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시편과 잠언이야기
칼빈의 주석분석(시편:시가서)
John Calvin 주석 분석(시편: 시가서) 청교도신학연구회자료 발표자: 신원균 강도사序論.칼빈의 시편 주석의 특징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먼저 그의 서문에 핵심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칼빈이 시편을 어떻게 이해했고 또한 그 이해한 방식을 자신의 주석에다 어떻게 담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그는 이 서문에서 시편 자체가 얼마나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보고에 담겨진 다양하고 찬란한 보화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말하건 간에 그 주제의 탁월함에 못 미치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것보다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받게 될 경이로운 이득을 독자들에게 주는 편이 더 낫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대해 그 위대함을 충분하게 드러낼 수는 없지만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습관적으로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라고 불러오고 있는데,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1).위의 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지만 칼빈이 이해했던 시편의 가치라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것임을 알 수 있다2)3). 특히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표현을 통해서도 제시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서문 전체를 살펴보면 칼빈은 시편 자체의 특징이 인간 생활에 관련된 모든 부분을 총망라해서 제시되는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제시해 주고 있다4). 바로 이처럼 시편 자체가 갖고 있는 구성적 독특성 때문에 칼빈은 시편을 주석하는데 있어서 다른 주석의 방법과는 접근 방법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칼빈의 다른 주석과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 핵심을 기본으로 갖고 있지만 시편에서는 시편 자체가 갖고 있는 독특성을 충분히 고려해서 주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시편자체가 갖고 있는 독특성에 대한 의미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더욱 명확하게 제시해 주기도 한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선포하기 위한 그의 종들에게 분부하신 계명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 시편에서는 선지자 자신들이 하나님을 향해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모든 심오한 사상과 감정을 솔직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특별히 자신을 검토하는 데로 초청하여, 아니 초청한다기보다 이끌어서 우리가 굴복하고 있는 수많은 결점들과 또 우리에게 많이 있는 악덕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숨겨진 채 남아 있지 않도록 하고 있다5). 칼빈은 여기서 2가지의 특징을 정리해 주고 있는 데 먼저는 "성령의 도구(organa)"로 사용되고 있는 인간 저자의 깊은 내면적인 삶에서 표현되는 계시적 특징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이런 특징을 개혁파 신학에서는 "유기적 영감"6)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처럼 시편에서는 유기적 영감의 최고의 절정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고뇌와 기쁨, 고통, 슬픔, 갈등, 열정과 그의 속으로부터 흘러가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전 생활의 형태를 성령께서는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계시의 장엄함과 거룩성을 드러내시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성령의 계시적 독특성은 칼빈이 두 번째 특징으로 제시하고 있는 표현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이런 구체적인 인간 삶의 모든 세밀함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뜻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연약성을 숨기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고 돌아보아 온전히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또한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밝혀 주고 있다7). 칼빈의 이런 지적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위와 같은 계시적 특징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연약성을 깊이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우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계시방식의 특성이 성도를 얼마나 깊이 고려하시고 또한 배려해 주시는 방식인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바로 이와 같은 시편 자체의 독특성 때문에 칼빈은 자신이 어떤 주석의 특징을 새로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성경의 그 자체적 독특성에서 자신의 주석 원리를 끌어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유기적인 계시의 표현 형태에서 그 독특성을 찾았기 때문에 칼빈은 이 시편을 주석하는 데 있어서 첫 번째로 주석자 스스로가 이런 유기적인 독특성을 깊이 이해하고 적용해야만 가장 바른 주석 작업을 해 나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해의 특성을 깊이 인식할 때만이 "성령의 뜻"8)을 가장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뜻을 통해서 오늘날 성도의 삶에 가장 깊이 적용할 수 있음을 제시했던 것이다.9) 칼빈은 이런 특징들을 자신이 사역하던 당시 제네바의 생활에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해 주고 있다. 이제 만일 독자들이 내가 노력함으로써 집필한 이 주석들에서 어떤 열매나 이득을 얻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나를 단련시키셨던 그 투쟁들로 말미암아 내가 경험했던 그 소량의 체험이 다음과 같은 면에서 나를 보통 이상으로 도우셨음을 그들이 이해해 주리라. 곧 이 경험을 통하여 나는 신성한 시편들에서 얻어지는 교훈은 무엇이든지 현재에 적용하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각 저자의 의도』를 보다 쉽게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다윗이 고통 당했던 것과 같거나 또는 그와 유사한 것을 교회의 내적 원수들에게서 받았던 사실은 다윗이 했던 하소연을 보다 충분히 이해함에 있어서 내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10). 그러나 다윗의 상태가 자신이 시편 69편4절에서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無理)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소연하고 있을 정도로 백성에게 선한 대접을 받아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쓰라린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나를 돕고 위로해 주어야 했을 사람들의 미움으로 까닭 없이 공격당했을 때 내 자신이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인물과 일치되고 있음에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이 지식과 체험이 나로 하여금 시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말하자면 시편을 묵상함에 있어서 『어떤 알기 어려운 영역일지라도 잘못 빗나간 적이 없었다』11). 위와 같은 관점은 칼빈의 시편 주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점인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제네바에서 당하고 있었던 사회적, 교회적, 신학적인 형편을 시편 저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형편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방식이 칼빈이 시대나 상황을 무시하고 바로 성경 속으로 자신을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 원리로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모든 성경 해석을 검토하라고 가르친(롬12:3,6) 사도의 원칙에 따라"12)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그는 바른 해석 원리에서 떠나서 행하는 무익한 호기심이나 헛된 질문 등 알고자 하는 생각까지 포기해야 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칼빈이 이런 원칙을 벗어나서 무분별하게 성경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칼빈의 시편 주석에서 칼빈 자신이 어떤 정신에서 이와 같은 유기적인 적용의 원리를 찾고 있는지 더욱 주의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칼빈이 다윗과 자신의 삶의 내용을 비교해서 성경 주석의 방식으로 담고 있는 것이 얼마나 탁월하고 또한 깊은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놀라게 될 것이다13). 즉 이런 적용 방식은 성경의 각 내용을 그의 삶의 가장 깊고 세밀한 부분까지 갖고 들어가 오직 그 말씀으로만 생각하고 또한 그 말씀으로만 먹고 자라 가려고 하는 칼빈의 깊은 성경정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14).그리고 이런 칼빈의 성경 주석 이해는 "나는 교회의 교화에 관계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내 마음에 이런 소원을 심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이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며"15)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기 자신도 오직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족한 은혜를 누리는 것처럼 성도들이 그런 풍성함을 깊이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목회적인 정신에 기초한 실천적인 주석 이해임을16)알 수 있다.17) 이제 본 논고에서는 이런 칼빈의 독특한 성경주석방식을 시편의 각 장들의 주석을 통해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인해서 칼빈을 통해서 당시 제네바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또한 자신들의 모든 삶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하며 하나님의 깊은 뜻이 세워져 가기를 바랐던 것처럼 우리의 이런 연구 작업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개혁 교회 위에도 이와 같은 풍성한 진리에 대한 이해와 적용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먼저 시편이 워낙 분량이 많기 때문에 본 논고에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시편 1편의 구조와 독특성을 살펴보고 나머지는 각 시편들의 중요한 특징을 중심으로 "비탄과 고난시, 감사와 찬양시, 왕권시, 메시야시, 말씀시, 저주시" 등에서 위와 같은 칼빈의 주석 정신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本論.1. 시편 1편.시편 1편은 시편의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시편 전체의 정신이 1편에 아주 핵심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을 칼빈은 "본 1편이 일종의 서언의 형식으로 시편 전체에 맨 처음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안에서 그는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라는 의무를 강조한다. 