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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평- 제국과 상인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1. 31. 15:07

제국과 상인

 

저자: 이승렬

 

 

최근 뉴라이트 세력은 이른바 대안교과서 출판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한국이 근대화 되었다는 해석은 우리나라의 근대자본주의가 일본에 의해 성장하였다는 해석을 담고 있어, 기존의 역사학계와는 입장이 분명히 다르다.

 

저자는 제국과 상인(역사비평사, 2007 4)을 펴내어, 대한제국 시절 이미 우리나라에 근대적 자본주의가 형성하였고 토착화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였으며, 오히려 식민지배로 인해 근대적 은행제도의 발전이 식민지배의 착취기관으로 변천해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쓴 이승렬씨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와 서울시립대 출강 중이고, 연세대 국학연구원의 객원연구원과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한국 보수주의가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해왔는지 그 역사적 기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부르주아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한국적 특수성을 주로 연구해왔다.

 

주요 논문으로는 「역대 조선총독과 일본군벌」(1994), 1930년대 전반기 일본군부의 대륙침략관과 조선공업화 정책」(1996), 1930년대 조선의 수출증가와 조선공업계의 동향-조선인 자본가의 산업적 지위와 관련하여」(1997), 「일제하 중추원 개혁문제와 총독정치」(2005), 「일제하 천도교 계열의 자본주의 인식의 변화와 인간관」(2006) 등이 있다.

 

 

이제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 소개해보기로 하자.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은 분권제에 기초한 틀 속에서 서양의 자극에 대응했다. 지방 번벌(영주) 세력에 의한 막부 타도는 자본주의 근대화로 연결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체제에 기초하여 외부의 자극에 대응했고, 그것이 갑오개혁 및 광무개혁으로 나타났다. 특히 광무개혁은 조선왕조의 왕실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또 조선과 일본은 근대화를 실시한 시차가 30년 가량 나는 탓에 외압의 강도나 수준이 달라 단순 비교가 어렵지만 양자가 출현하게 되는 체제적 배경도 상당히 달랐다.

 

조선 후기 상업 발달을 보면, 농촌시장 못지않게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전국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었다. 특히 서울은 중국으로 연결되는 조공무역로의 중심지였고, 서울을 비롯해서 몇몇 상업도시를 기반으로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과 선진 지식을 흡수한 엘리트층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관계가 변동할 때마다 민감한 영향을 받아야 했던 조선왕조를 바꿀 만한 유력한 세력 중의 하나였다. 갑신정변, 갑오개혁, 광무개혁 등에서 그들의 노력이 확인될 수 있다.

 

조선의 19세기는 현물경제에 기초한 국가적 상품화폐 경제와 화폐수탈에 기초한 농민적 상품화폐 경제가 병존하는 시대였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구조는 이서에서 수령, 중앙의 권문세가로 연결되는 지배계층이 공적 징세기구를 악용하여 중간수탈을 할 수 있는 방납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한 부는 국가재정으로 흘러가지 않고 기득권층의 사적 이익으로 집적되었고, 상인층은 이렇게 부정축재를 일삼는 양반지주층과 공생관계를 형성하면서 자신들도 부를 축적해갔다. 그 결과, 아무리 향촌에서 농민수탈이 증가해도 중앙 재정구조는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한말 조세제도 및 재정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개혁의 최우선 과제는 현물경제와 화폐경제가 병존하는 이중구조를 혁파하고 화폐경제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과 중간수탈이 자행될 수 있는 허점을 가진 징세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전자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세금납화의 전면실시와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화폐개혁, 그리고 국고은행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중앙은행의 설립이 요구되었으며, 후자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세의 부과와 징수체계를 분리하여 근대적인 징수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은행 설립은 1880년대부터 조선 정부 역점사업 중 하나였지만 청의 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갑오개혁기에도 조세금납화 등 조세 및 재정개혁을 위해서 은행이 필요했지만 끝내 설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은행 설립은 단순히 근대적 금융기관 설립이라는 의의뿐만 아니라 정부가 개혁을 위한 자율적 능력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지표이기도 했다. 1897 2월에 한성은행이 설립되었고, 1897 10월에 대한제국이 출범했으며, 18991월에는 대한천일은행이 설립되었다. 18998월에는 고종의 전제권력을 뒷받침하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반포되었다. 근대적 경제구조의 인프라라고 할 수 있는 화폐제도 개혁 및 중앙은행 설립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이다.

