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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책소개> 우석훈 "직선들의 대한민국" - 환경적 감수성과 조경적 감수성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1. 31. 15:34

  2008년 6월 12일 웅진하우스 출간.

 

 

'환경감수성'은 '생태적 감수성'과 약간 다르게 사용되는 단어다. 하여튼 둘 다 환경과 생태에 대하여 '민감한 정도'를 말한다. 감정이입을 통해 '공감'하는 정도를 말한다고나 할까. 헝거포드 그룹의 '환경소양'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어린 시절의 '야외활동'이 환경감수성 함양에 결정적이라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확실히 '낭만적' 전통의 영미적 '중산층' 지식인의 '소양'중 하나인 것으로 여겨진다. 야외활동속에는 한국인에게 이제 낯설게 여겨지는 '사냥취미'도 들어 있으니 말이다. 신통한 사실은 '사냥취미'가 '사냥꾼의 합창곡 그대로 '마초주의'까지 함축한 활동임에도 '환경 감수성'에 관련되는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잊혀진 환경학적 사유의 뿌리 - 경제에 대한 반성

 

우석훈의 책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어떤 측면에서 '환경감수성'이 한국에서 '조경감수성'으로 변질 되었다는데 대한 보고서 비슷하다. '조경'은 글자 그대로 자연과 비슷하게 건축물 주변을 꾸미는 일을 말한다. 이 '조경'을 고려하여 '미리' 건축물의 실제 모습을 그려낸 그림이 '조감도'이다. 우석훈은 왜 1%의 이익을 위해 나머지 99%가 들러리 되는가 분석하다가 바로 이 '조감도'에 빨려들어가는 '미적 감수성'을 찾아냈다. 다른 것이 없다. '조감도' 하나면 한국 국민들은 껌뻑 죽는다는 것인데 바로 이 '조감도' 덕분에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대대손손' 의원을 해 올 수 있었던것 아니겠는가. 그동안은 주로 행정기관이나 00회관 등의 조감도가 주로 설득력을 발휘해 왔지만 청계천 이후 그것은 아주 왜곡된 '생태적 감수성'과 결합하여 이제 '자연형 하천'과 나아가 '대운하'와 결합해 있다. 지난 대선에서 '대운하' 조감도는 정말 엄청난 위력을 떨쳤다.

 

환경학은 사실 '경제'에 대한 반성적 사유에서 성립한 학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환경학은 기이하게도 '조경'과 결합하면서 이상하게 뒤틀려버렸다. 말하자면 '경제학'을 제쳐 둔채 하나의 '공학'처럼 정착했다는 점이다. 공학중에서 '조경'과 밀접히 연관되는 '공학'이라면 '건축공학'인데 사실 '조경학과'는 농과대학에 있었고 건축학과나 건축공학과는 드문 경우 미술대 일반적인 경우는 공과대에 있었으며 조경과 건축은 별개의 학과였다. 이 두개가 '조감도'의 구도가 변해가면서 '결합'한 셈인데 여기에 '환경대학원'의 역할이 꽤 컸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환경대학원은 굉장히 빠르게 설립됐다.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이 그 효시인데 유엔환경계획이 창립된 1973년에 설립되었으니 정말 빨랐다. 말하자면 변변한 환경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지도 않았음에도 '대학원'이 먼저 설립된 것이다. 한국인이 가진 '트랜드'에 대한 선견 같은 것일까. 1977년의 트빌리시 선언에도 한국은 대표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바로 다음 해에 자연보호헌장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실 1960년대 보존운동의 유산과 같은 흐름에 있었으니 좀 늦은 셈일까. 허나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설립은 독일이나 미국과 견주어 결코 늦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유엔인간환경회의가 1972년에 열렸고 다음에 유엔환경계획이 창설되었는데 바로 그해에 서울대는 환경대학원을 설립한 것이다. 

