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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더 깊은 신앙으로 가는 길 (1)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42

 

 

 

 

 

 

 

 

 

더 깊은 신앙으로 가는 길 (1)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목차>

 

 1. 마음의 평안(마11:28-30)
 2. 바로 잡으라(갈6:1-5)
 3.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마6:19-34)
 4. 순종(빌2:5-8)
 5. 능력(빌4:13)
 6. 판별식(갈5:16-24)
 7. 쓰레기통(창3:17-24)
 8. 제자의 길(눅9:57-62) 
 


 

 

 

 

 

 

 

1. 마음의 평안(마11:28-30)


쉼을 얻기 위해서는 짐지는 법을 바로 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위로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본문을 보며 얼른 ‘예수님께서 내 짐을 져 주시려는가보다’ 하는 기대를 갖기 쉽습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9절은 ‘대신 져 준다’는 약속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십니다. 짐에 짐 하나를 더 얹어야 할 판국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짐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되어있지 내가 그 짐을 져주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짐을 지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배낭을 질 때 우리는 무거운 것은 밑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거운 것을 밑에 넣으면 그 무게가 사람을 뒤로 잡아 다니기 때문에 훨씬 더 힘이 듭니다. 짐은 어깨에 메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가능하면 어깨 선상의 위로 올라오게 하고, 어깨를 누르게 해야 합니다. 뒤에서 잡아 다니면 허리를 잡아 다니기 때문에 흐트러지려고 하는 몸의 균형을 잡기가 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쉼을 얻기 위해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하십니다. 곧 짊어진 짐이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쉼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쉼을 주는 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자기가 진 짐에 대하여 억울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십자가는 세 번이나 거두워 가시기를 기도할만큼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또 십자가의 형벌이란 형 자체도 무섭고 공포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형틀 자체도 무겁고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지지 못하심으로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갈만큼 무거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말씀은 그 짐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짐을 지는 자세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그의 ‘멍에와 짐’을 지게 하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스스로 진 짐에 대하여 억울해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진 짐 중에 가장 무겁고 어려운 짐이란 무엇일까요? 아마 마음에 맺힌 억울함이 아닐까요? 자식을 위해 쓰는 것은 아무리 많은 돈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은 일에는 천원도 아깝고 억울합니다.

 


억울하다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최고의 짐이 될 것입니다. 그 억울함만 벗어나면 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억울하다는 마음은 왜 생깁니까? ‘내가 당할 일이 아닌데 당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만나는 일들은 다 만날 일이지 억울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우리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길을 봅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자기를 부인하다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자들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갈등은 사람이 원래 죄의 성품을 가지고 사는 것과 가장 극렬하게 대치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과 다른 한쪽으로는 죄악된 마음으로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과의 갈등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자신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요구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생활방식과 생각의 원리들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 본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체면을 잃는 일을 부끄러워하고 명예를 잃는 일에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런 것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평안한 길을 약속한 것이 아니라 고통받을 것과 환난이 있을 것을 오히려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당하면 어려운 일을 안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성경은 그 반대로 말합니다. 그 최고의 증인이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이 사실을 얼마나 안 믿는지 알 수 없습니다. 너무 쉽게 “예수님, 저는 오늘도 주의 뒤를 좇겠사오니 편안하게 해주시옵소서!”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살펴봅시다.

 

 

 

 

주님의 짐을 지는 마음과 자세가 중요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신자란 결국 ‘모든 일에 형통한 자’가 아니라 ‘모든 일과 사건과 결과에 대해서 마음의 평안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신분인 것입니다. 신자가 얻는 행복이란 결국 고통과 슬픔이 없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가신 그 마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억울한 길일 수 있으나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요, 방법이라면 그 일이 아무리 어렵고 괴로와도 그것은 우리의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아버지께서 권하시는 길이었기에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또 무겁게 진 짐들이 이와 같이 주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기쁨일지언정 한숨과 절망일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5:41에 사도들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하였습니다. 채찍과 수모가 그들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 짐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것이 절망일 수 있고 자랑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짐지는 마음과 자세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신자란 결국 그의 인생과 존재를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사는 것을 제일 좋은 큰 기쁨으로 갖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얼마나 순조롭게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주님께 쓰임을 받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2. 바로 잡으라(갈6:1-5)


