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스 선교사 (조원시 선교사)
조원시 목사의 노년기 모습
김찬희 박사가 입수, 지난 7월18일 인천내리교회에서 열린 '내리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공개 했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조원시 (존스) 목사는 1888년 5월에 약관 20세의 나이로 선교사로 내한하여 약 5년간 배재학당에서 교편도 잡고 문서출판 사업도 하다가 1892년부터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아펜젤러가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조원시 목사는 그 터 위에 전도와 교육 전반에 걸쳐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은 내리의 아버지라 할만한 분이다. 그는 1892년에 한국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했고 강화, 연안, 해주, 남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고 1894년에는 한국인 자력으로 교회당을 건축 봉헌했으며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조직하여 이동신학교를 개설했고 1901년 성탄절에는 내동 현 위치에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지었고 교인 다수가 하와이로 이민함에 따라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에 파송하기도 했다. 한국 교회 찬송가 보급에도 공한한 그는 그 후 서울에서 신학월보를 창간하고 The Korea Review를 편집발간하였고 서울 YMCA 창립에 공헌했으며 1905년에는 초대 신학당 (현 감신대) 당장에 취임하였다. 조원시 목사는 1919년 5월 뉴욕에서 51세로 별세했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워 놓았고, 1892년에 그의 후임으로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해 왔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그 즉시 실천에 옮겨 강화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리 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장조계를 조직한 바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계도 실패하고 교인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50명의 계원중 유독 이승환이라는 성도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이승환 성도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강화 선교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올 수 있었다. 우선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최초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 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의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말에는 존스와 스크랜톤(W.B.Screanton, 시란돈 施蘭敦) 두 선교사가 이미 강화교산교회에 와서 유숙한 바 있고, 내리교회 백헬란 전도사는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을 교회 창립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존스 선교사 (조원시 선교사) 가족, 1895년 출생한 장녀 캐서린과 부부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1905년 하와이 이민을 방문한 존스 목사내외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로 인천 영화여학교 설립자이다.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 82세때 모습
선상세례가 있었던 장소 (출처- http://www.kyosan.zc.bz/)
미 감리회 소속으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한국을 찾은 존스 선교사는 제물포지방 감리사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에 능통하여 한국어사전 편찬, 한국 역사와 문학, 철학과 종교 분야에 관해서도 깊이 있는 저술을 남겼다. 강화지방 선교역사는 존스 선교사와 함께 그에게 복음을 전파 받은 강화 출신의 주막집 주인 이승환과 관련된다.
본인의 직업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례를 받지 못하던 이승환이 존스에게 강화에 살고 있는 모친의 세례를 부탁했던 것. 지역 유림들의 반대로 존스 선교사가 강화에 들어오지 못하자, 갯벌에 정박 중인 배에서 한국 옷을 입고 기다리던 존스에게 한 밤 중에 모친을 등에 업고 찾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승환과 모친이 함께 세례를 받게 된다. 이 장면을 헤스(M.Hess)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난폭한 반대로 세례예식은 마을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존스 박사가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은빛 찬란한 달밤에 한 노파의 기쁨의 잔이 넘쳤으니, 이는 죄 씻음 받은 기쁨의 잔이었다. 그녀는 강화의 겨자씨로 불리었다.”
선상세례가 있었던 장소
강화 복음의 씨앗이 되는 이승환의 집터
제물포에서 믿기 시작하여 고향인 서사면 증산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존스에게 선상세례를 받은 이승환은 과연 강화 선교의 '발판'이었다. 존스는 아직은 선교사에게 문을 열지 않는 강화에 제물포교인 이명숙을 전도인으로 삼아 파송하였으며, 이명숙은 증산동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강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강화의 첫 감리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되었다. 바로 이것이 '서사교회'(西寺敎會), '교항교회'(橋項敎會),'교산교회'(橋山敎會),'양사중앙교회'(兩寺中央敎會),등으로 불리다가 현재 '강화교산교회'(江華橋山敎會)로 불리는 강화 첫 감리교회의 시작이다.
강화 복음의 씨앗이 되는 이승환의 집터
교산교회 두번째 예배당 터, 김상임 전도사 생가 인근이다.
교산교회 두번째 예배당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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