이 환경대학원은 이후 우리나라 환경학이나 환경공학의 '원류'가 되었다. 각 대학의 환경학과나 환경관련 학과에 거의 '주류'를 이룬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문제는 앞에서 언급했듯, 이 환경학이 미국식의 경제에 대한 통렬한 반성적 사유에서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에 대한 관심이나 사유를 삭제해 버린것처럼 보인다는데 있다. 오히려 '약한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 '인공재'와 '환경재'가 서로 '보완적 전환'이 가능하다면서 모든 환경파괴 행위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가버렸다. 대운하에 관여하는 환경학자나 환경공학자들이 그런 경우이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초기 출신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 물론 김정욱 교수 같은 경우는 전혀 아니다. '아닌' 경우도 있긴 하나 대운하에 '청사진' 그리는 사람들중 많은 듯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조감도와 '조경적 감수성'이 끼어든다.

'속류화'된 환경학적 사유와 '조경적 감수성'의 탄생 

 

문제는 바로 이런 이유로 환경적 사유가 점점 '속류화' 되어 버린다는 데 있다. 벨라미 포스터의 언급이 더 심하게 뒤틀리는 경우이다. 종말론을 설교하는 목사님처럼 엄청 대단한 '담론'으로 시작해서 뒤에 가서는 '쥐꼬리'처럼 사그라들어 버린다는 것인데 더 심하게는 '앞의 종말론'과 '뒤의 장미빛'이 어긋난다는데 있다. 대운하를 찬성하는 '환경학자'의 관점에서 그것은 장미빛이다. 간단히 경제도 살리고 환경도 문제없다는 이런 발상이다. 우석훈은 이것을 조감도의 '미학'이라고 불렀다. 탁월한 통찰인데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시절 인터넷을 떠돌던 대운하 '프리젠테이션'이 바로 '딱' 맞아 떨어지는 경우였다. 물론 서울시장 시절에는 청계천 조감도가 엄청 위력을 떨쳤고 당연히 청계천 주변의 부동산은 폭등했다. 생태적 감수성을 '부동산 폭등'에 결합시킨 이런 '조감도' 또는 '조경'의 미학적 감수성이란 정말 대단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바로 이런 '감수성'의 한복판에 있다. 따라서 이 진영에 참여한 '환경학자'란 바로 그와 동일한 감수성을 갖춘 사람들이 된다. 이 사람들에게 환경학이란 그저 '트렌드' 중의 하나에 불과했던 셈이다. 

 사실 서양의 생태주의자들에게 '환경학' 또는 '환경론' 나아가 '생태주의' 담론이란 그들 사상의 '원류' 비슷했다. 이런 흐름속에는 가령 '사냥꾼의 합창'에 나오는 '남자의 즐거움 장부의 즐거움' '팔과 다리는 튼튼하게 되어' 등등의 '야생 취미'도 들어 있다. 이른 바 '환경소양'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중에 '시에라 클럽'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냥꾼 협회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연구 대상의 '기이한 선정'은 바로 이 사람들의 환경소양이 '높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루어진 일인데 그 정도로, 야생에서의 사냥, 캠핑, 등산, 암벽타기, 보트타기 이런 것도 '환경감수성'의 영역에 포함시켜 사고했던 셈이다. 이것은 정확히 미국의 '중산층' 중 '일각'의 '정서'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환경감수성 연구란 미국에서 특히 '일부' '컨트리'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환경관련 단체 구성원이나 그와 유사한 단체 구성원을 이루는 '중산층 일각'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셈이며 따라서 그 '한계'란 매우 분명하다. 

