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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문관을 통해 본 화두의 분류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12. 22. 07:19

무문관을 통해 본 화두의 분류

 

1. 무문관(無門關)

2. 선문답(禪問答)

 

 

1. 무문관(無門關)

중국 남송시대에 무문혜개(無門慧開)스님이 많은 공안(公案)가운데 잘 알려진 48則(항목)을 가려 뽑아서 무문관을 지었다. 여기서는 48則 중에서 더 잘알려진 것을 14則으로 간추렸다.

 

조주구자(趙州狗子)

조주스님에게 어느 중이 묻기를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은 "無!(없다)"라고 대답했다.

 

백장야호(百丈野狐)

백장스님이 설법할 때마다 한 노인이 있어서 늘 청중을 뒤에서 열심히 듣고 있다가 대중이 물러나면 그 노인도 역시 물러나곤 하더니 어느날은 설법이 끝나고 대중이 다 물러났는데도 이 노인 만이 버티고 서 있었다.

백장스님은 이상히 여겨 "면전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 때 노인 말이 "저는 사람이 아니올씨다. 옛적 가섭불의 재세시 이 절의 주지였습니다. 그때 어느 학인이 묻기를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이에 제가 대답하기를 "불락인과(因果에 떨어지지 말라)"라고 했기 때문에 五백년동안 야호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 일전어로 야호를 벗어나게 해주시오."하고 묻기를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떨어집니까" 이 때 백장스님이 "불매인과(因果에 얽매이지말라)"라고 가리키자, 그 말 끝에 대오하여 인사하고 말하기를 "저는 이미 야호의 몸을 벗어나서 뒷산에 있으니 스님께 바라건대 죽은 僧과 같이 장례를 치러 주시오."

백장스님은 유나로 하여금 대중에 고하기를 食後에 죽은 승의 장례식이 있다고 했다. 이때 대중이 수군거리기를 "일중이 모두 평안해서 열반당에 한사람의 병자도 없었는데 어째서 죽은 승의 장례가 있다고 할까." 食後 스님은 대중을 데리고 뒷산 바위 밑에 이르러 지팡이로 죽은 야호를 끄집어 내어 화장을 했다.

 

구지수지(俱肢竪指)

구지스님은 누가 무어라고 물어도 다만 손가락을 들 뿐. 후에 동자가 있어서 어느 때 외인이 묻기를,

"스님께서 어떤 법요를 설하던고?"

동자 역시 손가락을 들다. 후에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드디어 칼로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는 아파 통곡하며 달아날 때 스님이 이를 불렀다. 동자, 머리를 돌린다. 이때 스님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동자 곧 깨쳤다.

구지스님은 세상을 떠나려할 때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천룡의 일지두선(一指頭禪)을 배워 일평생 쓰고도 남았다는 말을 마치고 돌아가셨다.

 

세존염화(世尊拈花)

세존께서 옛날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니, 이 때 대중이 모두 그뜻을 몰라 묵묵했는데, 오직 가섭존자만이 미소를 지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이 있으니,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고 하셨다.

 

조주세발(趙州洗鉢)

조주스님에게 어느때 중이 묻기를 "제가 처음 총림에 왔습니다. 잘 지도해 주시오" 하니 조주스님의 말이 "죽(밥)을 먹었느냐, 아직 안 먹었느냐?" 중이 대답하기를 "죽을 먹었습니다. "

"그러면 발우(그릇)를 씻었을 테지." 그 중이 깨쳤다.

 

달마안심(達磨安心)

달마 면벽함.

二조(혜가)가 눈(雪) 위에서 팔을 베어 하여 말하기를, "제가 마음이 편하지 못하니 바라건대, 스님께서 안심케하여 주소서."

달마 대답하기를, "마음을 가져오라. 그대를 위하여 편안케 해 주리라."

二조 "마음을 구하려도 구할 수 없습니다."

달마 말하기를, "그대를 위하여 안심케 했노라."

 

간두진보(竿頭進步)

석상스님 말하기를,

"백척간두에서 어떻게 걸을 것인가. 또 옛 어른들이 말하기를, 백척간두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아직 眞은 못되리라. 백척간두에서 모름지기 걸어 보라. 시방 세계에 전신을 現하리라."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스님이 어느 때 동당(東堂) 서당(西堂)간에 고양이새끼 한 마리로 시비가 벌어졌기 때문에 고양이새끼 목을 잡아들고 말하기를 "대중아 도득(맞은 對句·즉 든 이유)하면 살리고 도부득(對句가 맞지 않으면)죽이리라."

대중이 한사람도 대꾸가 없었다. 스님은 드디어 이를 잘랐다. 밤 늦게 조주가 외출로 부터 돌아왔기에 스님은 조주에게 거사(낮에 한 사유를 말하는 것)하니 조주는 아무말없이 신발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나갔다. 스님은 "네가 만약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는 죽지 않았을 것을..."

 

평상시도(平常是道)

남전스님에게 어느 때 조주가 묻기를 "어떤 것이 이 도(道)입니까."

남전스님 대답하기를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이다"라고 했다.

