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예루살렘교회 강화중앙교회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항에 첫 발을 내 디딘 후 만 7년째 되는 1892년 가을, 제물포구역 책임자로 있던 존스(G. H. Jones, 趙元時) 선교사가 강화선교를 위해 강화읍 갑곶나루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강화남문을 통하여 강화성(江華城)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려던 계획이 강화유수의 완강한 거절로 입성하지 못하고 갑곶나루에서 며칠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인천으로 되돌아갔다.
다음해 1893년에 인천에서 술장사를 하면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다니던 강화 서사면 시루미 (현 양사면 교산리 송산마을)출신 이승환이 고향에 돌아와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강화복음 전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에 힘입어 존스는 제물포 교인 이명숙(李明淑)을 강화전도인으로 파송하여 이승환 댁을 거점으로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강화의 첫 감리교 신앙공동체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교항마을의 초시 김상임(金商壬)과 그의 가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교항교회가 설립되었고, 3년 후인 1896년에 이웃 면 송해면 상도리 홍의마을의 한학자 박능일(朴能一)이 자기 집에서 서당학생 20여명과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홍의교회를 설립하여 강화의 두 번째 교회가 탄생되었다. 1900년 9월 1일,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박성일․허진일․김봉일 등에 의해 강화읍 천교하(川橋下, 강화읍 신문리)의 여섯 칸 반짜리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서 강화중앙교회가 설립되었다.
다음해 4월 존스 선교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교회를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소요된 상당한 금액은 존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매리에타(Marietta)에 살고 있던 교인, 찰스 오토(Charless Otto)가 보내 준 기금으로 충당되었다. 이로서 8년 전 존스가 강화성에 입성하려던 꿈을 강화토착인들에 의해 이루게 되었다. 이 교회는 설립 8개월 만에 강화에서 가장 넓고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강화 선교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후 한옥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들이 늘어나자 1914년에 다시 교인들의 정성어린 헌금과 미국 선교회의 도움으로 서양식 모양의 새 교회를 건축하였다. 이 교회당은 여러 차례 개축하며 사용하여 오다가 2000년에 헐고 1,800명이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규모의 크고 아름다운 “선교100주년 기념성전”을 건축․봉헌하였다. 강화중앙교회는 1세기 동안 강화지역 복음화의 그루터기의 역할을 하여 왔다.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 교회를 직접 개척하거나 설립되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에 힘입어서 강화지역에는 2005년 현재 119개의 감리교회와 감리교인 20,671명으로 전체 개신교회 177개의 67.2%와 개신교 교인 24,553명의 84.2%를 찾지 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명실공이 강화의 예루살렘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강화중앙교회는 교육선교를 위해 1901년 4월에 신교육 기관인 교회부설로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였으며, 1902년에 또 여학교인 “합일여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후 두 학교는 하나의 학교로 통합되었는데,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이 학교는 일제치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한국 개화의 산실이 되어 왔다.
강화중앙교회는 복음, 민족, 교회가 함께 어우러지며 발전하는 민족과 지역을 구원한 구심점이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이동휘(李東輝)권사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의 보창학교, 유경근 속장(독립운동가)의 교회지도자와 강화중앙교회가 함께 추진한 민족교육운동은 민중계몽과 독립사상으로 이어졌다. 1907년 한국군 해산과 관련되어 발생한 의병운동 때 일제 만행으로 빚어진 김동수 권사 삼형제의 순국사건, 1919년 3․1만세운동 때 김광국 목사, 김유의 전도부인을 비롯한 교인들이 앞장선 만세시위, 조구원, 조봉암(초대 농림부장관) 등 교회청년들이 목숨 걸고 투쟁한 독립운동 등 일제 치하에서 갖은 탄압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이 교회가 선교초기부터 교인들이 실천적 신앙을 바탕으로 지역복음화를 주도하였고, 민족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중앙교회는 한국전쟁 때에도 전화의 폐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방주역할을 하였다. 바다건너 북한에서 피난민들의 안식처였으며, 전후 피폐한 농촌을 회복시키기 위해 복민의숙(福民儀宿, 후에 복음학원 강화실업고등기술학교로 발전됨)이란 기독교 농민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였고, 기독병원을 설립하여 질병으로 고통 받는 교인들을 치료하며 불신자에게는 전도의 방편으로 삼기도하였다. 지난 1세기 동안 강화역사의 중심에서 지역의 복음화, 민족운동과 사회개혁을 주도해 온 강화중앙교회는 선교2세기를 맞으면서 선조들이 쌓은 믿음의 토대를 바탕으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새롭게 탈바꿈 하고 있다.
1994년 이민구 목사님이 28대 담임자로 부임하면서 “성령충만 만민선교, 만사형통하는 교회”라는 표어를 걸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정신으로 21세기 선교비젼을 실현하기 위해 온힘을 쏟고 있으며, 2,000여 성도가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강화중앙교회는 20여개의 국내 미자립교회 및 단체에 선교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해외선교에도 관심을 두어 영국에 지교회 킹스턴중앙교회를 두고 있다. 필리핀, 몽골, 중국 등의 한인교회와 해외선교사를 돕고 있다. 학원선교를 위해 강화읍에 소재하고 있는 덕신고등학교를 감리교 소속학교로 지정하고 기독교신앙 담당교사를 파송하는 한편 학교운영비로 매년 4,000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이 밖에도 지역선교를 위해 결식자 점심급식사업, 경로위안잔치, 환경미화원 위로연, 연간 2,000만원 상당의 장학금 지급, 침술선교봉사활동, 웨슬리 사회봉사단 활동, 불우이웃돕기 행사 등 사회를 향한 다양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민구 담임목사는 이 교회가 지난 1세기 동안 강화 선교의 중심역할을 하며 수많은 감리교회 지도자를 배출한 교회답게 선교 2세기를 맞는 현재에 있어서도 기독교인 수가 37.7%를 점유하고 있는 강화지역을 완전한 성시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고 있다. 또한 100여 년 전 서양선교사들이 우리교회에 도움을 주었던 것과 같이 복음의 빚진 교회로서 해외선교와 북한선교 활동을 강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글 이은용 전화 : 011-591-6305 , E-mail : silverd2@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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