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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도의 영화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8. 5. 06:24

인도에서 영화가 처음 공개된 것은 1896년 7월 7일 봄베이(1995.11. 뭄바이로 개칭)에서였으나, 인도인의 손으로 영화가 제작된 것은 1912년 D.G.팔케의 극영화 《하리시찬드라왕》이 최초이며, 이 작품은 이듬해에 개봉되었다. 그후 많은 제작자가 나타났으나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는 식민지 정책의 심한 규제를 받고, 검열제도는 민족의식을 억압했기 때문에 도피적인 내용의 영화와 신화적인 주제나 음악·무용 등의 내용을 담은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이행은 1931년 힌두어에 의한 작품 《아람 알라》에서 시작되었다. 독립 이후 영화계는 스타시스템의 확립과 함께 극영화의 제작편수는 연간 평균 300편을 넘어서 양적으로는 미국·일본과 어깨를 겨루는 세계 3대 영화산업국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인도영화는 동부의 콜카타를 중심으로 하는 벵골어 영화, 서부의 봄베이에 거점을 둔 힌디어·마하라시트라어\·마라티어·구자라트어\·콘카니어 영화, 남부에서는 마드라스를 중심으로 하여 제작되는 타밀어·텔루구어\·캐나다어·말라얄람어 영화가 있어서 인도의 영화산업은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봄베이 동쪽 푸나에는 국립영화학교가 있어서 1961년 이래 젊은 영화예술가를 양성하고 있다. 인도영화의 대부분은 고전이나 신화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으나 리얼리즘 또는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도 제작되어 국제적 평가를 높였다.

1954년 칸영화제에서 대상(大賞)을 받은 봄베이의 명감독 비말로이의 작품 《2에이커의 토지》를 필두로 1955년 쿠와자 아마드 아바스가 제작한 《문나》가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캘커타의 사타지트라이는 《대지의 노래》를 발표하여 벵골지방의 가난한 일가를 생생하게 묘사한 리얼리즘 수법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어서 《아파라지트》 《오프의 세계》를 제작하여 '오프 3부작'이 완성되자 그의 영화예술가로서의 명성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와 같은 뛰어난 영화작품의 출현은 인도영화 발전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독립 후 인도 영화계에서는 스타시스템의 확립과 함께 배우가 제작·감독\·주연을 겸하는 일이 많은데, 라지 카푸르(1924∼ )는 국제적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채플린과 비슷한 경향을 가진 희극배우로 《밤의 장막 속에서》가 1957년 체코의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이래 《방랑자》 등의 작품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동시에 감독으로서도 인도영화계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라젠드라크마르, 딜립 크마르 등은 연기파로 이름 높은 남성 배우들이다.

인도에는 1만 2천개 이상의 영화관이 있다. 대도시뿐 아니라 시골 구석까지도 영화관 앞에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인도의 영화는 거의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도때도 없이 음악이 나오고 난데없이 춤을 추는 장면이 계속 된다. 영화의 인기를 그 영화의 OST 앨범의 판매량으로 가늠한다고 하니 영화에 있어서 음악의 역할이 어느 정도 되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런 뮤지컬 같은 영화에 또 하나 보태지는 것이 있다면 액션 장면이다. 인도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인도인들은 싸움은 커녕 심지어 화를 내는 것도 드물다. 그런 그들이 영화속에서는 싸우고 주먹을 날리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도의 영화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관객들의 태도이다. 조용히 앉아서 영화를 감상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인도의 관객들은 영화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 하여 소리를 지르고 떠들고 울고 웃는다. 상류계급이 앉는 2층 좌석은 그 정도가 덜하지만 1층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함성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고 영화에서 노래와 춤이 나올때는 몸을 들썩이고 박수를 쳐댄다. 그 모습에서는 영화에 그토록 심취할 수 있는 인도인들의 순수함을 엿볼 수 있다.

출처 : 여행가이드 [국내여행,유럽여행,일본여행,중국여행,동남아여행]
글쓴이 : [여가]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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