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목사님 당시 교회 모습
1939년7월14일 부임해서 1950년9월28일 순교 하실 때까지의 애양원교회의 외부모습이다. 현 애양원 교회의 모습은 손 목사님 순교 이후에 종탑 부분과 강단 부분이 증축되었다.
1939년7월14일 부임당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당시에는 손목사님의 아버지 손종일장로님도 함께 계셨다. 애양원 안에는 환우들만 살 수 있었으므로 목사님 사택은 병원직원들이 사는 건강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 소원이 자신도 병이 들어서 애양원 안에 들어 가서 환우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당시 예배드리던 모습
손양원목사와 당회원들
손양원목사님 당시 애양원교회의 당회원들이다.지금 생존해 계신분은 한분도 안계신다. 사진에 신풍교회당이라고 나와 있는데 애양원교회는 1909년 4월25일 광주 봉선리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이름이 설립당시에는 봉선리 교회였다. 현재의 애양원으로 1925년에 이주한 이후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신풍교회당이라 불렀다. 1936년에 애양원교회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애양원이라는 이름은 손목사님 부임전에 바꾸어진 이름으로 손양원 목사와는 상관이 없는 이름이다.그 이후 1982년이 성산교회로 바뀌어서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성산교회이다.
일제의 위협
안재선과 함께 부흥회 인도
서울 남대문교회 부흥집회시 안재선과 함께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함께 다니는 것이 재선이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쳐서
후에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애양원 정문에 선 손양원목사
손양원목사는 별명이 삼경목사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세 번 놀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외모가 멋지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 외모가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서 첫 번째로 놀라고, 다음으로 그 조그마한 체구에 품어져 나오는 소리에 놀라고, 세 번째는 설교말씀에 놀란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삼경목사다.
애양원 원장 손양원 목사와 애양원 직원들 , 1945.9.10- 10.15 까지 임시로 원장을 겸임 하였다.
한센환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시는 손양원 목사
한센병에 걸리면 감각 기능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발이나 손에 상처가 나도 아픈줄을 모른다. 뜨거운 물에 넣어도 뜨거운줄을 모른다. 손목사님이 부산 감만동(戡蠻洞)에서 목회를 하실 때 한 한센환우가 발에 커다란 상처가 났는데 보니 상처가 아주 깊어 그대로 두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님이 그 환우의 깊은 상처를 입으로 빨아 치료를 해주고 있는 모습이다. 손목사님의 치료로 상처가 나아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다한다.
손양원 목사(왼쪽에서 2번째)와 김구 선생(왼쪽에서 3번째)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에 손 목사를 교장으로 초대하였으나 " 나는 환우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 고
거절하였다.
성산 초등학교 졸업생인 3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나환자를 위해 1915년에 설립한 학교로 당시는 봉선리 국민학교였으며 1971년 폐교되었다. 또한 1946.9.8. 나환자를 위한 성산중학교를 개교 하였고 1971년 폐교되었다.
한성신학교 옛 건물 사진
1955.4.12 애양원은 나환자를 위한 대학과정 한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2년에 폐교되었다.
한성 신학교 학적부
일제 검사에게 취조받는 손양원 목사, 사랑의 원자탄 영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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