다. 장터에서 파는 재료와 장터로 나온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아직 봄나물이 나오기는 이른 시기고 그나마 장터 안에서 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곰취와 봄동, 쪽파 정도다. 그래도 보성의 작은 논과 밭에서 나온 보성산 찹쌀과 보리, 수수쌀, 녹두, 수수는 그 알이 곱고 단정해 빨간 고무 ‘다라이’에 얌전히 담긴 모양이 쉽게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보성산은 아니지만 보성 인근에서 나온 목포 젓갈, 완도와 해남의 멸치, 고흥 마늘 등 지역의 대표 특산물들도 한 자리씩은 차지하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팔도 장보기도 가능하다. 또 시골에서만 소화 가능한 알록달록 통치마와 통바지 패션, 각종 씨앗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민간요법으로 제조된 만병통치약 등은 시골 장터에서만 볼 수 있는 쏠쏠한 재미다. 게다가 대낮부터 만취해 거리에 쓰러진 노인들과 상인들끼리의 작은 다툼과 자랑, 구성진 욕설 등은 이런 장터 풍경과 완벽한 궁합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손바닥만 한 장터지만 한나절 구경하고 있으면 인생의 생로병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녁까지 전깃불 켜놓고 장사하던 호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후 4시면 서둘러 짐을 싸는 사람들이 많아 파장이나 다름없는 풍경을 연출하는 것이 시골 장터의 현실이다. 그래도 보성 장터 사람들은 여전히 건강하고, 자부심도 대단하다. 서로 욕하고 다투고 경쟁하지만 자신들의 정직한 노동을 이곳 장터에서 사고팔며, 덤으로 정을 나눈다.
1 보성의 녹차는 담담하지만 오랜 음미하면 단맛이 배어나온다.
2철 지난 바닷가처럼 쓸쓸하고 운치 있는 보성만 수문 해수욕장.
3 율포와 수문 해수욕장 주변으로는 횟집이 즐비한데, 어느 횟집을 선택해도 회를 먹기 전부터 배를 봉긋하게 불려주는 엄청난 ‘스키다시’의 행렬이 이어진다.
4 서울에서 파는 녹차 아이스크림처럼 달지는 않지만 보성 녹차의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5 5일마다 보성 장터에 ‘뻥’ 고함을 만들어내시는 뻥튀기 아저씨.
생각보다 일찍 파한 보성장을 뒤로하고 율포만을 아늑하게 끼고 있는 푸르디푸른 녹차 밭을 보면 보성 사람들이 왜 그리 강하면서도 순한지 알 수 있다. 4월이면 연둣빛 순한 기운을 반드르르 흘려보낼 녹차 잎은 아직은 칼바람에 짙은 초록색의 두꺼운 잎을 가지고 있지만, 곧 야들야들한 햇차를 내놓을 것이다. 투박하고 거친 말투 속에 여린 심성을 감추고 있는 보성 장터 사람들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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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디터 : 김은주 / 사진 : 박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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