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 예수께서 가르치신 십일조
(1).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
윗 글에서 보았듯이 십일조에 대한 규정들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명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십일조가 세 가지 용도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셋째만 다른 십일조로 보며 결국 두 가지 십일조가 있었다고 이해하는 자들도 있으며 또 물론 각각 독립적인 세 가지의 십일조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열심히 많았던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십일조를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가장 보편적인 종교인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를 따른 다면, 사실은 매년 10의 2를 드려야 했으며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와 절기와 제사를 위한 십일조- 더구나 제3년에는 '구제의 십일조'를 포함한 세 가지 십일조를 다 드려야했기에, 매 3년째는 거의 십분 삼을 십일조로 내어야 했으며 실지로 그들은 그렇게 십일조에, 아니 십이조와 십삼조에 열심을 냈었습니다. 이 점을 보아도 역시 오늘 한국교회들의 십일조는 그 근거가 모호함이 다시 한번 더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저것도 버리지 않는(마 23:23)" 십일조를 한다면 사실은 최소 2/10 이상을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더 나아가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뿐만 아니라 화폐를 포함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한 예로 누가복음 18:12에 보면 자신의 종교행위를 자랑하며 기도하는 바리새인이 나오는데 그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역성경에는 '소득' 앞에 나오는 panta '판타(모든)'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가 빠져 있는데, 원래는 '판타'가 있어서 '모든 수입'이라고 해야 하며, 공동번역과 표준 새번역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이 바리새인은 다른 백성들은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만 드리지만 자기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백성들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금식하지만 자기는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이나 금식한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물건을 살 때조차도 산 값의 십일조를 떼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판 사람이 십일조를 떼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는데, 이 정도면 거의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 아닙니까?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논쟁과 마찬가지로 십일조 논쟁을 오랫동안 치열하게 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식물이 어느 정도까지 자랐을 때 십일조의 대상이 되는 지, 자생 식물이나 양념류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 지, 또 자생 식물에서 씨를 얻었을 때도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 등등을 따지고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짓들이지요. 그러나 이게 그 옛날 바리새인들만의 모습이라 생각하십니까? 은행 이자에 대해서 십일조를 해야 하는 지, 십일조를 제한 후 받은 용돈에 대해서도 자녀들이 또 십일조를 해야 하는 지... 그래서 한 라디오에서 상담하는 목사님은 바로 그렇게 골치 아프고 율법적(?)이 되기 때문에 아예 십이조를 하라고 권고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그 같은 상담의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 다만 그 목사님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역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꼭 같은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을 양산하고 있음이 자명합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고 나서는 그 다음부터는 십일조 도둑으로 몰아부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은 잠시이고 십일조 도둑의 불명예는 아예 영원하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마태복음 23:15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여기서 '지옥 자식'을 '도둑 자식'으로 바꾸면 꼭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한 술 더 떠서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고 더 큰 소리를 칩니다. 그러면 아무리 '도둑 자식'이 되어도 꼼짝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는데, 뭐 달리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도둑'의 멍에를 쓰고라도 십일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진정 그렇게 가르치셨던가요?
(2). 이것이냐? 저것이냐?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하라고 가르치셨다고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말씀은 누가복음 11:42과 마태복음 23:23입니다. 같은 내용이기에 마태복음 23:23을 기본 본문으로 택하여, 과연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치셨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먼저 문맥을 봐야겠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문맥을 보면 80%가 보입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마태복음 23장은 그 한 장이 통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그 무서운 책망의 말씀에서 '십일조를 하자'는 그 엄청난 '긍정'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엄청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엄청난 긍정을 하자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그랬다면 바리새인들은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 뛸 만한 격려를 받은 셈이 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첫 포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23:2)"로 시작됩니다. 누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 누가 율법을 알고 진리를 안다고 말하며 가르치려하고 있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칭 선생이며 지도자라고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과연 그들이 율법을 제대로 알고 있으며 과연 그들이 진리를 가르치고 증거하는 선생과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지를 따져보자는, 아주 논쟁적인 서두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23장 전체는 이 서두에서 밝히신 논점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논쟁이 계속됩니다. 즉 그들의 성경해석이 옳은가 라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언급된 23:23의 말씀은 "화 있을진저!"라고 시작되는 7개의 문장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화 있을진저!"