이 전체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에 자신들의 마음을 쏟는 자들이 복이 있다"18)라고 언급해 주고 있다. 그리고 칼빈의 주석 방식인 "적정과 절도"의 원칙이 본 1편에 깊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본 시편을 잘 살피는 것은 시편 전체를 살피는 도입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본 1편에서 칼빈은 개혁파 신학의 핵심적인 정신인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에 대한 이해를 1-2절을 주석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이탈할 정도로 이 세상에 타락이 언제나 만연하고 있는 만큼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법을 연구하는 학도들이 복되다고 주장하기에 앞서서 그들 주위에 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불경건성때문에 넋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사악한 사람들을 혐오한다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누구든지 먼저 악인들의 무리에서 물러서거나 떨어지지 않고서는 마음을 기울여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하나님의 종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의 생활을 철두철미하게 혐오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19).칼빈의 위의 언급을 보게 되면 예정론적인 깊은 사고가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진리를 쫓아가는 바른 신앙은 이 땅에서 너무나 찾아 보기 힘든 그런 형태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 반대로 유기자들의 거짓된 신앙의 형태는 무수히 많음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넋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라는 말에서도 잘 살필 수 있다. 이런 신앙의 형편 때문에 진리를 따라가는 삶은 그의 삶의 전체에서 철저하게 악한 자들의 삶과 구별되어 살아가는 정신이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을 더욱 강조해서 주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예정론적인 사고에서 진리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개혁파 신앙의 핵심적인 신앙 정신인 것이다20).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이해의 기초에서 칼빈은 자신의 시대적 형편과 본문의 뜻을 다음과 같이 연결하고 있다. 이 시편의 저자의 시대에 하나님의 독실한 예배자들이 자기 생활의 틀을 올바르게 잡기 위해서 불경건한 자들의 무리에서 스스로 물러설 필요가 있었다면, 더욱더 타락한 세상에 사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용의주도하게 모든 위험한 모임을 피하는 가운데 그것이 주는 불결로 얼룩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21). 여기서도 칼빈은 자신의 시대에 제네바의 특징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이런 사회적, 교회적 형편이 성경의 정신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를 깊이 있게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는 당시의 부패한 사회와 종교적으로는 로마 카톨릭과 재세례파나 그 외의 다른 이단들의 횡포에 대한 형편을 성경의 입장과 비추어서 성도들이 볼 수 있도록 제시하는 이해였던 것이다. 2. 비탄과 고난시22)서론에서 말한 칼빈의 시편 주석의 유기적인 표현 방식의 깊은 이해는 시편의 여러 부분 중에서 특히 '비탄과 고난'에 관련된 시에서 그 절정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150편의 시편 중에서 이 주제와 관련된 것이 약⅓ 정도에 해당될 정도로 그 주제가 매우 풍부함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 자신의 비탄과 고난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칼빈은 더욱 주의해서 제시하고 있다. 먼저 시편 4편의 내용을 샆펴 보고자 한다. 칼빈은 우선 이 시의 배경이 다윗이 사울의 박해를 받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런 고난 중에 다윗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그 계시적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다윗은 본 시편의 처음 부분에서 하나님께 도와주실 것을 기도한 다음에 곧이어 그의 원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가운데 그들에 대한 승리자로서 기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본을 통해서, 우리가 역경에 짓눌리거나 아주 큰 고난에 부딪칠 때마다 구원의 소망을 방어하면서 우리에게 공격을 가해 오는 모든 시험을 때려부수고 통과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23)이처럼 칼빈은 다윗이 개인적으로 처해 있던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며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의 성격을 표현해 가는 과정 속에 성령께서 이 다윗을 도구(organa)24)로 사용하셔서 모든 성도들에게 제시되어야 할 하나님의 계시적 내용을 전달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런 다윗의 개인적인 신앙의 다짐이 어떻게 계시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는지 6절의 내용을 통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나는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만족한 가운데 타인들이 그처럼 간절하게 바라는 목적을 아예 무시하고 거기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뜻으로 보고 싶다. 다윗의 소원과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소원에 대한 비교에는 신실한 자들은 현재의 좋은 것들을 낮게 평가하는 가운데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자신들이 그의 호의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체험으로 아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다윗의 말에는 먼저 번영을 원하면서 하나님의 호의를 무시하는 자들이 모두 얼마나 바보짓을 하는지가 암시되어 있다. 곧 그들은 이 일은 소홀히 하면서 이리저리 깔려 있는 잡다한 「거짓 교리」에 이끌려 제정신을 잃고 있는 것이다. -- 반대로 다윗은 자신에게 비록 모든 좋은 것이 결핍된다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사랑 하나면 나머지 모든 것은 다 잊어버려도 그 이상 충분히 보충하고도 남는다는 점을 증거해 주고 있다.25)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윗이 고난 중에서 개인적으로 신앙의 다짐을 확립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중요한 핵심이 담겨져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칼빈은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이 세상의 형편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만 만족하고 사는 것이 모든 힘의 원천이며 또한 삶의 바른 정신임을 드러내시고 있다는 것이다.26) 그리고 이런 정신을 무시하는 반대자들의 특성은 다윗 시대에 다윗을 그렇게 조롱했던 것처럼 여전히 칼빈 자신의 시대에 로마 카톨릭이나 재세례파를 통해서 끝없이 칼빈 자신에게 "거짓 교리"를 제시하지만 칼빈 자신은 결코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없음을 적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음의 3절에서는 이런 다윗의 고통이 더욱 깊이 제시되어 있다.여기서 시편 기자는 악하고 심술궂은 사람들이 심하게 자기 마음을 찌르는 또 하나의 예리한 창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단이 다윗을 슬픔으로 불사를 그 불길을 부채질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수단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곧 이 원수 사단은 '너는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 하나님께서 너를 쫓아내셨음을 보지 못하느냐? 분명히 하나님은 성막에서 섬김을 받으려 하시는데 너는 지금 그곳으로 가지 못하며 성막으로부터 너는 추방당한 것이다'라고 말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부축을 받아 강력하고 『활력에 찬 저항』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말은 거센 공격이 되어 이 거룩한 사람의 믿음을 전복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의 감정이 참으로 강한 충격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그는 혹심하게 상심했으며, 그 상처는 그의 심령에까지 미친 것이다. 지금 다윗은 자기가 울어서 얻는 위안보다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더 큰 위안을 얻은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 그러므로 우리가 불행 가운데 있을 때, 악인들이 우리를 향하여 개가를 부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항하고 계신다고 심술궂게 조롱하면, 그때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리기 위한 말을 하도록 하는 자는 사단임을 잊지 말자. 그리고 이때는 우리가 안심하거나 무관심할 때가 아니며, 극히 위험한 전쟁이 우리를 대항하고 있는 때임을 명심하자.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감정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악인에 의하여 조롱받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심하게 비난하지 않고는 우리의 믿음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혀 감각없는 자들이 아니라면, 그와 같은 형편에서 우리는 가장 심한 슬픔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27) 여기서도 칼빈은 다윗이 당하고 있었던 고난의 성격은 사탄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임을 지적하면서 이런 도전이 칼빈 자신의 시대에도 여전히 횡횡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당하고 있던 슬픔과 고통은 성도의 전형적인 신앙의 형식으로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이런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한 도움심의 결과 였다고 지적하므로 오늘날 성도가 슬픔 중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인지를 적용해 주고 있다.28) 또한 다윗의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이 깊이 배어나고 있는 것이 42편에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이 42편에서 다윗의 고민과 형편을 소개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적 내용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첫째로 다윗이 사울의 잔인함 때문에 도망을 다녀야 했고, 방랑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무엇보다도 자기를 가장 슬프게 했던 것은 성소에 가까이 갈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어떤 이익보다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가 실망하려고 할 때,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극히 어려운 싸움을 치렀던 것을 보여준다. 