남전스님 말하기를 "도는 지(知)에도 속하지 않고 부지(不知)에도 속하지 않는다. 지(知)하면 이 망각이요 부지(不知)하면 이 무기(無記)니라. 만약 정말 불의의 도에 달하면 오직 태허의 확연하여 통할함과 같을지니 무엇 때문에 굳이 시비할 시비할 것인가."

조주가 이 말에 돈오했다.

 

불사선악(不思善惡)

六조 그 때(因) 命상좌가 쫓아 대유령에 다다르매 六조는 명상좌가 다다름을 보고 곧 의발(衣鉢)을 바위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의발은 "信"을 표시하는 것인데 완력으로 다툴 것인가. 그대가 가져가려면 가져가 봐라."

命이 들려고 하니 산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는지라, 깜짝 놀라 벌벌 떨면서 명이 말하기를

"내가 法을 구하려 왔지, 의발 때문은 아닙니다. 원컨대 행자(六조)는 가르쳐 주소서."

六조 말하기를 "善도 생각지 말고 惡도 생각지 말라, 이러할 때 어떤 것이 명상좌의 본래의 면목인고?" 명이 이 말에 대오하여 전신에 땀이 흐르고 눈물 흘리다.

 

비풍비번(非風非幡)

六조가 어느 날 찰번(刹幡)이 바람에 날리는데, 두 중이 서로 대론(對論)하기를, 한 중은 깃발이 날린다고 하고, 다른 한 중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여 서로간 자기의 의견을 주장할 때, 六조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오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오 그대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두 중이 송구스러워 하다.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조스님에게 어느 때(因) 대매(大梅)가 묻기를, "어떤 것이 불(佛)입니까."

마조스님,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대답하다.

 

비심비불(非心非佛)

마조스님에게 어느 때 중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마조스님 대답하기를, "비심비불이니라."

 

정전백수(庭前栢樹)

조주스님에게 어느 때 중이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입니까."

조주스님 말하기를 "뜰앞의 잣나무(栢樹子)"라고 대답했다.

 

 

 

2. 선문답(禪問答)

◆선문답의 개요

선문답은 깨달음의 응용과 확인 그리고 체득을 지향하는 선종의 전통적인 표현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뜬금없는 동문서답이나 내용 없는 언어의 유희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잘 가꾸고 보존되어 내려온 선종의 전통적이고 비밀스런 문화에 속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인류가 가진 가장 위대한 표현기능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묻고 답하는 일이다> 이것은 모든 문화발전의 원동력이자, 인간이 지닌 가장 본능적인 <자기표현수단>이다. 우리는 불교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묻고 답하는 일> 이야말로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우기 실제적인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가르침은 더더욱 질문에 대한 답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범주속에서 발견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선문답이다. 선문답은 동문서답이 아니요, 신비적인 유희도 아니다. 선가의 언어 체계속에서 드러나는 절실한 표현방식인 것이다.

 

◆선문답

선문답은 선(禪)을 지도, 체득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선사(스승)와 납자(제자) 사이의 문답이다. 어찌 보면, 좀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대화라고도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문답에는 항상 명확한 주제가 있다. 그것은 불교의 진리를 체득하는 것에 관한 것과 불교의 진리, 즉 선종에서의 선(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선의 진리를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설명이나 가르침이 없다. 단지 물음에 대하여 단순하게 드러낸 대답이 있을 뿐이다. 또한 선문답은 깨달음에 관한 검증을 위해서도 쓰여진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선문답은 깨달은 사람 사이의 법의 문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교종적 설명이 아니고, 선종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묻고 답하는 것이다. 여기에 선문답의 난해한 면이 있는 것이다. 선문답에는 그래서 선기(禪機)가 드러난다. 여기에서 막힌다면 그것은 곧바로 물은 사람의 현성공안(現成公案)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가르침의 방편이 또한 선문답인 것이다. 억지로 이야기하자면, 선문답은 깨달은 사람이 선종의 전통적 방식에 의해서 본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공안과 함께 선사의 지극한 지도편달의 한 방편이다. 선종의 이러한 전통적 방식은 대화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시적(詩的) 형식을 빌린 게송을 통해서도 드러내어 진다.

 

◆초심자가 공안(公案, 화두)을 보면

초심자의 경우에는 완전히 헛소리처럼 들리기 쉽상이고 아니면 전혀 반대인 신비주의적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선문답은 결코 있지도 않은 허위를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선의 진리를 그대로 일상적 언어를 통해 뱉어 낸 행위에 불과 한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禪의 도리를 설명해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수행을 해나가는 데 장애만을 줄뿐이다. 하지만 선문답을 완전히 비논리적 유희나 동문서답식 해프닝으로만 받아들이는 현상이 존재한다면 이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은 바로 불교의 정수이고, 이러한 선을 접할 기회를 상실하는 것은 올바른 불교를 배우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문답에 사용되는 언어

다양한 언어들이 선문답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적인 표현을 위주로 표현하는 悟道頌이나 傳法偈 등의 게송을 살펴보면 상당한 상징과 비약이 등장한다. 그러나 거기에 사용되는 언어도 마찬가지로 상식적 언어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다만 논리의 비약이 따를 뿐이다. 혹시 이해못하는 단어나 어휘는 시대상황 속에서 지금은 약 간 이해하기 어려운 방언이나 도구의 이름 정도가 고작이다. 그리고 선문답에서는 단순한 언어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할, 방, 손짓, 발짓, 몸짓, 시늉 등의 광의의 언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할은 벽력같은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방은 주장자로 상대를 치는 것이다. 또한 손짓, 발짓, 몸짓, 시늉 등이 모두 상황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구사되어 진다. 난데없이 계속 소리만 지른다면 그것 또한 선사를 흉내내는 사선(死禪)일 것이다.

