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은 신앙으로 가는 길 (2)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목차>
9. 심은대로 거둔다(갈6:6-10)
10. 전도(고전1:21)
11. 생명의 법(출19:5-6)
12.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까지(고전10:1-13)
13. 외모를 보지 마라(약2:1-9)
14. 봉사론(삼상30:1-6)
15. 신자의 존재론(빌1:12-18)
9. 심은대로 거둔다(갈6:6-10)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을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자신들이 심은 것을 근거로 육체적인 것만을 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거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따금 ‘육체로 심는 자는 아무 것도 못 얻고 신령한 것을 심는 자만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로 심어야 육체를 거두는 법’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투자도 하고, 또 일도 해야 합니다.
‘신령한 것으로 심고’ 즉 하나님께 요구를 하면 하나님은 신령한 것으로 답해 주십니다. ‘신령한 것으로 심으면’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녀를 위해서 기도를 하면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 속에서 그 은혜를 입는 자로써 크게 된다는 말입니다.
공부를 잘할지 못할지는 ‘공부에 관한 문제일 뿐 신령한 문제는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 풍토는 이렇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 축복받고 물질 축복을 받지 못하면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더 깊은 신앙의 경지인 하나님이 우리를 신령한대로 쓰시고 신령한 것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들을 물질적인 축복이 병행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는 식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많이 시험받고 낙심과 좌절감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육체로 거두고 싶으면 육체를 위하여 심으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신령한 것으로 거두고 싶으면, 즉 성령으로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교만하거나 낙심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정당하고 성경이 약속한 옳은 것이며 그것이 세상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뒤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9-10)
신자가 ‘교만한 것’과 ‘낙심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시험이 더 많습니까? 막상막하입니다. 우리는 늘 교만합니다. 교만한 이유는 무지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아무에게나 그 공식을 갖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단순하지 않습니다.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할 만큼 신앙은 깊고 풍성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은 부활신앙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를 믿자마자 닥치는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낙심’입니다. 신앙 생활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기도 합니다. 신자란 참 외롭다. 서로 격려하고 돌아보라는 명령을 받고 실은 그렇게 해주어야 설 수 있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여기에 관한 근거 구절이 고린도전서 15장에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 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0-58)
이 말씀은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땅속에 묻히고 썩을 것입니다. 이것을 주 안에서 ‘잠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있지 않고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다 부활할 것이니라’ 진술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자간에 서로 넘어지지 않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썩은 시체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만일 일어났다면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일으켜짐을 받은 것입니다. 57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김을 주는 것’입니다. 사망을 어떻게 이깁니까? 그가 ‘이김’을 주시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신앙의 중심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좌절하고 넘어질 때마다 이 생각을 하자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서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7-58)
신자끼리는 서로 권면하여야 합니다. 좌절이란 결국은 자신의 일로 생기는 것입니다.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바로 이 대 명제를 소홀히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좌절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좌절하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며, 위 명제를 각자가 내적인 힘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며, 바로 이것이 끊임없이 성령 안에서 씨를 뿌려야 하는 우리의 일에 힘을 주는 근거라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10. 전도(고전1:21)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전도란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은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방법과 내용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왜 꼭 십자가라는 방법을 사용하셔야 했을까요? 신자들이 왜 꼭 그 방법이어야 했느냐 묻는 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신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들이 볼 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됩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구원이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고린도서는 이 사실을 말하면서 분쟁에 관한 경고로 가득차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구원문제가 자신들에게 근거가 있다고 생각해서 일어난 싸움들입니다.
