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종교이야기

[스크랩] 선의 세계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12. 22. 07:20

선의 세계

 

 

1. 선의 어원

2. 선과 경전

3. 선의 기원

4. 벽관(壁觀)

5. 안심법문

6. 이입사행

7. 미(迷)와 오(悟)

8. 견성

9. 공안

10. 천상천하유아독존

11. 돈오(頓悟)

12. 여여(如如)

13. 회광반조

14. 거울과 벽돌

15. 평상심시도

16. 회호(回互)

 

 

 

1. 선의 어원

선은 인도에서 발생한 유일한 사유법인 `요가(yoga)"에서 발전한 것으로 부처님이 불교를 개창한 이래 불교 수행자들은 선을 통해 해탈의 길을 걸어왔다. 선이 인도에서만 발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성본스님은 그의 저서 〈선사상서〉에서 몬순의 계절풍 영향을 받은 우기지역에 자리한 인도의 지리적 특성에서 찾고 있다. 즉 4월부터 3~4개월간 많은 비가 내리는 우기(雨期)에 유행을 금지하고 한 곳에 안거(安居)하며 수행토록 했는데 불교에서는 이 기간을 하안거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선은 굳게 뿌리를 내리며 발전을 거듭해왔다.

선은 산스크리트어 디야나(dhyana)와 팔리어 쥬안(jhan)의 음역이다. `디야나"는 중성명사형인데 이 말의 동사 어근인 `dhyai"의 의미는 `심사(沈思)하다" `숙고(熟考)하다"라는 말이다. 중국에 들어와 고요한 사유(靜慮), 종교적 명상(定), 직관(思惟修)등으로 풀이됐으며 한역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의 정(定)은 원래 사마디(三昧 samadhi)로서 `집중하다"를 뜻하는데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며 하나의 대상에 주력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등지(等持)라고도 의역한다.

부처님의 성도는 바로 선정에 의해서 관찰된 법의 깨달음으로 성취됐다고 말해진다. 〈불교대사전〉(홍법원간)의 풀이에 의하면 선은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혼란해짐을 막고 지혜를 몸에 배게 해서 진실의 이치로 나아가도록 하는 수행법이다.

 

 

 

2. 선과 경전

"초기 선종은 경전도 중시"

교외별전이라고는 하지만 초기의 선종이 경전을 버리지 않고 중시했음을 알 수 있는데 "경전에 의하여 도의 대본(大本)을 안다"는 말에서 압축된다.

무엇보다 대승불교의 초기 선종에서 《능가경》과 《금강경》은 주요 경전으로 분류된다. 초기 선종을 "능가종"으로 부르는 경향에서도 알 수 있다. 도선은 《속고승전》 "법충전"에서 능가를 남북에 전한 것과 이것을 계승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달마대사가 《능가경》을 혜가에게 전하면서 "내가 이 나라를 보건대 다만 이 경이 있을 뿐 너는 따라 행해서 스스로 제도함을 얻으라"고 했고 또한 혜가의 법을 받아 이 경전을 전지(傳持)한 사람들의 계보를 밝히고 있다. 《금강경》의 전지설도 전해진다.

달마에서 혜능에 이르는 육대의 조사들이 대대로 《금강반야경》을 이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설의 자료로서는 《하택신회선사어록》이 최초로 꼽혀진다. 신회는 남종선 입장으로 대승의 차원보다 높은 "최상승"이란 말을 주장했고 아울러 《육조단경》과 함께 《금강경》을 중국선종의 소의경전으로 정착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중국선종의 전통적 영향을 받은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인 조계종도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음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이밖에도 선사상과 관련된 경전으로는 《유마경》, 제법실상의 《법화경》, 해인삼매의 《화엄경》, 불성사상의 《열반경》 등이 있다. 특히 《유마경》의 경우 "직심이 바로 보살의 도량[直心是道場]"이라고 설한 <보살품>은 선종의 기본적인 입장의 근거로 많이 인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유마경》에서의 주장은 훗날 중국 선종사에 있어서 조사선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이법문으로 유명한 유마거사가 중국 선종에서 항상 산성(散聖)의 한 사람으로 주목되고 있는 것이나 유마의 침묵이 불립문자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인 좋은 예다.

 

 

 

3. 선의 기원

선은 붓다 석가모니의 깊은 깨달음을 상징하는 한송이의 꽃과 미소에 그 원초적 기원을 두고 있다. 남송시대의 무문혜개선사가 편찬한 "무문관" 제6칙 "세존염화"라는 공안은 선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시던 세존께서는 대중들에게 한송이 연꽃을 들어 보였다.