자기의 소망을 확고하게 가지기 위하여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기도와 명상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가 경험한 슬픔 때문에 갖게 된 마음속의 투쟁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29)위의 내용도 살펴보면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비참과 슬픔의 성격이 무엇인지가 다윗의 슬픔을 통해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그 자리에서 박탈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슬픔으로 제시되어 있으며, 이런 어려움을 오직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내용으로 회복하며 지탱해 갈 수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성도에게 있어서 위로와 은혜의 수단이 무엇인지를 또한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성도의 소망이 인간의 죄악 유혹에 의해서 어떤 갈등 속에 처하게 되고 또한 그런 속에서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칼빈은 지적하고 있다.3. 감사와 찬양시30)시편 저자들의 감사와 찬양은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성경 저자의 유기적인 특징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구약 당시의 율법적인 정치법과 의식법에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시편 저자의 유기적인 특징들도 살펴야겠지만 그와 함께 정치법과 의식적인 내용들이 어떻게 저자의 인격과 또는 그의 삶의 전체 내용 속에 스며들어서 감사와 찬양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칼빈은 바로 이런 특징들을 잘 지적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런 특징들이 잘 살펴질 때 "신,구약의 통일성"이 파괴되지 않고 전체적인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시편에서 감사와 찬양의 대표적인 의식적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성전'에 대한 기쁨과 감사와 제사의 참여에 대한 즐거움을 들을 수 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칼빈은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 몇 가지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성전'과 관련된 65편 을 살펴보고자 한다.31) 시편 기자는 성소의 유익함을 특히 명백하게 지적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축복을 즐길 수 있도록 이끄시기 위하여 명백히 가리키신 외적인 도움들을 은근히 찬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옛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찬미 드리는 자들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기 위해 하늘로부터 직접 자신의 손을 뻗어 내리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봉헌, 그리고 다른 의식들과의 경건에 관한 외적인 방편들이라는 교의(敎義)의 수단을 빌어 당신을 예배하는 자들의 영혼을 만족케 하심이 합당하다고 보셨던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서 행하는 '수단들이'32) 이와 비슷한 것으로 비록 우리가 이런 것들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소흘히 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33)여기서 칼빈은 다윗이 그토록 '주의 집'과 '성전'의 영광을 맛보는 것을 바라는 이유는 단지 외적인 집의 형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본질적인 내용이 당시에 '성전'을 통해서 가르쳐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와 찬양의 모든 대상과 또한 그것을 사용해서 기뻐하는 것 모두가 이렇게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위와 같이 시편 저자가 성전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선택받은 것에 대한 기쁨과 영광은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죄인 된 저자 자신을 선택해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가 가장 핵심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계속 지적하고 있다. 즉 저자는 거저 주시는 은혜 안에서 죄 사함을 주시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 안에 거하는 것에 기쁨을 묘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34)다음으로는 제사에 대한 부분을 살펴 볼 수 있다. 제사도 동일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76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35)이 시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성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에 따라, 전쟁을 좋아하여 용맹스럽고 전쟁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잘 갖춘 원수들을 놀라우신 권능으로 막아 주신 은혜와 진리를 찬송한 것이다. -- 이 시에서 저자는 매우 적절하게 하나님께서 활과 칼과 방패를 꺾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의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교회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시므로 이 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심하지 않으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에 주저하지 않는 성도들의 용기를 노래하고 있다.36) 성도들은 이제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한다는 권면을 받고 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풀어주신 한 가지 축복을 위해 서원 제사를 드리는 일이 있어 자기들의 안전함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음과, 자기들은 그 안전함에 대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음을 이 의식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달음으로써 이것을 다시금 새롭게 신앙 생활에서 실천하라고 깨우침을 받는 것이다.37) 여기서도 칼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각한 전쟁의 위험 속에 직면했을 때 저자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것을 갈망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지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위로를 얻고 있음을 지적한 다음에 이런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고 싶어하는 저자의 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의 찬양 내용은 '서원'을 갚고 또한 '예물'을 드리는 행위로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의식들은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단지 외적인 의식만을 행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통해서만 살겠다는 핵심이 이런 외적인 모습을 통해서 표출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감사의 표현도 인간이 무엇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물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서 그 뜻에 순종하고 싶은 소원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늘날 하나님께 예배 드리려면 꼭 예물을 가지고 와야 한다고 하면서 '헌금'을 강요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는 죄악된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칼빈의 지적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시편에 제시되어 있는 많은 의식적인 부분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 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의식들을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했는지 그 핵심과 본질을 알아야 하는 것이며, 바로 그 본질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바른 감사의 모습임을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적인 뜻과 맞지 않는다면 이미 시편에서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38)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단지 외적인 감사와 찬송의 행위는 하나님께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왕권시39)다윗의 왕적 지위와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왕권의 독특성이 시편 110편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이 110편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권능과 왕권에 대한 구약의 대표적인 본문이기도 하다. 칼빈은 이 110편을 다윗의 왕권과 연결해서 어떻게 풀어 가고 있는지 그의 설명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칼빈은 이 본문이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주고 있다. 이 시에서 다윗은 그리스께서 행하실 통치의 영원하심과 그의 제사장 직의 영속성을 공포하고 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권능과 함께 최상의 통치권을 부여하셨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대적들을 정복하시던가 굴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시는 것을 확언한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을 먼 곳까지 두루 넓히실 것을 덧붙여 말한 다음 그리스도께서 가장 엄숙한 맹세와 함께 제사장 직분에 앉으시도록 명함을 받아서 왕으로서의 직분을 누리시는 영광과 함께 제사장으로서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실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제사장 직분의 새로운 질서를 이루게 되고 잠정적이었던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에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히 그침이 없을 것을 이야기한다.40)이처럼 본문은 비록 다윗 한 개인과 또는 다윗이 가지고 있던 왕권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어도 다윗 자체를 넘어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중요한 계시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다윗을 빌어서 이런 놀라운 계시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말씀은 어느 정도는 다윗이라는 개인적 인물에게 해당된다고 할 수도 있다. 다윗은 불법적으로 왕위에 오르지도 않았고, 사악한 계교를 써서 왕위를 얻으려 하지도 않았으며, 백성들의 변덕스러운 투표에 의해서 왕위를 얻은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이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에 의해서 였다. 더욱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이 왕국은 아주 특별한 왕국이기 때문에 이 나라와 다른 모든 나라들을 구분하려는 것이 다윗의 의도였다. 