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흐만 | 사도신경해설
전 철
1.서론
1.1.잘못 계획된 시도?
신앙 고백에 관련하여 교의학 개요를 그리는 것은 문제이다. 교의학 개요는 신학의 실제적인 주제들을 포착하 고 우리 시대의 도전들과 대결해야 할 시도이다.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관점을 생각해야 한다. ⑴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사도적인 케리그마가 아니라 고대 교회의 교의적인 생성에 관계하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의 문제 설 정에 관계하여 사도적인 케리그마를 상대화 한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신앙 싸움에서 그 당시의 질문과 대답 에서 유래하였다. ⑵ 창조자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을 말하면서 어떻게 현실성을 외면할 수 있을까? 여 기서 시선의 방향은 분명하다. 밑으로부터의 신학 대신에 위로부터의 신학이 제공된다. ⑶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실제로 교의학 개요와 일치하지 않는가?
1.2.전승과의 대화
우리는 조상들의 유산을 다루는 것이지, 거기에서 해체되는 것이 아니다. 교리사적인 전승의 근거를 상실한 신 학은 재빨리 평면화 되고 비생산적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전승의 증거들을 취급한다. 사도신경은 개방되고 비판 적인 대결 가운데서 상대화 하면서 이해 되어지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2.사도 신앙 고백 : 기원과 삶의 자리
2.1.한 전승의 창작과 진실
사도신경은 무엇인가 ? 고대전승을 파악할 때, 12사도들의 무리가 성령강림 이후, 선교하기 위해 온 세계로 파 고 들어가야 할 것을 결단 했을 때, 그들은 선교를 위한 신앙의 규범, 하나의 공동의 신앙 규범에 일치하였다. 놀 랍게도 그것은 성령의 인도 아래에서 기초되었다. 12제자는 각자의 관심을 짧은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 형식들은 전체를 따라서 구성되었다. 위의 이야기는 물론 하나의 전설이다. 그러나 각 사람이 각 부분을 나누어 맡아 말하게 된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신약적인 혹은 고대 교회? 흐름을 봐서 관심을 일으키는 고려가 숨어있다.
2.2.신앙.고백.세례
사도신경의 삶의 자리는 아마 초대 교회의 세례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신경은 세례받는 자에 의해 고백된 것이 아니라, 세례 베푸는 자가 질문의 형식으로 제의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고백은 세례사건에서 지시한 바와 같이 구속력을 지니는 신앙의 결단에 일치한다. 3세기의 세례문답으로부터 신앙고백의 선언적인 형식이 생 겼다. 교회들은 상세한 부분에서 상이성을 갖는 세례고백들을 형식화 했다. 로마 교회에서 사용된 것이 가장 영향 력이 많은 고백으로 되었다. 4세기에 사도신경은 어느 정도 첨가와 변화가 있어나며, 6세기 서부 코오트 지역의 스페인과 갈리엔에서 작성된다. 이 텍스트는 오랫동안 서방교회에선 경전화가 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정치 적 발전에 연결되어 있다.
3.나는 믿는다................ 아멘
3.1.신앙 고백의 본직과 한계
"나는 믿는다..... 아멘" 이 두 말은 사도신경의 윤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여기에 이 문서의 본질과 한계가 나타 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강조되어 있다. 먼저 신앙이 문제이고, 최종적인 수행에 있어서는 찬양, 감사, 영광 을 드림, 신앙의 대답이 문제이다. 이것이 신앙고백의 본질이고 성격이다. 사도신경의 첫번째와 마지막 말은 형식 화된 텍스트를 그냥 놔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신앙과 찬양을 드리는 삶의 순화 안에 포함하면서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자유스러운 "내가 믿는다"라는 고백 없이, 인격적으로 기꺼이 동의하는 아멘 없이, 이 사도신경은 한계와 자신을 넘어서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
3.2.논란된 믿음
기독교의 세 가지 중요한 믿음, 사랑, 희망 중에서 믿음이 가장 논란된 개념이다. 믿음은 동시대의 문화에서 불 리한 위치에 처해 있다. 종교적 행동에서 문제적인 것, 주저하는 것 등이 믿음과 관계된다. 레온하르트 라가츠는 믿음을 적극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의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서적인 믿음의 이해에는 이 그리 스도의 뒤따름, 그 나라의 바른 실천이 문제가 된다. 참된 믿음은 앎에 있지 않고 신뢰에 있다. 신앙의 이러한 이 해와 오해가 부분적으로 교회의 책임이라면, 이제는 신앙의 본래적인 더 좋은 면을 회상하여야 할 것이다. "더 좋 은 것"은 예언자이며 사도적인 그리고 성서적인 신앙의 이해에 있다.
3.3.신앙의 올바른 개념
신앙은 이해, 통찰, 인식을 지향한다. 신앙은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진 의미에서의 "앎"이 아니고 사랑과 신뢰 안 에서 인격적인 경험을 의미하는 인식이다. 믿음은 진리의 신실한 계약의 영역에 닻을 내린다. 믿음의 요소는 존속 성이다. 믿음은 미리 알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보장이 아니라, 신뢰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인 이원론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그 약속에서 살고 있는 살의 관련성에서 표현되었다. 예수 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사람들에게 철저한 삶의 방향 전환을 요구하고, 믿음으로써 산을 옮기는 것을 기대하는 때, 예수도 이와 같은 방향에서 믿음을 생각한다.
