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신과 학생들
일제는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 열기를 이미 경험한 터였다. 결국 일제의 조치를 따르지 않으면 학원이 폐쇄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설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떠나지 않겠다는 아이들을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떠나 보내며 해가 지도록 아이들과 대성통곡을 하여야 했고, 일경이 오지 않을까 눈치를 봐가며 우리의 말과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설움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이런 모진 탄압을 견뎌내기 위해 오히려 자신에게 더욱 채찍질을 해 나갔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쉴새 없이 가르치노라면 목이 부어오르고 팔다리가 쑤셔대지만, 밤이면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에 서곤 하였다. 또 농번기 때마다 손수 마을 사람들의 논밭일을 돕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학이라 해서 쉴 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천곡을 중심으로 해서 이웃에 흩어진 마을과 교회를 찾아다니며 단기 교육을 시키곤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힘은 그녀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오는 힘이었으며, 교육을 통해서 민족을 일으키고자 한 그녀의 민족신앙에서 온 것이 분명할 것이다. 1934년 3월 최용신은 좀더 신학적인 이론 수업을 쌓기 위해서 일본의 고베여자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은 자신의 오빠와 동생이 공부하고 있었고 어린 시절 부모에 의해 정혼했던 약혼자, 김학준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수학했던 고베 여자신학교(현 세화대학교) 자치회 기록부(1934년 4월 27일)는 당시의 최용신의 심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저는 조선에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사명감에 불타 농촌전도에 들어갔는데,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다시 학교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들어오고 보니 그 희망이 이루어져 현재 대단히 기쁩니다.”(“최용신 양의 신앙과 사업”의 저자 홍석창 목사가 84년 도일해서 확인)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3년간이나 중단했던 신학공부를 그것도 이국땅 이국인 사이에서 쫓아가고자 너무 무리해서 공부했던지 덜컥 병이 나고 만 것이다. 처음엔 다리가 붓고 몸이 조금 피곤한 정도였으나 차츰 그 부기가 더해갔고 나중엔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아마 그것은 3년간의 힘들고 고된 농촌사업에 지치고 지친 후유증으로 온 것일 게다. 최용신은 애써 준비해 온 유학의 길을 도중 하차해야 하는 아픔을 간직한 채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은 최용신이 공부를 도중에 하차하고 만 것이다. 최용신은 먼저 고향에 내려가 건강을 회복한 다음 다시 천곡으로 갈려고 생각하였으나 천곡 사람들이 “아파서 드러누워도 좋으니 제발 천곡으로 오라”고 애원하는 통에 그녀는 제 2의 고향인 천곡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천곡 사람들의 기쁨은 대단하였으며 그들은 곧 바로 그녀의 완쾌를 위한 기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누구라 할 것 없이 각자가 좋다는 약을 다 구해 드렸고, 전보다 더 알뜰히 보살펴 드렸다. 이런 정성의 손길로 인해서 그녀의 병세는 차츰 호전되어 갔다. 몸이 좀 회복되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일을 위해 다시 일어섰다. 워낙 책임감이 강하고 부지런한 성품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천곡을 위해서 전보다 더욱 열심히 뛰어 다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년 전부터 원조해 주던 YWCA의 보조가 1년 전에 절반으로 삭감되더니 1934년 10월에는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학원운영에 큰 타격을 주어 그 아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최용신의 천곡학원, 혜촌 김학수 화백 그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최용신과 개미저축회 회원
최용신은 이 절박한 상황에서 당시의 여론(女論)이라는 여성잡지에 글을 기고하여 호소하였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의 현상을 여러분 앞에 내어놓고 싶습니다. 내가 사는 이 촌은 우리 조선에 있어서 두메라고 부를 만한 벽촌은 아니외다. 서울서 멀지 않은 서해안의 작은 두메 산골짝이랍니다. 이 촌을 가리켜 근방에서는 교촌(敎村)이라 부르니 이 까닭은 이곳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20여 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학습강습소가 마을 가운데에 제일 높은 곳에 있는데 그래서 이 촌을 가리켜 문화촌이라고까지 부릅니다. 이 강습소에는 근방 십여 동네의 아동이 모여 오는데 그 수가 백여 명이나 됩니다. 이 많은 아동들이나 가정 정도를 말씀하여 보면, 호수가 1,400호 되니 그 중에 1년 수입 150원 이하의 호수가 910호나 됩니다. 특히 빈한한 지방이므로 이 강습소는 그 대중을 가르치는 데에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강습소는 이 지방의 중요한 기관이나 우리는 이것도 우리 농민들의 손으로 독립경영을 하지 못하고 사업가들의 후원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문화촌이라는 이름을 듣고 교촌이라는 칭호를 받는 이 촌중에 비통한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땅을 울리오니 목석이 아니고서야 어찌 볼 수 있사오리까? 이 비통한 울음은 다름이 아니오라 우리의 불쌍한 어린이들이 배우고 가르치는 강습소가 폐쇄된다는 원통한 울음이었습니다. 사업가의 열성은 경제적 제한이 있어 이제부터는 후원의 손을 끊는다는 소식이 들림에 우리들은 낙망의 눈물, 비통한 울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르칠 줄 알고 배울 줄도 알건마는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습니다. 배움에 굶주린 우리 농촌 어린이들은 장차 어디로 가며 가르쳐 주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어이 하오리까? 우리 농민의 호소를 어찌 다 기필하오리까? 뜻있는 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어 주소서.”(1934년 10월 30일)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운 호소를 했음에도 그들은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최용신은 막다른 길에서 발벗고 나섰다. 여러 친지들이며 먼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호소하여 어려운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또다시 시련이 닥쳐온 것이다. 다시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옛날의 증세에다 식욕까지 떨어져 음식조차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회복되리라 생각하고 약을 먹어가며 수업을 강행하였다. 그때의 사정을 천곡교회 홍찬의 장로는(88년 당시 76세) 이렇게 회상한다. “그 와중에서도 선생님은 학원의 떨어진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운동회까지 개최하였고, 또 수업도 계속해 나가셨지요. 도저히 서서 가르칠 형편이 못되면 앉아서라도 수업을 강행하셨습니다. 보다 못해 우리들이 좀 쉬라고 권유하면, ‘배우러 온 학생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시곤 했죠.”
1930년대 샘골 마을지도
최용신이 거주하던 4칸 초가
밀러 선교사가 기증한 전재풍 목사의 사택 건너방(현 태영 아파트 205동 위치)에 임시 거주하다가
샘골교회 뒤 4칸 초가로 이사, 장명덕 전도사와 함께 거주하였다.
전재풍 목사와 최용신 선생
전재풍 목사는 샘골교회 최초 담임 목회자로 1934~37년까지 시무하였다. 이전에는 순회목회자들이 샘골교회를 돌보았다.
초창기 YWCA 지도자 (1922년)
샘골파견 (1931년)
샘골강습소 낙성식 기념 (1933년)
최용신 사후 1935.3.20 제2회 천곡강습소 졸업생
최용신 사후 1935.3.20 제2회 천곡강습소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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