하나님께서 땅의 임금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신 것은 사실이나 다윗처럼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윗과 같이 그리스도의 섭정의 지위에 올라 정치를 한 것은 아니었다. -- 그러나 이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모형으로 영향을 입었던 것과 같은 거룩한 위엄의 옷을 입지는 못했다. -- 다윗 스스로는 특별한 양식으로 왕국의 통치가 위임된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 다윗 자신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음을 알고 있었뿐만 아니라 통치권을 위임받을 때까지는 조야하고 은둔자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던 다윗은 왜 자신이 세상의 다른 왕들과 함께 분류될 수 없는가 그 합당한 이유, 곧 하나님의 권리에 의해서 통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41)이 설명에서도 보면 다윗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와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졌던 왕권에 대한 독특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언의 영을 통해서 장차 그리스도의 자리에 대해서 자신의 인격과 또한 지위를 빌어 말할 수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다.42) 이처럼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인격적 독특성과 또한 그의 인격뿐만 아니라 그가 누리고 있었던 삶의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로 하나님의 뜻에 밀접히 연결되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이런 독특성이 시편 주석에서 계속해서 제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다윗의 왕위에 대한 찬양이나, 다윗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찬송 등이나, 다윗의 인격에 대한 모독에 대해서 저주와 심판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내용은 모두 이런 독특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다윗과 그리스도가 아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의 방식처럼 무조건 모든 상황을 기독론 중심으로 풀어 가는 방식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그는 오직 적정과 절도의 원칙에 따라서 각 본문을 살피며 또한 삼위일체적으로 모든 본문의 특성들을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신학적인 기독론 중심적인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칼빈의 독특한 성경의 이해는 그의 성경관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전체 성경"(Tota Scriptura)에 근거한 접근 방식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런 칼빈의 독특한 이해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시편 72편에 잘 드러나고 있다.이 시를 단순히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고 있는 자들은 이론적 근거가 못되는 말들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유대인들에게만 외치고 있다는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된 말이 아닌 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다면 이는 괴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은 자기 후손이 그 왕국을 소유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다. 곧 그 왕국의 능력과 지배는 결국 그리스도에게 미쳐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다윗은 백성들의 현세적인 아름다운 것들이 자기와 후손들에 의해서 지켜질 나라 안에 포함되어 있는 장래의 것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과, 이러한 것들은 단지 훗날에 있을 더욱 우월한 어떤 것, 즉 영적이고 영원한 축복을 나타내는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다윗은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이러한 나라의 영원한 지속을 가장 갈망했고, 또 이것을 위하여 가장 진지하게 간구했던 것이다.43) 이처럼 칼빈은 비록 다윗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성취를 통해서 완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삶과 왕권의 독특성을 빌어서 하나님의 풍성한 계시의 내용이 전달되고 있는지를 더욱 집중해서 드러내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단순히 기독론으로 풀어가는 방식보다 더 풍성한 계시의 내용을 소개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성도의 머리로 그리스도와 그리고 삼위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이 본문이 연결되어 있어서 성도들에게까지 성화의 과정에서 맛볼 수 있는 계시의 풍성함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주석에 대한 특징은 구약, 신약 모두에서 동일하게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이해가 전제되어 글에 표현되어 있는 것도 살펴 볼 수 있다. 즉 칼빈의 이러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그의 삼위일체에 대한 독특한 이해이기도 하다. 특히 구약에서의 삼위 하나님의 자리에 대한 이해는 다른 주석들 보다 더 탁월한데 왜냐하면 그는 먼저 본문에서 성령의 의도를 끊임없이 찾으려고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와 사역을 적절하게 드러내 주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이러한 전체적인 사역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집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44) 이처럼 칼빈은 그의 주석에 있어서 어느 한 위만을 강조하려고 하지 않고 항상 삼위일체적 중심을 잃지 않고 있다. 오히려 칼빈은 어느 한 격위(格位)만을 따로 떼어 강조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위험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만을 따로 떼어 특별하게 언급하지 않는 것은 루터주의와 큰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의도적으로 성경의 대목을 강해 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았지만 칼빈은 그렇게 하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의 구속적인 사역을 종합적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이처럼 칼빈은 신격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를 생각하지 않은 체 삼위 중 어떤 한 격위를 따로 떼어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상 숭배와 같은 행위로 취급하고 있다. 즉 성령을 중심으로 삼게 되면 치명적인 주관주의나 신비주의로 빠져들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게 되면 휴머니즘(인간론)으로 빠져드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45)5. 메시야시46)시편 전체가 이미 신약과 긴밀한 관계 가운데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예언적 특징이 다윗의 삶과 그의 내면적인 갈등 또는 그의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 시편에서는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칼빈은 이런 다윗과 예수님의 독특한 연관성을 자신의 주석에서 잘 제시해 주고 있다. 먼저 본 시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다윗은 본 시편에서 자신이 절망에 빠질 정도로 비참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을 하소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혹심하게 당한 여러 재난을 열거한 다음에 깊은 시험에서 빠져나와서 용기 백배하여 구원의 확신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신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데, 다윗이 예언의 영으로 알게 된 것은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승귀되기 전에 놀랍고 비상한 방법으로 낮아지셔야만 했다는 점이다. 우선 1절을 살펴보기로 하겠다.47) 1절은 그리스도의 십자상에서 외치신 말씀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더욱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48) 먼저 칼빈은 이 고통의 호소 속에 담겨진 다윗의 내적 갈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의해서 버림당하고 내던짐을 당한 것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절망에 빠진 자의 불평으로 들릴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에게는 자신을 위한 아무 도움이 없다는 점을 믿으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두 번씩이나 자신의 하나님으로 부르면서 자신의 탄식을 그의 품에 내 맡김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아주 뚜렷하게 고백하고 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들에게서 그의 호의의 표적을 거두실 때마다 그들이 어디로 눈을 돌리든 온통 칠흙같은 밤의 어두움뿐일 때, 그들은 이러한 내적 갈등으로 단련 받을 수밖에 없다. -- 다윗은 슬픔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하는 말을 일시에 쏟아 놓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저버리셨다는 모순된 생각을 완강하게 뿌리치지 않고서는 그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건한 사람치고 날마다 내면적으로 위와 같은 것을 체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육신의 판단에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고 포기하신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그는 신앙에 의해서 감각과 이성의 눈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고 있다.49)이처럼 다윗은 갈등 속에서 괴로움과 또한 신앙의 분투적 노력을 찾은 다음에 이것이 성도의 일반적인 형편에 어떻게 적용되어 있는지를 먼저 살피고 나서, 이런 다윗의 고통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통과 예언적으로 일치를 이루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의 영혼을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손에 바치려 하던 순간에 바로 이 말씀을 외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였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고 소리칠 정도로 큰 슬픔을 느꼈으며, 큰 정신적 갈등에 사로잡히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숙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 물론 다윗이 여기서 자기 자신의 고통을 두고 몹시 애달파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 시편이 예언의 영의 감동 아래 다윗왕과 주님에 대해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해 주었다는 데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50)칼빈은 여기서 다윗의 갈등과 형편이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예언적인 역할을 당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깊은 내면적인 갈등의 모습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성취됨을 우리는 보게 된다. 