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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매일 반복해야 하는 치유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4. 25. 21:09

매일 반복해야 하는 치유 처음 구원을 받았을 때도 그냥 율법과 훈련으로 슬쩍 넘어가서는 안되는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내적치유도, 치유적 큐티도, 복음도 또 다시 멈추어집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요? 이에 대한 성경적 해결방법은 무엇인가요? 로마서 5장 17절에 한 사람(아담)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한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구원 받고 내적치유를 받았다고 해서, 오늘 십자가에 연합했다고 해서 내가 결코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치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구원의 감격과 치유의 기쁨을 맛보도록 하셨으나 그것은 앞으로 있을 구원과 치유의 예고편이고 목표일 뿐 실제 치유와 구원은 아닙니다. 물론 그 구원을 칭의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 구원과 치유는 완전합니다. 그러나 내 속이 모두 구원 받고 치유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제 그 구원과 치유를 기억하고 믿으며 내 속에 어떤 죄와 상함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놀라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 나가면 이와 같이 구원과 치유의 감격을 더 깊이 맛볼 것이니 계속 드러내고 치유를 받으라는 것이 주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칭의적 구원의 기쁨과 의를 벗기시고 내 속의 아픔과 어두움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픔과 죄의 뿌리는 아주 깊습니다. 아담에까지 이릅니다. 내가 과거에 범했던 죄나 상처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죄와 상함은 왕으로 나를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아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에게 포로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가서 내 백성을 내어 놓으라고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열 번이라는 반복을 통해 외적으로 겨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자유민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진정 애굽으로부터 자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사백 년간 애굽왕이 왕 노릇했던 그 지배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내면 속에 바로는 여전히 왕으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내적 지배를 해방시키지 않고는 결코 가나안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40 년간의 광야생활을 통해 바로왕의 내적지배로부터 끊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후의 신앙적 내용인 것입니다. 40년이란 시간과 계속되는 반복이 필요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본토 친척 아비집을 외적으로 떠나는 것은 몇 년 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내적으로 떠나는데 25년이나 걸렸습니다. 많은 반복이 필요합니다. 오핸 시간이 필요합니다 드러남의 반복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몇 번해서 안된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애굽을 떠나는데도 열 번의 반복이 있었고, 광야에서도 40년간의 반복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하나도 전진하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장소에서 왔다 갔다만 했습니다. 왜 그렇게 조급하게 가나안으로 가려고 하는가요? 충분한 광야의 방황과 드러남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떠나신 것도 버리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구원과 치유의 과정입니다. 마귀는 자꾸 의심과 두려움을 줍니다. 우리는 드러남의 반복과 더 깊은 상함의 드러남이 있어도, 즉각적인 열매와 진전이 없어도 결코 믿음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의 25년간의 지속된 믿음처럼, 우리의 믿음도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반복을 두려워 맙시다. 열매가 없는 것을 두려워 맙시다. 아브라함처럼 계속 십자가에 나갑시다.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와 기업을 얻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구원과 치유가 25년이나 40년간 방황할 것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충분한 시간과 반복과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조급하거나 쉽게 낙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반복은 우리가 바로의 지배로부터 자유하는 데에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치유와 구원은 십자가와 부활의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데, 치유의 열매는 반복적인 십자가와 부활의 연합을 통해 주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느날 하루 아침에 치유가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고 십자가에 연합한 만큼 그 죄와 상함이 부활에 연합이 되어 치유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겨자씨처럼 자라나는데 그 생명력은 십자가의 연합을 통해 공급받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결코 부활의 생명이 없기에 나의 치유는 반복된 십자가의 연합을 통해서만 성장하고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드러남과 십자가의 반복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치유의 생명이 겨자씨 만하고 드러남과 바로의 힘은 너무도 거대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십자가에 가도 치유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고 바로만 득세하는 것 같습니다. 이 때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에 가는 만큼 나의 생명과 치유는 자라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느낄 정도로 자라날 것입니다. 비록 느껴지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그 생명을 소중히 간직하고 계속해서 십자가의 연합을 반복할 때 그 바로의 권세는 점점 약해질 것이고 내 속에 예수님이 점점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은 필요합니다. 신앙은 변하지 않는 것 같은 반복을 통해 성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수한 반복을 의미하는 오병이어를 보여 주셨고 일흔 번의 일곱 번의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매일의 이 치유적 큐티는 바로 이 반복의 구원과 치유를 매일 묵묵히 행하는 것입니다. 별로 열매가 없어도, 매일 똑 같은 상함과 죄를 본다고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으며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주의 약속을 바라보며 오늘도 십자가에 나갈 때,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그의 신실하신 약속대로 생명과 기업을 얻고 말 것입니다. 아직 잘 되지 않는 치유적 큐티, 두려워 맙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드러남의 반복에 지치지 맙시다. 포기하지 맙시다. 아프지만 또 십자가에 나갑시다. 그 속에는 내가 못 느끼는 부활의 연합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삭의 확실한 모습으로 그 생명이 나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길만이 우리의 치유적 큐티가 자리잡고 복음과 치유가 스스로 서게 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성훈 치유 전문 사역자자님 글
출처 : Joyful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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