다른 지체의 어려움을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위의 본문 2절과 5절은 서로 말의 표현이 맞지 않는 듯 싶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6:5)


어떤 사람이 죄를 짓거든 그러한 사람을 바로 잡고 너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1절에 남을 바로 잡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잡는다는 단어는 ‘틀린 것을 고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서로 짐을 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의 원어적인 뜻은 ‘위골된 뼈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체 중 작은 부분은 무시하지만 그 역시 대단히 중요한 지체입니다. 신자로서 다른 지체의 결손을 감당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모든 지체가 정상화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무엇입니까? 다음의 성경구절을 통해 살펴봅시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2-13)

 


여기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말이 처음 나오는데 곧 부족한 것을 ‘바로 잡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13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는 ① 첫 번째 뜻은 병들어 있는 지체, 자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체들을 정상적으로 회복시켜서 온 몸의 기능을 ‘정상화’하라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 뜻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자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을 온전히 이루는 자가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는 말씀의 의미는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한 정상화의 요구입니다. 여기 온전한 어떤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했을 때 그 머리에 부합된 ‘온전한 몸, 완성된 몸’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어 우리가 그 모든 지체로서 심신이 합일한 상태로 주께서 요구하시는 수준까지 시행하고 도달한 온전한 경지의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지체로서 불필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지체 중에 불필요한 지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각 기능이 골고루 보존되고 합치되고 구비되어 발휘되어야 합니다.

 

 

 

 

지체는 경쟁하지 않고 서로 보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는 말씀은 바로 ‘발휘’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8-19)
이것이 ‘온전한 사람’의 개념입니다. 사람이란 결국 자기 머리로 알고 있는 것까지 요구합니다. 이런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우리가 그 몸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인식해야 하며 바로 그것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서로 짐을 나눠 져야’합니다.
내가 크는 것과 동시에 같은 지체로 부름 받은 자들을 서로 싸매고,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나도 크는 방법입니다. 온몸이라는 시각에서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경쟁적 차원에 있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보완합니다.

 

 

 

 

함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 합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3)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으로써 완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몸을 일컬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란 결국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자들이 합쳐서 한 몸을 이룬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몸’입니다.
우리 개인으로 따지면 각자가 그 몸의 지체입니다. 고로 지체가 지체끼리 경쟁하지 말고 지체가 각각 자기 일을 감당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른 지체와 조화를 이룬 정도가 온전한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지칭되는 우리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단체가 됩니다. 몸이라는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으로써의 우리의 책임이 있고, 그것을 감당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성장하여 한 몸을 이루는데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한 몸이면서 다른 지체임을 인식하여 지체가 서로 경쟁적이거나 절대적이지 않고 보완적이며, 조화되고 협력적인 위치를 깨닫는 데는 개인의 아집과 편견과 자존심을 깨뜨리는 아픔이 뒤따릅니다. 남 때문에 속상한 일이 생깁니다. 함께 지체로 온전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 때문에 어려워 봐야 합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을 돌이켜 세워 놓고 함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자리에 가야하며, 그 경지에 가는 동안에 우리는 정말 말할 수 없이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자 자기의 일을 우선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6:4)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온전한 몸이란 내가 다른 것을 대신 함으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리가 팔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팔을 회복시켜 놓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각자의 임무는 고유한 것입니다. 대치할 수 없는 직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의 짐을 질뿐만 아니라 남을 보완해 주어야 합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다리가 부러졌을 때에는 나머지 지체라도 건강해야 됩니다. 그래야 결손 부분들을 버텨냅니다. 팔을 다쳤으면 목이라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결손 부분을 보충하고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이 팔을 대신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묵히 와서 출석해 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가만히 왔다가만 가도 참 대단한 것입니다. 제일 못하는 사람은 아무 역할도 안하고 돌아다니며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돌아만 다니는 것, 그것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곧 ‘피와 신경’인데 그건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피와 신경은 머리로부터만 명령, 즉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으로 우리 몸을 도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6:4)
여기 ‘남에게 있는 것이 내 것만 못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각각 각자의 고유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입니다’ 딴 것은 하지 말고 자기 짐이라도 제대로 져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나 사회는 튼튼하게 될 것입니다.