3.4.세계관의 일차원성으로부터 해방으로서의 믿음
우리는 우리의 문화와 사회에서 "일차원성"에서 제한되고 평균화된 삶의 이해와 그에 상응하는 실천적인 강한 경향에 부딪친다. 현대의 기술공학의 실제적인 사고는 두 가지의 짧은 명제로 성격화할 수 있다. 그것은 일어났기 때문에 참되다. 그리고 그것은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참되다. 첫째 명제는 역사주의의 태도를 나타낸다. 둘째 명 제는 기술공학 시대의 성격을 특징지운다. 첫째 단계에서는 실증주의적인, 계몽주의적인 경향이 지배적이다. 둘째 단계에서는 모든 문제를 기술공학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전면에 드러난다.
3.5.누가 신앙고백의 주체인가 ?
성서적 믿음은 인간학적인 또는 구원론적인 개인주의나 집단주의 위에 일방적으로 고착?하지 않는다. 나와 우 리, 우리와 나는 통일성 안에서 함께 듣고 말해져야 한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있어서 인격적인 결단에서 사도 신경은 생성되었다. 이 결단은 과거와 분명한 생의 상황과의 결별을 뜻하며 인격적인 희망과 책임 아래에서의 좁 은 길을 선택함을 뜻한다. 모든 참된 신앙의 고백들과 같이 사도신경은 이 사건의 문서이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 다"와 "우리가 믿는다"의 두 형태는 설 자리가 있는 것이다.
4.나는 주를 믿는다.
4.1.믿음의 지향성
믿음의 이해에 따라서 사도신조의 신조와 믿음의 행위 안에 우리는 머문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백을 드리는 모든 기독교인의 연대성 안에 있다. 우리는 신앙의 고백에서 고립화 된 개인으로서 머물러 있지 않고 이 고백을 드림으로써 형제 자매의 포괄적인 사귐 안에로 들어간다-단지 수평적, 사회적으로가 아니라 수직적, 신학적으로-. 사도적 신앙의 개념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변경할 수 없는 내용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된 것이고, 그 내용과는 관계에서 움직여진다. 믿음은 그 자체를 고집하거나, 자기이해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대답으로서 성 취되고, 그리스도를 뒤따르고, 그 자신을 넘어서서 그 대상과 관계된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 결정적인 말, 하나님으로써 서술된다. 즉 사도적 믿음은 결정적으로 하나님 신앙으로서 이해된다.
4.2.자명한 하나님 주제의 동요
하나님 주제는 자명한 것인가? 물론 사도신경에서는 하나님의 유일성이 강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이다. 전승된 신앙 고백의 어려움은 하나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술과 그의 탄생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기적에서 비로서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신앙은 예수 자신이 가르쳤던 소박한 주에 대한 신앙에 방해가 되는 추가물처럼 나타났다. 수백년 동안 하나님에 대한 주제는 서구의 사상에 흐르고 있었다.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그리고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관심은 하나님은 존재 하신다는 근본적인 결론에 축적되어 얽혀져 있다. 또한 신학과 교회는 고취된 유신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상의 공이적인 전제 아래에서 계속하여 생각하여 왔고 활동하였다. 본회퍼는 하나님에 대한 주제의 자명성이 상실된 그 동요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에서 하나님에 대한 주제의 자명성은 인간적인 측정에 의해 서도 그리고 그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사라졌다.
4.3.의사소통의 어려움
우리의 사회와 문화를 위한 신학의 중요성과 타당성은 대부분 이해되지 못하고 때때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유신론적인 관련성의 내적인 필연성은 붕괴되었다. 신학은 삶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과학의 지배 아래서 신학의 진리는 시대착오로 지난 시대의 유물로 낯선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와같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질문과 그 질문의 타당성은 결코 현명하지가 않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를 이해시키는 것은 의미있는 과업이다.
4.4.해방의 양자 택일
"하나님의 주제"에 대해 쉽게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다. 나는 동부 유럽의 경우를 예 로 들어 설명하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의 체제 아래서 동부유럽의 사회와 문화는 "하나님"이란 주제를 인류의 연대기에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한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종교와 하나님에 대한 주제는 작은 역할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이 시대의 문화와 문화적인 유산과의 관계에서 종교는 침묵을 지켜야 했고 최고의 적으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앎, 양심, 삶과 죽음에 있어서, 인간 존재의 인격적인 참 모습에 대한 물음은 하나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하나의 가능한 양자택일로 나 타났다. 이 양자 택일에 전면으로 나타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관념을 정치적인 것으로 오용하 는 것은 하나님 주제의 타당성을 무효화 시키고, 그 철저성을 둔화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의 하나님 증언에서는 바 로 이 타당성과 그 철저성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주제가 정치적 도구로 오용되는 것도 인간의 잠 재력으로 오용되는 것도 허용할 수 없다.하나님 주제의 연관성이 죽음의 문제에 직면하여 특별히 해방하는 현실 로 경험되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교회의 위치가 사회이 영역에서 물러났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그 사신을 가지 고 교회 밖에서, 그리고 비기독교인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주 제"는 성서적으로 인격적인 삶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적인 삶과도 관계된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하 나님과 그의 나라는 분리될 수 없게 관계되어 있다. 계시의 주제는 평화와 정의의 새 나라에 대한 동경을 말한다.