대중들은 그 영문을 몰랐으나 오직 가섭존자만이 홀로 미소를 지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진리에 관한 바른 안목과

열반으로 향하는 미묘한 마음

형상을 벗어난 실상

지극히 미묘한 진리의 문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의 법을 넘어선 가르침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한송이의 연꽃을 들어 보인 붓다와 이를 바라보고 홀로 깨달음의 미소를 지은 가섭의 이심전심에서 선불교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너무 평범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붓다는 언어의 설법보다는 한송이의 연꽃을 말없이 들어보임으로써 자신의 정신을 표현했고 가섭은 자신이 직관한 붓다의 지혜를 미소로써 표현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이야기에는 불교의 창시자이며 인류의 영원한 스승인 붓다 석가모니와 그의 후계자인 가섭의 온 생애가 압축되어 있다.

인간성의 가장 깊은 영역에 대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들은 그렇게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의 기원을 말해주는 이 평범한 이야기의 이면에는 모든 불교수행자들이 추구해마지 않는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과 같은 불교의 궁극적인 깨달음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의 법을 넘어선 가르침"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설한다.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붓다가 가섭에게 이심전심으로 전한 불교의 진수는 훗날 인간에 관한 불교의 통찰을 총괄하면서 동아시아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인 선종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선종은 경전의 주석적 연구에 치중하는 교종과는 달리 경전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오직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하면서 선종의 독자적인 조직과 수도규칙을 확립하고 토착 중국불교의 최대종파로 발전하게 된다.

 

 

 

4. 벽관(壁觀)

고정관념 넘어선 "발상의 대전환"

선을 이해하는데 가장 필요한 용어의 이해가 벽관이다. 벽관은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되는 선사상의 요체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선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송대의 종감(宗鑑)이 저술한 《석문정통(釋門正統)》에 의하면 벽관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이와같이 마음을 안정(如是安心)함이란 벽관을 말한다. 객진위망(客塵僞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벽"이라 한다. 마치 가옥 외벽이 외부의 풍진을 방지하는 것과 같이 객진위망을 근접시키지 않는 마음의 긴장, 그것이 벽관이다."

여기에서 객진이란 밖에서 오는 오염이다. 위망이란 작위적인 것을 말한다. 마치 거울을 덮은 먼지와 같은게 객진위망이다. 벽관은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설명한다면 객진위망이 달라붙지 않는 내면적인 마음의 긴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글자 그대로 벽관을 해석할 경우 마음의 긴장상태는 없을 것이다. 즉 벽관은 "벽을 본다"가 아니다. 요컨대 "벽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벽이 되어 보는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 공(空)을 관(觀)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공을 지켜보는 것이다. 때문에 벽관엔 시종일관 긴장감이 팽팽하다. 긴장감이 해소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벽과 내가 하나가 되고 또한 그 단계를 뛰어넘어 공을 제대로 파악, "깨침"이 있을 때 가능하다. "벽이 되어 보는 것"은 기존의 관념을 벗어나는 일이며 발상의 전환이다. "바람도 깃발도 아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든지 "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다리가 흐르는 것"등의 후대 선사들의 말은 벽관의 경지가 높은 수준에 다달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중국선의 초조 달마대사는 벽관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달마가 중국에 들어와 북위의 한 동굴 속에서 혼자 좌선삼매에 들었는데 흔히 이를 "면벽정진"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면벽은 외부세계와의 단절이 아니다. 달마의 면벽은 벽과 하나되어 자기와 세계를 관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범성일체(凡聖一體)의 진실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벽관은 "회광반조"(廻光反照)의 뜻을 품고 있다. 석양이든 거울이든 모든 것을 반조하는 불가사의한 작용을 벽관은 지니고 있다. 선의 출발은 이러한 벽관에 기인하며 따라서 더욱 큰 매력을 지니고 있다.

 

 

 

5. 안심법문

"안심법문"은 선가(禪家)의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 "안심(安心)"이란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을 얻을 필요가 없는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기존 "깨달음"의 경지를 한차원 높여 설명하는 선적 표현이다. 이와 관련된 역대 선사들의 안심문답은 곳곳의 자료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시초는 역시 보리달마로부터 비롯된다.

달마대사가 9년의 면벽에 들어있던 어느날 신광(神光) 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말했다.

“제자는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조사께서는 부디 불안한 제 마음을 풀어 주십시오.”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내게 가져오너라. 마음의 평화를 주리라.”

달마의 이 같은 응대에 신광은 다시 말했다.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을 수 있다면 어찌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나는 이미 그대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었느니라.”

신광은 이말에 크게 깨우쳤다. 그가 훗날 달마의 법을 이은 중국선종의 2조 혜가(慧可)대사다.

"안심법문"은 달마 혜가를 이어 면면히 계승돼 전해진다. 혜가가 법통을 계승한 뒤의 일이다. 한신도가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해달라는 당치않은 요구를 해왔다.

혜가는 참회할 죄를 어디 한번 내놓아보라고 다그쳤다. 한참을 생각한 신도가 “나는 오랫동안 죄를 찾아왔으나 발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혜가가 말했다.