‘나는 너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사도 바울은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너희의 무엇이 남보다 낫다는 말입니까? 너희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 너희가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만들고 너희가 생각하는 그래서 네가 얻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 아닙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전도가 기술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전도인들이 여러 가지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방법들을 고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방법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열심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전도를 잘하는 것, 테크닉화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정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에 대한 우리의 열심이고 정성이지 ‘그래서 전도가 잘된다’는 법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도란 ‘미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방법’을 우리에게 요구하여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방법으로 해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반석에서 불이 나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 사건을 살펴보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사사기 6장에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그에게 전하는 어떤 명령을 듣고 기드온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명령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제사를 드릴테니 받아 달라고 제안합니다.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삿6:19-21)
무교전병을 반석 위에 두고 국을 쏟았습니다. 그 후에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이 대매 불이 나왔습니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기드온으로부터 불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반석에서 나왔습니다. 기드온은 단순히 지팡이가 되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기드온은 지팡이로 쓰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기드온을 용사로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기드온을 들어 쓰셨으며, 그 지팡이를 움직이므로 시선을 끌었습니다. 시선을 반석 앞으로 잡아끌었고 불이 실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전도’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은 지팡이에 불과한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함으로 모든 사람의 시선을 우리가 믿는 것과 전하는 것으로 이끌어 옵니다. 그것이 방법이 되어서 한 영혼이 중생하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한 생명을 구원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 일에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지팡이로 써서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시선을 끌어 모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겠다고 복음을 전하도록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야만 구원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일이 이루어지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 우리들을 들어 쓰시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우리를 동참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내 능력 내 수준에 의한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값없이 부르셨고, 다만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사 구원하신 것처럼 오늘도 한 영혼을 구원하시며 그런 일에 나를 쓰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이 가장 잘 나타내는 방법 또한 전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쓰임 받고 그것의 방법 자체가 전도라는 것으로 그렇게 그 일에 일조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오늘도 역사 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사람들을 사망의 자리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사역을 하는 줄을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전도를 자기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전도를 해서 열매 없는 사람을 깔보거나 자기만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착각은 전도를 하고도 감사가 없습니다. 지팡이 같은 차원에서 전도자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못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에 있어서 미련한 방법을 동원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안다면 자랑대신 늘 감사가 있을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전도란 한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제일 나쁜 방법인 셈입니다.
전도란 논쟁이나 기적적 증명이나 또는 권세 같은 것이 전혀 배제된 평범한 신자의 가장 평범한 권면이기에 사실 죄의 사슬과 그 권세를 깨뜨려 죽은 생명을 소생시키는 방법으로는 가장 무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 무력한 즉, 미련한 방법을 쓰셔서 하나님께서 지금 구원을 베푸시며 역사하심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1:26-31)
하나님께서 그의 일군을 부르실 때 지혜자나 능한 자를 뽑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지혜 있는 자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깨우쳐 주시고 값없이 주셔야 얻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을 모두 구원을 얻은 자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자신이 얻은 구원과 자신이 깨달은 복음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전도에 기도가 없어진다. 방법을 기교화 하고 정교화 해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게 되어 서로 다투고 경쟁만 합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은 은혜를 구하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시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요 구원의 문을 지금도 열고 계신 것이기에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누가 마음이 변하여 감동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오늘도 죄의 사슬을 깨뜨리시며 어두움에 있는 영혼들을 불러 내신다는데 가만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11. 생명의 법(출19:5-6)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미래가 완료가 되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오늘 본문 출애굽기 19장 5-6절과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똑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는 내용의 약속을 미래형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래형이기 때문에 어떤 조건이 붙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이 결과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은 완료형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네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이 ‘무엇으로 완성되었기에 이 미래형 약속들이 완료형이 되었습니까?’ 조건의 자리에 바로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요 전부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부활이라는 문제는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미래형으로 인식되어 그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많음을 보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조건을, 신약에서는 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며 그러기 위하여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것과 그 거룩이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성되는가 하는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신구약이 다같이 거룩을 요구하고 있으되, 구약은 그 거룩이 어떤 의미에서는 ‘조건’으로 요구되고 있지만 신약에 와서는 ‘이미 완성되어진 것, 얻어진 것’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같은 거룩이 구약으로 요약될 때는 율법적 성격과 심판의 성격을 띄고, 신약에서는 사랑으로, 믿음으로, 소망으로 가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구원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합니다.
이 사건이 가장 극적으로 구약에서 묘사된 것이 출애굽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월절, 곧 이스라엘 최고 절기의 그 근거를 이루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또한 홍해를 건너는 사건으로 그 의미와 내용을 강조합니다.