4.5.서부 유럽을 위한 동부 유럽의 경험들
동부 유럽에서와 같이 서부 유럽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의 크레도(Credo)는 생과 현실성의 문제에 밀접 히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에 관한 주제가 그 자명성을 상실했다는 것, 세속화된 공업 사회에서 이 주제를 이해 시 키느 ?것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한탄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생의 근본적인 문제와 개방된 사회의 전망의 빛 에서, 하난미에 관한 주제는 생각해 볼 만한 것이며, 믿을 만한 주제가 되는 기회로 포착해야 할 것이다.
5.전능하신 아버지를.........
5.1.자명하지 않은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의 사도신경의 진술은, 하나님 개념이 흔들려진 우리의 문화 안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 미하든지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 진술을 임의적인 자명성과 혼합하지 말고, 사도적인 증언에의 직접적인 접근으로 시도해야 한다. 여기서 언급한 하나님은 사도신경의 전체에서 표현된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 령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란 점이다. 경험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부활의 경험과 오순절의 경험을 하나님 이해를 위해, 시종일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삼위일체 도그마의 삶의 자리가 있다.
5.2.권위가 없는 가장
나사렛 예수가 말한 이름에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강조가 표현되어 있는 것을 신약학자들은 확인한다.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을 날카롭게 한다. 즉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변화시킨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섬 세한 현재, 사랑과 신뢰의 동기르 ?전면에 표출시키고 가장의 권위적인 요소를 뒷전으로 물러나게 한다. 예수의 호칭은 압바(Abba)이다. 이 개념은 희랍어로 표현된 아버지보다 어린애다운 친밀한, 간단한 호칭이다. 나사렛 예수 는 아버지의 전적인 주권과 아버지의 초월적인 권위를 표현할 줄 알았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가부장적인 권 위 아래서 이해하는 것은 중대한 오해였다. 사도적인 아버지 이름을 기독론적으로 정착할 숙고가 중요하다. 전적 으로 비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다. 예레미아스의 "압바" 연구에서 아버지의 모습과 탕자의 비유가 표현하고 있듯이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권위적인 사고방식의 연장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에 대한 폐기를 지시한다.
5.3.폭력이 없는 사랑의 권능
구약적인 전능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출애굽 사건과 계약의 콘텍스트를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은 해방의 사건에 기초되어 있다. 또한 신약에서 하나님의 전능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서 경험되고 부활 사건을 고려하여 증거된다. 사도적인 부활 사신의 전망에서 보면, 하나님의 전능은 나사렛 예수의 운명 안에서 구 체적이 된다. 성서의 증언의 이해에 의하면 여기에 영과 힘의 놀라운 표시가, 즉 폭력 없는 사랑의 탁월성과 전능 이 있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특별한 성서적인 전망은, 그의 결과를 단지 교의학적인 영역에서가 아니라 윤리적 인 영역에서 갖는다. 폭력 없는 사랑의 힘은 전능한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고백자가 알아야 될 방향을 지시한다. 이것은 모든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이기심을 몰아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데 있어 어떤 지표를 제시할 수 있는 방향이다. 전능한 아버지에 대한 고백의 참된 아멘은 폭력이 없는 사랑의 실천에서만이 현실적으로 증명 된다. 믿음에서만이 증언되는, 우리가 만들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이 여기서는 문제이다.
6.하늘과 땅이 창조자
6.1.성서의 특징
로마 교회와 니케아 신조, 그리고 사도신경의 고대 교회의 고백의 본문들을 비교해 보면, 첫 항목의 진술에서 전능한 아버지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창조자로 부르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는 창조주에 강조점을 두고 있고 로마 교회의 신조는 별로 강조하지 않고 있다. 방면 창조주의 사상은 기독교적인 하나님 신 앙의 온전한 요소에 속하고, 그러게 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창조의 주제는 처 음부터 성서적인 특성을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6.2.논쟁될 수 없는 아버지 되심
"하늘과 땅의 창조자"라는 이 진술은 그 앞선 진술에 대한 부가어로서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이 부가어는 임 의적인, 구속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는 필요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세 례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지역의 하나님, 사적인 구원자가 아니라 전체의 현실에 관계된 그리고 믿음에서 증언 될 수 있는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창조자의 비교될수 없는 절대성의 강조는 전구약의 경건성과 삶의 양식을 꿰뚫고 흐른다.
