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
(1). 진짜 십일조를 찾아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십일조를 통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싶으셨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십일조를 드려야 했다면 그 십일조를 통하여 과연 그 어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웠어야 했을까요? 제1.위의글에선 십일조 도둑놈 찾기를 통해 '하나님을 시험하는 십일조'의 문제를 풀어갔었는데, 오늘은 먼저 진짜 십일조 찾기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에 접근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진짜 십일조라니? 그럼 가짜 십일조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예, 물론 가짜도 있지요. 현재 한국 교회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십일조가 바로 가짜 십일조입니다. 진짜 십일조는... 이제 한번 찾아볼까요?
우선 십일조가 세 가지 정도라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이 세 가지 십일조들이 각기 다른 '세 개의 십일조'인지 아니면 '한 십일조의 세 가지 다른 국면'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성경에서 언급하는 순서대로 첫째, 둘째, 셋째 십일조라고만 이름 붙여서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십일조"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십일조로 "레위인과 제사장과 나눠먹는 십일조(레 27:30-33, 민 18:21-32)"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십일조는 레위기 27:30-33에서 언급된 후 민수기 18:21-32에서 좀 더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며 그 모든 소산들은 여호와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그 고백을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주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스스로 취하시는 십일조입니다. 또한 이것은 구별되어 성전을 섬길 직분을 맡음으로 땅 분배에서 제외된 레위인들을 위한 생계의 대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십일조를 떼어 제사장들에게 주어야했습니다. 이 십일조는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고 또 교회에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십일조의 용도입니다.
"둘째 십일조"는 "축제에서 가족과 함께 나눠먹는 십일조(신 12:5-19, 14:22-27)"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신 12:5, 11, 14:23)'으로 가지고 나와 '온 가족(12:7, 12, 14:26)'이 함께 먹고 즐기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 제사의 큰 주제인 '여호와 앞에서의 음식 나눔'에 내포되어 있는 '거룩한 식사와 축제'라는 신학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함께 축제하며 또 함께 나눠 먹는 정신은 신약의 애찬(love-feasts)과 성찬으로도 이어지고 있어서 언약 공동체 내에서 영속적 가치와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유월절 등 절기 축제에 참여하는 경비와 또 함께 음식 나눔을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튼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가족들과 함께 즐기며 나누어 먹음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십일조는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것이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이해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십일조"로는 "이웃과 나눠 먹는 십일조(신 14:28-29, 26:12-15)"가 또한 명령되고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매 3년마다 한번씩 행하는 철저하게 나눔에 목적이 있는 십일조였는데, 수혜 대상은 레위인들과 객(이방인,개종자들)과 고아와 과부들이었습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들은 알다시피 구약에서 늘 언급되는 나눔과 구제의 대상이었기에 이 십일조는 특별히 약자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용도로 실시되었던 십일조였으며, 또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복에 대한 선포는 오직 이 십일조를 지키는 것에 대하여 선포되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일조 하면 워낙 '복'을 밝히는 백성인지라 좀 강조하여 밝혀야겠습니다.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당연한 하나님의 것을 바치는 것이기에 오히려 안 지키면 저주만이 선포되고 있지만, 가난한 이웃을 위한 구제의 십일조는, 물론 이 십일조도 명령이지만, 이 십일조는 잘 지킬 때에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9)"는 축복의 약속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 받기 위해 십일조 하시는 분은 전략적으로라도 반드시 구제의 십일조를 하셔야 그토록 원하는 복을 받을 수 있으므로 복 받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라면 이웃과 나눠 먹는 구제의 십일조를 하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양상의 십일조가 구약 성경에 율법으로 언급된 십일조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둘째 십일조'와 '셋째 십일조'에 대하여는 지금 처음 들으시는 분도 꽤 있을 것입니다.왜 그랬을까요? 왜 우리는 여지껏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잘 알고 있었는데 정작 십일조를 온 가족이 함께 나눠먹었다 라든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는 삼 년에 한번씩 따로 다시 십일조를 했고 특히 그 십일조에만 사실은 축복이 선포되고 있음을 왜 우리는 여지껏 제대로 몰랐을까요? 서두에서 현재 한국 교회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십일조가 바로 가짜 십일조라고 말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일조는 정작 십일조의 일부분뿐이었고 또 레위인이 사라진 지금 우리가 십일조를 해야할 이유가 있다면 오히려 둘째 십일조와 셋째 십일조가 강조되어 십일조를 했어야 하는게 논리적으로 맞는데,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관련되어 또 하나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는데, 십일조는 처음부터 성전 유지를 위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2). 성전 유지는 성전세로
위에서 이미 언급되었지만, 세 가지의 십일조 모두 '나눠 먹는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철저하게 나눠 먹을 수 있는 음식에만 국한되었으며, 그야말로 '나눠 먹는 것',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를 위해서는 '성전세(Temple tax)'가 있어서 그것으로 충당되었고, 건축을 할 때는 주로 자원하는 특별 헌금이나 헌물이 따로 드려졌습니다. 성경에는 성막을 만들었던 기록과 성전을 두 차례 건설하는 모습과 또 몇 번 성전을 보수하는 기록이 있지만 그 목적을 위해 십일조가 사용되었다는 언급이나 정황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십일조는 그냥 나눠 먹는 것일 뿐이었으니까요.