출애굽 사건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사건을 추적해 봅시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겠다는 약속과 명령을 주십니다. 그 내용은 고난에서 꺼내는 해방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상의 목표가 1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출애굽을 고생하는 땅, 종된 땅, 신약식으로 말하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꺼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꺼냄을 받은 뒤 할 일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은 이 사건이 끝난 다음에 애굽으로부터 벗어나 홍해를 건너 시내산으로 갑니다. 시내산에 도착한 그 정경들이 오늘 우리가 본 본문같이 출애굽기 19장 5-6절 말씀에서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라”는 것으로 먼저 요구사항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24장 3절부터 봅시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 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3-8)
시내산에 와서 19장 5-6절의 약속을 이룹니다. 그러면 19장과 24장 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대로 십계명이 20장에 나옵니다. 그 뒤로 지켜야할 율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더욱 상세히 기록한 것이 레위기입니다. 레위기는 읽기에 지루하고 따분한 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목욕과 이발’을 가장 싫어합니다. 목욕 뒤에는 어디를 잘 안 닦았는지 어머니가 꼭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일 좋은 때는 언제입니까? ‘목욕과 이발’을 한 다음입니다. 시원하고 아름답게 단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레위기는 읽기 싫습니다. 읽으면 우리의 더러움이 지적되고 우리가 어디를 더 께끗하게 해야 되는가를 요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을 내가 닦았는지 안 닦았는지 옷을 입고 다니면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왜 요구되고 있습니까? ‘거룩한 나라’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죄밖에 모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하셨습니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24:3)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24:7)
구약성경의 말라기는 ‘성전문을 닫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죄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의 노예인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의 주인입니다. 우리가 죄를 선택한 것입니다. 의나 선을 선택하든가 악을 선택하는 기로에 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죄밖에 선택하지 못합니다.
애굽 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간섭 없이는 탈출할 수 없듯이 우리 스스로는 죄의 사슬로부터, 종된 신분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은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는 싸움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는 것을 막는 악한 세력인 죄를 어떻게 파괴하고, 진멸하고 승리하여 우리를 그곳으로부터 꺼냈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에 ‘너희가 이 산에서 나를 경배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애굽이 반대하고 처음에는 안 놓아주다가 나중에는 놓아줄 것입니다. 그 때 기록이 18절 이하입니다.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출3:18-22)
내용을 잘 살펴보면 두 가지 내용이 겹쳐서 나옵니다. 하나는 출애굽을 ‘노예되었던 것에서부터 꺼내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니까 허락하라’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은 한 민족이 한 민족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는 것으로 성경이 성격을 규명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싸움은 영적인 싸움으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승리와 부활의 승리
또 하나는 여호와께서 애굽을 세게 치자 바로가 결국은 놓아 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졌고 굴복했다는 묘사 때문에 ‘탈취물을 취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금 은 패물을 얻어 나온다’고 마지막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금 은 패물을 얻어 가지고 나온다는 것은 이 상황에서는 전쟁으로부터 승리한 사람의 전리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 곧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는 악한 세력을 깨뜨리고 우리를 꺼낸 사건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 ‘내가 주를 잘 섬기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서 떨치고 일어나서 승리해야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좌절한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고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성도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가면 유월절을 지나 이제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곳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 앞에 찬송한 시가 나옵니다. 이 찬송이 왜 가능했을까요?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0-14)
이 전쟁은 하나님과 죄악의 세력 사이의 전쟁입니다. 죄악 세력이 하나님을 대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죄악을 깨뜨리고 우리를 그곳에서부터 꺼내시는 전쟁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 전쟁을 예수님께서 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지 않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스스로가 이룰 수 없는 승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꺼내 놓으신 것으로 우리에게 한 근거와 조건으로 친히 이루어 주셔서 이제 서게 한 자리에 있는 자들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4-15)
예수님과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갖는 가장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그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입니다.
신앙의 승리는 언제나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이란 자기가 죄와 싸워 이겨서 넘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오늘날 이 싸움에서 진 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으로 애굽 사람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탈출하다가 다시 쫓기듯 도망해 홍해 앞에 선 모습과 흡사하다는 말입니다.
물리치고 나온 것 같은데 그들이 더 거세고 흉악하게 좇아오고 아무 곳에서도 나를 구할 자가 없고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좇아오는 철병거들 사이에 낀 모습들을 늘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럴 바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한 것 같이 싸우지 말고 그곳에 가만히 있을 것을, 그러면 중간이나 갈 것인데, 괜히 나왔다가 가도 오도 못하는 것에 걸린 모습들을 보고 늘 당황하는 것이 신자들의 현실에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비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1-58)
여기 표현대로 보면 신앙의 최종적인 승리의 표현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표현들이 ‘수동태’로 되어 있지 ‘능동태’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제 몇 십 년 더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죽으면 우리 몸들은 육신은 땅에 묻혀서 썩을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에 이 몸도 부활한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57절의 표현이 있기에 부활이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입니다.