6.3.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세계 이해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그 이외의 사도신경도 다른 이름을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세계를 외면하고 계시지 않다. 하나님은 홀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으려 하고 새로운 현 실을 일으키려는 결심을 지니고 있다. ⑴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신학적인 세계 이해 의 기본 구조를 규정한다. "창조는 우연성에서 기초되고, 그 존속은 항구성에 있다." 이 둘은 강조되어야 하고, 분 리될 수 없는 상호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의 신앙은 세계를 비신화화하고, 가치와 상태의 모든 절대화를 거부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창시적인, 종말론적인 긍정의 빛 안에 있다. 우연과 불변의 이 두주제의 변증법적인 연결에서, 성서적 창조 신앙은 기본 구조에서 적극적이고 진지하고 역동적인 존재로의 알맹이로 작용한다. 성서적 인 창조신앙 없이 기독교적인 문명의 "세계 관계"는 거의 이해될 수가 없다. ⑵나의 다른 우주론적인 언급은 "하 늘과 땅"에 관해서이다. "하늘과 땅"의 표현의 의도는 시간에 제약된 표상들과 함게 서 있다. 이 의도는 시간에 제약된 표상들과 함께 서있다. 이 의도는 관찰과 자료가 변할지라도 불변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창조는 그의 가시성에서, 물적인 존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구분, 피조물인 하늘의 현실을 망각하고, 기술 공학의 세계를 유일한 본질적인 현실성으로 높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정도를 넘게 되었다. 그렇게 기초된 삶의 방식의 엄청난 진보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존재에 위협적인 일면성을 뜻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 관계의 일면성을 효과있 게 교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인간의미래, 더 나아가서 우리의 창조의 미래를 위해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대한 완전한 해결은 없다. 사고방시과 행동양식을 바뀌게 하는 여러 방면의 전략이 필요하다. 성서적인 창 조 사상, 하늘과 땅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우주론적인 면에 있어서 고부적으로 실제적일 수 있게 될 것 이다.
6.4.인권과 하나님의 은혜
루터는 창조자 신앙을 개인화하고 현재화 한다. 그것으로 그는 성서의 창조 신앙의 중요한 관심을 지적하고 있 다. 우리들 삶의 일반적인 관계들과 사정을 환기시키는 루터의 감동적인 언어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 창조 신앙 에는 창조된 생명과 창조물을 끈덕지게 애호하고 현실의 영역안에 있는 일체의것에 대한 비방과 경시를 반대하는 기본 태도다 있다. 이 방향에서 나는 하늘과 땅의 창조자에 대한 신앙의 인간학적인 의미를 추구한다. 인간 존재 는 유한한 상호 의존 관계에 있는 피조물이고 지로 죽음의 위협을 받는 피조물이다. 성서적으로 "영광의 인간학" 세계와 인간의 자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피조자란 생의 한가운데의 시작과 마지막에 하나님의 계약안에 받아들 여진 창조와 관계된 존재이다. 인간 존재의 권리는 하나님 자신 안에 기초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무조건 가치가 있다. 우리 존재의 명백한 이 우연성은 우리 존재를 위한 창조자의 자연스러운 결단으로서 은혜의 우연성이다.
7.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7.1.사도신경의 핵심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중심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라는 짧은 명제에서 오스카 쿨만은 초대 교회 신 앙의 고백에 대한 그의 연구를 요약하고 있다. 초대 기독교 교인들의 신앙의 진술은 끈덕지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운명을 선회한다. 그 출발점은 동시에 기독교 운동의 중심점이고, 역사적인 근거이고, 교리적인 기초 이다. 그리스도의 고백에서 사도적 신앙의 심장은 고동친다. 기독교 신앙 고백의 기독론적인 집중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일반적인 종교사의 전망에서 볼때 하나의 도전이고 파결이다. 사도는 이것을 거침돌Argernis이나 어리석음Torhit으로 간주한다.
7.2.거침돌(Argernis)이나 어리석음(Torhit)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역사에 있어서 신경의 역사에 있어서 철학적인 세 가지의 본질적인 면을 언급하 려고 한다. ⑴거침돌과 어리석음으로서의 신경의 기독론적인 출발점과 중심점은 우연성과 특이성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우연성과 특이성에서 존재의 비밀은 열려지고, 세계의 구원이 일어난다. 우연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인 간에게 필요불가결한 것이고, 외부로부터 도래함으로써 내적인 것이 열린다.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익명 은 자유의 필요성으로소 존재해야 한다. ⑵두번째 조항의 다른 거침돌과 어리석음은 하나님과 역사의 관계이자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이다. 고전적-이상주의적인 그리고 영지주의적-헬라적인 전승에 있어서 시간과 영원은 바로 대립되었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간 밖의 참된 존재로서 엄격히 생각되었다. 그러나 신경은 십자가에 못박힌 자 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불쾌감을 일으키는 이 역사에서 하나님의 현재를 고백한다. 우리의 고난과 삶 의 역사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무감적인 박에서 개선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이 아 니다. 같이 고생하시고 투쟁하시는 그런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의 도래할 나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 안 에서"현재한다. ⑶ 나는 세번째 면에서, 기독교신앙과 하나님의 신앙이 결합된 이름을 생각하려 한다. 구약에서는 결정적인, 바꿀수없는 하나님의 이름, 야훼에 대한 전적인 경외와 헌신이 문제인 것이다.
7.3.예수 이름의 사신
종교사적으로 중요성을 갖고 있는 이 명칭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를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다. 희망의 정치적인 구원론적인 차원, 원수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와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한 기대는 메시아의 기대와 연결된다. 메시아의 칭호와 관련하여 베드로가 예수에게서 고난의 주제르 ?배제시키려고 할 때, 예수는 베드로에 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였다. 그의 사명은 정치적인 의미를 애당초 거부했다. 예수의 지배는 봉사에서 실현된 다. 해방을 시키는 사랑의 말과 행위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했다. 그는 구속사적인 약속의 성취자였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의 사명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생활의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이 지적된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형식은 그리스도와 믿는 자의 밀접한 연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울에게서 여러가지로 표현되었다.