라고 번역된 헬라어 ouai '우아이(ouai)'는 구약의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으로 '고뇌 혹은 절망의 외침' 그리고 '확실한 저주와 심판의 선포'가 선언되어질 때 내뱉는 '선지자의 독설'적 표현으로, 그 당사자를 이미 저주와 심판 받아 죽은 자로 여기고 그들 앞에서 향을 피우고 곡(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강력하며 분명한 저주와 심판의 선언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이 본문에도 7번을 거듭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심으로 이 선언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7'이라는 그 숫자가 암시하듯이 완전한 저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네 번째 화를 중심으로 첫 번째와 일곱 번째, 두 번째와 여섯 번째, 세 번째와 다섯 번째 화들이 상호 대칭적 관계를 이루어서 구조적으로도 '완벽한 화'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A. 첫째 화(13절) -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아니함
B. 둘째 화(15절) - 해를 더 끼치는 형식적인 열심
C. 셋째 화(16-22절) - 성경을 잘못 사용함
X. 넷째 화(23-24절) - 더 중한 것을 의도적으로 배척함
C'. 다섯째 화(25-26절) - 성경을 잘못 사용함
B'. 여섯째 화(27-28절) - 해를 더 끼치는 형식적인 열심
A'. 일곱째 화(29-33절) - 선지자를 배척하는 자들의 자손(즉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음)
이와같은 대칭적 구조에선 항상 가운데 있는(X) 말씀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는 성경에서 자주 발견되는 구조입니다. 즉 첫째, 둘째, 셋째 화가 주로 그들의 외식과 위선을 '포괄적'으로 겨냥한 책망이었다면, 중심에 있는 네 번째 화는 그와 같은 외식과 위선을 낳은 '원인적' 이유 즉 '율법의 본질인 의와 인과 신을 버리고 형식만 의도적으로 취한'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러므로 넷째 화인 23절의 말씀에서 십일조는 그저 '율법에서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을 버린' 대표적인 잘못의 한 예로 든 것인데, 이 말씀에서 오히려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오는 것은, 아!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솔직히 필요한 표현을 못찾겠습니다.
그리고 23절 그 말씀을 좀 더 자세하고 꼼꼼하게 살펴보면, 먼저 예수께선 그들이 하고 있었던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예로 들고 계신데 -누가복음에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 도대체 박하와 회향이니 운향과 근채니 이런게 무언지나 아십니까? 사전을 찾거나 영어 단어와 비교해 보시면 이것들이 민트, 허브 등의 향신료 종류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 언급된 품목들은 위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논쟁하던 바로 그 품목들인데, 하나같이 개인의 밭에서 정성 들여 김매고 키우고 하는 것들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씨만 뿌려 놓거나 아니면 들에서나 산에서도 구할 수 있는, 우리로 말하면 파, 마늘, 깻잎, 들깨 뭐 이런 양념 종류들과 심지어 들풀에 대한 십일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까지 당시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이것을 예수께서 기특하게 여기셔서 황당한 '양념'의 십일조를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주장도 말이 안되는 소리지만, "이것들도 버리지 말고 저것들도 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예수께서 십일조를 지지하셨으니 우리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황당하다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십일조를 강조할 구실을 찾긴 찾아야 할텐데... 고민하다 결국 찾아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기에 앞 뒤 가리지도 않고, 게다가 가장 권위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니 더욱 금상첨화였겠지요. 그래서 냅다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해라 하셨다고 소리 지른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읽어보면 이 말씀에서 '이것'과 '저것'을 지칭하는 지시사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태라는 사실도 쉽게 알게 됩니다. 즉 복수형 tauta'타우타(이런 것들)' , kakeina'카케이나(저런 것들)'로 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도 행하고 저런 것들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의와 인과 신'을 지칭함을 쉽게 알 수 있으니 그렇다면 '저런 것들'은 무엇을 가리키겠습니까? 표면적으로야 '박하와 운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가리키지만 그건 '십일조'라는 한 가지 아닙니까? 더구나 그런 십일조는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지어낸 얼토당토않은 것이기에 그렇다고 수긍하기도 힘듭니다. 결국은 문맥 전체를 보는 것이 타당한데,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 '버릴 수 없는 저것들'은 십일조를 포함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다양한 제사 행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선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 전체를 책망하기 위해 여러 왜곡된 신앙 행위들 중에서 특별히 십일조를 한 예로 드신 것 뿐입니다. 즉 예수께선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각종 예물을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는 것이며, 실지로는 그와 같은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맥인 23:16-22에 보면 예수께선 여전히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십일조를 비롯한 여러 제사 행위들을 인정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께선 율법 아래 나셔서 난지 8일만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셨고 12살이 되었을 때는 율법에 따라 성인식 결례를 치르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셨으며, 유월절이나 여러 절기들을 지키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도 몇 번 올라가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성전세로 은전 1세겔을 바치기도 하셨습니다(마 17:24-27). 오히려 십일조는 예수께서 직접 바치셨다는 기록이 없지만 성전세는 자신의 몫인 반 세겔을 바친 기록이 있는데, 왜 한국교회서 성전세를 바쳐야 한다는 소리는 없는 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아니나다를까 일종의 성전세를 요구하는 곳도 있긴 있습니다. 바로 제가 속한 장로교 합동 총회는 '세례교인 의무금'이라는 게 몇 년 전부터 생겨서 실시되고 있는데, 그 취지가 성전세와 비슷합니다. 말 그대로 세례 교인으로서 의무금을 총회에 낸다는 것인데, 1년에 5000-10000원을 '의무적으로'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 교인이라고 의무금을 총회에 낸다는 발상 자체가 우선 황당합니다. 그게 구약 시대에 성전세를 냈던 것이나 아니면 중세 때 면죄부를 거두었던 논리하고 뭐가 다릅니까? 더구나 위대하신 우리 총회는 의무금을 노회별로 할당해서 독려하고 또 제대로 의무금을 안 낸 교회에는 행정적인 제약을 줘서 각종 증명서류들을 발급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지로 의무금을 안냈다고 한 개척교회 목사님은 소속 증명서를 거절당했으니까요.
