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빛바랜 사진이야기

[스크랩] 아우슈비츠의 수용소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8. 2. 18:42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도 잔인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수용소를 가보시겠습니까? 

 

모든 유대인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은 아우슈비츠로 이송하여

그들이 도착 즉시 '욕실·청결·건강'이라는 거짓 푯말이 붙은

비르케나우의 독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그 역사의 현장으로 가보세요.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Oswiecim )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서쪽으로 약 50㎞ 지점에 있는 작은 공업도시 아우슈비츠는 전 세계적으로 테러와 학살,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4월 27일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비밀리에 이곳 교외에 거대한 강제수용소를 건설하였습니다.

 

지명인 오슈비엥침은 독일군이 세운 수용소의 이름을 따 아우슈비츠로 바뀌게 됩니다. 수용소 입구의 철문 위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질수 있다)'라는 글씨(좌측 사진)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해 6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확장되어 3개의 파트(아우슈비츠 1호, 아우슈비츠 2호-비르케나우, 그리고 아우슈비츠 3호-모노위츠)로 나뉘게 됩니다.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가 처형당했으며, 그 후에는 러시아 포로들과 집시, 그리고 다른 민족주의 죄수들이 이곳에 수용되었습니다.

 

1942년부터는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완전 말살 계획'의 하나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도 잔인한 학살이 이곳에서 자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유대인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들은 도착 즉시 '욕실·청결·건강'이라는 거짓 푯말이 붙은 비르케나우의 독가스실(우측 사진)에서 학살당했습니다.

 

피수용자는 강제노동과 영양실조, 전염병으로 죽었으며, 일부는 의학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학살된 자의 금니와 모발 등은 자원으로서 회수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나치는 그들의 범죄 행위를 감추기 위해 가스실과 화장터를 비롯한 건물들을 부수고 자료들을 소각시켰습니다.

 

1945년 1월 27일 붉은 해방군에 의해 수용소 뒷편에서 그 잔해들이 발견되었으며, 1947년 7월 2일에는 폴란드 의회의 승인으로 잔존하는 아우슈비츠 1호와 아우슈비츠 2호-비르케나우 수용소 터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을 건립하게 됩니다.

 

1967년 4월에는 수용소 자리에 위령비가 세워졌는데, 제막식에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포함하여 약 12만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까지는 크라코프에서 기차와 버스로 이동할수 있으며, 버스는 1시간 30분, 기차로는 1시간 10분이 소요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들어 갈 때보다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더 무거웠습니 다.
 
 가스실 굴둑이 역사의 증인입니다.

 
 좌우로 있는 이중전기철조망


 
 막사와 막사 사이에도 이중 전기철조망이




해묵은 포플러 나무가 그날의 참상을 알고 있겠지


 
 막사입구

 
" 캠프 오케스트라가 여기에서 행진곡을 연주하여 죄수들을 자연스럽게 집합시켜 인원을 점검 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들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는 죠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1863-1952)
 

 


 
 통행증명서


 
 임시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오기전 대기중인 유태인


 


 
 쓰고버린 독가스깡통 산터미를 이루었다.


 
 싸이클론 비(Cyklon B) 라는 독가스는 독일 데게슈(Degesch)사가 생산해서,
 1941년부터 1944년 까지 약 30만 마르크의 이익을 내었다


 
 까스실에서 나온 색이 바랜 머리털


 
 머리털이 산더미처럼 그날의 참상을


 
 가스실로 들어 가기전 모아놓은 안경들


 
 처형되기 직전 벗어 놓은 유대인 신발더미


 
 재활용을 위하여 쌓아놓은 옷가지들~  모든게 다 재활용이지만.


 
 소유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 트렁크,
 브러쉬 종류, 신발, 식기, 신체장애자의 의수족 등이다.
 

 
 최고가의 법낭 그릇들


 


 
 가죽가방


 


 
 소유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 가죽트렁크,


 


 
 어린이들의 옷과 신발, 우유병 등은 관람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보석을 찾느라고, 뒤축이 떨어진 신발들


 
 면도용 부러쉬및 머리빗들 


 
 당시의 구두약통


 
 처음 수용소로 들어올 때 수용소 관리국장으로부터
  "너희들이 출구 화장터의 연기 하나밖에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의복과 소지품들을 빼앗기고, 3가지 포즈의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1943년 아우슈비츠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 초기에는 입소하면 정면 측면등 사진을 남겼으나 그후  엄  청난 사람이 들어 올 때는 그냥 까스실로 바로 갔다고 함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정전후 구출 되었다고 한다.


 
 비인륜적인 화장실


 


 
 고급 침실


 
 막사 입구


 
 독 가스실 내부/30x15m 크기의 밀폐된 
 이 독가스 실에서 한번에 2백명씩의 유대인들이 죽어갔다
 가스실 내부, <추모의 꽃다발>


 
 독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 시체더미들은
 이 소각장에 옮겨져 한 줌의 재로 바뀌었다>


 
 사망후 많은 시체를 자동으로 태우는 곳


 






 
 아이러니하게 이젠 이수용소가 폴란드 제일의 관광수입원이 되어버렸다.







 
Phil Coulter
 
PS: 우리 나라가 공산화 된다면 [아우슈비추] 보다 더 저질적으로 잔악하게 우리 인구의 반
      약1,000만명은 희생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정신 바짝 차려야한다
출처 : 아침이슬
글쓴이 : 아침이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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