7.4.그리고 예수를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가 희랍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주"는 정상적인 인간의이름을 지닌 역사적인 인격에서 나타났다. 신앙의 고백의 근원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생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은 자의적인 구속력이 없는 개방된 가능성을 지향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예수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구속력이 있는 삶을 형성해야 한다.
8.그의 외아들 우리 주를......
8.1.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신약의 기독론적인 존칭의 대열로부터 나사렛 예수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회적인 현재와, 이 역사와 하나 님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이 두 규정이 선택된다. 신경의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다루어질 수 있을까? 이 문 제에 대한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주제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과 <우리의 주>라는 두 진술의 방향이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달려있다. <그리스도 신성>의 주제를 교의적으로 고착화 시킬때 그것은 문제되었을 것이다. 본질과 같은 개념들에 의해 역동적인 주제들이 고정화 내지 정적인 것으로 되었을 것이다.
8.2.아들을 보내심에서의 하나님의 출애굽
하나님 아들의 주제는 고대 이집트와 신약의 헬레니즘 환경에서는 자주 사용된 잘 알려진 개념이며 예수에게서 만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에서도 구약적, 유대적인 맥락에서 이해된다. 나는 하나님 아들에 대한 이해의 여러 가 지 면을 세 관점에서 조명해 보려고 한다. 물론 이 세관점들은 상호연관되어 있다. ⑴하나님 아들의 동기는 먼저 그리스도 역사의 내적인 차원을, 예수와 아버지와의 유일한 관계를 표현한다. 그의 행위와 고난에 하나님의 역사 가 일어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일어난다는 확신은 공관복음서의 예수에게서 본질적인 요소 를 이룬다. ⑵하나님 아들의 주제는 내적인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외부로 향한 그리스도 역사의 차원, 즉 그의 선 교, 봉사를 규정한다. 이것은 신약적인 하나님 아들에 이해의 근본 경향을 규정한다. ⑶아들의 사명과 운명은 우 리의 운명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 아들"에 관한 주제를 이와 같이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의 신성의 주제"가 설명된다. 사도신경은 우리의 구원과 해방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다.
8.3.모든 지배권의 가치전도로서의 주 예수
내용면에서 주 주제와 연결된 세 가지 국면이 신앙의 기독론에 있어서는특징적인 것 같다. 첫째로 주님이란 고 백은 그가 구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안내판을 말한다. 주의 칭호는 확실히 부활에 관계된다. 둘 째는 주님의 고백으로 그리스도의 현재와 그리스도인의 현재가 규정된다. 세째로 이 고백에는 개인과 교회의 영 역 뿐만 아니라, 인류와 전 피조물의 운명이 드러난다. "주"의 고백은 역사적인 현실에서 표현된다. 예수의 주권은 고백자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정치적인 영역에 증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교의적 인 일치에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 중 특히 왕의 직무가 강조된다.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강조에서 기독교 인의 윤리적, 정치적인 책임을 위한 노력이 수반된 것은 우연일 수 없다.
8.4.하향길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윤리적인, 정치적인 생활에 상응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믿음을 갖고 고백할 수 있다. 따라서 주 예수를 증언하고 뒤따르는 두 방식, 즉 교회의 영역과 세계의 영역은 구분되어야 하나 분리 되어서는 않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구체적인 현실과 관계를 갖는다. 바울은 우리의 운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역사의 관련성에서 물으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주님을 뒤따르고,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진 력하는데서 정치적인 차원이 열린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다른 우상들과 맏\?선 것처럼 모든 새로운 바알과 가이 사의신성에 대하여 양심적으로 맞선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써 고백하는 새로은 양식에서 우리는 많은 기회를 갖고 있다.
9.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9.1.다툼과 긴장 해소
이 부분은 사도신경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이다. 여기서 논쟁은 동정녀 탄생이란 진술을 펼치는 데 있다. 그러나 여기에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처녀 탄생의 실제적인, 신학적인 의도를 간과하는 위험에 떨어진다.
9.2.기독론적인 두 주제의 두 차원
말씀의 성육신, 영의 인간화는 사도신경의 중심주제이다. 기독론적인 주제에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인간은 함께 있고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본성으로만 환원시키려고 한 순수한 단일성주의의 경향은 교회사의 한 부분을 장식했다. 두 화살(신성과 인성) 중의 어느 하나가 상실될 때, 믿음의 기초도 흔들인 다. 사도신경에서는 주제들이 정적인 개념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사건을 역사를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하나님의 인간 되심의 사건도 그 역동성과 역사성에서 서술된다.
9.3.성령의 계획 속에 있는 성탄절의 역사
"성령으로 잉태하사"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이 짧은 명제로서 나사렛 예수의 출생과 근원에 대한 문제의 초점은 맞추어지고 대답된다.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그의 출신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의 근원은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의 역사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주도권에 의한 수 태 이외 다른 어떤 것문제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그의 영에 의한 주도권의 관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주체는 그러므로 하난미 자신이다. 그래서 인간은 살고 고난받고 행동한다" 사도신경에는 성육신의 성탄절 역사의 운동, 방향, 흐름이 분명하게 파악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인간적인 역사이다. 양자 중의 어떤 것도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9.4.마리아와 기적의 상대성
동정녀 탄생의 동기는 바로 이 상대성에서 그 이차적인 주제에서 신학적으로 주목될 만하다. 동정녀 탄생의 동 기는 엄격히 신학적이다. 우리는 이 의도를 더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나는 처음 엔 인간의 이성, 활동, 경건성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문제이다. 거기에 하나님 자신이 현재한다> 동정녀 탄생애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어떤 동역적인 협력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도권과 은총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이 놀랍도록 혁명적인 성격으로 차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마리아의 혁명적인 대답에서, 인간의 독자적인 구원이 아닌 은혜의 역동성을, 잔인한 인간 성이 아닌 은총을 입은 인간성을 주목해야 한다.
