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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책]현대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실존의 문제를 촐라체의 빙벽에서 자극하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1. 31. 15:34

 

<현대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실존의 문제를 촐라체의 빙벽에서 자극하다.> (박범신의 “촐라체”를 읽고)



 소설 속 세 화자는 촐라체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실존적 물음을 직시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오늘의 발버둥이었고 과거의 일그러진 기억과의 화해였다.


 저자는 이 책을 산악 소설이 아닌 실존적 소설로 봐달라고 했다. 또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소설이라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길은 결국 두 갈래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나의 길은 경쟁에 가위눌리면서 자본주의적 소비문화를 허겁지겁 쫓아가는 길일 것이고, 다른 하나의 길은 안락한 일상을 버릴지라도 불멸에의 영성을 따라 이상을 버리지 않고 나아가는 길일 것이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본문 327)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경쟁에 가위눌리면서 자본주의적 소비문화를 허겁지겁 쫓아가는 길’을 걷고 있다. 맞다.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적 소비문화가 강제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슬픈 건 자본주의적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무비판적 동의의 삶으로 젊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 또한 목숨을 건 촐라체 등반을 감행하고 있다. 지독히 좁은 취업 구멍 속을 통과하기 위해 역겨운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의 등반 역시 위태롭고 치열하며 때로는 감동적이다. 다만 슬픈 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촐라체를 등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강요에 의해 기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못 배운 부모님의 설움에서 비롯된 강제 때문일 수도 있고 명품 구두를 요구하는 여자 친구의 강요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의 안정된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거세되는 건 꿈이며 실존적 물음들이다.


 이 소설은 바닥의 언저리에서 쳐 올라오는 젊은이들의 치열한 실존적 싸움을 촐라체 빙벽에서 보여준다. 그리고 제시한다. 촐라체는 어디든 존재하며 너와 나의 가슴 속 역시 그러하며, 그런 촐라체가 품는 수많은 위험을 안고서 치고 올라가야 한다고. 정상 정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존재 의문을, 카르마를 이루기 위해서. 정상 위는 다만 허공일 뿐, 그 어떤 산도 허공 아래 존재할 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실체, 스스로의 자각이라는 것이라고.


 박범신이 제시한 메시지는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그 제시의 방법인 소설은 내 마음을 그다지 울리지 못했다. 처음에는 생소했던 등반 전문 용어의 낯설음 때문으로 치부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노골적인 작위성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지나친 의욕과 메시지적 강박관념 때문에 너무 드라마틱한 장면이 난발한다. 이를테면 하영교가 추락할 때 운 좋게 살아남게 되는 그 과정이라든지 혹은 줄이 끊기며 추락하는 그 순간이 그의 형 박상민이 칼을 내 던진 타이밍과 동일시되는 점 등 소설 구석구석에 우연의 장면이 지나치게 많다. 또한 상민과 영교의 낯간지러운 화해의 과정은 너무 어색했다. 작가의 지나친 개입이 들통이나 캐릭터가 스스로 살아 움직이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세 명의 화자가 돌아가면서 소설을 전개하고 있기에 자신의 속마음이 속속들이 들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 거리감의 조절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느껴졌다.


 박범신의 신작 “촐라체”는 젊은이를 위한 소설이라고 말하지만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신파극에 거부감을 느끼는 젊은 세대의 감성을 헤아리지 못한 점 등의 아쉬운 대목이 있다. 하지만 소설의 핵심 맥은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카프카가 인생을 미로 속의 자유의지로 표현했지만 이제 이 시대는 그 미로적 구조를 탈출할 상상력이 필요할 시점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젊은이의 실존적 물음을 자극하는 역할을 감당할 게기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해본다.



추천강도 ★★★


08.07.21 두괴즐


 

출처 : 두뇌를 괴롭히는 즐거움
글쓴이 : 최일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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