 

도고 상인들이 은행가로 전환한 것은 한국에서 부르주아의 등장을 의미했다. 정부와 상인의 공생관계 위에서 성장한 그들은 국가권력에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식민지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대한제국의 금융 근대화를 추진했던 은행가들은 나중에 대한제국 금융기관의 식민지적 재편을 주도했고, 일제강점 후에는 조선상업은행 및 한성은행장을 지내는 등 금융계의 주요인물이 되었다. 대한제국의 유산인 그들은 식민지 근대 자본주의가 전개되었던 발판이기도 했다.

 

정치적 후원자를 원하는 상인과 은행을 필요로 하는 광무정권은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었다. 황실 측근관료 및 재무관료들, 그리고 상인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실은 우리가 대한천일은행이 광무정권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기에 충분한 근거들이다. 대한천일은행의 주주는 실제로 소수의 관료와 상인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은 대부분 황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들이었다. 정부가 은행을 보호하기 위해 약간의 자금을 지원한다는 한성은행의 정관과 대한천일은행 정관 제6조는 궁내부 및 정부가 은행자본금의 1/2에서 1/3을 출자할 수 있다. 예컨대 대한천일은행이 조세청부를 맡은 지역이 전국 205개 군에 걸쳐 있었다는 것이다. 1899년 광무정권이 징수한 지세 총액 369.4만원의 약 15% 58.3만원을 이 은행이 징수하였다.  전국에 걸쳐 파견된 100여명의 조세청부업자-세납차인들 다수는 상인들이었다. 대한천일은행이 그 상인들을 전체적으로 통괄했기 때문에 조세포탈과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세청부업자들 대부분이 상인이었고, 육의전상인, 경강변의 객주, 종로의 포목상, 남대문 밖 객주, 인천의 객주, 그리고 인삼매매와 관련된 개성상인 등이었다.

 

광무정권이 추진했던 식산흥업정책의 하나로 설립된 한성전기회사의 자금관리도 대한천일은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회계장부로 파악한 자료에는 시위대와 친위대는 부대 예산을 대한천일은행에 예치하고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인출했다. 전환국은 대한천일은행이 매입한 지전을 다시 매입했다. 백동화를 남발하여 백동화 인플레이션을 야기한 전환국은 그로 인한 환전시장의 불안정이 대한천일은행에 가져다 줄 위험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대한천일은행의 지전매매는 단순한 환전영업이 아니라 백동화로 결제되는 은행수표인 본점표를 발행하여 백동화 유통을 확대하려는 광무정권 통화정책의 본질이었다. 또 지전을 매입하면서 대한천일은행이 발행하고 광무정권이 지급을 보증한 은행수표인 본점표의 유통은 백동화 유통을 확대하려는 광무정권의 통화정책이 시장에서 수용된다는 근거가 된다. 지전 구입 증가로 인한 본점표 유통의 증가는 사적 어음거래와 달리 근대적 신용금융의 형성 과정이었다.

 

광무정권의 적극적 지원으로 조성된 자금을 토대로 대한천일은행은 19세기 말 격심한 상업발달 과정에서 상인들의 늘어난 상업자금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영업활동을 전개했는데, 유가증권과 상품 그리고 부동산 등을 담보로 하는 대출 등이었다. 농지와 삼포 담보대출은 기존의 토지자본이 근대적 금융기관을 매개로 상업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상인들은 상품매매와 관계없이 발행한 어음을 할인하는 어음대출을 자주 이용했다. 대한천일은행의 이자율은 일본은행에 비해 높지 않았다. 일본상인들의 주거래 은행 역할을 한 이소하치은행의 평균 대출이자율은 1901 20.07%이었으며, 대한천일은행은 24%였다. 그러나 일본 이소하치 은행 전체 대출에서 부동산담보대출이 50%인데 비해, 대한천일은행은 대부분이 신용대출이었다. 또 청나라상인의 한상에 대한 대출이자율 역시 29.2% 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주의는 강제로 대한제국 정부와 1차 한일협약을 맺고 재정과 외교를 관장했다. 1904년 메가타 대장성 주세국장이 부임하면서 가장 먼저 대한제국의 화폐발행기관인 전환국의 폐쇄, 한국의 화폐정리, 국고금 취급권리, 나아가 다이이치(第一)은행에 은행권을 발행할 권리(중앙은행의 역할)를 부여했다. 1905년 화폐정리로 대한제국의 화폐 및 금융시스템이 전면 부정되어 대한천일은행의 주요고객인 상인들의 파산이 이어졌다. 개혁의 피해자는 한인들이었고,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자는 일본인들이었다.

 

식민지지배가 시작된 1905년 이후에는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 토목청부업자에게 자금을 융통하고, 토목건축업자에 대한 대출은 관공서 및 군대의 건설 용도로 사용하였기에 1910년대 무단통치 지배정책의 물리적 기반조성에 은행 자금이 동원된 것으로 봐야 한다.