 

◆선문답의 기능과 한계

선문답이 공안화 되어 수행의 지침으로 쓰이는 것은 간화선의 훌륭한 전통이다. 물론 간화선의 병폐를 동시에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문답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즉 수행이 없는 선문답은 성립도 안될 뿐더러, 있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또한 선문답만을 일삼는 다면, 이것 또한 하나의 폐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생긴다. 수행에 힘쓰지 않고 언구言句에 쫓아다니며 허덕이는 이가 분명히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간화선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깨달음은 결코 선문답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선문답으로 인해 생긴 공안에 의지해서 올바른 수행이 지어졌을 때만이 깨달음의 조건이 갖추어 지는 것이다. 선문답은 깨달음의 응용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드러냄인 것이며, 또한 확인인 것이다. 공안 하나를 뚫으면 1800공안을 다 뚫는 다는 것이 빈말이 아닌 것이다. 물론 훌륭한 선사의 적절한 한마디는 기연으로 맞아 떨어질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항상 참구하며, 수행하는 자세일 것이다. 선문답은 활발발지한 응용의 세계이므로,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척이나 중요시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혹한 입장에서 보면 더욱더 미혹을 가중시킬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아무리 활발발지(活潑潑地)한 선문답의 세계도 결국은 공안 하나의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오로지 힘써 수행하는 자세가 먼저 필요한 것이다.

 

3. 무문관(無門關)을 통해 보는 화두의 분류

공안(화두)에 대하여 분석하거나 분류하거나 왈가왈부하는 일은 禪에 있어서 금기(禁忌)하는 부분이지만 배우는 부분에 있어 약간 분류해보고 그 공안의 성격을 이해하고 더 많은 공안들을 접하되 수행을 더욱 진전시키기 위함이다.

 

화두에 입문하는 이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구자(趙州狗子)

趙州和尙 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조주스님에게 어느 중이 묻기를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

"無"

라고 대답했다.

 

思考의 틀을 뛰어 넘어라.

●"똥막대기"니라

운문시궐(雲門屎궐)

雲門因僧問 如何是佛 門云 乾屎궐

 

운문스님에게 어느 때(因) 중이

"어떤 것이 불입니까."

운문스님은

"간시궐(똥막대기)"이라고 대답했다.

 

●"바람도 깃발도 아니네"

비풍비번(非風非幡)

 

六조가 어느 날 찰번(刹幡)이 바람에 날리는데, 두 중이 서로 대론(對論)하기를, 한 중은 깃발이 날린다고 하고, 다른 한 중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여 서로간 자기의 의견을 주장할 때, 六조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오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오 그대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두 중이 송구스러워 했다.

 

●"뜰앞의 잣나무니라"

정전백수(庭前柏樹)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州云 庭前柏樹子

 

조주스님에게 어느 때 중이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의 西來意입니까."

조주스님 말하기를

"뜰앞의 栢樹子잣나무니라"

라고 대답했다.

 

조사선이 추구하는 경지.

 

●일지두선(一指頭禪)

구지수지(俱지수指)

 

구지스님은 누가 무어라고 물어도 다만 손가락을 들뿐. 후에 동자가 있어서 어느 때 외인이 묻기를, 스님께서 어떤 법요를 설하던고, 동자 역시 손가락을 들다. 후에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드디어 칼로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는 아파 통곡하며 달아날 때 스님이 이를 불렀다.

"동자야!"

동자 머리를 돌린다. 이 때 스님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동자 곧 깨치다.

 

●"선도 악도 아니면?"

불사선악(不思善惡)

 

六조 그때(因) 명상좌가 쫓아 대유령에 다다르매 六조는 명상좌가 다다름을 보고 곧 의발을 바위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의발은 信을 표하는 것인데 완력으로 다툴 것인가. 그대가 가져가려면 가져가 봐라."

명이 들려고 하니 산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는지라, 깜짝 놀라 벌벌 떨면서 명이 말하기를

"내가 法을 구하려 왔지, 의발때문이 아닙니다. 원컨대 행자(六조)는 가르쳐 주소서"

六조 말하기를

 

"善도 생각지 말고 惡도 생각지 말라, 이러할 때 어떤 것이 명상좌의 본래의 면목인고." 명이 이 말에 대오(大悟)하여 전신에 땀이 흐르고 눈물 흘렸다.

출처 : 환상의 C조
글쓴이 : 얼음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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