“내가 그대의 죄를 사(赦)했다.”

이 신도가 그후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으니 그가 3조 승찬(僧燦)이 된다. 승찬은 법통을 받은 후 스승을 꼭 닮은 조사가 되었다. 어느날 사미승이 찾아와 예를 올리며 간청했다.

“큰 스님. 청컨대 자비를 내리시어 해탈법문으로 이끌어주십시오.”

“누가 자네를 묶어 놓았나?”

“저를 묶어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전히 해탈을 구하려 하는가?”

이 말에 사미승은 큰 깨침을 경험한다. 그가 훗날의 4조 도신(道信)이다.

 

이렇듯 안심법문은 역대조사들이 후학을 제접하는 본류로 자리해 내려오고 있다. 반규(盤珪)는 선천적으로 성질이 급해 수행에 엄청난 장애를 입고 있다는 한 제자의 하소연을 듣고 "급한 성질을 보여달라"며 오히려 태어난 마음 그대로 사는 것이 좋다고 충고하고 있다.〈반규어록〉

 

 

 

6. 이입사행

입도의 법문은 여러 가지다. 그렇지만 달마가 설한 "이입사행론"이 선학 발전의 밑바탕으로 자리하고 있다. "선으로 가는 두 가지의 길과 네가지의 실천"에 관한 달마의 설법은 이렇다.

“도에 이르는 길은 많으나 근본을 들어 말하자면 두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진리의 깨달음에 의한 입문, 즉 이입(理入)이며 다른 하나는 실천에 의한 입문, 즉 행입(行入)이다.”

"이입"이란 경전의 연구를 통한 근본교리의 이해, 즉 깊이 뿌리박은 신앙에 의해 일체의 유정물(有情物)이 하나의 참된 본질인 진성(眞性)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진성이 명확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외적 대상이나 망상으로 가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돌아와 전심으로 벽관하면 아타(我他)의 구분이 없고 성(聖)과 범(凡)이 하나의 본질임을 깨닫게 된다. 이 믿음을 굳게 지킨다면 다시는 언구(言句)와 형상에 이끌려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깨달음의 진리와 하나가 돼 적연무위(寂然無爲)를 누리게 된다. 이를 진리의 깨달음에 의한 입문(理入)이라고 한다.

실천에 의한 입문(行入)에는 네가지 규범이 있다. 여기에는 다른 모든 규범들이 귀속될 수 있다. 그 네가지 규범이란 무엇인가.

 

첫째 증오를 갚는 규범, 보원행(報怨行)이다. 무엇이 증오를 갚는 규범인가. 사람안의 마음이 각성되면 누구나 자발적으로 이성의 지시에 따르게 된다. 나아가 타인의 증오를 최대한 이용해 역으로 구도 정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보원행이다.

 

둘째는 삶의 가변적인 조건과 환경에 적응하는 규범, 수연행(隨緣行)이다. 모든 중생이 업보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진정한 자아가 없다는 것을 우선 알아야 한다. 무엇을 얻었다고 의기양양해 할 이유가 없다. 마음 자체는 늘고 줄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은 항상 도와 은밀한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

 

셋째는 집착을 버리는 규범, 무소구행(無所求行)이다. 세상사람들은 평생 미혹의 상태에 빠져있다. 따라서 탐욕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집착이다. 그러나 현명한 이는 진리를 이해하며 그들의 이성은 세속의 길로부터 회귀하기를 권한다.

 

넷째는 법에 맞추어 행동하는 규범, 칭법행(稱法行)이다. 지혜로운 이는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自利) 동시에 남에게 봉사한다.(利他) 번뇌의 오염을 떨치기 위해 육바라밀을 수행해 완덕을 갖추지만 그 또한 대단하게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오로지 진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규범, 이것이 칭법행이다.

 

 

 

7. 미(迷)와 오(悟)