반면에 성전세는 출 30:11-16에 나타나 있는데, 성전을 위한 속전으로 20살 이상된 성인 남자가 반세겔을 드리도록 제정되었으며, 출 38;24-31에서 처음 거둬들인 성전세의 세목과 또 그 성전세가 성막 건축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대하 24장에 보면, 요아스 왕이 여호야다 제사장 생전에 성전 보수를 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요시야 왕은 성전 보수를 하다 율법책을 발견하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는데 그때에도 성전세로 거둔 은으로(왕하 22:4) 성전을 보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지난 글에서 대대적인 십일조 회복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느헤미야도 성전을 위하여는 십일조와는 다른 별도의 성전세를 거두었음(느 10:32)을 알 수 있는데, 느헤미야 시대에는 1/3세겔을 성전세로 바쳤습니다. 즉 성전세는 원칙적으로 1/2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으나 느헤미야의 시대와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대에는 그 세를 감하기도 하는 융통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십일조와 성전 유지는 상관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날도 십일조를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분들이 '성전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십일조는 성전 유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이 말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으며, 정히 그러하다면 지금도 예배당 건물 유지를 위해서 특별한 헌금을 하거나 아예 성전세처럼 일종의 회비를 내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며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잘못된 성경해석을 들이밀며 왜곡된 관점과 의도를 가지고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종교적 횡포일 뿐 결코 정당하고 바른 목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돈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인하며 고백하는 행위에 다름이 아니며, 결국은 돈 때문에 진리를 팔아먹는 행위라고 지탄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전세는 세겔이라는 돈으로 드렸지만 십일조는 아예 돈으로 바칠 수도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토지 소산과 가축 이외의 다른 소득에 대하여 십일조를 내라고 한 경우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돈으로 십일조를 낼 수도 없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돈으로 십일조를 내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4:24-27을 보면, '둘째 십일조'인 축제의 십일조가 설명되고 있는데,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를 가지고 가기에 성소가 너무 먼 경우에는 일단 돈을 가지고 가서 성소가 있는 곳에서 다시 십일조에 해당하는 물품들을 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레위기 27:31에 보면 '사람이 그 10분 1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5분 1을 더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해 돈으로 대신하려면 10분 3에 해당하는 금액을 내야 한다는 말이며, 더구나 제사장은 그 돈을 십일조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십일조에 해당하는 물품을 사야만 했습니다. 쉽게 말해 돈으로는 안받겠다는 말씀이지요.
어찌보면 참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법규정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멀리 있는 사람이야 당연히 돈으로 바치는 게 훨씬 쉬울 것이며, 제사장들이 모든 돈을 거두어서 일괄 구입하여 분배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며 경제적입니다. 그리고 예리하신 어떤 분들은 그 당시는 화폐 유통시대가 아니었다 할런지도 모르겠는데, 그것도 전혀 아닙니다. 이미 화폐는 아브라함 이전부터 널리 유통되고 있었고(창 23:12-16) 또 십일조보다 앞서 성전세는 이미 돈으로 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돈으로 내려면 3배를 내라고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억지로라도 그것들을 이고 지고 끌고 성전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왜 이렇게 비합리적인 요구를 십일조에 하고 계실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십일조는 단순히 하나님의 것이기에 바치라는 것 이상의 그리고 복 받기 위해 바치라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특별하신 의도와 목적이 있음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것을 성전까지 네가 직접 이고, 지고, 끌고 와서 예배와 축제를 드리며 바쳐야 하고 레위인들과 온 가족들과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나눠먹어야 한다"라는 것이 십일조에 대한 정확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3). 토지는 다 여호와의 것이니
그럼 이제 그 시대로 돌아가 한번 상상을 해 보겠습니다.
