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지순례이야기

[스크랩] 샘골(천곡)교회, 최용신 기념관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4.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 22:00

 

최용신의 학력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연극발표회

협성여자신학교 (현 감리교신학대학)

 

최용신 협성신학교 시절 (앞줄 오른쪽) 

 

1928년 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최용신은 매우 중요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그 만남은 바로 아닌 황애덕(에스더) 교수와의 만남이다. 황에스더는 여성비밀결사체의 모체인 ‘송죽회’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이 당시 협성신학교의 농촌사업 지도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황에스더는 농촌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YMCA, YWCA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학생들에게 농촌운동에 대한 사명감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최용신은 협성신학교를 다니면서 황에스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입학한 첫 해, 황해도 수안 용현리로 황에스더와 김노득과 함께 농촌실습을 떠났다. 각종 식용품과 일용품을 가지고 긴 여행 끝에 용현리에 도착해보니 문맹과 극빈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과 함께 3개월 동안 최용신을 비롯한 세 처녀들은 글을 가르치고 학예회를 열면서 동고동락했다. 이곳에서 최용신은 관념적으로 생각만했던 농촌운동을 실제적으로 실습하고 농촌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체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다음해 포항 옥마동에서의 농촌실습은 자신의 전 생애를 농촌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게 하였다. 졸업을 앞둔 1931년 10월, 최용신은 당시 수원지방의 밀러 여선교사의 요청과 YWCA의 지원으로 경기도 반월군 천곡(샘골)에 파송을 받아가게 된다. 이미 천곡은 교회가 세워져 부흥일로에 있었으며 선임자인 장명덕 전도사에 의해 학원도 설립되어 있었다. 

 

최용신기념관 소개 비디오

 

최용신 선생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崔昌熙씨 2남 3녀 중 차녀로 출생(1909년 8월 12일)한 최 용신은 일찍부터 가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928년 3월, 감리교단이 설립한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19세)를 졸업하고 서울여자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를 입학한 최 용신은 일찍부터? 농촌계몽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최용신은 루씨여자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저의 희망은 농촌에 들어가 농촌계몽에 일생을 바치는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고 한다. 이러한 그녀의 사상은 그녀가 졸업시에 쓴 “교문에서 농촌으로”라는 글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 오늘 교육받은 여성들이 복더기 쌓인 농촌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크게 유감된 바이다. 여성도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 농촌으로 하여금 어두움 속에서 걸어 나오게 못한다면, 이 사회는 어느 때까지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유달영, “최용신 전기-눈 속에 피는 나무”, 중앙출판공사, 1978년, 255-257쪽)?

 

 

최용신 선생     (출처- http://blog.naver.com/tksqksghk46)

 

1928년 조선일보에 게제된 최용신의 글          (출처- http://sg21.org/html/main/main.htm)

 

여러 가지로 일하는 여건이 좋은 천곡에서 최용신은 마을을 순회하면서 농민들의 생활상태와 교육에 대한 열의를 타진하면서 그가 하고자 하는 교육사업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막상 마을을 다니면서 학원의 신입생을 모집해보니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사람들이 일찍 기독교를 믿어 생각은 많이 깨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파란 처녀의 교육사업에 전적으로 밀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최용신은 만나는 사람마다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하고 권면하면, 마을사람들은 “돈이 없어요, 월사금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실망치 않고 최용신은 “공부해서 잘살아 봅시다”하면서 학생들을 모집한 결과 40명이 되었다. 이들에게 한글, 산수, 재봉, 성서 등을 가르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육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저녁에는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 그는 하루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오전반이 끝나면, 곧 오후반을 가르치고, 이것이 끝나면 가정순회지도, 개인전도로 다니며, 밤에는 다시 야학을 인도하였다. 야학이 끝나면 한밤중에 그 동안 미처 돌아보지 못한 동네를 지도하고 오면 첫 새벽이 되는 것이었다. 최용신의 이러한 열심과 헌신적 행동은 마을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헌신으로 인해, 최용신과 샘골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샘골의 모든 일은 최용신의 한마디로 주저없이 움직이게 되었고, 샘골의 어려운 모든 일은 최용신에게로 왔다. 닭을 잡아도,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와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대접했다. 완전한 신뢰였다. 점차 천곡학원이 마을사람들의 신임을 얻었고 학생수는 증가하여 6칸의 예배당이 비좁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학원을 인가하여 강습소로 개축할 계획을 세워 추진하였다. 정식 학원 설립의 꿈을 키우던 최 용신은 교회를 중심으로 “천곡 학술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였다.

 

최용신은 동네 유지들을 찾아 다니면서 “짐승을 키우는 것보다는 사람을 키우는 일이 더 소중하지 않느냐”며 설득 작업을 벌여 기금을 모아갔다. 그녀는 기금을 모음과 동시에 건축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나서서 돌을 나르고 새끼를 꼬고 터를 닦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일치 단결하여 학교를 세워 나간지 한달 남짓한 1932년 10월 27일 정초식을 거행하였고, 추운 겨울에도 쉬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여 드디어 1933년 1월 15일 낙성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러 천곡학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933년 봄이 되어 학생을 새로 모집하니, 예년보다 훨씬 많은 110명이나 몰려오게 되었다.

 

새로 지은 교사마저도 턱없이 모자랄 정도였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은 반드시 예배로부터 시작하여 보통 6시간 또는 7시간 계속되었다. 보통학교 6년 과정을 단 2년 만에 마치는 것이라 조금은 벅찬 과정이었다. 그러나 보통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전부 다 가르쳤는데, 특히 그녀는 한글, 역사, 성경 등의 과목에 중점을 두고 가르쳤다. 그녀는 이러한 과목을 통해서 신앙과 애국심을 고취시켜주기 위해서 최선을 노력을 다하여 나간 것이다. 예를 들어, 동화시간에는 모세, 다윗, 에스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자수시간에는 한국지도를 무궁화 꽃으로 꾸미게끔 하였고, “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 반만년”이라는 노래를 가르침으로써 민족교육과 아울러 민족신앙을 심어나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천곡학원은 점점 일제의 미움을 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최용신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서 민족신앙의 민족교육을 계속해나가자, 급기야 일제는 갖은 탄압을 가해오기 시작하였다. 학생수가 시설에 비해서 너무 많으므로 초과 학생을 돌려보내라느니, 조선의 국어와 역사는 가르치지 말라느니 하면서 갖은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학원의 시설미비라는 명목으로 천곡학원의 학생들을 다른 곳으로 빼내는 등 분열정책을 일삼았다. 일제는 사사건건 천곡학원을 운영하는 최용신을 불러댔다. 최용신이 기독교인이며 신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는 점, 역사와 한글,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점 등은 일제가 긴장하는 점이었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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