 

1910년대부터 미곡 및 포목상에 대한 자금융통은 식민지적 교역구조라 할 수 있는 미면 교환무역의 확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일본 본국의 물가를 안정시키고 일본 상품의 조선 판매를 도와주었지만, 물가고에 시달리는 한국 민중의 생활고는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1910년대 후반기에 미곡 수출의 지나친 급증으로 인해 쌀값이 급등하고 이에 편승하여 수입면직물 가격도 올라가면서 물가가 크게 올랐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저금리-인플레 경기를 방조하였다. 당시 은행의 주요 의사결정권은 일본지배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1911년에는 은행명이 대한천일은행에서 조선상업은행으로 바뀌었었는데. 이것은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설립 목적에서 식민정책을 위한 금융기관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의 사회적 기반이었던 상인 출신 자본가들 역시 식민지 지배체제가 수립되는데 있어서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들은 한성공동창고㈜, 한성수형조합, 한성농공은행 등을 설립하였고 여러 친일단체를 결성했다. 그들은 친일 정치세력들과 서로 교류하며 인적 네트워크를 다지는 한편, 경성 지역의 유력한 사회적 리더로 부상한 부르주아였다.

 

김성수를 매개로 형성된 산업부르주아 세력은 경제운동인 물산장려운동, 문화운동인 민립대학 설립 운동, 정치운동인 자치운동을 주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활동 패턴은 전통적인 지주나 상인부르주아와는 달리 경제엘리트에 안주하지 않고, 정치, 사회, 문화 영역까지 지배하려는 패권성을 드러냈다. 그들이 화려하게 식민지 조선 사회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3.1민족해방운동이 일본제국주의를 압박하여 쟁취한 자유공간의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최초로 정치적 주도세력임을 자임했던 부르주아 세력은 지배할 권리돈 벌 권리를 맞바꾸었다. 일제 말기 한인 부르주아는 신경제/공익/도덕/국민 재조직 등 전체주의 정신을 고취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 민주주의 같은 근대의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반민족 행위 이전에 개인의 가치를 발견한 근대성 자체를 핍박한 것이었고 침략전쟁에 동조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저자는 조선 후기에 중국과의 조공무역로를 중심으로 이미 커다란 시장이 형성되었고, 몇몇 상업도시를 기반으로 자본을 축적한 상인과 선진 지식을 흡수한 엘리트들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근대적 자본주의의인 화폐발행과 은행도 설립되었다고 한다.

 

특히 은행 설립은 1880년대 조선정부의 역점사업 중의 하나로 대한천일은행이 출범하였으나 청의 간섭과 일본의 조직적인 반대로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대한천일은행의 설립은 대한제국 근대화의 상징임과 동시에 대한제국이 근대적 자본주의를 추구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강조한다. 또한 한성전기회사의 자금운영은 식산흥업정책의 하나였고, 은행이 직접 징세권을 행사한 점, 전환국과 대한천일은행이 지전발행과 매입으로 인플레를 막으려고 한 점, 지전 매입으로 은행수표인 본점표의 유통을 보급하려 한 점, 일본의 부동산담보대출과는 달리 어음대출을 자주한 점 등도 모두 근대적 신용금융 형성을 위한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제국주의는 식민지배를 본격화 하면서, 대한제국의 화폐 및 금융시스템을 전면 부정하였고, 대한천일은행의 주요 고객인 상인들을 파산으로 내몰아 사실상 근대적 자본주의의 발전을 막았다고 한다. 일본화폐보급이나 까다로운 화폐교환, 그리고 전환국 폐쇄, 백동화의 인위적 퇴출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제 화폐개혁의 최대 피해자는 대한제국의 상인이었고, 최대 수혜자는 일본인들이었다고 한다. 대한천일은행은 식민정책을 위한 금융기관으로 전락되었으며, 한국의 관급공사에 일본인들이 수주를 독점하고 필요한 자금은 조선상업은행 및 여타 은행에서 조달하였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근대 자본주의의 태동은 대한제국에서 시작되었으며, 대한천일은행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히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는 근대 자본주의의 자생적 발전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상인들은 정부와의 공생관계로 국가권력에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식민지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고 지적한다. 대한제국의 금융 근대화를 추진했던 은행가들은 나중에 대한제국 금융기구의 식민지적 재편을 주도했고, 일제강점 이후에는 조선상업은행 및 한성은행장을 지내는 등 금융계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이처럼 식민지 지배체제 하에서 상인들이 은행가로 전환한 것은 한국에서 최초의 부르주아 등장을 의미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한국 근대 자본주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한제국의 유산인 그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에 편승하여 출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국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부터 뒤틀린 출발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글쓴이 : 크리스 웨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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