아무리 썩어빠진 국가라도 아직 세금 안냈다고 국민에게 호적 등.초본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는 소리는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무금이 신학교나 신학생들을 위해서 일정 부분 정확하게 쓰여진다든지 아니면 농어촌 교회들과 개척교회들을 위하여 쓰여진다든지 하는 명확한 사용근거라도 있으면 기꺼이 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밝히지 않고 내랍니다. 그리고 안내면 조직의 쓴 맛을 보여 주겠다는 건데, 이건 완전히 조폭의 논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고 그야말로 '강도의 굴혈'입니다. 그런데도 수십 수백 억이 집행되는 이러한 일들이 아무런 공론화의 절차없이 일방적으로 시행되고, 사정이 이래도 그대로 순응하며 착착 의무금을 내고 있는 모습은, 가히 '조직의 힘'이며 솔직히 저로서는 종교가 타락하는 최종 단계인 '집단 최면 현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전세 때문에 글이 좀 샜습니다만, 아무튼 예수께선 살아 계셨던 동안에는 율법과 성전을 부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십일조는 지적하고 계시지만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도 시대적인 문맥에서 파악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셨으니 성전이 없는 지금도 성전세를 내자고 할 것이며 그리고 나병 같은 병이 나았으면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지금도 제사장에게 아니면 목사에게 가셔 보여야 한다고 할겁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우리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그렇게 예배하는 '안식교'를 이단으로 분별하는 것은 잘 하면서 왜 십일조는 여전히 드려야 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 말씀으로 억지를 부리며 기를 쓰며 십일조를 주장하는 분들에게 또한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이 그렇다면 그 십일조 행위를 통하여 예수께서 먼저 지적하셨던 '이것도 행하고' 있습니까?
(3). 예수께서 가르치신 십일조 - 의(義), 인(仁), 신(信)
예수께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물질을 드리는 것 보다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먼저 행하라고 가르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곧 이은 뒷 절에서 이 두 차이점의 간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풍자하여 말씀하시길,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제 기억으론 예수님의 말씀중 가장 엽기적인 표현으로 이 지독한 모순을 강조하여 비판하심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즉 들깨나 깻잎 따위를 십일조 하려는 그 사소한 일에는 목숨을 걸었지만 정작 중요한 본질인 정의(justice)와 자비(mercy)과 신의(faithfulness)는 안중에 없었던, 소탐대실(小貪大失)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목구멍으로 낙타를 삼키는 -더구나 낙타는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받던 동물이었습니다-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의 십일조와 그들의 종교 행위를 바라보셨던 예수님의 판단은 이와같이 분명한데, 다시 또 낙타를 삼키는 일을 강요하는 '소경된 인도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이 실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십일조의 본질 나아가 모든 율법의 본질은 예수께서 명확하게 지적하신 것처럼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fulness)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병행되는 구절인 누가복음에선 11:42에서는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지난 글(32호)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에서 살펴보았던 세 가지의 십일조가 함의하고 있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기도 합니다.