 

 

 

 

 

3.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마6:19-34)

 

눈은 마음의 등불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로 34절은 한 묶음입니다. 보물을 땅에 있는 보물과 하늘에 있는 보물로 나눕니다. 마태복음 6장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상에 대한 대조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은 눈에 보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에 치중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헛된 것이며,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보물은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하늘에 것과 땅을 것을 알기 위해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22절에는 눈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라”(마6:22-23)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장님입니다. 장님은 이마와 무릎을 제일 많이 다칩니다. 눈이 나쁘다고 눈만 다치지 않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을 다 다치게 됩니다. 온 몸을 상케 하는 것이 곧 눈입니다. 눈이 눈을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분별력과 판단력’이 결국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영혼에 관한 것과 진리와 절대에 관한 것에 대한 분별력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그 사람의 전 존재와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는 ‘세상에서 살 때에는 세상 것을 가지고 살고 영원한 천국에 갈 때에는 그걸로 가면 안될까?’라는 것입니다. 그걸 아시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영혼을 위하여 사는 것은 좋으나 그렇게 살면 삶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5-26)
새에게는 하나님이 창조주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는 천부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목숨을 연장할 수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공중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말씀하시면서 믿음 없는 우리들을 책망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30)
여기서 믿음이 들먹여지는 이유는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그 반대로 엉성하므로 꾸중을 듣는 것입니다.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 할 일은 오늘 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3-34)
우리의 목숨과 운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다만 허락된 것으로 살아 있는 동안에 주어진 시간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결론으로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모두를 우리가 실천하는데 있어서 닥쳐오는 시험의 모습은 결국 ‘내일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내일하기로 연기한다’는 뜻이 아니고 ‘오늘 일을 타협해서 내일 곱배기로 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 제목은 [내일은 없다]입니다. 물론 내일을 준비하는 차원에서는 내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왜 필요없다는 말이 되느냐 하면 준비하고 대비한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의 신앙생활을 타협하는 빌미로 내일을 갖다 대기 때문에 ‘내일은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날 하루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난과 고통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감수하겠다.” 이것이 순교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6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참 어리석고 무섭습니다. 사람 앞에서 증명시키고 싶은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루를 충성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눈으로 바로 보아야 하고 그 원초적인 신앙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지, 내가 내 생명을 보존하거나 연장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하여 당하는 그 날 그 하루를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4. 순종(빌2:5-8)


예수님의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본문은 이렇게 말해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하면 무척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런데 2장 1절 이하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1-4)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틀린 문제가 아닌 잘 하는 문제에 걸려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옳고 그른 것, 즉 거룩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거룩이 ‘사랑’이라는 아름다움까지 가 있지 않는데 있습니다. 사랑과 덕이라는 부분까지 가 있지 않으면 ‘아직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방법으로 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마음을 품고 이 문제를 해결하라’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순종하는 자세에서 모든 문제를 풀었다는 것을 기억해서 신자가 당한 문제를 풀 기준과 자세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합니다.