이긴 자로서 승리와 누림을 지속하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는 자연계에서 최고의 법칙은 사망입니다. 사망을 이기는 것은 없습니다. 한번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을 이기는 법칙 속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우리를 사망이 가두어 놓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기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김 속에 있는 힘이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시험을 치러서 합격하면 학교에 들어갑니다. 시험을 보아서 떨어졌으면 그 학교에 못 들어갑니다.
떨어진 자는 그 다음에 공부 안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시험을 봐서 합격했으면 그 학교에 들어간 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시험을 치룹니다. 시험 뒤에는 성적표가 반드시 뒤따릅니다. 신앙생활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라기보다는 이긴 자로서의 싸움입니다.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싸움이 아니고 신자로서의 승리와 누림을 지속하느냐 놓치느냐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낙제하는 일은 있어도 퇴학당하는 일은 없을 자리로 들어 왔다는 것이 부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와 나 자신을 비교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신앙 생활을 못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점점 영이 맑아지기 때문입니다. 옛날 같으면 그 죄를 짓는 것이 눈에 안 보였는데 이제는 보인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살인적인 욕을 했어도 떳떳했었습니다. 더 지독한 욕이 없는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을 안합니다. 마음이 여려졌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훨씬 더 죄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난 희망이 없어!’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자꾸 겸손해지고 자꾸 운다. 겸손하다는 말은 제 삼자가 볼 때 이야기지 본인이 겸손해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본인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좌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옆 사람이 보기에는 자기와 비교해서 너무나 깨끗하고 겸손하다고 생각하는데 신자는 더러움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과 자신을 비교해 보기에 절망하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절망하는 것이나 우리가 장담하는 것으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히 버림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았고 거룩한 나라로 삼았기 때문에 훈련시키는 과정으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에 합격장을 받으면 내 백성을 삼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포기되지 않습니다.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성경은 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를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우리는 ‘사망이 이김을 삼킨 바 되는’ 생명이 사망을 이겨내는 법칙 속에 초대받아 들어온 자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를 거기로부터 꺼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선언이 우리에게 로마서 8장 1절로 결론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모든 것은 한번 태어나면 죽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법칙, 곧 생명의 법칙으로 사망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못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실패도 할 수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망의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정죄의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꾸짖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꽃이 필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믿는 것”으로 진술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꽃이 피어 있지 않았다면 내일 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내일 피지 않았다면 그 다음날 필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나무에 꽃이 피어있지 않았으면 ‘죽었나?’하는 의심이 찾아옵니다. 죽은 나무라면 꽃은 안 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안 피었어도 내일 필 것이고 내일 안 피면 모래 필 것이고 언젠가는 필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법칙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를 거기서부터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약속한 모든 약속들이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를 아직도 시험 보게 하지 말라. 우리 자신을 스스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워 놓고 만족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신 것으로 말미암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입니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신앙생활에서 승리하여야 합니다.
12.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까지(고전10:1-13)
우리는 늘 마이너스 인생임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신자가 걸어온 길을 논할 때 과거를 돌아보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기록하면서 출애굽 사건에서 난관 하나 하나를 극복할 때마다 처음의 난관을 극복한 사람이 두 번째, 세 번째 난관에서도 계속 걸리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것은 처음 관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일에 있어 프리패스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 신앙생활에 일종의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핵심이 12절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 말씀을 더 집약해 놓은 것이 빌립보서 3장 5-16절입니다.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3:5-16)
여기에서도 분명히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직 내가 잡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성경이 말하는 자세와 우리 개인이 가지는 자세 사이에는 늘 충돌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괜찮은 일을 하는가 하면, 나는 원래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이 증거된 것으로 그 사건을 기억합니다.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만한 신앙적인 어떤 승리를 하면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내가 본래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이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집착하는 이유는 내가 과거에 잘한 일을 기억함으로 내가 원래 괜찮은 사람이라는 ‘안심’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착한 존재가 아니라 원래는 ‘마이너스’인생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죄인으로 출발하여 죄악밖에 저지를 줄 몰랐던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함을 받고 의와 생명에 대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자라나고 도달한 지점이 다음을 향한 디딤돌이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어져서 다음 단계로의 도약이요, 이어짐이요, 자라남이요, 도달함에 관한 문제이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로써 과거가 기억되기 시작하는 것만큼 신앙에 무서운 유혹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나 사람이나 자랑거리가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는 합격점이 되면 천국에 가게 되어 있지 여기 남아 있게 되어있지 않은 자들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뒤를 돌아 볼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지만,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복음 안에 있어 보니까 그것이 모두가 필요 없는 것이었더라”
말한 뒤에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바울은 어떤 조건 속에서도 주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신자들이 생각해야 하는 신앙상의 자세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2-27)
사도 바울이 이 말씀들을 나열한 것은 바울에게는 이것이 자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애를 썼으며, 그 많은 고생과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를 놓치지 않았는가’를 나열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요 자세인 것입니다.
