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늙지 않습니다.(회갑맞이소감)
--2005년 12월을 내 인생의 만 60회 생일로 맞고 보내면서
나는 늙어 갑니다. 그러나 시간은 늙지 않습니다. 시간은 시간 그대로 나를 처녀림처럼 기다립니다. 내가 만일 이제라도 저와의 사랑에 빠질 수만 있다면 저와 함께 만드는 미래는 아직도 황홀한 창조일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탓하기보다 저를 사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나의 파트너인 시간과 더불어 내 인생의 마지막 무대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선배들은 시간을 이해하는 여러 관점들을 제공해 왔습니다. 그중에 가장 동양적이고 보편적인 사색은 순환론적인 관점으로 대표되는 힌두교나 불교의 시간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은 돌고 돌면서 다시 오늘을 맞이한다는 소위 윤회적 관점입니다. “인생은 원이다”라는 생각이 그것이고 소위 뉴에이지적 시간관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시간관이 가진 낭만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런 시간관이 우리의 인생을 생산적으로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시간관은 창조적인 긴장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과론은 이런 시간관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철학적인 장치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만회할 기회를 가진다는 점에서 긴장은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시간관과 대조를 형성하는 대표적인 시간관이 선으로 표현되는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시간을 일찍부터 ‘크로노스’(Chronos)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러나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런 시간관에서 인생은 존재를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일찍 성경의 기자들은 ‘크로노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카이로스’(Kairos)를 말하고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관은 흘러가는 시간이 그냥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오메가 포인트의 목적을 가지고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시간이 하나님의 목적을 빗나갈 경우 하나님은 역사 속에 개입하십니다. 이런 시간-바로 때가 찬 위기의 시간이 곧 카이로스의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독교적 시간을 가르쳐 종말론적 시간관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카이로스의 시간관에서 비로소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묵상하고 이런 목적 실현의 마지막 순간을 진지하게 맞기 위한 종말론적 긴장의 태도로 오늘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은 다시는 맞이할 수 없는 꼭 한번 밖에 없는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진정한 기독교적 시간관은 그냥 선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점(.)으로 연결된 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순간의 점들이 모여 오늘을 만들고 내일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목적이상으로 오늘 이 순간의 현존을 고민해야 합니다. 인생은 목적 그 자체만이 아닌 오늘 이 순간의 의미도 동일하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으로만 살다 보면 오늘은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도구화되는 오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과 오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는 것이 어려운 작업일지라도 내일을 오늘에 살고 오늘에서 이미 내일을 사는 실존적인 인생이야 말로 가장 기독교적 존재의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여기서 천국을 살고 순간에서 영원을 사는 삶이라 할만 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존재의 방식을 ‘영원한 지금’(Eternal Now)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시편기자는 불과 70의 인생, 강건하면 80의 인생을 사는 우리가 이렇게 영원을 바라보며 사는 방식을 시편 90편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기자는 인생은 결코 슬픔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현존임을 인정하면서도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즐겁고 기쁜 인생이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나 자신의 현존을 위해 즐겁고 기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을 영원처럼 살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를 화나고 슬프게 하는 일에서 좀더 초연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를 향하신 주인 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질적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일들에 대하여는 비록 내 생각과 다른 무엇이라 해도 가볍게 미소 지으며 축복하며 지나 갈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의 호흡을 감사하고 감격하며 오늘 여기에 허락된 사람들과 환경을 소중한 그분의 선물로 받으려 합니다. 현존(Present)이 바로 그분의 선물(Present)이기에 말입니다.
아마 저를 아끼는 벗들이 이 편지를 읽을 즈음 우리 가족은 제주에서 조용한 관상의 시간과 기도로 인생의 의미를 나누는 며칠의 ‘함께 함’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마침 둘째 아이 범이가 한동대 법률대학원을 졸업하고 큰 아들 황이 내외가 크리스마스 휴가로 귀국하여 오래 만에 가족들이 함께 하는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시간에서 의미있는 사람들과의 함께 함보다 더 소중하고 더 눈물겨운 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지구촌 가족들 한분 한분 모두와 더불어 함께 하고 싶지만 부질없는 민폐를 끼치는 것이 부담스러워 육신의 가족들과의 ‘함께 함’으로 그 의미를 대신할까 합니다. 진실을 고백하자면 나의 인생에서 육신의 가족들 이상으로 나의 영적 가족들은 한 순간도 떨칠수 없는 무게를 지닌 내 존재의 버팀목이 되어 왔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나누고 받고 울고 웃다가 흐른 세월-그 시간의 마당에서 부딪쳐온 얼굴들과 눈길들은 바로 저의 존재의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남은 세월도 그렇게 매 순간 순간 인생의 주인되신 그 분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 주인과의 사랑에 빠진 영혼들을 바라보다가 하나의 불꽃으로 사라져갈 운명을 더욱 뜨거운 가슴으로 끌어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 불꽃들의 잔영을 지는 석양에서 되도록 여유있게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떠오를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며 오늘 이저녁의 안식을 마치 영원의 향연처럼 사랑하고 싶습니다.
조창인 형제의 기시고기의 한 구절이 다시 가슴시리게 떠오릅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그가 그렇게도 살고 싶어 한 내일이었다”고. 내가 살아온 세월 육십년을 은혜로 살게 한 모든 분들 그리고 오늘을 감사로 맞게 해주신 이들 모두에게 평안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샤바트 샬롬!
P.S.--어제 17일 한동대 국제 법률 대학원 졸업식에서 둘째 아들 범이는 저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범이가 최우등 1등 수석(summa cum laude)로 졸업하며 리더십 상을 함께 받고 저에게 “아빠, 이것이 내가 아빠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야”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 아들의 졸업식장에서 또한 “21세기 텐트 메이커들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축복을 함께 누릴수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신 성도들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어 순진한 자랑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또한 본의 아니게 저의 생일 소식이 새나가 주일 저녁 제직들에게 깜짝 선물을 받게 된 것도 황송한 기쁨이었음을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또 한번 저는 사랑에 빚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평안을 빕니다.--제주로 떠나기전/빚진 종 목동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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