 

‘자기를 비웠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자기의 주장이나 판단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주장과 판단을 스스로 종이 되어 하나님이 하시는대로 맡겼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판단 때문에 잘 싸웁니다. 판단이 옳았을 때는 더 잘 싸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묘사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나오지 옳다는 묘사는 오히려 적습니다. 그 일은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데까지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예수님이 하신 일을 높이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 때문에 우리도 죽을 각오를 하고 순교할 각오만 한다면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께서 주께 허락하신 것과 방불한 축복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어도 좋다’는 것이지, 죽음을 각오했으니 영광된 결과를 달라는 요구조건으로 제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으로 결과를 요청하는 것은 우리더러 ‘죽음을 각오하라’는 것이 아니라 ‘죽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했으니 이루어 주옵소서’하기 쉽습니다. 죽음을 앞세워 놓으면 그 결과가 꼭 이뤄진다는 방법론으로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십자가 죽음까지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것은 그를 죽여서 졸병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죽으라’는 말은 졸병이 되라는 말이요, 명령에 순종만 하고, 숨겨져 있고 감춰진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꼭 이루어지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것을 앞세우고는 죽지 않습니다.
실로 죽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고달픈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종이 되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곧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1-4)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니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증명하고 싶어서 일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시된 것입니다. 즉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자기를 증명하는 것으로 쓰여지는 날에는 이것이 얼마나 사람을 해치는 것이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가 되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자기의 영광이나 자기의 증명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순종하셨고 정말 죽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본 받고 싶어하는 성향의 인물, 또는 부럽게 생각하는 인물은 요셉과 다니엘입니다. 왜 그럴까요? 끝이 멋있기 때문입니다. 축복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 흉내를 내라고 합니까? 예수를 흉내내라! 본받아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주를 좇는다’는 말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주를 좇는다’는 것의 맨 뒷 부분이 요셉의 성공과 다니엘의 성공과 연결되지 십자가의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불행한 신앙의 작태입니다. 사실은 이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를 좇는 길은 십자가를 것입니다. 그 길에 더러 영광의 순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순간의 영광만 취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발상입니다. 그 영광을 넘어 십자가의 죽음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5. 능력(빌4:13)


우리의 생각은 바울이 말한 의도를 빗나가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이 구절은 신자들이 무척 좋아하고 자주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자주 사용되는 성구들이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글은 사도 바울이 성공하고 승리한 다음에 쓴 글이 아니고 가장 곤란한 지경에서 쓴 글입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간 중의 하나로 로마에 감옥에 수감된 가운데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잡혔습니다. 그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신분으로 시이저에게 직접 항소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이송되어 로마 감옥에 수감된 것입니다. 이 때에 빌립보 교인들이 면회를 왔습니다.
빌립보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의 이름을 따서 지은 그리스에 있는 도시의 이름입니다. 로마는 이태리에 있습니다. 그리스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이 먼길을 찾아와 위문품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으면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차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감이 있습니다.

 

 

 

 

바울이 가는 길은 세상의 도움으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빌4:10-20)
바울은 일단 그들의 관심과 사랑에 깊이 감사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관심은 그 이상에 있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갖다 준 것은 너희가 이 일에 참여하여 하나님 일에 동참한 것이 너희를 위하여 기쁜 것이지 나에게는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왜 자족합니까?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기 때문에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와 궁핍에도 그것을 감당할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에게는 ‘그가 가는 길이 세상의 것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는 길은 세상으로부터 방해받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의 것’으로 방해를 받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 세상의 것이나 원리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풍부한 것과 궁핍한 것이 상관이 없다는 것은 풍부한 것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를 궁핍하게 만드는 것으로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적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돈이나 권력이 도움도 방해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옥중에 있을지라도 옥중에 있는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방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쌓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주의 길을 가려하면 방해에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2-27)
보통 이런 고백은 성공한 다음에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 합니까? ‘이렇게 이렇게 해서 고생만 했는데 결국은 정말 망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세상에 의하여 방해를 받습니다. 그 방해에 걸리는 이유는 기독교의 추진력과 힘을 세상의 것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매였으나 복음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4-5)
바울은 이렇게 자기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최고의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보람있고 의미 있는 일에 마음껏 활개 펴는 것입니다. 그 길을 지금도 사도 바울은 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1:12-14)
복음이 매여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붙잡혀 있습니다. 세상 쪽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지금 붙잡혀 있으면 복음도 붙잡을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은 매이지 않았다고 선언합니다. 그것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 진술된대로 고백을 할 수 있는 근거들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것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생애와 기쁨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곧 신앙의 힘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 언급된 것 같이 세상의 것으로 근거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분명히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것으로 쌓는 것이 아니며, 세상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이 길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만의 생애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세상이 그를 반대했기에 당하는 고난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곧 세상이 복음과 생명의 하나님에 관한 것을 반대해서 받는 고난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쪽에서는 적극적인 차원에서 신자가 세상의 것으로 무너지지 않으며, 세상의 것에 근거하지 않고 기쁨과 승리의 생활을 하고, 복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으로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가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습니다’하고 순교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기쁨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요 주를 모시는 것이라는 고백과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를 이런 경지에까지 이르는 ‘신자’의 위치를 요구하는 것이 본문의 참된 교훈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바울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니라” 돈은 어떤 것을 가능케 하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바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수단은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부자라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라는 고백이 근거로 서야지 돈을 사랑해서 돈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 우리가 붙잡혀 있다면 그는 아직 신앙인의 경지에는 미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능력은 세상이 우리를 아무리 할퀴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길을 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길이 그 앞에 예비되어 있다는 점을 깊이 명심할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로만 부르시고, 또 그 일을 감당할 훈련을 시키십니다. 돈, 건강, 명예 등등으로 근거했다가 넘어져 봄을 당함으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부름 받은 일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가진 바 믿음과 기쁨과 승리의 근거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의 생애를 그렇게 어려운 길로, 그의 뒤를 좇아갈 수많은 후대의 신자들을 위해서 인도하셨는지도 모릅니다.