십일조는 안식년 제도와 함께 땅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대한 고백으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소산이 주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고백하는 신(信, faithfulness)의 행위이며, 나아가 '경제 정의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방편이었으며 그 실천 윤리였기에 의(義, justice)의 행위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의 나눔에 가장 기본적인 취지가 있었으며 또한 특별히 셋째 십일조를 따로 제정하실 만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나눔을 강조하셨던 인(仁, mercy)의 행위로 '나눔의 삶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편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같이 십일조를 바르게 행함으로 '평균케 되는 삶의 원리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즉 '의와 인과 신'이 그 중심되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담긴 행위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경된 인도자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켜버림으로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사라져버리고 '박하와 회양과 근채'를 붙들어서 그 푸성귀 몇 포기에 자만과 위선과 탐욕을 담도록 인도하고 있었으니, 예수께서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화 있을진저!"를 일곱 번씩이나 외치셔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기를 쓰며 강조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십일조는 과연 '의와 인과 신'을 행하는 '이것도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인과 신'이 지배 원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강자가 약자를 무참하게 짓밟는다거나 많이 가졌다고 해서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하고 유린하며, 그러고도 더 가지기 위한 불의와 불법만이 성행함으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는...(딤후 3:2)" 삶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곳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공정하고도 정당한 선의의 경쟁과 도리어 양보하고 손해보는 것까지라도 할 수 있는 미덕과 그리고 피차 신뢰하며 존중할 수 있는 진실과 사랑이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그 땅의 빛이요 소금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청결하고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임, 그곳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있는 사회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기도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행하라고 명령하셨을 때는 바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 소망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주신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한번 더 강조하셨던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꿈꾸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는 바로 그렇게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율법의 행위인 십일조로는 그 소망을 한번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고 그나마 성전이 완전히 붕괴됨으로 그 최소한의 명분마저도 사라진 지 이미 2000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의와 인과 신'이 이미 사라졌기에 성전을 거두어 가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2000년이나 죽어있던 불씨를 다시 살려내며 역시 2000년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의와 인과 신'은 버리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게' 하는 '소경된 인도자'는 또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렇다면 십일조 없는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의와 인과 신'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성전을 거두심으로 십일조를 그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젠 어떠한 방편으로 '의와 인과 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하나님의 뜻인 '의와 인과 신'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다음 글 <헌금하는 사람, 연보하는 사람>에서 십일조에 대해 써 왔던 지금까지의 글에 대한 결론을 맺으며 십일조를 넘어서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가야 할 '연보'를 그 성경적 대안으로 제시하겠습니다.
(4).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음성을 빌어 헌금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말씀은 마태복음 6:19-21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래서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적용하며 강조합니다. 그러나 과연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곧 보물을 하늘에 쌓는 행위일까요?
그 말씀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유지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역 즉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네 삶의 방향을 맞추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란 또 무엇입니까? 예수께선 요한복음 6:29-30의 대화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즉 밝혀주신 그대로 하나님의 일은 '믿음에의 투자' 즉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에 투자하고 힘쓰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보물이 있는 곳'이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또는 '우리의 가치관과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물은 꼭 돈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그 어떤 것'으로 '보물=돈'이라는 공식은 사실 너무 단편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이해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돈이 아니라 우리 삶의 우선 순위와 가치관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본문의 바른 이해입니다. 즉 지금 예수께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아는 일에 너의 보물-너의 우선 순위와 가치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어지는 뒷 절의 말씀을 또한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뒷 절의 말씀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을 것이니..." 라는 말씀인데, 아니 갑자기 웬 시력(?) 이야기가 나옵니까? 이 말씀은 눈 나쁜 자들을 상당히 기죽이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그렇습니까? 이 말씀은 앞에서 말씀하신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의 말씀입니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며 마음이 바르게 정해져야 인격 전체에 건강과 온전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앞 말을 부연하고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자 예수께선 우리의 '심안'과 '육안'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을 것입니다. 즉 바른 관점을 가져야 모든 것이 밝게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본연의 가치와 관계 속에서 보게 되지만, 반대로 땅에 속한 것을 보물로 삼은 자는 그 시각이, 그 가치관이, 그 우선 순위가 왜곡되어 사실상 모든 것을 오도하게 되고 영적 어두움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보물을 돈으로 보는 시각'이야말로 오히려 '눈이 나빠서 어두움에 빠져있는' 대표적인 모습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또 이어지는 24절은 더 분명하게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땅'과 '하늘'중 네가 분명히 선택하라고 다시 다그치고 계시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25-34절의 말씀도 꼭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6장은 19-34절까지가 같은 주제로 하신 말씀인데, '너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 주제이며, 이 모든 것의 결론적인 말씀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땅의 보물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큰 문맥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그 말씀을 바르게 본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으로 무작정 헌금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본문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며 아전인수격으로 오용하여 헌금만을 강조한 결과,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은 헌금은 잘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그 삶과 가치관은 전혀 변화가 없는 이상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가치관과 삶의 자세가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나라에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바뀐 가치관과 삶의 자세로 열심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면 내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보물이 되어 하늘에 쌓이는 것이지 내가 낸 돈들이 하늘에 쌓여 천국 통장의 잔고가 늘고 내가 천국에서 더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사이비 종교의 가르침이지 참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기 위하여 먼저는 나 자신의 삶의 자세와 모든 가치관들을 그리고 나아가 이 세상의 소중하고 중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진리 앞에 쳐서 복종시켜 이 모든 소중한 만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내가 맡은 자리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제발 좀 그 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가장 비성경적이며 또 모든 악의 근원이기에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시는 바로 그 돈으로 하나님을 팔며 신앙을 팔고 있는 그 추악한 행위들을 그쳐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와 평강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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