깨달음과 미혹이 둘이 아닌 이치

오(悟)는 언제나 미(迷)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미가 곧 오가 되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선불교는 그래서 마력을 갖는다. 미(迷)가 미(迷)가 되는 까닭은 오(悟)라고 하는 것이 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미가 한번 오로 전환하게 되면 이제까지의 미는 곧 바로 오가 된다. 무시겁래(無始劫來)의 암굴이라 하더라도 오의 햇살이 한 번 비추어 들어가게 되면 그 암성(暗性)은 그 자리에서 명성(明性)이 되는 것이다. 암이 나가고 난 뒤에 명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암 그 자체가 명이 된다는 논리다. 즉 미가 오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대로 하자면 "부처님이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의 사이에는 일호의 간격도 없다. 다만 반드시 인식해야 할 것은 미가 오가 되고 암이 명이 되며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전환의 기(機)만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환은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홀연"이며 "돈(頓)"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돈"은 전기(轉機) 그 자체를 의미한다. 또한 그 성적(成積)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주의할 것은 그러한 구별을 굳이 하게 될 경우 깨달음은 이미 그 자리에서 달아난다는 점이다. 말로 놀아나고 말로 구별하며 실해(實解)를 그 자체로 본다면 그것은 미(迷)다. 또 이것을 두고 이(理)에는 따르지(順) 않으면서 사(事)에는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 역시 오(悟) 자체 위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마조도일선사의 제자 대주혜해는 "다만 체관(諦觀)만 할지어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오(悟)다. 체관은 직각(直覺)의 뜻으로 만법을 만법으로 보는 것 이외 다름이 아니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으로 나누게 되면 오는 그만 없어진다. "순사(順事)는 있으나 순리(順理)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혜해선사는 오(悟)는 혜능이 말하는 견성을 가리킨다고 적시하고 있다. 실제로 이런 의미에서 혜능이 깨달은 자와 미혹한 자 사이에, 보리(bodhi)와 번뇌(klesa)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으며, 자성은 "도"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 주장한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만하다. 이를 종합해 풀이하면 견성은 돈견(頓見)으로서 가능하며 돈견이 아니면 아니된다. 혜능 이후의 계통은 다 이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8. 견성

형언할 수 없는 최상의 자유

견성이 없으면 선은 사선(死禪)에 불과하다. 불입문자와 교외별전이 방편으로 활용되는 이유는 절대 이뤄야 할 견성에 이르도록 하려 함이기 때문이다. 《육조단경》 "돈점품"에 따르면 견성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견성한 사람은 세워야 할지 세우지 않아야 할지를 알맞게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왕래에 자유로워 지체되거나 구애됨이 없기 때문이다. 견성인은 경우에 따라서 언제고 응하여 활동하며, 그에게 향한 질문에는 언제고 응하여 대답한다.

한순간도 자성을 여의치 아니하고 모든 상황에서 자기 역할을 한다. 이렇게 그는 최상의 자유라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여 지속적 희열인 "유희삼매"(遊戱三昧)를 누린다. 이것이 바로 견성의 의미이다."

 

견성이란 말은 혜능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학설이다. 과연 달마가 중국에 와 "이심전심 견성성불"이란 말을 했는지 역사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혜능 이전엔 "관조"(觀照) 또는 "적조"(寂照)로서 깨달음의 "지"(知)를 보편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혜능이 "조" 대신에 견(見)을 그려 넣어 "견성"이라고 한 것이다. 관조와 적조가 편견에 빠지기 쉬웠던 데 비해 견성은 혜능 당대에 성불로까지 파악됐던 것은 흥미롭다.

주목해야 할 점은 신회시대에 와서 새로이 도출된 견성의 사상이다. 신회는 견성을 단순히 혜능의 설이라 하는데 그치지 않고 육조대사의 통설이라고 주장했다. 도원이 《육조단경》에 견성의 이자(二字)가 있는 까닭으로 이 책을 위서라 하고 육조의 진설이 아니라고 했다는 점에서 견성은 신회의 고유한 사고였다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신회에 의하면 달마로부터 시작되는 선사상은 무념(無念)과 견성의 두가지 기둥으로 이룩된다. 남종(南宗)을 특색짓는 여래선, 좌선, 견성등의 사상이 다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좌선을 정의하고 있는 신회의 다음 말은 주목된다. "지금 좌라고 함은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선이라 함은 본래의 자성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몸을 앉히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켜 선정에 들어가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신회는 선이란 본래의 자성을 보는 것, 즉 견성이라고 했다. 견성이란 자성이 자성을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이단의 의식을 초월해서 그 스스로를 본다는 적극성을 내포하고 있다.

 

 

 

9. 공안

깨달음으로 가는 완벽한 의문구조

공안이란 무심(無心)과 견성(見性)을 목표로 삼는 참선수행의 대명제이다. 한국불교의 참선수행도 모두 공안의 참구를 통해서 이루어질 정도로 공안은 선의 핵심이다. 선의 수행과 깨달음으로 이끄는 공안은 원래 관청의 "공문서" 〔公府案牘〕라는 용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정부가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선종에 차용돼 절대적인 규범성과 판단의 준칙이 되는 참선수행의 명제로 기능했다. 구체적으로는 조사의 말 어구 문답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공안은 옛선사들의 언행과 깨달음의 해결을 필요로 하는 완벽한 의문구조이다. 선사들은 그 자신의 독자적인 언어와 행동을 남기고 선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그의 인생과 깨달음은 후학 및 제자들에 의해 점검되어지고 전해졌다. 특히 이 속에서 각 개인의 통찰이 투영되고 의문이 더해지면서 공안은 하나의 의문구조로 정착하게 됐다. 공안에 대해 〈벽암록〉의 서문을 쓴 삼교노인(三敎老人)은 이렇게 적고 있다.