 

 

 

 

6. 판별식(갈5:16-24)

 

열매가 아니라 나무가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의 본문에서 유명한 부분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우리는 자주 ‘성령의 열매를 맺자’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잘 안될 뿐더러 나아가 반대로 육체의 열매만 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말씀이 어떤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으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한번도 ‘열매를 맺으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열매는 언제나 ‘그것이 무슨 나무인가’를 분별하라는 것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5-18)
열매를 ‘판별’의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매를 달리게 하는 나무는 잘 몰라도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지 않으며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라’는 것입니다. 나무는 가만히 둔 채 ‘좋은 열매’만 맺으라고 한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하는 주장은 이쪽과 관계가 없습니다.

 

 

 

 

주님은 능력이 아니라 성품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지금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또 이 열매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가 지금 ‘성령을 좇아가고 있는지 육체를 좇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라고 이 열매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열된 이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열매는 맺힙니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성령을 좇고 있는지 육체를 좇고 있는지를, 네가 하는 일의 열매가 무엇으로 맺히고 있는지로 분별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육체와 성령을 구별하는 판별식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6-17)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는 법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진술된 것은 맺히는 열매로 인하여 네가 어디에 속했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겪는 가장 큰 실수는 ‘옳다는 것’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이단과의 싸움이라면 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내가 옳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상대방을 죽음의 자리로 몰아 놓는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말하자면 나와 남을 옳고 그름으로 구별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육체의 열매나 성령의 열매가 다 같이 성품적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즉 능력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능력적’인 면이 아니라 ‘성품적’입니다.

 

 

 

 

