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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를 돌려주세요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6. 27. 11:57

우리 아빠를 돌려주세요

 

조동범 | 2009-06-26

 

불쌍한 우리 아빠의 뼈가 박물관 2층 유리상자 속에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울음이 나와. 모든 사람들이 아빠를 구경할 수 있잖아. 내가 가난한 에스키모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나는 우리 아빠를 아빠가 원했던 방식으로 무덤에 묻을 수 없는 거지?

 

- 본문 중에서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죽어서도 편히 묻히지 못한, 살이 발린 채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아버지의 시신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던, 한 소년이 있다. 피어리에 의해 미국에 오게 되어 평생을 미국인도 에스키모인도 아닌 삶을 살다가 서른 중반에 생을 마감한, 슬픈 삶이 있다. 그는 평생 북극을 그리워했고, 동시에 자신의 모든 불행이자 비극이었던 미국을 버릴 수 없었다. 북극에서 온 소년에게 뉴욕의 화려함은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었으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해진 폭력이기도 했다. 미닉의 삶은 결코 개인의 불행이 아니다. 제국주의의 폭력 앞에 무력했던 미닉의 비극은 바로 우리의 비극이자 슬픔에 다름 아니다. 불행한 에스키모. 그의 이름은, 미닉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박물관에 전시된 아버지의 유골과 맞닥뜨렸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었겠는가? 당신의 아버지가 살이 발린 채 박물관 유리 전시실에 한낱 구경거리로 전시되어 있다면 당신은 과연 어떤 기분이겠는가? 이 책의 주인공 미닉은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아버지의 유골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때부터 그의 불행은 실체를 드러내고 그의 삶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실 미닉의 불행은 피어리를 따라 미국에 간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에게 피어리는 위대한, 혹은 고난을 극복한 탐험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본 편향적인 시선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물건을 주고 에스키모의 진귀한 물건을 강탈했으며 자신을 도와준 에스키모를 멸시했다. 그에게 북극은 단지 탐험의 대상일 뿐이었고 에스키모는 열등한 종족에 불과했다. 그러나 에스키모가 없었다면 그의 북극 탐험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사실 피어리의 북극 탐험은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다.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에스키모의 도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피어리에게 부여한 최초의 지위는 과연 합당한 것일까? 이미 북극에는 에스키모가 살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결국 피어리의 북극 탐험은 제국주의의 오만한 시선으로 바라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미국인들에게 에스키모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구경거리이자 연구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키모를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했던 것일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백인이 아닌 존재는 문명이 아닌, 그저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제국주의의 폭력과 감춰졌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피어리를 따라 뉴욕에 갔던 6명의 에스키모. 그들은 동물원의 동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한낱 구경거리에 불과했으며 인류학의 연구 대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뉴욕의 감기는 그들에게 치명적이는데, 6명의 에스키모 중 4명은 감기로 죽고 1명은 북극으로 돌아갔으며 미닉만이 뉴욕에 남겨졌다. 미국인에게 입양되어 행복한 삶을 살 것만 같았던 미닉. 그러나 미닉의 행복은 거기까지였다. 양어머니의 죽음과 양아버지의 해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무렵, 미닉은 자신의 아버지 키수크가 해체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음을 알고 충격에 휩싸였다. 미닉은 아버지의 유골을 돌려받기 위해 투쟁했지만 미국인들은 미닉의 아버지를 돌려주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미닉은 북극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그러나 북극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미닉의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닉은 힘겨운 투쟁 끝에 북극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에스키모의 언어와 문화를 잊은, 뉴욕의 화려함을 경험한 그에게 그곳은 더 이상 예전의 아름다운 고향이 아니었다. 미닉은 결국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생활과 문화 역시 더 이상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미닉은 에스키모인도 미국인도 아닌, 단지 이방인이었을 뿐이었다. 미닉은 피츠버그로 이주한 이후에 잠시 행복한 삶을 맛보기도 하지만 폐렴으로 서른 중반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에스키모. 에스키모는 그들의 언어로 ‘생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을 에스키모라고 부른 것은 당연히 백인들이었다. 백인들에게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생고기를 먹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을 에스키모라고 부르지 말자. 그들은 에스키모가 아니다. 그들을 지칭하는 정확한 명칭은 이누이트이며 그것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에스키모, 아니 이누이트의 유골은 백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들의 고향 북극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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