‘누가 더 주를 위하여 매를 맞았느냐, 누가 더 고난을 당했느냐, 누가 더 많은 추억거리를 갖고 있느냐가 자랑이 아닙니다. 신자의 자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은 것이 자랑이 아니라 신자가 마땅히 와 있어야 할 자리, 해가 지면 달이 갈수록 신자가 커가야 하는 것은 내가 주를 위하여 고생을 했으며, 이런 업적을 남겼느냐’가 아닙니다.
28절을 보면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내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이 자리에 와야 합니다.
바울에게는 주님을 위한 고생이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인 고린도전서 10장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그곳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홍해도 건넜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섬길 때에도 나는 버티었습니다. 다 간음할 때도 나는 거부하고 버티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잘못을 하면 ‘나는 안 그랬는데 너는 왜 그러느냐?’ 이렇게 나오는 것은 교회에서 쌓아야 할 신앙의 본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서로 주고 받아야 할 신앙상의 가장 큰 격려와 나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눔은 누가 무엇에 걸려 넘어졌든지 지금 누가 약하면 나도 약하고,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는 것으로 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를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연약한 자가 갖는 믿음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갖지 못하고 그 앞에 심판자로 서 있지 않습니까? 잘못한 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잘난 척하는 교만한 자로서 그의 앞길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주를 위하여 고생한 것을 자랑으로 쓰고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애씀 없이는 얻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11:30-33)
사도 바울이 지금 우리에게 자신의 치사하고 연약하고 사람들에게 놀림 받기에 꼭 좋은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은 우리가 걷는 길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그가 분명히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각자의 자존심을 세우고, 각자의 우월감을 증명하는 것이 신앙을 소유하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리고 얼마나 쉽게 우리가 거기에 말려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인가를 알기 때문에 그는 이 문제를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 각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주께서 요구한대로 갖기 위하여 참으로 큰 싸움을 해야 합니다.
신자들 자신의 생애와 신앙생활과 실천과 자세로 가지기 위해 여기에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하는 커다란 신앙적인 결단과 애씀이 없이는 그저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증명하기 위하여 하는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을 방해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영광까지도 가릴 수 있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졌던 모든 신앙적인 경험들과 걸어온 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열매맺기 위하여 한 순간도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합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생명과 진리와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과 특권들을 놓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지나가는 시간들이, 앞으로 만들어질 경험들이 우리들 각자를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는 이 말씀으로 결론 내려지게 해야 합니다. 남의 약한 것을 보면 나도 약해지고 남의 실족한 것을 인하여 내가 애태우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자리로 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참으로 시험에 약한 자들입니다.
아차 하면 자존심의 도전을 받을 때 물러서지 못합니다. 자신이 감춰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신앙에서 제일 큰 시험거리입니다. 우리는 쇠하여야겠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합니다. 나는 묻혀 하나의 씨앗이 되어야 비로소 열매를 맺힌다는 이 법칙을 놓치지 않는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풍토가 되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13. 외모를 보지 마라(약2:1-9)
늘 우리는 다음 단계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은 처음에 시작한 열심과 결심과 깨우침들로 인해서 그 다음에는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되는 점이 아니가 싶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잘한 것으로는 오늘을 때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제 일이고 오늘은 오늘 일이 또 있는 법입니다.