능력을 행한 자들에게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 책망하셨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런 열매들에 대하여 신자들은 보통 ‘신앙’이 어떤 ‘능력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능력들이 문제를 해결해 놓고 상대방을 죽이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준수, 신앙의 방향이라는 것은 ‘성품적’이고 ‘인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일을 이루는 면으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쪽을 좋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다음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0-23)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의 열매로 제시하는 것은 ‘능력적인 것’입니다. 놀랍게도 거짓 선지자들은 능력 일변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것은 열매를 구할 때는 ‘능력인가, 아닌가’ 쪽으로 하지 않고 ‘성품적’으로 했습니다.
성품적으로 ‘거룩한가, 사랑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결코 ‘능력이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로 말미암아 어떤 열매가 맺혀지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좋아도 그 일이 ‘육체의 열매’가 맺혀졌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 귀신 쫓아냄, 권능, 이런 일들이 너무나 기독교적이기에 이 일을 행하는 한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일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일꾼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심판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이 일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빌립보서 2장 1절로 8절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어떻게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사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셨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환난과 핍박에 처한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에 처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등등 바로 이와 같이 신앙적 차원에서 높은 일을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장한 일이 다툼이나 허영으로 물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고 겸손히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일,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주님과 자신 중에 무엇을 기초로 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3절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 주께서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24-27절까지 그 유명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비유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보통 주의 말씀을 듣고 실천한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요 주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실천의 유무를 대조한 비유라면 지은 집을 비교하여야 합니다. 곧 본문의 비유는 주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집을 지은 사람과 주님의 말씀 외의 것에 기초하여 집을 지은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집을 지은 것에 대한 비교가 아니라 무엇에 기초하고 있느냐를 비교한 비유입니다. 집이 견고한 것도 또 무너지는 것도 둘 다 기초 때문입니다.
결국 얼마나 종교성이 짙은 일을 했느냐 - 선교사, 목사, 전도 등등 - 보다 그런 일들로 얼마나 주님의 모습이 드러났느냐-사랑, 겸손, 온유 등등-로 자신의 신앙을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나무냐 나쁜 나무냐의 구별을 짓는 기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열매를 맺는 신앙만이 나중에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7. 쓰레기통(창3:17-24)


깨끗한 집에는 쓰레기통이 있습니다.

 

본문은 아담과 하와가 쫓겨나는 장면입니다. ‘이 사람이 선악울 아는 일에 우리 중에 하나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생명과를 따먹고 영생할까봐 하나님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인간을 추방하십니다.
“그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과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0-21)
이 장면은 본 훼퍼는 [옥중서간]에서 “고칠 수 없는 것은 감추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적었습니다. 그것을 감추어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깨끗한 집과 더러운 집이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깨끗한 집은 쓰레기가 통 속에 들어가 있는 집이고, 더러운 집은 쓰레기가 널려 있는 집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주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깨끗한 사람이 되면 우리 마음에 ‘더러운 생각이 안나온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고칠 수 없다면 감추고 사십시오.

 

그러나 성경에 신앙인이란 ‘그 마음 속에 다시는 죄악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언급한 곳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일어나는 생각을 눌러야 되는 사람입니다. 악한 말을 입밖에 내지 않고 악한 생각을 행위로 옮기지 않는 사람일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악한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 자체로 당황합니다. 그리고는 결벽증에 걸려서 자신을 학대하게 됩니다.
사람은 뒤에서 욕하는 것과 앞에서 욕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쁩니까? 그것은 앞에서 욕한 것이 훨씬 더 나쁩니다. 그러나 뒤에서 욕하면 치사하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뒤에서 욕한 것은 예의를 지킨 것입니다. 앞에서 욕한 것은 싸우자는 것입니다. 뒤에서 욕한 것은 싸우지 않겠다는 자세입니다.
‘고칠 수 없는 것은 감추고 지내야 합니다.’ 상대해서 감당할 수 없을 때 도망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나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한 것입니다. 성경에 진술된 말들, ‘사랑하자, 봉사하자, 충성하자’하는 것들을 결심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자기 실력은 돌아보지 않고 단순하게 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성결한 삶을 유지해 가십시오.

 

사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란 것이 그런 낮은 수준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훨씬 차원 높은 인격의 한 수준인 것입니다. 그것을 고쳐 나가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들을 만났을 때 ‘이 일은 내가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만큼 용기 있는 일은 없습니다.
깨끗한 사람이란 주머니에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손수건이란 깨끗하게 간수하는 것이 아니라, 코 나오면 닦고 더러운 것이 있을 때마다 닦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은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고칠 수 없으면 감추어야 합니다.
누구와 화해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렇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깊고 오묘하게 만드셨는가를 이해해야 하는 구절이 본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쓰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기억케 하는 본문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인간을 대접하는 것이고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로 하나님 앞에 만들어졌는가를 기억케 하는 내용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남이 뒤에서 흉보는 것은 용납해야 합니다. 우리도 남을 뒤에서 흉보아야 간신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의 마음은 그리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많은 시행착오와 좌절할 만큼의 성격적 결함의 치명적 실수들을 경험해서 고쳐 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속마음에 더러움과 더러운 유혹을 받습니다. 그것이 없어서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 묻어서 성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8. 제자의 길(눅9:57-62)

 

부친의 차례를 치르는 일도 주님은 막으셨습니다.