9.5.동정녀 탄생의 신학적인 관심
동정녀 탄생은 금욕의 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예수의 문제에도 직접 속하지 않는다. 동정 녀 탄생의 문제는 시종일관 은혜의 신학에 관련된다. 그것은 세계를 구원하는, 강제할 수 없는 사랑의 선물이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때, 어떻게 구원이 우리에게 오는가에 대한 사신이다.
10.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사........
10.1.인간의 모습을 지닌 구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님의 성육신을 논의한 후, 기독론의 참 인간성에 대한 문제에 이르렀다. 그리스 도의 완전한 인간성은 인식은 고대 교회에서 결코 자명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회의는 신약성서 의 배후에서 시작한다. 예수의 인간적, 물질적인 성격을 완화시켜서 상징적인 가상으로 환원하려고 한 가현설의 실험은 고대 기독교가 직면했던 가장 심각한 시험이었다. 예수와의 만남에서 인격적인 현실성의 어떠한 영역도 제외되지 않는다. 신약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의 동시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그렇게 경험했다. 예수의 완 전한 인간성에 대한 지시로서, 그 구원이 인간의 전체적인 삶과 세상의 모든 현실에 관계된다면, 사도적인 그리스 도의 증거는 우리의 윤리적인 책임을 확립시킨다. 예수의 삶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의 삶을 형성해야 할 것인 가에 대한 윤곽을 보여주며, 그를 따르는 자의 삶의 방향과 목표를 각인해주고, 그에 대한 신앙을 구속력 있게 성 격화하기 때문이다.
10.2.구원사 밖에 있는 한 인간
"빌라도 아래서"라는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강력하게 부각시켜 준다. 이로써 그리스도 신앙의 현실성과의 관계가 분명히 밝혀 진다.이것은 역사적인, 정치적인 구체성에서 수행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빌라도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인 관련성을 뒷바침해준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위치는 기독교 신앙을 위해 서 실제로 중요하다. 칼바르트는 빌라도의 이 역할을 관심있게 추적하였다. 바르트는 그의 논문 "정당성"과 "법" 에서 예수와 빌라도와의 만남을 기술한다. 국가의 제도에 대해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바울의 지시는 오늘날에도 주목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 물론 교회사적으로 이 지시가 오용되어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전락된 것 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와 관련을 갖지 않은 신앙의 가현설의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은 아 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10.3.기독교적인 매저키즘 ?
"고난받으사"라는 이 말은 흔히 예수의 마지막 날의 수난을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예수의 출생과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전 삶과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싶다. 그의 삶의 스타일은 고행을 하고 있 는 금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생의 기쁨을 동시대인들과 같이 나누었다. 그의 주변의 반응으로 보아서 그가 어떠한 생활을 영위했는지를 알수 있다. 복음서의 시각에 의하면, 고난의 삶은 예수에게서 불행한 삶을 뜻하 지 않는다. 십자가는 그의 사명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이다.
10.4.파괴적인 것의 파괴
죄와 죄의 결과는, 신경의 첫 조항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둘째 조항의 배경에서 표현된다. 예수의 고난은 악의 극복을 위해서, 파괴적인 것의 파괴를 위해서 필요 불가결했다. 그의 고난은 악의 극복을 위한 목적에서 이해되어 져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을 하나님께 저항하는 인간적인 죄의 힘을 타파하려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이해한다. 적극적으로 믿는자는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은 자"를 뒤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11.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11.1.핵심
십자가의 사건은 교회의 정초와 사도적인 신앙의 근거를 위해서 중심되는 주제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쉽게 평 면적으로 도식화하려들고, 십자가 신학에 본래적으로 내재하는 그 다양성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11.2.사랑의 결과
요셉 라칭거에 의하면 십자가는 타자를 위한 전적인 자기 희생의 사랑의 철저성으로 나타나 있다. 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이것이 요한 복음에서 "벗을 위하녀 제 목숨을 바치 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사랑의 철저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적용된다.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십자가의 역사적, 전기적인 배경들이 주의깊게 관찰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신 학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구체적인 사랑이다. 그 사랑의 결과는 쓰고 끔찍하다. 그는 끔찍스런 육체의 고통 속 에서 신음한다. 만일 그의 십자가가 사랑의 결과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면 믿음과 희망의 기반은 흔들렸을 것이다.
11.3.하나님께서 함께 괴로와하심
십자가의 이 종말론적인 구원론적인 면들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검토되고 보충되어야 한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 은 우리 자신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잃어진 거기에서, 우리의 삶이 끝장난 거기에서 우리를 찾아 발견했다. 십자가의 이 종말론적인 차원의 숨은 의미를 밝혀 우리들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종말론적인 역사에서 우리의 구원사, 즉 하나님과의 우리의 화해, 우리의 해방과 구원이 문제인 것이다. 구원론의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 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저편에, 역사의 피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 에, 죄와 갈등으로 괴로와 하는 여기에, 소외의 조건들 안에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는 우리의 역경과 순경 에 함께 계신다.