구약 시대의 한 농부가 있어서 추수를 마친 후 지키는 절기인 수장절(초막절)을 지키고 또 십일조를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의 마을은 예루살렘과 사흘 길이나 되었기에 그는 결국 밀을 이고 지고 양을 몰고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일년 동안 수고하여 수확한 농작물을 이고 지고 또 애지중지 자식처럼 키웠던 양을 몰고 예루살렘을 향했던 그 사흘길 동안 그 농부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니 어떤 생각을 하길 하나님께선 기대하셨겠습니까? 올 한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수확을 얻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구약 시대에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5:23에 보면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 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토지 소산의 10분 1이 여호와의 것이라고 한 것은, 토지가 여호와의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우기 위함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토지가 안식했던 안식년에는 모든 백성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십일조는 레위인을 위한 생계보장책 이전에,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라는 신앙고백인 동시에 땅을 주시고 또 한 해 동안 그 땅에서 넉넉히 수확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토지 분배가 골고루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는 분량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즉 십일조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내면서 생색을 내는 사람도 없었고 십일조를 적게 낸다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두 땅이 분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원칙적으로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안식년 제도와 함께 '모든 토지는 다 여호와의 것'이라는 고백을 요구하셨던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것인 토지를 인간들 욕심에 따라 투기의 대상으로 삼은 결과 이 지구상의 무수한 백성들이 이제는 땅 한 평 없이 살아가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으며, 한국은 그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대형교회들을 필두로 대부분의 교회들은 십일조로 모은 막대한 돈으로 부동산 투기꾼 못지 않게 땅들을 사들여서 건물 짓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땅을 사들이고 값이 오르면 그 땅을 팔아서 더 큰 땅을 사고 건물짓고...
다른 명목의 헌금을 그렇게 사용했어도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일인데 하물며 십일조의 명목으로 들어온 헌금으로 땅을 사고 앉았으니, 십일조를 제정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통탄해 하실 일이겠으며, 교회들 스스로가 이미 십일조를 무효화시킨 꼴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십일조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오히려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어서 무엇보다 토지 분배가 즉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역설하며 힘쓰는 것이 오히려 십일조의 정신을 오늘에 바르게 살리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토지나 부의 분배가 공정하고 공평하게 이루어져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여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들의 십일조가 참으로 이러합니까? 아니면 정확하게 그 반대입니까? 사실은 정확하게 그 반대입니다. 죄송한 인신공격이지만 강남에 몰려있는 그 유명한 한국 대형교회들의 출발이 강남 지역의 개발로 하루아침에 땅 부자가 된 졸부들에 의하여 급격하게 성장하였음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무조건 십일조를 많이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포하며 땅 부자 졸부들의 양산을 합리화시키며 나아가 교회들 스스로가 그 졸부들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습니까? 형편이 이렇게 분명한데 도대체 왜 지금도 돈에 환장하고 땅에 환장한 그 교회들에다 십일조를 한단 말입니까? 분별하셔야 합니다.
최소한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나의 십일조를 가지고 축복의 도구로 협박하거나 땅 사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면 감히 제가 당부드리거니와 지금 당장 그 십일조를 그만두십시오. 그건 동일한 죄악에 동참하는 결과만 낳을 뿐입니다. 교회에 드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냈다고 스스로 안위함으로 누리는 그 값싼 평화에 안주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더 분명하고 좋은 길이 당연히 있습니다.
(4).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토지 소산의 십분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는 의미 속에는 안식년 제도와 같이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다는 사상과 고백 속에는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와 경제제도에 대한 기대와 이상이 담겨 있어서,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며 평균케 하려는(고후 8:13-15)'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적인 사회의 경제 제도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단순히 하나님의 것이니까 바쳐야 한다는 이해와 적용은 충분하다고 보기 힘들며 더 구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신 것이 매 삼 년마다 드렸던 '구제의 십일조'입니다.
물론 십일조 자체가 '나누어 먹는 것'이었고 그래서 음식에 국한 됐었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토지 소산인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십일조로 바쳐야 한다고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서 꼭 확인해 보십시오. (신명기 12:17, 신명기 14:23, 느헤미야 13:5, 느헤미야 13:12) 한결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올리브유)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품목의 공통점은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소와 양 떼들 중에서 취했던 십일조 역시 제사를 드린 후 함께 나누어 먹었던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그야말로 동물성과 식물성이 골고루 갖춰진 음식인 셈이지요.