‘주님을 좇는 일’과 ‘신자가 되어서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예수님께 나온 한사람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를 좇겠습니다’ 말할 때에 예수님은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말하는 것이냐? 반문하셨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았던 것은 먹고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하는 아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일에 예수님을 이용할려고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부친을 장사지내는 일’도 ‘가족과 작별 인사하고 오는 것’도 막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라”

 

 

 

 

신앙의 싸움은 가정에서 제일 먼저 벌어집니다.

 

신자된 우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행과 축복의 개념을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달리한 존재들입니다. 신자는 생활 방식과 원리들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뀐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다는 것이 세상의 것을 더 윤택하게 하는 것이라는 차원으로 가면 절대 안됩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은 양립할 수 없다는 진술입니다. 본문 마지막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앞에 진술된 것이 결례를 말한 것이라면 뒤에 것은 충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가정에서 제일 먼저 전쟁이 벌어집니다. 다른 일은 다 이해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일만은 도무지 용납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것과 동일한 길을 걸어갈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에게 모두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것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대속의 사역’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행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과 방불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썩어야만 열매를 맺는 법칙이 모든 성도들에게 그대로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의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4:7-13)
우리 생각에는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좇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죽이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고전4:9)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아주 정확하게 깨뜨리고 계십니다. 실수하고 잘못한 것 때문에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도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런 방법으로 생명은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4절 이하에서 본 것 같이 우리에게 옆 사람들이 모르는 일들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나의 일과 태도를 보고 배우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우리가 져야 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지셨습니다. 거꾸로 우리가 그를 못 박았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는 다시 소생합니다. 똑같이 우리도 이웃에게 그렇게 하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하셔서 그 방법으로 한 영혼을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의 기쁨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는 것을 보는 것이 신자의 최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능욕받는 일은 기쁨이 되었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2-6)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감옥에서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자기가 기대했던 그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기대를 가졌습니다. ‘이분이 오시면 죄악을 심판하고 이방 민족을 쫓아내고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시키셔서 이제는 전쟁도 슬픔도 없는 나라를 건설하시리라’ 그래서 헤롯 앞에서도 당당하게 그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으로부터 도무지 그런 반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영적인 반응을 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지금은 심판할 때가 아닙니다. 살려내는 때입니다. ‘지금 천국의 확장은 잘못한 자들을 심판해서 몰아내고 하나님의 백성을 온전한 자리로 앉히는 평화를 주는 때가 아니라 지금 사망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죄와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그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끌어내는 때다’라고 역설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6)
나중에 사도들의 모습들도 사실은 이러한 면에서 전혀 달라집니다. 사도행전 5장에 가면 대제사장들과 함께 한 자들이 사도들을 잡아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시비를 벌이다가 그대로 놔두기로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막는 것이 불법이요, 사람의 생각으로 그리 한 것이면 스스로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을 불러 들여 채찍질 하고 놓아 주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짐을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정당한 신자로서 끝까지 남아 있는 자가 되십시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제비 새끼처럼 먹이를 갖다주면 받아먹고 앉아 있는 형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심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그 일을 시작하시고 완성 국면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살펴 봅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아직은 구원의 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문을 활짝 여시고 아직도 화목케 하시는 말씀을 부탁하시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지금 십자가를 지고 능욕받는 일에 부름을 받고, 우리가 죽어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는 일에 부름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지 ‘주여, 제가 주를 따르겠습니다. 나에게 능력과 영광을 주옵소서’는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아니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오늘 이런 식으로 주님이 요구한다면 정당한 신자가 몇 명이나 남을까요? 이런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가 그 교회와 그 사회가 실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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