11.4.고난의 위태로운 회상
예수의 삶은 남을 위한 삶이었다. 구러나 여기서 우리는 위태롭다, 위험하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고난 받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헌신은 바로 억압된 자와 소외된 자, 삶의 권리를 빼앗긴 자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하기 때 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사" 라는 말은 신학의 숙고를 위해서, 신앙의 실천을 위한 윤리적, 정치적인 결고 를 위해서 중요하다. ⑴십자가의 회상은 삶과 이해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십자가의 기억은 모든 역사 속에 스며있는 고난의 땀을, 역사의 상처를 장미로써 위장하려 하지 않는다. ⑵신약성서적인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에 대한 기억은 하나님이 바로 정치적인 사건에 현재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다.
11.5.쓰라린 최후까지
"죽으시고" "묻히시다"라는 이 진술은 십자가 사건의 최후적인 성격과 예수의 인간성의 문제를 가장 예리하게 드러낸다. 나는 이 두 진술에서 강조점을 기독론의 문제와 신앙의 고백과 관련하여 중시여긴다. 하나님 아들의 우 리와의 연대성은 인간의 최종적인 한계로서의 죽음에서도 보여진다. 하나님 아들의 인간적인 것에 낯설지 않다는 명제는 그의 종말을 고려하여 볼때네 훨씬 심화된다.
11.6.희망의 지옥행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라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말은 사도신경의 특수성을 나타낸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지옥행"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행진이 시작하는 것을 본다. 한편 칼빈과 대부분의 개혁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지옥행"은 신화론적으로 이해되었다. 나는 루터와 칼빈이 사도신경의 어두운 진술을 같 은 관점을 가지고 해석했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지옥행은 삶 전체에 관련된 예수의 해방의 역사의 넓이와 깊이를 지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의 부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우리는 하늘과 땅, 우리가 지옥이라고 부 르는 곳에서도 그리스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12.제삼일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12.1."나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안다"
십자가는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역사적 인 현실성을 넘어서는 부활은 파악될 수 없는 비밀에 속한다. 부활 자체는 역사적인 검증의 성격을 넘어선 문제 이므로 역사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성과 관계를 갖고 있는 증언의 차원은 남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의 현실성의 문제를 재빨리 비신화화 해서는 안될 것이다.
12.2.부활의 역사성
기독교의 부활의 사신은 죄경의 진영에서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죽음의 힘을 극복한 희망의 사신으 로서 이해되고 실제로 그렇게 증거된다. 부활의 현실관계는 결코 신화론의 문제와 세계관의 여역에서 밝혀질수 없다. 부화? 현실 관계와 그 역사성은 역사적?니 차원, 세계를 변화시키는 차원을 가지고 있다.
12.3.삼일
"삼일"이란 시간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공백으로 남아 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시간이 삽입된 것 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교의적으로 뿐만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삼일"은 부활 사건의 현실 성을 상징적-변증법적으로 비현실화시키고 그 현실성을 제거하려는 일체의 유혹과 맞서게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유일회적인 부활 사건을 의미한다.
12.4.참으로 부활하셨다.
부활과 관련하여 "종말론적"이란 규정은 엄격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신약의 관점에 의하면 부활에서는 최종적 인 자와 최종적인 것이 문제이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모든 인간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모든 한계를 넘어서는 데에서 성취된다. 동시에 부활은 최종적인 것을 지시하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신약 성서의 부활의 증언에서 우리는 이 면을 간취할 수 있다. 완성된 해방과 화해의 새 창조는 부화 신앙에서 보면 상호 관련성을 갖는다. 부활의 이 종말론적인 지평이 이해된다면 부활사건의 최종적인 성격은 보다 더 잘 드러날 것이다. 부활의 매체는 설교, 믿음, 그리고 부활의 프락시스이다.
12.5.숙명주의에 대한 저항운동
부활의 결과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제적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부활의 현실적인 결과들은 우리 시대의 고통과 관계 된다. 그 중에 우리를 가장 괴롭힌 것의 하나는 숙명론의 유혹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활의 현실성 과 신앙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부활신앙은 운명에 대한 체념과 자포자기를 타파한다. 부활의 사신은 십자가 아 래서, 역사의 숙명적인 경향과 극복을 부활의 빛에서 보면서 집요하게 죄절과 체념과 대결한다.이것은 예수가 십 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새로움의 가능성은 신앙고백의 전망에서 결코 파탄된 것은 아니다.
13.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거기에서부터 산 자 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러 오시리라..........
13.1.어제, 오늘, 내일의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여기에서 "오르사, 앉다, 다시 오시리라"는 시간의 세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과거, 현재, 미래가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신경이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와 미래를 분명 히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 이 본질적인 면을 우리는 교의학에서 주목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 오늘, 내일의 시간들에게 불변의 주제인 것이다.
13.2.신들은 우주 비행사들인가 ?