왜 십일조는 한결같이 먹을 수 있는 음식만을 내어놓으라고 하셨을까요? 당연히 나눠 먹으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나눠 먹어야 했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나눠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눠 먹었던 십일조가 레위인들에게는 그 몫이 돌아갔던 것 같은데, 가난한 자들에게까지는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셋째 십일조'인 구제의 십일조를 다시 제정해서 아예 삼 년마다 한번씩 더 지켜야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번 더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 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 정신은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시옵소서(잠 30:8)"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라는 바로 그 기도들과 맞닿아 있었던 것입니다. 잠언 30장 아굴의 기도에서 '필요한 양식'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찢어진 내 몫'이라고 앞선 23호글 "한 나그네의 기도"에서 언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큰 빵 덩어리를 함께 뜯어먹는 그들의 식습관이 반영된 의미이며, '찢어진 내 몫'은 또한 제 몫을 갖지 못한 이웃에 대한 돌아봄을 함의하고 있는 생각이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그리고 이 기도가 예수님에게 이르면 아예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으로 좀 더 구체화됩니다. 즉 이 땅에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자가 없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면 그러한 자들과 우리가 함께 나눠 먹겠다는 나눔의 기도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다는 고백은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관심인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그 십일조가 돌려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그렇게 실현되길 실천한다는 고백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5).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
성경의 모든 기록과 가르침은 주 너의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배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십일조를 하든 무엇을 하든 그것을 말씀하신 이유이며 또 우리가 순종함으로 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 제도를 이스라엘에게 주셨을 때, 그것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일조를 행함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그 백성답게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에선 분배받은 기업이 없거나 또는 소외되고 가난함으로 눈물 흘리는 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선 땅이나 돈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함께 나누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일조 제도를 통하여 그같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십일조를 바르게 행함으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관심을 알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십일조를 통하여 '경제 정의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십일조를 통하여 '나눔의 삶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 십일조를 행하고 있다면 그 공동체는 반드시 '평균케 되는 원리'가 현실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입고 성령으로 충만했던 공동체는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십일조가 문제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행 2:44,45)' '평균케 되는 원리의 삶'이 문자 그대로 실현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것이 예수의 피로 구속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모든 율법은 은혜 아래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가 추구했던 '평균케 되는 원리의 삶' 역시 이렇게 은혜 아래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완성된 모습을 성경은 이미 우리에게 좋은 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다시 십일조로 돌아갔습니까? 십일조는 이제 우리의 목표가 아닌데 왜 겨우 십일조가 다시 목표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헛되게 하는 일이며 스스로 성령으로 충만치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일 뿐입니다. 예수를 알고 성령을 아는 사람은 결코 십일조의 그늘 밑에 안주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십일조 다 냈다고 스스로 자위하며 자신의 의를 쌓아갔던 그 옛날 바리새인들의 삶으로 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까? 그것들 때문에 우리 주께서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셨고 피흘리기까지 하셨는데 왜 그 피흘림을 계속 헛되게 하고 있습니까? 겨우 십일조 따위로 하나님의 뜻을 팔아먹고 겨우 십일조 따위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나 한심합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십일조와 헌금을 통하여 '평균케 되는 삶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면 불행히도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리고 물론 십일조 천 수 백년 했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평균케 되는 원리가 제대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이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그 율법들을 완성하신 것이며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훨씬 넘어서서 하나님의 공동체 모두가 평균케 되기 위하여 사실상 내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이, 은혜와 성령의 시대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그런데 율법인 십일조를 앞장세워 성령 충만한 공동체의 모습을 아예 포기하게 만든 것은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경고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막 3:28,29)'는 결코 멀리 있지 않으며 또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진정 성령 받으셨으며 그 성령으로 충만하십니까?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십일조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우려하고 있는 점은,
첫째 마치 십일조 거부가 헌금 거부로 인식되어 엉터리 신자들의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지금껏 십일조 헌금을 참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물질의 청지기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드리고 있는 대부분의 성도님들에게 혼란과 우려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오늘날 한국교회의 잘못된 십일조는 일차적으로 목사들과 교회 구조에 있으며,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목사인 제가 앞으로 해야 할 사역에서 제 스스로의 사역에 대한 쐐기를 박기 위하여 쓰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주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번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구속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은 분명히 십일조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말씀했던 것처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갈 5:1)" 하지만 또한 동시에 이제는 "서로 짐을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하는(갈 6:2)" 어쩌면 더 무거운 짐을 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제시한 이 원리는 율법을 넘어서야 하는 모든 일들에 언제나 원칙으로 제시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십일조와 헌금에 대하여 좀 더 깊고 진지한 생각과 묵상들이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의 지갑은 회개하지 않고 영혼만 회개하겠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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