신앙생활의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된 자리까지 우리를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동안 아무리 잘한 것이 있어도 그 잘한 것을 꺼내 놓고 서로 비교하며 오늘은 게을러도 좋다는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과정을 마쳐 갈수록 다음 단계를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이루기까지 우리는 뒤에 것을 돌아 볼 틈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뒤에 것을 잊어버리고 부름 받은 대로 상급을 향해, 푯대를 향해, 오늘의 싸움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생각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생활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성도는 세상이 목표이거나, 세상 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약속들과 복들이 너무나 대단한 것이라는 뜻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고단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너무나 크고 엄청나기에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을 자랑하고 있을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본문 야고보서 2장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보면 ‘부자라고 해서 대접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해서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도덕과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요구가 아닙니다. 성경이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 명하시는 이유는 ‘사람은 세상의 것으로 힘을 내거나 그것으로 목적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신자들만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는 하나님의 상징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성경이 이런 말을 합니다.‘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니라’ 왜 돈이라는 말씀을 꺼내실까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돈에 욕심을 낸다. 의식주, 권세 같은 것들은 돈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사랑하고 목표로 하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게 되고 이런 것들을 욕심내는 자들이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는 자는 죄악 속에 파묻혀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으로 못난 사람을 괄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가 되어서 구축하는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표하고 우리가 욕심내는 것은 신령한 것들이요 영원한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권세를 가진 것과 돈을 가진 것에 대하여 아첨하거나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복의 전부이거나, 첫 번째 두 번째 가는 복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것도 기쁘게 주신다. 다만 그것은 복의 유일한 증표도 아니고 뽑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진 자가 자랑하거나 없는 자가 좌절할 문제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허름하게 입고 왔다고 해서 괄세하지 않습니다. 잘 입고 왔다고 해서 머리 숙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있는 사람보고 겸양하라는 것은 혹은 그것으로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봐 절제하라는 것이고, 없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깊으신 뜻과 능력으로 하시는 일이기에 우리가 불평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노라 말은 하지만 그 믿음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심에 있어 어떤 사람들을 들어 쓰십니까?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용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들은 우리의 산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것, 세상이 만들어 낸 것을 목표로 하거나 내용으로 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 치장한 것에 대하여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는 이유입니다. 이 말씀이 야고보서로 넘어갑니다. 야고보서는 ‘행함 없는 믿음’에 관한 싸움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
왜 행함이 없습니까? 그가 믿는다고 하는 도리는 이 세상의 것으로 내용을 삼거나 이 세상의 것으로 목적을 삼는 것이 아닌데 사람의 신앙이 세상의 것에 미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돈이 해 줄 수 있는 것에 내 시선이 가면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믿음이 실천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에서는 믿음이 행세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이미 해온 싸움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질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1:2-4)
이것은 하박국 선지자의 하나님을 향한 일종의 반문입니다.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1장 5-11절까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합1:5-11)
‘불의한 자를 왜 그대로 놔두십니까?’ 하는 하박국의 질문에 하나님은 ‘네가 지금까지 본 것은 별 것 아니다. 앞으로 더 사나운 백성이 일어나는데, 그들은 더 강포를 행하고 더 패역하고 더 악질같이 놀 것이다’ 대답하셨습니다.
의인은 악한 세상을 오직 믿음으로만 삽니다.
12절 이하는 다시 하박국의 질문입니다.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합1:12-17)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행하지 아니하시고 왜 이렇게 하십니까?’ 재차 묻는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세상은 점점 더 악하여 간다. 그러면 의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환경과 조건의 개선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리라’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 신앙 중에 가장 넘어서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고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사는데 점점 삶이 더 힘들어지느냐’는 항변이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큰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쌓아가려고 하는 것, 우리가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는 세상의 것으로는 도무지 도움을 받지 못하고, 권세를 자기고 이익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의 안일과 평안과 자랑이 이 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의 자랑을 위하여 돈을 좇지 말고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좇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가 제일 많이 노력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것’입니다. 신령한 영력을 기르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며, 구하며, 말씀을 상고하고, 거기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과 사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찾아오신 것 같이 십자가를 지는 자리까지 가야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비판하고 자르는 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영향력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노력하십시오.
이제부터는 신령한 사람이 됩시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와 거룩과 영광, 영혼을 냄새 맡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요구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들이 다만 율법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요구 자체는 우리가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따지는 문제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 사람으로 변해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있는 요구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 이상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지킨 것에 끝나지 않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것이 법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서 나 스스로 영광된 자리에 도달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는 것이 명령이고 그것을 지켜야 되는 일일뿐만 아니라, 기도를 하므로써 내가 기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고 거룩함과 영광의 자리에 진일보하는 신령한 사람으로의 성숙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복인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것 자체로 우리에게 복된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일을 사모하여 경건을 연습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요, 명령이요, 숙제일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복된 은혜인 것입니다.
