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테크/부자학

대만 최고의 부자이야기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3. 10. 21:42

샬롬

대만 최고의 부자이야기 입니다.

정말 글자 그대로 감동입니다.

 

9조원 기부하고 세상 떠난 대만 포모사그룹 왕융칭

때수건 하나로 30년, 딸 혼수는 면도기 하나
“돈은 하늘이 내게 잠시 빌려준 것”
소년의 바지엔 ‘중미합작(中美合作)’이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밀가루 부대를 잘라 만든 바지였기 때문이다. 걸레를 기운 듯한 윗도리에, 광목천을 꿰매 만든 가방을 들고, 맨발로 걸어온 수십리 산길이었지만 소년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제 돈을 벌 수 있다.” 밥보다 고구마 죽을 먹을 때가 더 많았던 나날, 그것도 없을 땐 물로 배를 채워야 했던 고통, 그래도 참을 수 없었을 땐 훔쳐서 먹어야 했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동생을 낳던 날, 산파도 없이 혼자 탯줄을 자르고는 곧바로 빨래를 하러 나가야 했던 어머니였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머니, 제가 돈 많이 벌어 편안히 모실게요.”

쌀집 점원으로 취직한 15세 소년은 굳게 다짐했다. 소년의 이름은 왕융칭(王永慶). 30개 계열사에 9만명 임직원을 두고 연매출 617억달러(2007년·62조원)를 올리는 대만 최대 기업 ‘포모사그룹’의 창업자다.

▲ 개인 재산 9조원을 사회에 환원한 대만 포모사 그룹 왕융칭 회장. / photo FKI 미디어
‘맨발’로 출발해 세계적 기업을 일으켜 ‘경영의 신(神)’으로 추앙 받아온 왕 회장. 지난 10월 15일 세상을 떠난 그는 약 20일 뒤인 11월 11일 세인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났다. 대만 언론이 이날 그의 유언장을 공개, 깊은 감동을 전한 것이다. 유언과 함께 왕 회장이 세상에 환원한 재산은 무려 9조원에 달했다.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누구나 재부(財富)를 바라지만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떠날 때 가지고 떠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모으는 재산은 다를지 모르지만 세상과 작별할 때는 모두 사회에 돌려줘야 하는 데엔 예외가 없다. 돈은 하늘로부터 잠시 빌린 것일 뿐이다.”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8남매 중 장남


왕융칭은 1917년 1월 18일 대만 타이베이현(臺北縣) 신디엔(新店)의 즈탄(直潭)이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부근은 자갈밭으로 소문난 황무지였다. 왕융칭 가족은 이곳에서 차(茶)를 재배했다. 왕융칭은 8남매 중 장남이었다. 부모님은 매일 새벽 4시부터 찻잎을 따서 포장한 뒤 배에 싣고 타이베이의 도매상에게 운반했다.

차 수확은 봄에서 여름까지만 이뤄졌다. 가을이 되면 차 농가는 할 일이 없었다.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부모님은 가을이 되면 나무를 베어 목탄을 만들어 팔았다.

왕융칭의 아버지는 몸이 약했다. 그래서 찻잎을 따는 일, 밀가루 부대를 염색해 차 부대로 만드는 일, 부대에 차를 담는 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의 일과는 저녁 식사가 끝나고 모두 쓰러져 잠든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고구마 줄기를 가늘게 썰어 물을 붓고 끓여 돼지 사료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돼지가 사료를 먹는 것을 본 뒤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왕융칭은 어머니의 불평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왕융칭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여동생이 태어났다. 왕융칭은 처음으로 출산을 곁에서 지켜봤다. 어머니는 산파도 없이 혼자서 힘겹게 여동생을 낳았다. 스스로 탯줄을 자르고 기진맥진해진 어머니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집 옆의 개울. 그날 중으로 빨래를 해야 했던 어머니는 찬물에 손을 담가 빨래를 한 뒤, 그날 밤까지 차를 손질했고, 돼지에게 사료를 먹인 뒤에야, 지친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왕융칭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머니는 강인한 의지력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데에 인생의 참뜻이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삶은 헛되지 않았고, 나는 영원히 내 가슴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살아가고 있다.”