특히 이런 예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본문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관련해서 풀어 가는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적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칼빈은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일반적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으로서 제시되는 --구원의 서정 속에서는 경험하는 모든 신앙의 내용으로, 즉 단순히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성화의 내용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계시적 특성도 함께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은 칼빈 주석만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것이다. 즉 성경의 내용을 단편적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전체(Tota)적인 방식에서 이해하고 접근하는 특성인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칼빈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이 교회 전체와 각 개인의 성도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세밀하게 드러내서 성도들로 하여금 시편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51)6. 말씀시52)시편에서 제시되고 있는 독특성 중에서 말씀과 관련된 특징도 중요한 특징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모세 오경이나 선지서나 시가서 등에서는 십계명과 관련된 율법의 기본적인 정신들이 선언적으로 증거되고 있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모습 속에서 '제시와 경고'의 선포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시가서에는 이런 율법의 기본 정신들이 저자의 깊은 내면적 인격과 그의 삶을 통해서 표출되어지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인 것이다.53) 이제 대표적으로 119편을 통해서 이런 내용을 칼빈이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말씀 속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자기의 관심사인 것을 밝힌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그는 하나님께 자기를 향한 은혜를 거두시지 말 것을 간구하고 있다. -- 자기 마음의 성실성을 알고 있는 선지자는 계속해서 자기가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 다윗은 여기서 자기 자신의 예를 들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율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보호를 받았으며, 또한 더욱 주의 깊게, 진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계속 되기를 구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 시는 저자가 개인적으로 특별히 자기만 사용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 말할 때마다 그 본보기를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면 우리는 사단의 유혹에 맞서 자신을 잘 지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내가 앞에서 말했던 것, 즉 선지자는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본으로 내세워 그들이 본을 받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 선지자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이 시험을 극복했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선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법에 대한 사랑으로 불붙게 해주신다면 용기를 얻고 힘을 내서 끝까지 자기의 길을 감으로 도중에 연약해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선지자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넓혀 주시지 않으면, 사람들의 나태함과 무기력함은 바른 일을 하게 할 수가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넓히시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는 하나님의 계명의 길을 걸을 뿐만 아니라 뛰어 가기에도 부족함이 없다.54) 이처럼 칼빈은 시편 119편을 주석하면서 저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앙으로 자라가며 성화되어져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그 내용들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적인 성격으로 모든 성도가 따라가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 제시되어지고 있는지를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저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의 소원을 하나님께 바라고 있고 또한 그것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제시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적 사실들을 성도에게 주셨을 때 그 계시의 내용들이 성도의 삶의 깊은 내면 속에 어떻게 녹아 들어가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의 계시들을 제시해 주고 있음을 칼빈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관점으로 칼빈은 단순히 저자의 삶을 모방하는 차원이 아니라 어떤 부분이 모방할 수 없는 저자만의 독특한 성령의 계시적인 도구(organa)로 제시되어 있는 부분인지를 알아야 하며, 또한 어떤 부분이 교회의 교사와 머리로서 온 성도의 성화의 과정으로 본받아야 하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는 부분인지를 잘 살펴야 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했을 때에 우리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칼빈은 지적하고 있다. 즉 모방해서는 안될 부분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은 '원숭이 짓'과 같은 파렴치한 짓이고55), 또한 성도의 성화의 모델로 제시되어 있는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세밀한 구별은 더욱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7. 저주시56)시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저주에 해당하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 부분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성도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토록 무서운 저주와 심판을 제시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저주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많은 논쟁을 갖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칼빈도 이미 이런 부분에 대한 독특성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는 그는 각 시편의 저주에 해당하는 부분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칼빈은 우선 이 저주에 해당하는 부분이 어떻게 저자 개인의 인격과 맞물려서 하나님의 계시적 특성으로 제시되고 있는지를 밝혀 주고 있다. 즉 이것은 어떤 한 개인의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며 오직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와 관점에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칼빈이 이렇게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모세오경 주석과 선지서 주석에서 살펴보았듯이 본 저주에 해당하는 부분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집행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분명한 표명과 그 이해에서 제시되고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선지서 주석에서 3번째로 다루었던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성격이 이미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론적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고유한 자리를 확증하기 위한 방식으로 제시되었던 것처럼 본 시편에서의 저주에 해당되는 부분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고 또한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공의로운 판단으로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저주'의 성격으로 제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칼빈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만이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수 있는 권능을 시편 저자의 개인적인 소망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특성들을 칼빈의 지적을 통해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속에 들어 있는 저주에 대해서는 내가 다른 곳에서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다윗이 이러한 저주를 하거나 그들을 향한 자기의 바라고 있는 것을 나타낼 때에는 어떤 육체적인 무절제한 성격으로 말미암아서 동요를 받았거나, 분별이 없는 열심만으로 한 것이 아니요, 또 개인 감정에 치우쳐 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 문제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가지고 있는 자아 평가의 분량에 비례해서 자신의 문제에 도취된 나머지 원수를 갚고자 무모하게 돌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에서부터 사람이 자기에게만 치우치면 치우칠수록 더욱 무절제하게 개인적인 관심에만 집착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개인적 관심을 촉진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또다른 종류의 죄악을 낳는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원수에게 앙갚음하는 행위가 정당하고 합법적일 수 없고 자기의 간악한 성벽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앙갚음을 할뿐이다. -- 가장 사악한 목적을 위하여 이 시편을 이용함으로 왜곡하는 수도승들 특히 프란시스파 수도사들은 얼마나 불경건한 무리들인가? -- 나는 이러한 수도사들에게 미혹되어 자신과 자기의 독자를 이러한 말로 저주하면서 프랑스에 살고 있던 한 부인을 알고 있다.57) 그러나 나는 모든 터무니없는 감정을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다윗에게로 돌아가려 한다.58) 다윗은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관습에 맞추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영적인 형벌에 대한 성격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윗의 의도는 하나님의 보응을 이렇게 보여줌으로써 온 세상이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묵묵히 따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 다윗은 자기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말하므로 이 저주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하늘 보좌에서 내리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또 다윗이 성령의 특별하신 감동을 받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을 무모하게 따라 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시인이 여기에서 어떤 개인적인 관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요, 그가 말하고 있는 대상은 평범한 성격을 지닌 자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59)이처럼 칼빈은 본 시편의 저자가 특별한 성령의 인도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권능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인격 속에서 표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런 본문은 철저하게 오직 신론적인 사고에서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성격이 이미 저자의 말을 통해서도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심판과 저주의 내용을 제시할 때는 꼭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시109:27)라는 말씀을 통해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의 존귀함이 드러나는 것이 이 저주의 최종 목적임을 알 수 있다.60) 이처럼 칼빈은 시편의 단편적인 본문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정신과 그 흐름을 이해하는 가운데 각 본문이 차지하고 있는 독특성이 무엇인지를 조화 있게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모세 오경을 통해서도 보았듯이 그 기본적인 사고는 십계명의 정신에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結論.