14. 봉사론(삼상30:1-6)
하나님이 다윗에게 가혹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뒤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이것을 사울이 시기하여 죽이려 함으로 도망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적국인 블레셋까지 가게 됩니다. 블레셋에 있는 방백 중에 아기스라는 사람이 다윗을 비호해 주고 블레셋으로 귀화하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고 들어온 사람이기에 귀화한 사람이라 믿고 그를 비호해 주지만 다른 불레셋 사람들은 다윗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던 중에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아기스는 이때야 말로 다윗이 블레셋 사람이 된 증거를 보여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싸울 수도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따라 나섰습니다. 아기스와 함께 전쟁에 나가자 다른 모든 방백들은 다윗에 대하여 의심을 품습니다. 이 때 아기스가 보증을 섭니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윗은 되돌아갑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큰 위기를 모면한 셈입니다. 다윗이 그동안 자기가 거하던 시글락 성에 되돌아 와보니 함께 따랐던 부하들과 가족들을 아말렉 사람들이 다 잡아가 버린 뒤였습니다. 가축도 다 빼앗기고 재산이 다 약탈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30장 4절에는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을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과정입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 속에서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을 때 한번 반짝하고는 그 다음부터는 가혹한 훈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왕도(王道)나 전쟁하는 법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도망 다니고, 또 도망 다니고, 울고 또 울고, 한숨만 쉬는 세월을 보냅니다.
나중에는 블레셋에도 못 있게 되어 도망 나올 때 미친 사람 노릇을 해 가지고 오물을 뒤집어 쓰고 수염에 침을 흘리며 빠져 나옵니다. 시편 34편은 미친 체 하고 있다가 쫓겨난 후에 지은 시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간을 쓰려고 할 때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살 소망이 끊어진 자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9)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여러번 파선하고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의 위험을 만나고 굶고 춥고 헐벗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바울은 하나님 앞에 최고로 충성된 일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복음을 전하러 다닌 일들과 과정을 보면 한 번도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의 자리에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고생만 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가시도 견딜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사도 바울이 이젠 죽었구나’라고 생각해야 되는 어떤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필요’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우리의 개념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 그럴 때는 당연히 시련이 먼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열심도 아니고, 충성도 아니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이 가시를 내게서 뽑아 주십시오’하였으나 하나님은 달리 대답하셨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12:7-9)
사도 바울 쪽에서는 전혀 자기가 평안 하려고 이 문제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이것을 ‘내 몸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있다’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원어가 간질이라는 단어의 어근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아마 간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를 설명한 것을 보면 외모도 볼품도 없고, 언변도 어눌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다가 간질병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너무 치명적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 쪽에서 생각하자면 자기의 편안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감옥에 갇혔든지 어디에 있든지 걱정을 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당신은 잡힌다’ 했을 때 ‘내가 주께 받은 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다’라고 대답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들은 다른 요구입니다. 주의 복음을 위해 간절하게 구한 것입니다.
늘 맡겨진 일에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열심에 관한 부분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마태복음 16장 16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모함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막았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제가 결코 방관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막아 드리겠습니다. 내 죽음으로라도 그것만은 막겠습니다’하는 뜻입니다. 이 때에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도 이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겠노라 말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을 우리가 보충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늘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맡겨진 충성심이요 그것 이외는 쓰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었으면 낮춰 쓰시는 것에 만족해야 하고, 들어 쓰시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일을 승리로 이끄시고야 만다. 그런데 우리는 꼭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 주님이 승리하는 것이라고 믿고, 우리가 성공하는 것이 주님이 성공하는 것이라고 믿는 나쁜 습관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중의 괴수를 들어 쓰셨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 이 점을 더 확실하게 살펴봅시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 이하는 사도 바울의 직분론입니다. 디모데에게 직분에 관한 충고를 하면서 ‘나는 나에 대한 맡은 바 직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딤전1:12-17)
하나님이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나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은 ‘내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 되이 여겼다’는 것도 내가 충성심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보아 주셨다’라는 말입니다. ‘내가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를 불렀습니다.