첫 사업
15세 때 쌀집 점원 출발, 1년 만에 쌀가게 열어


초등학교를 졸업한 왕융칭은 15세 때 고향을 떠나 취직을 했다. 쟈이(嘉義)라는 지역의 쌀집 점원이었다. 왕융칭은 1년간 점원으로 일하면서 쌀을 들이는 법, 쌀을 고르는 법, 쌀값을 계산하는 법 등을 눈여겨봤다. ‘쌀가게를 하면 굶지는 않겠다’는 결론을 낸 그는 아버지가 빚을 내 모아준 200원으로 작은 쌀가게를 열었다. 첫 창업이었다. 이때가 1931년, 그의 나이 16세였다.

▲ 2001년 9월 방한 때 김영삼 당시 대통령 부부와 함께한 왕 회장 부부. / photo 포모사 코리아
당시 대만의 쌀가게는 쌀에 섞여 있는 돌을 골라내지 않은 채 그냥 판매했다고 한다. 왕융칭은 이 점에 착안했다. “돌 없는 쌀 팝니다”라고 크게 붙여놓은 뒤 돌을 골라내고 장사를 한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당시엔 쌀을 산 고객이 집으로 쌀을 들고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왕융칭은 이 점에도 변화를 모색, 대만 최초로 ‘쌀 배달제’를 실시했다. 왕융칭은 고객 집으로 쌀을 날라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쌀독까지 쌀 부대를 들고 가 직접 쌀을 부어줬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융칭은 고객 가정의 식구수·식사량 등을 미리 파악, 쌀이 떨어지기 2~3일 전에 ‘알아서’ 쌀을 배달해주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다. 이 같은 판매 방식은 당시로선 혁신적인 것이었다. 왕융칭의 판매 기법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실패 & 재기
전쟁통에 잇단 실패 후 낙향… 거위 키워 재기 발판


쌀가게로 돈을 번 왕융칭은 정미소로 눈을 돌렸다. ‘정미소를 차리면 이윤 폭이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는 정미소를 비켜가지 않았다. 전쟁이 격해지면서 1941년 비료 공급이 급감했고 그 결과 대만의 쌀 생산량이 크게 감소한것이다. 당시 대만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은 쌀 배급제를 강제로 실시했다. 쌀 거래량이 줄어들면서 왕융칭의 정미소는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자 왕융칭은 벽돌 사업에 주목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 노동력을 구하고 물자를 운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융칭은 사업을 접고 낙향해야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엉뚱하게도 거위였다. 당시 대만 시골에선 대부분 닭이나 거위를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먹을 것도 부족한 전쟁 통에 거위에게 제대로 된 먹이를 줄 순 없었다. 농가의 거위는 바짝 말랐고 당연히 제 값을 받을 수 없었다.

왕융칭은 인부를 동원해 수확 후 밭에 흩어져 있던 배추 뿌리와 겉껍질을 수거했다. 그리고 정미소를 찾아가 정제하고 남은 볏집과 쌀겨를 사들인 뒤 배추 겉껍질을 섞어 사료를 만들었다. 왕융칭은 농가를 찾아다니며 비쩍 마른 거위를 싼값에 대량 구매, 자신이 만든 사료를 거위에게 먹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굶주린 거위들은 앞다퉈 사료를 먹어댔고 경쟁하듯 살이 올랐으며 다른 거위들에 비해 2배 이상 높은 가격에 팔려 나갔다.


도약
플라스틱으로 성공… 30개 계열사 거느린 대만 최대 그룹으로


대만 정부는 1953년 일본 식민 통치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제1차 경제개발 4개년 계획을 세웠다. 계획 중에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타이어 공장을 세운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계획을 알게 된 왕융칭은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뛰어들었다.