이제 칼빈의 시편 주석(시가서)을 마치면서 본 저자는 다음의 중요한 두 가지를 다시 한 번 명확히 하고자 한다. 즉 칼빈은 비록 시가서가 저자 자신의 깊은 내면적 인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도 어디까지나 이것은 하나님의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한 도구(organa)로 사용된 것이지 그 이상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칫 우리가 이 부분에서 오해하기 쉬운 것은 저자의 유기적 특성에 너무나 몰입하다 보면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 '마태의 신학', '바울의 신학'하면서 그 저자 자체의 독특성만을 가지고 신학적인 자리를 세우려고 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이 시가서의 저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자리 때문에 자칫 저자의 자리에만 집중해서 저자 자신이 가장 중심된 내용으로 제시되는 소위 "모범론 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칼빈도 이미 이런 위험이 성경을 얼마나 파괴하는지를 여러번 경고했었다.오히려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누누이 밝히고 있듯이 철저하게 시가서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을 살필지라도 성경 전체가 가지고 있는 그 핵심적 성격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즉 오직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61) 그래서 칼빈의 이런 저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히기도 했다.우리는 우선 선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어떤 필요성이나 동기에 의해 선지자들이 그런 말을 하기에 이르렀는지를, 그리고 그들의 사정과 말씀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는 일반적인 교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지자들이 한 말을 읽고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어떤 이유에서 무슨 말씀이 선포되었는지를 고려하고 그 다음에 일반적인 진리를 이끌어 내야 한다.62)우리가 기록된 것을 유익하게 읽고자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성령의 뜻을 생각해야 하며 그 다음에 선지자가 말한 목적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것을 이해한다면 그 다음에는 거기에서 얻은 것을 다른 일에 적용하는 것이 쉬워진다. 그러나 본문이 의도한 목적을 숙고하지 않는 자는 항상 이곳 저곳으로 헤매며 그가 비록 많은 것을 말하더라도 여전히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63)이처럼 칼빈은 시가서의 독특한 특성을 고려하고 있어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뜻"을 각 본문을 통해서 찾아내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찾지 못하고 단지 저자 자신의 내용에만 머무르게 되면 '아무리 많은 말을 한다 해도 여전히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는 그이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 시편의 저자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핵심적인 정신임을 우리는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64)라는 말씀에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신학계에서 많은 설교해석방식이 난무하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또한 곤핍한 영혼들에게 참된 위안과 소망을 줄 수 있는 진정한 성경의 참뜻을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하며 칼빈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 위와 같은 정신을 잘 간직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의 피땀과 뼈를 깎는 고된 훈련은 하나님을 영광을 드러내며, 또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영혼들을 풍요롭게 하는 거름임을 잊지말자!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성도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고후1:6)미주1) Comm, vol 7. p. 157.2) "아다나시우스는 시편을 '성경 전체의 압축판'이라고 그 양식을 표현하였다. 바질은 '모든 신학의 요약서'라고 표현하였고, 루터는 '작은 성경 그리고 구약의 요약서'라고 표현하였으며, 멜랑히톤은 '세계에 현존하는 작품 중에서 최고의 우아함을 갖춘 작품'이라고 표현하였다"(Comm, vol 7. pp. 144-145). 3) 다음과 같은 표현을 통해서도 칼빈이 시편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안전을 도모하는 주요한 수단들 가운데 하나인 만큼, 그리고 이런 훈련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기 위한 더 좋고 잘못이 없는 규칙이 시편 이외의 다른 어는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시편을 이해함으로써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숙달되었는가에 비례하여 천국 교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Comm, vol 7. p. 158). "이 책이 모든 다른 것보다 훨씬 바람직한 특권을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할 것 같은데, 이 책이 알려주는 특권이란 하나님께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람 앞에서 고백하기 부끄러워하는 약점들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허락과 자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외에도 여기에는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올바른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 -- 간단히 말해서 그 어떤 책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올바른 방법을 완전하게 가르쳐 주거나 이 신앙의 훈련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힘을 강력하게 북돋아 주는 책은 없다는 것이다"(Comm, vol 7. p. 159).4) 이런 시편 자체에 대한 이해는 칼빈 주석의 편집자 서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시편에는 유대 백성의 민족적 역사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삶의 특별한 부분들과 개인적인 체험 및 장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예언들이 포함되어 있다. 각 시편은 광범위한 분야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신앙적 진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품어야 할 의무인 모든 열렬한 감정의 여러 가지 예들과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영혼의 모든 갈등을 담고 있다"(Comm, vol 7. p. 143).5) Comm, vol 7. p. 157.6) 이처럼 유기적 영감을 통한 성경의 이해 방식은 개혁신학의 전형적인 영감론과 더불어 성경해석을 하는 기본 원칙으로 이해되어지고 잇다. 루이스뻘콮(L. Berkhof)은 그의 성경 해석학에서 "성경 저작에 있어서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와의 관계"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성경 저자들이 해야 될 일을 예배하시는 과정에서 그들의 개인적 특성, 성격 및 성질, 그들이 갖고 있는 재능과 교육, 저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등 성경 저자들의 개성을 제한하지 아니하고 사용하시었다"(L. Berkhof, 성경해석학, 윤종호, 송종섭역, 개혁주의신행협회, 1993. p. 51). 또한 뻘콮은 계속해서 그의 해석학에서 시가서에 대한 해석의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이런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는 칼빈의 주석적 특징이 어떻게 개혁신학 안에 정착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 시편의 내용에 역사적 사건이 취급되어 있으면 조심스럽게 연구를 해야 된다. (2) 시편이 성경의 다른 분양보다도 훨씬 더 주관적이기 때문에 심리적인 요소가 시편을 정확히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하다(해석자는 시를 쓴 시인의 성격과 정신 구조를 연구해야 된다). (3) 시편이 사적(私的) 성격뿐 아니라 대부분 공공성을 띠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볼 때에 그 시편에는 중생치 아니한 마음에서 나온 시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이 쓴 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그러기에 해석자는 어떻게 시인이 하나님의 뜻-성령의 뜻-을 드러내는지를 알 때까지는 만족해서는 안된다). (4) 메시야에 관한 시편을 해석할 때에 직접 취급한 시편과 간접적으로 메시야를 표명한 시편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된다. (5) 저주시와 관련해서, 시편에 있는 저주 내용에 대해 몇 가지의 사실을 살펴봐야 한다. 