"조사 스님들이 가르쳐 보이신 바를 공안이라고 한다.(祖敎之書 爲之公案)"

 

즉 선가에서는 이와 같은 공안을 참선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생각하는 대상 또는 단서로 삼도록 했다. 특히 임제선에서는 참선수행인에게 진리를 참구하는 테마로 전수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조동종의 경우 산천초목을 비롯 천둥 번개가 치고 바람에 낙엽이 지는 등 여러 가지의 자연현상도 수행자에게 불교의 진리를 가르쳐 보이는 공안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공안의 종류는 대단히 많다. 흔히 1,700가지라고 하는데 이는 〈전등록〉에 등장하는 1,701인의 선사들이 보여준 기연(機緣)과 언행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나의 공안으로 좌선에 빠질 때 일반적으로 화두(話頭)를 든다고 한다. 사전에 의해도 공안은 화두 또는 고칙(古則)과 같은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공안과 화두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 듯 보이지만 엄밀하게는 다른 용법으로 쓰인다는 견해도 있다.

 

공안이 선사와 참선자간의 선문답이라면 화두는 선사의 답변이라는 것이다. 화두의 참구를 중시하는 선을 간화선이라고 한다. 화두의 참구를 중시한 송대의 대혜종고는 지나치게 사변적이며 어록을 주석하는 학문으로 떨어진 송대 선종의 기풍을 회복하기 위해 굉지정각의 묵조선을 극력 비판하면서 화두의 참구를 중시하는 간화선을 성립시켰다.

 

 

 

10. 천상천하유아독존

"보살이 탄생하자 사람의 부축없이 곧 사방으로 거닐며 각 방면으로 7보를 걸었고 걸음마다 발을 들면 큰 연꽃이 솟아났었다. 7보씩 걷고 나서 사방을 둘러보고 눈을 깜짝이지도 않으며 입에서 절로 말이 나왔다. 먼저 동쪽을 바라보며 갓난애기의 말답지 않게 스스로 글귀에 맞게 바른 말로 게송을 읊으셨다.

 

"이 세간 가운데

내가 가장 높구나

나는 오늘부터

목숨 받는 일이 끝났네."

 

《불본행집경》제8권 "수하탄생품"에 묘사된 말이다. 부처님은 어머니 마야부인의 몸을 빌어 이땅에 오시게 되는데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자 마자 "이 세간 가운데 내가 가장 높다"(天上天下 唯我獨尊)는 말로 인간의 존엄함을 일깨웠다고 한다.

선불교에서 받아들이는 이 말의 해석은 "인간의 본성은 부처이며, 본래부터 부처이기 때문에 무한한 존엄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중생과 달리 불성(佛性)을 깨쳐 각자(覺者)가 됨으로써 윤회의 굴레를 벗고 더 이상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누릴 수 있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몸을 받기란 매우 어렵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은 상대적으로 더욱 높아진다. 화엄사상에서 주장하는 개체(個體)란, 재산 지위 능력이 있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태양이 비치지 않는 음습한 곳이나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총 망라한다. 어떠한 사람도 사람인 이상 절대적 존엄성이 있다. 부처님 생명은 살아있다. 보잘 것 없는 것, 이름 없는 것도 빠짐없이 각자의 목숨을 풍족하게 개발해 나가는 대자연의 섭리, 그것이 바로 불교의 가르침이다. 각자가 각각 가지고 있는 껍질을 벗고 본래의 진면목을 나타내는 일이 바로 불성의 계발인 것이다. 때문에 진면목을 참구해 낸 선사들은 산은 산, 물은 물, 나무는 나무로 바라본다. "일상생활에 도가 있다( 平常心是道)"는 뜻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인간 각자의 개인의 존재는 개인만의 존재가 아니다. 무한한 넓이를 가지고 있다. 과거부터 이루어 온 연기의 법칙, 인과의 도리에 따라 오늘날의 이 시점에서 그의 삶을 살고 있다.

"이 하루의 목숨은 존중해야 할 신명이다. 존경해야 할 송장이다. 이와같은 목숨이니 스스로도 사랑하고 스스로도 존경해야 한다." 옛 역대 조사들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한결같이 강조했던 인간존엄의 가르침이다.

 

 

 

11. 돈오(頓悟)

돈(頓)은 시간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연속성을 절대로 부정하는 비연속성의 뜻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또 그대로 오(悟)를 서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일반의 지식과는 달리 추론적으로 꾸며 맞출 수 있는 구조적인 것이 아니라 비약성의 성질을 보여준다. 돈오가 무엇인가는 지덕법사의 물음에 답한 신회의 말에 잘 나타나고 있다.

지덕법사가 물었다.

"선사는 대중에게 돈오하라고만 가르칩니다. 왜 소승의 교설부터 점수(漸修)하지 않습니까. 9층 건물을 오르는데 계단에 의하지 않고 오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회가 답한다.