그리하여 이제 환경대학원 나온 사람들의 환경감수성이 무엇인지 살펴볼 차례인데 나는 그것을 간단히 '조감도 감수성'이나 '조경적 감수성'이라고 정리해볼까 한다. 그렇지 않다면야 조령에 '스카이 라인' 그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환경학자' 딱지를 달고 있을리 없다. '건축'도 아닌데 불구하고 그러하다. 한국에서도 매우 유사하게 '시골' 출신의 '전원'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환경학이나 환경관련 전공을 하는 것 처럼 여겨지는데 특이한 사실은 '조경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언제든' 대운하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사실 1990년대 초반 출범한 한국의 환경운동은 2000년 경에 이르러 '점차' 한계를 노정하게 된다. 그 까닭은 환경운동이 본질적으로 중산층 시민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하여 새만금과 같은 사업에 대하여 '생태주의'적 관점에서는 매우 '근본적'이지만 파병문제 같은데서는 또 매우 '유연한' 중간층 시민운동 관점의 환경운동이 성립했다. 참고로 가령 독일에서 파병문제에 녹색당이 근본적이고 사회민주당이 '현실적'이었다. 한국 환경운동의 근본 생태주의 지향과 정치적 포지션의 현실주의 사이에 내재된 긴장과 '모순'적 균열탓에 지금은 명백히 쇠퇴중이다. 게다가 요즘 와서는 점점 더 '변질'이 나타나는데 특히 기업과 정부 양쪽에서 '펀딩'을 받게 되면서 더욱 그러하다. 요컨대 풀뿌리 운동이 아닌 일종의 제도화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는데 이는 미국도 그랬다. 1970년 태동된 미국의 중앙집중 환경운동이 기업과 정부의 펀딩을 받는 반관반민으로 전락하면서 제도화되고 운동성을 잃어갔듯, 그보다 약 15년에서 20년 늦게 태동한 한국 환경운동도 마찬가지 경로를 걷는 듯 하다. 허나 미국에서 중앙집중 환경운동이 쇠퇴한 자리를 '환경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와 '환경정의 실현'을 지향으로 설정하는 
지역중심 풀뿌리 환경운동이 대신해 갔듯이 한국도 '지율스님' 단식을 계기로 풀뿌리적 근본 생태주의 운동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환경교육도 이런 흐름속으로 점점 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한국도 미국환경운동이나 환경교육과 매우 유사한 방향으로 움직여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경제'에 대한 맹점은 점점 심각한 수준이다. 환경교육이나 환경운동 양자 공히 마찬가지. '경제'에 대한 사유가 결여되었을때는 가령 '독일식' 지속가능발전이 영미적 석유패권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이런 것을 알아내기 어렵다. 환경학은 스스로 '간학문적'이니 '통합학문적'이니 내세우면서도 경제학이나 사회학에는 거의 '문외한' 수준으로 남아 있으니 대체 어찌된 셈일까?

경제학적 사유와 사회과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환경학 - 생태적 감수성의 온당한 복원 

환경학은 간단히, 제국주의와 식민지 개척, 과학기술, 시장원리 그리고 '자본주의'에 기반한 서구의 산업에 대한 '위기의식'과 '반성적 사유'에서 출현했다. 따라서 사회학이나 경제학과 매우 친화적일 수 밖에 없으며 역으로 경제학 또는 경제에 대한 '사유'가 결여된 환경학이란 그저 '트렌드'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그렇게 가고 있다. 당장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만도 그러하다. 여기 얽힌 문제는 요컨대 위 언급한 모든 범주가 망라되어 있다.

 

미국에서의 공장식 축산이란 일종의 '플랜테이션 농장'과 유사하지 않는가. '플랜테이션'은 유럽인들이 자국의 식량 또는 기호 농산물 재배를 위해 식민지를 활용하는 방식의 '고투입 농업'의 원류였다. 미국의 농업은 '흑인노예'를 '기계화 영농'으로 바꾸었을 뿐 고투입 농업임에 틀림없다. 녹색평론 이번호에 나온 글 그대로 이제는 유엔식량농업기구도 소농에 의한 자연적 순환을 따르는 유기농업의 생산력이 더 높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하다면 환경학적 사유는 이런 방향으로까지 진전되어 나가야 맞다. 오직 녹색평론에서만 이런 사유를 결코 '놓지' 않는다. 사회과학적 사유를 놓쳐버린 환경학이나 생태주의는 '전원' 생활을 동경하는 중산층 지식인들의 낭만적 급진주의로 끝나기 십상이다. 여기 약지속가능성까지 결합하게 되면 최악이 되며 '대운하'에 대해 찬성하는 환경학자의 태도는 이로부터 비롯된다. 요컨대 경제에 대한 반성적 사유가 완전히 결여된 결과이다.  

출처 :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글쓴이 : 사띠현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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