이러한 저주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을 옹호하기 위해서 사용, 개인적인 보복을 표명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서 구체화된 죄에 대한 교회의 증오심을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저주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적대심을 가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드러내는 일이 된다.7) 우리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선하심, 곧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며 모든 행복을 그분에게서만 구하도록 가르쳐 주고, 참 신자들이 몹시 궁핍할 때에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서 자신 있게 도움을 구하도록 가르치려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찬사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과 화목 시키고 그와 함께 확고한 평화를 우리에게 주는 값없는 죄사함이 확대 제시되어 있으므로 여기에는 영원한 구원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 아무런 부족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Comm, vol 7. p. 159).8) Comm, vol 7. p. 145.9) 이런 유기적인 긴밀한 특징은 김영규 교수는 잠언서를 분석하면서 "말씀이 주어지는 기본틀"이란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 기본틀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저자를 영감 하실 때, 그 시대와 저자와 관계 속에서 어떤 기본적인 틀들을 드러내시고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그 초점들의 성격과 강도가 어떠한지를 보기 위해서 살펴보는 것이다. -- 잠언은 이스라엘이 정복 시대를 지나 과도기의 혼란을 통과하고 이제 왕제도에 의해서 한 민족이 크게 한 국가로 정착되어 변화되어 버린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시편과 독립적으로 이것은 그 시대의 인간상과 사회상을 잘 반영할 수 있는 영감의 독특한 방식을 통해서 그의 뜻을 드러내시는 한 방식일 수 있다. 거기에는 가시적 교회로서 국가로서 성장한 한 민족과 사회 속에 있는 다양한 인간상과 사회상을 드러내고 있다. 지혜와 교훈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주로 선과 악이 구별되고 어울리는 다양한 인간상과 양태들에 초점이 되어 있다는 것이 큰 변화이다. 그런 초점과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율법의 권위와 가치, 율법의 원리적인 뿌리로서 그리고 지혜와 지식의 총체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입과 입술, 귀와 눈, 다른 지체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마음의 선과 악의 양태들, 빈부와 격차와 계급사회에서 생기는 사회계층간에 갖는 갈등, 가정 질서의 무너짐, 기타 다양한 사회윤리적 병폐들의 원인과 그에 따른 교훈들이 기록되어 있다"(김영규, 잠언과 그 저자, 미간 논문, 1998. p. 1). 잠언서는 칼빈의 시편 주석을 기초로 해서 김영규 교수의 연구 내용을 살피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도서도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0) Comm, vol 7. p. 160.11) Comm, vol 7. p. 167. "비록 심약하고 수줍기는 해도 한때는 사단의 무서운 공격을 생명을 위험에 내걸고 혼자 맞서 싸움으로써 붕괴시키고 멈추게 했던 일도 있었다. -- 이 5년간 겪은 시련은 견디기에 심히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사악한 중상모략으로, 나 자신과 나의 일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작자들의 악의로 인해서 상당히 괴로운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었다. -- 내가 세상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에 의해서 운영되고 지배된다고 확고히 주장했기 때문에 많은 오만한 사람들은 나를 대적하여 일어나서는 내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라고 말한 것으로 단언한다.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우매한 중상 모략이다. -- 버림받은 자와 선택받은 자를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예정의 영원하신 목적을 뒤엎으려고 애를 쓰는 자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자유의지를 옹호하기 위해서 책임을 떠맡는 자들도 있고, 내가 어떻게 그 성격을 규정지어야 할지 모를 괴팍한 열정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지로 인해서 그들의 신분을 즉시 내팽개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만일 내게 이러한 고통을 안겨 준 그들이 공공연하게 공인된 원수들이라면 어떤 점에서 그것을 참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형제라는 명목 하에 스스로를 감추고 성스러운 그리스도의 떡을 먹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베풀어주고 있는 자들, 간단히 말해서 복음의 선포자라고 큰 소리로 자랑하는 자들이 내게 괘씸한 싸움을 걸어오고 있는 이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진저리나는 일이겠는가? 이런 점에서 나도 다윗이 했던 것처럼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41:9), (시55:1-14)라고 하소연하는 것이 정당할는지 모른다"(Comm, vol 7. pp. 164-166)12) Inst(1559) 4. 16. 4. 13) 이와 같은 독특성을 편집자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호평하고 있다. "그가 다윗의 신앙적인 단련에 관해 언급하거나 그의 삶의 시련 혹은 내적 갈등에 관해 언급하건 간에 우리는 시편이 보이고 있는 많은 것을 체험했던 한 마음과 부딪히게 된다. 칼빈으로 하여금 시편 주석가로서 탁월한 자격을 갖추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이었다. 칼빈이 자신이 쓴 시편 서문에서 생생하게 기술한 대로 종종 다윗의 형편과 유사한 형편에 처했던 칼빈은 다윗의 사고방식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마치 눈으로 보았던 것처럼 볼 수 있었으며, 다윗의 감정의 복잡함과 성격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이 감정들을 묘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감정들에 관한 기술을 정독하게 될 때 이것들을 다윗이 쓴 것이라고 착각하게 될 정도이다"(Comm, vol 7. p. 151).14) "우리가 하나님을 그의 말씀밖에 어떤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그의 말씀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만족스럽고 긍휼로 주워진 피조물들 가운데 그 모든 재화들로부터 저를 확신하고 있다"(CO IX, 703. 김영규, 칼빈에 있어서 오직 성경, 신학정론 21호, 1993. P. 585).15) Comm, vol 7. p. 168.16) 이와 같은 실천적인 주석에 대한 칼빈 주석의 독특성을 편집자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본 시편 주석의 또 다른 탁월성은 그 실천적인 성격에 있다. 칼빈은 마치 자신이 희랍이나 로마의 고전을 주석 하는 것처럼 단순히 문법적 연구라는 무미건조하고 생명력 없는 세세한 묘사에 자신을 제한시키지 않았다. 그의 모든 설명은 실제적인 답변을 위해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실제적 주석과 비판적이고 문헌적인 서술과의 조화 있는 결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Comm, vol 7. p. 146).17) 같은 방식으로 욥기의 내용들 중에서 중요한 표현만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John, Calvin, 욥기 강해(칼빈의 욥기 강해/ 욥과 하나님), 서문강역, 지평서원, 1996. --욥기의 내용을 통해 참된 유익을 얻으려면 먼저 욥기의 윤곽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쓰여진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따라 우리의 삶을 조종하는 권한이 하나님께 있으며, 우리의 마땅한 의무는 모든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며, 우리는 전적으로, 사나 죽으나 당연히 그의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욥기를 통해서 기억해야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주관하실 권한이 있으며, 우리가 처음 언뜻 보면 하나님이 냉엄하게 행하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불평하지 않도록 우리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한 동안 우리는 야고보가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5:11) 라고 우리에게 권면하듯이 이 책에 나오는 욥이란 사람의 인내를 묵상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실 모든 비참을 견뎌 내야 함을 보여 주실 때, 그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임을 분명히 자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56-57). 그러나 성령께서 이 책을 쓰도록 하신 것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며 할례의 표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 나가며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62). 우리는 성령의 의도를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 나라에 속한 이 사람이 그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한 것을 보고 자기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교리를 어떻게 지켜야 마땅한지를 인식할 거울과 본으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63).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높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한 선택은 무색해지고 파쇄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값없는 선하심으로 부르사 구원받게 하시고,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버리셨다는 것이 그들에겐 매우 이상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 욥이 여기서 따르는 절차, 아니 욥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따르는 절차를 알고, 하나님의 공의가 어떠한 것임을 엿보기 위해서 그 점을 언급해야 했습니다(121). 하나님께서는 욥이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원하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순리대로 행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그것을 사용하시듯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이와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전하게 해주심으로써 우리를 아끼십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을 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훈을 우리를 위해서 미리 씹어 주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아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엄 앞에 서게 되면 금방 삼키움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본다면 완전히 납작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방편으로 우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감안하시는 것입니다(485).18) Comm, vol 7. p. 169.19) Comm, vol 7. p. 170.20) 이런 정신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칼빈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한다. "아주 교활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기만을 주입하는 것이 사단의 술책이므로 예언자는 아무도 부지중에 속아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흔히 인간들이 올바른 길에서 얼마나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첫발을 내디딜 적부터 교만하게 하나님을 멸시할 정도로 큰 발을 내딛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들이 악한 조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사단은 그들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곁길로 이끌어 내는 가운데 그들이 마침내 공공연한 범법 행위를 향해 줄달음질치도록 한다"(Comm, vol 7. p. 171). 