왕융칭은 플라스틱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그가 갖고 있던 자료는 당시 일본의 플라스틱 한 달 생산량이 3000톤이란 것뿐이었다. 당시 대만 인구는 일본의 10분의 1이었으므로 왕융칭은 한 달에 300톤 미만을 생산한다면 큰 위험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 포모사그룹의 플라스틱 공장. / photo 포모사 코리아
1954년 3월, 38세의 왕융칭은 자기자본 50만달러에 미국 원조자금 67만달러를 합쳐 총 자본금 117만달러의 포모사 플라스틱 주식회사를 출범시켰다. 왕융칭은 플라스틱에 관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섭렵했다. 그는 플라스틱 전문가가 돼 갔지만 사업은 순탄치 못했다. 예상과 달리 플라스틱 판매량이 20톤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원인은 공급 과잉이었다. 공급이 넘칠 땐 생산을 줄여야 한다. 하지만 왕융칭은 거꾸로 생각했다. 그는 판매 부진의 원인을 비싼 가격 때문인 것으로 판단했고 가격을 낮추기 위해 오히려 생산량을 늘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판단은 정확했다. 가격을 낮추자 판매가 증가한 것이다. 왕융칭은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었고 포모사 플라스틱 주식회사는 화학섬유, 방직공장, 석유화학, 자동차, 전선, 전자, 중공업, 종합물류 등 30개 계열사를 거느린 방대한 그룹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생활철학
소문난 자린고비, 자녀 교육도 엄격… 매일 새벽 2시 기상


왕융칭은 자린고비다. 그는 양복 한 벌을 20년 이상 입었으며 목욕용 때수건 한 장을 30년간 사용했다. “국제 전화비가 아깝다”며 유학 중인 자녀에게 전화도 자주 걸지 못하게 했고 편지를 쓸 땐 앞·뒷장에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안부를 적었다. 딸의 결혼식에 “신랑에게 잘 해주라”며 혼수품으로 면도기 한 개를 준 일화는 유명하다. “한 직원이 왕 회장 집무실에 1000달러짜리 카펫을 깔았다가 해고될 뻔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왕 회장은 자기관리에도 철저했다. 그는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1시간가량 명상을 한 뒤 1시간 동안 조깅을 했다. 그는 “새벽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해서 나보고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대단할 것이 없다”며 “먹고살기 위해 새벽 2~3시에 장사를 나와야 하고 다음날 장사를 위해 그날 밤 1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드는 일을 매일 되풀이하는 상인들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매사에 철저한 그는 하지만 주변을 돕는 일에 대해선 ‘자린고비’가 아니었다. 왕 회장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떠난 아버지 왕장껑(王長庚)을 기리기 위해 1976년 20억타이완달러(약 740억원)를 쾌척해 비영리재단인 장껑기념병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땐 자신의 전 재산 9조원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유언을 남겨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자녀들을 ‘갓 태어난 병아리’에 비유했다. “스스로 모이를 쪼을 수 없는 병아리를 위해 어미닭은 쌀알을 잘게 쪼개 하나씩 입에 넣어준다. 하지만 홀로 모이를 먹게 된 병아리가 계속 어미 닭에게 무언가를 바란다면 당장 혼쭐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왕 회장은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결혼할 때까지 자녀를 봐준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자녀는 엄격하고 강인하게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왕융칭은 자식들에게 엄격한 태도를 견지했다. 영국 런던대학 화학박사인 맏아들 왕원양(王文洋)이 1980년 돌아와 가업을 이으려 했을 때 그는 “말단 사원부터 시작해 과장·조장·부장 등의 단계를 ‘남들과 똑같이’ 거치라”고 강요했다. 이후 간부로 승진한 맏아들이 결혼 문제로 의견을 달리하며 우유부단함을 보이자 “경영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며 그룹 총재직을 조카이자 전문CEO인 왕원위앤(王文淵)에게 물려준 뒤 아들과는 의절했다. 그는 “세상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진리는 쉽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보통 사람의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 이범진 기자 bomb@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