 

"자네가 오르려고 하는 것은 9층 건물이 아니고 다분히 흙을 쌓은 여우의 무덤이 아니냐. 정말로 9층 건물이라면 틀림없이 돈오다. 내 생각으로는 돈의 가운데에 점을 세우기 때문에 9층 건물을 오르는데 계단이 필요하게 된다. 결코 점의 가운데에 점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근원적인 지혜로부터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돈오다. 대체로 단계에 의할 것은 없다. 자연이야말로 돈오다. 각자의 마음이 본래 공적인 것이 돈오다. 마음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는 것이 돈오다. 마음 그 자체가 도인 것이 돈오다. 마음이 고정할 수 없는 것이 돈오다. 본래의 마음에 눈뜰 뿐으로 아무 것도 더하지 않는 것이 돈오다. 모든 존재가 모두 존재하는 것이 돈오다. 공(空)이라고 말해서 공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렇다고 불공(不空)을 좋다고 하지 않는 것이 돈오다. 나라고 말해서 나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무아(無我)를 좋다고 하지 않고, 생사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돈오다."

 

9층은 밖으로부터 보아서의 구조이기 때문에 그런 구조가 인정되는 한 그것은 한계단 한계단 밟아 올라가야만 한다. 그것은 지식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속성 차제성(次第性) 누적성을 보지 않는 것이 돈오의 성격이기 때문에 9층의 누대는 말하자면 오(悟)를 뒤쫓아가서 지식이 그를 확인하는데 필요한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서 표치(標幟)를 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단계를 보는 것이 지식이니까 지식의 면전에는 언제나 9층루가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자기의 발자취로서 자기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9층루란 있지 않다. 따라서 한계단 한계단 점차적으로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올라간다고 할 때 오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는 이미 오가 아니게 된 것이다. 신회는 이러한 근거로 혜능과 신수의 차이를 설명한다. 돈오설이 달마로부터 혜능까지 전수돼온 전통사상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혜능과 신수의 대립은 신회에 의해 극대화됐고 마침내 북종과 남종의 분립이 이루어졌다.

 

 

 

12. 여여(如如)

몇 년전 대중가요로 히트한 "타타타"가 바로 이 "여여"란 뜻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여여"란 산스크리트어 타타타(tathata)의 의역으로 있는 그대로 진실의 모습을 의미한다.

<법화경> "수량품"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如來如實知見三界之相 無有生死 若退若出 亦無在世及滅度者 非實非虛 非如非異

不如 三界見於三界

 

내용을 압축해 설명하면 "여실히 삼계의 상을 지견 또는 관찰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여실지견(如實之見)이 있는 곳에 해탈이 있다"고 불교에선 가르친다. 여실지견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여실지견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법은 유(有)가 아니면서 유이고, 유이면서 유가 아니다. 그래서 유에도 주(住)하지 아니하고 무(無)에도 주하지 않는다고 〈종경록〉에서 밝히고 있다.

 

이 여(如)의 사상은 가장 인도적이면서도 중국 및 한국과 일본의 불교사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는 "그대로", "그와같이"등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본래 부사였으나 나중에 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이 "여"가 불교에 들어와 쓰일 때는 "같이", "그러한" 뜻으로 쓰이지 않고 "물건의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란 뜻으로 인용된다. 자연법이(自然法爾)와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여는 반드시 "여실"이며 "진여(眞如)"라야 한다. 부처님을 다른 표현으로 여래(如來)라고도 하는데 "진여로부터 내생(來生)한 이"로 수행을 완성한 사람, 인격완성자, 완전한 사람을 지칭한다. 나아가 진여로부터 왔기 때문에 진리의 체현자로서 중생을 가르쳐 이끈다는 부처님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라는 "여"의 논리는 뒤에 공(空)과 같은 뜻에 놓이게 된다. 차례차례대로 관찰해 나아가 보니 모두가 공이 아닌 것이 없다. 여의 진실은 곧 공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공이면서 불공(不空), 불공이면서 공이다 하는 것은 여여의 뜻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도 해석한다.

〈종경록〉제30권에 "유여여급여여지독존(唯如如及如如智獨存)"이란 말이 나온다. 여든 공이든 적(寂)이든 그것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데 무엇인가 그것을 아는 놈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 아는 놈이 지(智)라는 것이다. 이 지가 있어야 여여가 인정된다. 이것을 여여지(如如智)라고 한다. 하지만 이 여여지는 여여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여여와 여여지는 또 일여의 체중(體中)으로 거두어지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여가 곧 여지이고 여지가 곧 여인 것이다.

 

 

 

13. 회광반조

노산의 간법사(簡法師)가 신회에게 물었다.

"명경(明鏡)은 높은 대상(臺上)에 놓여져 만상을 비추어 거기에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무슨일 입니까?"

신회가 대답한다.

