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교산교회, 존스 기념예배당과 옛 교회 (박물관 예정)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워 놓았고, 1892년에 그의 후임으로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해 왔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그 즉시 실천에 옮겨 강화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리 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장조계를 조직한 바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계도 실패하고 교인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50명의 계원중 유독 이승환이라는 성도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이승환 성도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강화 선교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올 수 있었다. 우선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최초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 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의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말에는 존스와 스크랜톤(W.B.Screanton, 시란돈 施蘭敦) 두 선교사가 이미 강화교산교회에 와서 유숙한 바 있고, 내리교회 백헬란 전도사는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을 교회 창립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창립된 다음 해인 1894년에는 이미 교항리에 초가 12간을 구입해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다. 이승환씨는 그후 매서인이 되어 전도에 힘쓰다가 1898년에는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강화 교산교회 계삭회 소속으로 권사 직분을 받는다. 술집 주인 이승환이 변하여 어엿한 권사님으로 존경받게 된 것이다. 이승환 권사는 더욱 전도에 열중했다. 주로 강화, 인천, 옹진지역을 중심으로 전도하다가 1901년 이후부터는 주로 영종, 삼목, 용유등 인근 도서를 돌면서 몇 개의 교회를 세운다음 1908년경에 영국 성서공회를 통해 이민해 가고 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하튼 강화 지역 교회들은 이승환 권사를 통해 복음이 최초로 전래되었다는 데서 그의 공로를 오래도록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존스 기념예배당과 옛 교회 (박물관 예정)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봉헌예배
구 교회
구 교회
구 교회
옛 교회 종탑
구 교회 내부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
강화의 양반 중 선상세례의 과정에 감명을 받은 이가 있었다. 벼슬을 하지 않고 초시 신분으로 교항(현 교산)에 서당을 차려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김상임이 바로 그다. 김초시는 이승환 모자에 대한 존스 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을 본 이후 한문성경을 전해받고 읽은 가운데, 자신이 찾던 ‘정감록’의 ‘십승지지’란 주요 비결이 바로 성경의 ‘십자가지도’ 임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한다. 이후 김상임이 마을의 가신과 산당을 불사르고, 말씀 공부에 집중한 결과 교산교회 신앙공동체의 교인 수가 급증하게 된다. 서민층 일색이던 신앙공동체에 양반층이 합세하며 강화교산교회는 복음을 전 지역으로 확산시키게 된다.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의 배려로 인천의 신학회와 평양의 신학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02년 4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감리회의 한국인 3대 목사후보가 됐으나, 목사안수를 몇 달 앞두고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의 심방을 갖다가 감염돼 55세를 일기로 소천한다. 이후 교산교회 성도들은 김상임을 강화의 바울로 부르며 그의 신앙의 길을 따르며, 연이어 홍의교회(1896)를 거쳐 고부교회(1897) 상도교회(1899) 등 강화 전 지역의 교회개척을 위해 헌신하며 강화 어머니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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