왜 나를 불렀습니까?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치도록 풍성했기 때문에 나 같은 것도 용납해 주셨다’는 것이지 나에게 쓸만한 구석이 있었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그렇게 품어 주시고 나를 직분자로 불러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직임을 주셨고 모든 사람을 그렇게 구원하시는 분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죄인 중에 괴수를 들어 쓰셨을까요? 내가 먼저 구원을 얻은 것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고 ‘야! 저런 것도 구원을 얻은 걸 보니 나도 희망이 있겠구나’라는 것 때문에 나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개념이 직분론의 대표적인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직분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나보다 훨씬 못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내가 실력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써서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셨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했으면 못했을 것을 내가 했기 때문에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나를 씀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신가, 긍휼이 많으신가? 저 바울을 보니 나도 물론 희망이 있겠다. 그래서 나를 쓰는 것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의 만세의 왕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곧 직분자라는 것은 결국 쓰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우신가, 얼마나 은혜로우신가가 드러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우리가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사실은 ‘다음 다음의 목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직분자들, 혹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봉사를 맡은 모든 사람들이 신경 쓰고 해야 되는 일은 ‘나 아니면 못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능력이 있어야 된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써주십니다. 나를 씀으로 뭐가 증명되어야 하느냐?’가 바로 특히 마음써야 될 부분인 것입니다. ‘나 아니면 이 일을 못한다’가 아니라 ‘나’ 제일 못난 나를 쓰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은 은혜와 영광이 세세토록 나타나도록 하는 일이 우리의 쓰이는 바의 사실상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아야 되고 이것이 신자의 바른 직분관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15. 신자의 존재론(빌1:12-18)
주님을 위하여 내가 존재해야 합니다.
신앙은 어떠해야 됩니까? 궁극적으로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신자가 어떤 신앙자세를 가져야 됩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내가 주님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주님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어떤 신앙적인 실패를 하는가 하면 기독교적인 모든 것을 동원해서 ‘나를 증명해 달라’고 하나님께 조르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남보다 더 사랑하셔서 다른 사람과는 달리 특별 대우를 하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내 말을 들으신다는 것을 들으신다는 것과 ‘너는 가짜고 나는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식 신앙을 보면 나의 잘난 것이 증명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를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 사실은 신앙에 있어 가장 가치 있고 정당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은 언제나 논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잡혀 로마로 이송되어 간 후 두 갈래로 파가 생겼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히자 ‘바울이 주님이 세우신 사도였으면 왜 마음껏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감옥에 가두셨겠느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가 주를 위해 고난받는 참된 사도다’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싸움의 와중에서 바울은 ‘내가 아무러면 어떠냐? 뭘로 하든지 주님만 전파되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로 자주 혼란에 빠집니다. 기도하면 잘되고 축복하신다는 무조건적인 논리가 때로는 맞지 않을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박국 선지자와 욥의 경우일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이 땅에서 잘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와 하나님의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점은 불의한 자들의 생애는 모든 것이 자신들을 치장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그가 당하는 ‘어떤 것도 주를 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주를 위한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19-21)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신자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소원은 빨리 죽어 하늘 나라에 가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은 주님께서 아직도 갖고 계신 구원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2-24)
‘너희를 위하여 유익하고 주께서 그 일에 안타까움과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것이지 내가 살아서 꼭 주를 위해서 뭘 해야될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당신의 일에 나를 쓰고 계시고, 내가 당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영광받으시기 위하여 나를 살려 두심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주님을 위해서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7-9)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14:1-6)
이것은 바로 이런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의 사회에서 육류는 언제나 국가가 섬기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지고 나서야 시중에 판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을 섬긴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강을 위하여는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이기 때문에 먹지 않겠다는 사람과 고기를 먹고 건강을 얻어 주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이 경우 둘 다 잘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고 먹지 않는 이유가 주님을 위해서라면 다같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평가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싸움이 생깁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14:4)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신앙의 정도와 깊이에 따라 적절하게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먹고 먹지 않는 것으로 싸워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시기로 했다면 죽이실 이유가 있을 것이요,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높이면 높이시는 방법으로, 낮추시면 낮추시는 방법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신자끼리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싸움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사람 앞에서 평가받고 싶어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율법을 앞세우고 기독교를 동원해서 나를 증명하고 싶은 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보다 내가 잘 났다는 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자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영광스러우시다는 것을 증명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아무리 연약하고 아무리 모자라도 용납하셨다면 우리도 용납하여야 합니다.
나를 통해 주님이 증거되고 영광받으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 우리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괜찮다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거룩과 성결을 완벽하게 요구하시는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다 주의 것이요, 주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정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우리의 어떤 모습 속에서 나타내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에 순종하고 그 일을 할 일입니다. 사람끼리 비교하며 서로 싸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위해 나를 부르셨으며 그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로 나를 불러 그의 필요를 위하여 나를 쓰고 있다면 그것에 감사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가 네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으소서. 내가 주의 것이고 나의 삶의 모든 국면과 모든 일과 형태에서 주의 손길과 명령하심에 충성하게 하옵소서. 예수 외에 다른 것은 돌아볼 틈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며 나날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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