"명경은 높은 대상에 놓여져 만상을 비추어 나타낸다. 옛부터 고덕(古德)들이 이르길 그런 상태를 불가사의하다고 찬양한다. 그러나 나에게 말하라고 한다면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 없다. 명경이 만상을 비추어 만상이 나타나지 않는 편이 훨씬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여래는 무분별에 의하여 일체를 잘 분별하신다. 어찌하여 분별하는 마음으로 일체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신회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명백하다. 명경이 자유로이 물건을 비추지만 비추어진 물건에 의해서 명경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명경의 불가사의함은 여기에 있다. 명경은 또 작의(作意)하거나 선택해서 대상을 비추지 않는다. 거울 자체가 명정(明淨)하기 때문에 그 자체에 비추는 힘이 있고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담아낸다. 중생도 또한 마음이 청정하면 자연히 큰 지혜의 빛이 있어 무한의 세계를 비출 수 있다. 그것은 무념(無念)으로서 가능하다. 신회는 무념을 명경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명경은 물건이 있기 때문에 비추지만, 물건이 비추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것도 비추지 않을 때에 명경의 진가가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를 기점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상이 있고 없음에 관계하지 않는다. 그저 거울 자체의 작용이라 해도 좋다. 비추고 있으면서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다고 하는 소식이 여기에 있다.

 

견성이나 돈오나 이러한 명경의 비유가 가장 구체적이다. 회광반조란 원래 석양광선의 반사를 의미하는 "반조"에서 나온 말이다. 두시(杜詩)에 "반조"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듯이 삼라만상은 석양에 비추어져서 그 실상을 발양(發揚)한다. 여기에 기인해 당의 선가(禪家)에서는 거울이 물건을 비추는 작용을 "조(照)"라고 했다. 이 말은 당대의 선사상에 특유한 의미를 갖고 있다. 말자체는 대승불전류에도 나와 있지만, 당 시대에 거울의 철학이 완성되자 "조"의 일자는 선어(禪語)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비추지 않고서 비추는 소식을 "조"의 일자에 기탁한다. 예컨대 회광반조라든가 조용동시(照用同時)라는 생각들이 그것이다. 회광반조란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비추던 것이 스스로 비출 수 있는 힘을 되찾아서 비춘 것을 되비치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의 심성이 반조된다는 것이다. "회광반조"의 구조는 임제에 이르러 보다 철저해진다.

 

 

 

14. 거울과 벽돌

거울이 물건을 비추는 작용을 "조(照)"라고 불렀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말은 당대의 선사상에 특유한 의미를 갖고 있다. 말 자체는 승조(僧肇)와 대승불전에도 나와 있지만, 당대에 이르러 거울의 철학이 이루어지자 "조"의 일자는 널리 회자되는 선어가 됐다.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는 발상은 탁월한 철리(哲理)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마음을 발견해가는 거울의 철학, 그것은 남악회양(南岳懷讓)이 그의 법제자 마조도일(馬祖道一)을 일깨우는 장면에서 더욱 극명한 가르침을 던져주고 있다. 남악회양은 거울을 가르치기 위해 벽돌을 사용하는데 마음을 반전시키는 극적효과마저 낳고 있다.

마조가 남악 전법원에서 홀로 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좌선에 열중하면 어느 누가 내방해도 맞이하는 법이 없었다. 회양이 왔을 때도 좌선에만 매진했다.

이에 회양이 하루는 마조의 암자 앞에서 벽돌을 갈기 시작했다. 마조는 역시 돌아보지 않다가 몇시간이나 그러고 있는 회양의 태도가 하도 괴이해 물었다.

"벽돌을 왜 그렇게 열심히 갈고 계십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벽돌을 갈아 어떻게 거울을 만든다는 겁니까?"

마조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그러는 넌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된단 말이냐?"

마조는 앞 이마가 갑자기 서늘해짐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옳다는 말입니까?"

"비유하건대 수레를 타는 것과 같다. 수레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소에게 채찍질을 할 것인가, 수레에 채찍질을 할 것인가."

마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회양이 이어 말했다.

"너는 좌선하고 있느냐? 아니면 앉아있는 불타의 흉내를 내고 있느냐? 좌선이면 좌와(坐臥)에 구애되지 않으며 앉아있는 불타는 선정의 자세에 구애되지 않는다. 진리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일부러 취사해서는 안된다. 너는 앉아있는 불타를 배워서 오히려 살불(殺佛)의 죄를 범하고 있다. 좌선에 사로잡히는 것은 선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다."

얼마나 살아있는 설법인가. 회양의 가르침은 이제 "거울의 철학"에서 몇걸음 더 진일보하고 있지만 "거울"마저 빗겨가고 있는 셈이다. 어느 것도 차별하지 않는 그것이 "거울"이라면 형체가 없는 선정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가는 그것은 이미 "거울"의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벽돌이 거울이 될 수 없는 이치는 무명으로 부처가 될 수 없는 이치와 너무 흡사하다. "진리의 눈"을 외면하고선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 회양이 벽돌을 들어 "거울의 철학"마저 부수고 선을 더욱 앞으로 밀고 나갔던 순간이다.