즉 사탄은 하나님의 진리를 쫓는 삶에서 성도들이 실패하게 하기 위해서 아주 조금씩 다가와서는 결국에는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 첫 단계에서부터 내어 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1) Comm, vol 7. p. 171.22) 여기에는 해당되는 주제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3, 4, 5, 6, 7, 13, 17, 22, 25, 26, 27, 28, 31, 32, 35, 38, 39, 42, 43, 44, 51, 54, 55, 56, 57, 59, 60, 61, 62, 63, 64, 69, 70, 71, 74, 76, 77, 79, 80, 83, 86, 88, 94, 102, 109, 120, 130, 140, 141, 142, 143.23) Comm, vol 7. p. 204.24) "다윗은 일반적으로 온 교회의 선생이었고, 성령이 쓰시는 뛰어난 도구였다"(Comm, vol 8. p. 298).25) Comm, vol 7. p. 214.26) 비슷한 신앙 정신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기 하다. "다윗은 마음에 불타고 있던 단 한 가지 소원을 거의 모든 인간들이 홀려 있는 여러 가지 소원과 대조시키는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Comm, vol 7. p. 214).27) Comm, vol 8. p. 302.28) 이런 다윗의 내적 갈등의 모습과 그 성격의 의미가 5절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다음과 같이 반복되고 있다.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다윗은 그 시험에 지지 않으려고 자기의 슬픔에 대항하여 강하게 투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가 그 시험과 싸워서 승리를 얻기 전에, 완강하고 쓰라린 싸움을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윗은 한 차례의 위급한 공격을 받은 후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투쟁의 새 국면을 자주 당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대단히 마음의 동요를 느끼고 낙심했던 사실을 이상히 여길 필요는 없다. -- 다윗은 이 말씀에서 마치 자기가 두 개의 상대직 당파를 형성한 것처럼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믿음을 연단시킴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고 있다. 굽히심이 없는 용기를 가진 성령으로 무장하여 그는 육신의 감정을 제지하고 굴복시키기 위하여 그 감정에 맞섰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자기 마음의 겁과 유약함을 나무랐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귀와 세상을 대항하여 싸움을 끌어왔으면서도 그런 것들과 공적이고 직접적인 투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주로 싸우고자 했던 자에게 맞선 원수로서의 자신을 인정했을 뿐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단을 이기는 최상의 방법은 우리 자신이 밖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대항하여 내적인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 그러므로 다윗과 같은 무관심과 겁에 질린 상태가 우리를 덮쳐올때면, 마음의 정욕을 다스리고 굴복시키는 것, 특히 누구에게나 있는 불신의 감정과 싸우는 것은 경건한 자들이 자주 치러야 하는 싸움임을 명심하자"(Comm, vol 8. pp. 305-306). 여기서도 다윗의 신앙적인 갈등, 그리고 그 슬픔을 이길 수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능력, 또한 계속해서 싸워 가야 하는 성도의 자리, 싸움의 본질적인 성격 등이 소개되고 있다.29) Comm, vol 8. p. 298.30) 8, 11, 18, 19, 23, 29, 30, 32, 33, 34, 40, 41, 46, 48, 65, 66, 67, 68, 75, 81, 84, 85, 91, 92, 95, 98, 100, 103, 104, 105, 106, 107, 108, 111, 113, 114, 115, 116, 117, 118, 123, 124, 131, 133, 134, 135, 136, 145, 146, 147, 148, 149, 150.31) (시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있다. (시5: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시138: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위에 높게 하셨음이라32) "오늘날 은혜의 수단: 말씀, 성례, 기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4 장 구원에 이르는 신앙에 관하여: 1절 "이 믿음은 보통 말씀의 사역에 의해 생겨진다. 또한 말씀의 사역과 성례의 시행과 기도에 의해 신앙은 자라고 강화된다". 제 17 장 성도의 궁극적 구원에 관하여: 3절 "그러나 그들은 사단과 세상의 시험, 그들 안에 남아 있는 강한 부패성, 그들을 '보전하는 방편들을'(말씀, 성례, 기도) 게을리 함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죄에 빠져서 한동안 죄 가운데 머물러 있기도 한다". 제 18 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3절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 수 있도록 성령이 능히 깨닫게 하여 주시므로 그는 이상한 계시가 주어지지 않아도 '보통 방편을'(말씀, 성례, 기도) 올바르게 사용하여 이 확신에 이를 수 있다".33) Comm, vol 9. p. 99.34) Comm, vol 9. p. 96.35) (시76:11)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부분도 있다. (시61:8)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시107:22)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지로다. (시56:12)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시54: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132:16)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으로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움으로 외치리로다36) Comm, vol 9. p. 304.37) Comm, vol 9. p. 314.38) 시51:16-17. 이처럼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허락하신 대로만 감사와 헌신의 행동도 해야 한다는 정신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5)라는 말씀에도 잘 제시되고 있다. 39) 2, 18, 20, 21, 45, 47, 72, 89, 93, 96, 97, 98, 99, 101, 110, 132, 144.40) Comm, vol 10. p. 393.41) Comm, vol 10. p. 395.42) "다윗은 예언의 영으로 말했으며, 따라서 장차 그리스도의 통치를 예언했다는 원리 또는 격언이 당시에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해석상의 원리를 인정한다면 다윗이 장차 그리스도께 육체적으로 임하실 것을 말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고 최고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Comm, vol 10. p. 396).43) Comm, vol 9. p. 216.44) Comm, vol. 24. p. 171.45) John, Calvin. 욥기 강해, 서문강역, 지평서원, 1996, pp. 40-42. cf) "그런데 기독교 학자들은 교회의 회복에 대해 선포된 예언을 모두 그리스도의 인격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된다고 엄밀하게 주장하는 점에서 과오를 범했고, 이렇게 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조롱 거리가 되었다"(Comm, 에스겔, vol. 23. p. 240).46) 2, 16, 22, 24, 45, 72, 110.47) (시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48) (마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9) Comm, vol 7. pp. 520-521.50) Comm, vol 7. pp. 524-525.51) 이런 연결 관계가 칼빈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다. "사탄이 인간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가장 치명적인 화살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롱으로 바꿈으로써 우리의 마음에서 소망을 제거해 버리려고 애쓰는 것이다. -- 이것이 다윗에게 얼마나 가혹한 시험이었겠는가 하는 점은 각자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안다(다윗에게). 그러나 그가 사용한 해결책은 하나님을 자기 마음의 진실성에 대한 증인과 인준 자로 삼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런 하소연을 가지고 감히 그분 앞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위선자로 볼 때마다(성도에게) 우리 마음의 내면적인 진실성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답변하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사단이 모진 모욕과 야비한 조롱을 통해서 우리 마음으로부터 신앙을 제거하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을 거기에 대한 증인으로 내세워 우리의 거룩한 닻으로 삼도록 하자. --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동일한 무기로 공격을 받으셨다는 점을(그리스도에게) 생각할 때 사탄이 주님의 지체인 참 신자들을 주님보다 더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들이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하더라도(성도에게), 그를 자신과 자신들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그들의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 사실을 숙고함으로써 자신들을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52) 1, 9, 10, 12, 14, 15, 19, 36, 37, 49, 50, 52, 53, 73, 78, 82, 112, 119, 127, 128.53) 이 시는 여러 가지 주제를 취급하고 있어서 그 내용의 개략을 말하기가 곤란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선지자는 주로 두 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면하는 것과, 율법을 기술하고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방법을 지적해 주어서 성도들로 하여금 전심으로 율법을 연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선지자는 이와 더불어서 여러 차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 의롭고 더욱 경건하게 살도록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목적으로 약속을 부여하고 있다.(Comm, vol 11. p. 21).54) Comm, vol 11. pp. 28-44.55)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은 다른 많은 것들을 그렇게 했듯이 유대인들로부터 이것을 어리석게도 모방하고 있다. -- 더욱이 성령께서는 바울의 입을 통하여 우리가 거기에서 그에 의하여 보장받은 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분별없는 열정일 뿐 아니라, 또한 악하고 강퍅스러운 외고집이라고 이 위험성에 대하여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Comm, vol 8. p. 113).56) 35, 58, 69, 83, 109, 13757)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안에도 이 저주시에 대한 부분을 잘못 이해해서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의 내용에 대해서 저주식의 기도를 하는가 하며 부흥사나 목사들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위협해서 헌금이나 교회 헌신을 강요하고 있기도 하다. 58) Comm, vol 10. pp. 374-378.59) Comm, vo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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