 

 

 

15. 평상심시도

인간의 일상생활을 모두 불도의 전개로 보려는 사상이 여기에 있다. ‘평상심이 곧 도’라고 여기게 됐던 이 말은 마조도일(709∼788)의 상당법어에서 비롯된다. 나아가 마조의 제자 남전보원((748∼834)이 "평상심이 바로 도"라며 스승의 말을 메아리처럼 전수한다. 비슷한 말로 ‘착의끽반 아시송뇨(着衣喫飯 屎送尿)’도 있다. 도는 의복을 걸치고 밥을 먹고 대소변을 보는 일상생활의 행위에 있다는 말이다. 도가 일상생활에 있다는 생각은 옛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일을 일상생활의 행위에 근거해 짧막하게 한마디로 단언한 것은 역시 마조의 특출한 선기를 느끼게 한다. 마조가 직접 설파한 평상심이란 이렇다.

“평소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부러 꾸미지 않고 이러니 저러니 판단을 하지 않으며, 마음에 드는 것만을 좋아하지도 않고, 단견상견(斷見常見)을 버리며, 범성을 구분하는 생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 ‘범부처럼 행세하지도 않고 성인 현자처럼 행세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다.’ 지금 이렇게 걷다가 곧 멈추기도 하고 다시 앉아있다가 편안하게 눕기도 하는 등 형편에 따라 움직이는 이 모두가 바로 도다.”

아무리 청결하고 우아한 사람일지라도 하루에 몇번 반드시 배설을 한다. 대소변을 배설하는 것은 인간이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다. 여기에 청결과 불결을 분별할 소지는 없다. 마조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 넘치거나 부족함이 없으면 거기에 진리가 있다. 자칫하면 철학적으로 생각됐던 생로병사의 진리가 마조 이후 식욕과 배설이란 가장 원시적인 생리 기능면에서 생각케 된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시도’의 가르침은 마조의 법제자 남전보원선사에 의해 더욱 충실히 발전 계승된다. 남전의 제자 장사경잠과 한 스님의 대화를 들어보자.

 

“평상심이란 무엇입니까?”

“졸리면 잠을 자고 앉고 싶으면 앉는다.”

“그 뜻을 좀 더 가르쳐 주십시오.”

“더우면 부채질하고 추우면 화롯불을 쬔다.”

 

경잠선사의 말처럼 졸리면 자고 추우면 불을 쬐는 행위는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이다. 졸릴 때 잠을 못자면 고문이 되거니와 거기엔 인위(人爲)가 끼어있다. 때문에 평상심을 유지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같은 평상심에서는 두려움 성냄등 감정이 일어날 수 없음은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대로가 지극히 편안한 삼매상태다.

스승 마조를 이어 후학들이 ‘평상심시도’란 동일한 철학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평상심시도는 이어 일상의 용어들이 공안으로 채택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6. 회호(回互)

사전적 풀이로는 상호 순회한다는 의미다. 즉 이(理)와 사(事)가 상호 의존관계에 있음을 뜻한다. 회호의 논리란 긍정과 부정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주인과 객이 언제라도 자리를 바꾸어 앉되 결코 주객의 관계가 바뀌지 않는 것. 선학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이론으로 취급되고 있다. ‘회호’라는 말은 석두희천(700∼791)선사의 〈참동계〉에 나온다. 석두선사는 ‘회호’를 통해 제법의 실상과 본래의 자기를 융합시키는 원리를 밝히고 있다. 그가 말하는 ‘회호의 논리’는 무엇인가.

“신령한 마음 근원은 밝게 사무치나 곁가지가 은연중 가닥쳐 흐르니 현상을 붙들면 아예 미혹한 것이요, 이치에 계합해도 깨침은 아니다. 구비구비 온갖 경계 회호하고 회호하지 않는 것들이 빙둘러 돌아갔다가는 다시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제자리에 머문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개개의 주체가 상즉상입의 호환을 통해 물아일체의 총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불회호란 낱낱의 숱한 것들이 각자의 처지에 머물러 있음을 말한다.

만일 사람들이 회호의 입장에 서있다면 ‘물이 흐르는게 아니고 다리가 흘러간다’거나 ‘구름은 가만히 있고 산이 움직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회호는 ‘물아일체의 총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회호방참(回互傍參)’이란 말도 선가에서 쓰이는데 그 뜻은 대립적인 두 개의 것에 구애되지 않고, 서로 관계가 있는 것에 골고루 걸쳐서 궁극적으로는 자타가 일체가 됨을 의미한다.

출처 : 환상의 C조
글쓴이 : 얼음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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