승천은 근원적인 신앙을 "신화화"한 것이고 "실체화"한 것이라는 두 비판은 검토되어야 한다. 신약성서에 의 하면 실천에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부활과 성령 강림과 연결된다. 부활과 오순절은 사도들의 신앙의 프락시스의 기초이다. 승천의 주제는 신학과 교회로부터 성급하게 비신화화될 수 없을 것이고, 우선 재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역사는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재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고 있다. 이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해방하고, 구속력을 갖게 하는 의미에서 기독교의 희망 전체와 관련된다.
13.3.심판에서의 구원
최후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와 구별된 일바적인 주제일 수 있다. 심판의 주제는 기독론적으로 구체화 해야 할 것이다. 심판의 주제는 기독론적으로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⑴ 교회 전승들의 개념과 분위기를 어둡게 한 최후 심판의 주제가 기독론적으로 채워진다면 그러한 분위기는 사라질 것이다. 인간의 삶은 결단과 구별없이 기준과 분별없이 영위되지 않는다. ⑵ 이 전망에서 보면, 최후 심판의 전승에 관련된 다른 요소도 청산된다. 즉 신약성서적인 종말론과 심판의 말들을 이런 대칭적인 방식으로 고착화시킬 수 없다. ⑶ 예수의 사신에서부터 최 후 심판의 기준은 드러난다(마 25:31-46). ⑷ 예수의 구원사의 관련에서 최후의 날은 궁극적인 해방의 날, 그의 구 원이 완성되는 날이다. ⑸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 자에 대한 기대와 전망은 바로 개인의 삶에 관계한 다. 이 전망은 거짓된 판단과 인간적인 심판으로 뒤엉켜진 것에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13.4.끝없는 나라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는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이 진술은 시대와 관련성을 갖는다. 여기에 예수 사 신의 중심적인 주제, 죽 하나님의 나라가 받아들여 졌다. 하나님의 아들의 삶에서는, 따라서 기독교인의 신앙에서 는 개인적인 업적의 성취나 교회 자체의 어떤 과제의 성취가 결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 그의 끝 없는 나라가 문제인 것이다.
14.성령을 믿습니다
14.1.기독교 신학은 영을 망각했는가 ?
그리스도 사건을 권위적으로, 성령을 관계적으로 성격화하는 것도, 사도신경의 세 조항을 서로 대립시키는 것도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없다. 기독론이 없는 성령론도, 성령론이 없는 기독론도 문제이다. 우리는 영의 망각에 서 성령론의 차원을 회복해야 하겠지만, 제3조항의 일면적인 추상적인 성령의 신학만을 추구할 수 없다.
14.2.갱신의 힘
나의 존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닻을 내렸고, 나는 이제 열려진 구원의 현재화로 살아간다. 더 나아가 서는 현재화는 동시에 참여로서 이해되고 경험된다. 성령은 참여의 힘이다.인간은 이미 첫째 조항과 둘째 조항에 서의 창조자의 피조물로서 역사적인 고난과 죽음의 고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계약의 동반자로서 예수 그리스 도의 운명의 동반자이다. 하나님은 주체적인 존재로서 인간에게 말을 건다. 우리의 대답을 기대하고 그의 업적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기대한다. 겉으로가 아닌, 우리들의 내면적인 참여를 그는 기대한다.
14.3.현재하는 그리스도
영은 예수의 사신에서 뿐만아니라 그의 프락시스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주는 영이시다"라는 이 공식은 신학적인, 윤리적인 성격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움직여진 사랑이 영의 최종적인, 표준적인 은사 와 영의 현재를 결정한다. 예수의 부대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공허에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별의 시간은 체념의 시간이 아니라 세계 속으로 진군해 들어가는 시간이다. 압도적인 영의 현재는 신약성서에 서 아주 분명하게 주님의 현재로서 파락된다. 이러한 관련성에서 "주님은 영이시다"라는 명제도 현재에 대한 고백 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14.4.자유한 인간의 동일성과 자기 실현
그리스도 영의 현재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의 내재적인 세게에서 일어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 세 번째 강조로써 자유한 인간의 신학적인 의미가 아주 명백해진다. 성령은 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자유 한 아들을 창조한다. 예수의 영의 분명한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얻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성령을 지시하는 것은 동시에 다음과 같은 현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자신에게만 시선을 집중 하고, 자신 속에서만 맴돌고, 초월과의 다리 - 이웃과 하나님과의 다리 - 를 파괴한다면 그러한 동경은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 자기 경험은 자기 구원이 아니고, 발견도 아니다.
14.5.성령의 신학 : 교회와 새 창조
성령의 운동은 외부의 갱신을 목표한다. 성령의 운동은 인간 밖으로, 전세계 안으로 들어가도록 자극하고 이것 을 가능한다. 성령론은 교회론과 종말론을 지나 더 나간다. 성령은 현존하는 그리스도로서 먼저 교회의 영이다. 성령의 몸은 교회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상하는 것은 신약 성서적인 교회론의 명쾌한, 가장 생산적인 주제에 속한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에 거한다는 성령의 장소규정은 구체적인 신앙의 공동체를 단순하게 받아들이 거나 교회를 인간적인 현상에다 그대로 내맡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밖을 향한 선교의 이 첫 발걸음은 교회 의 내적인 삶과 밀접히 이어져 있다. 교회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교회와 함께 교회를 넘어선다. 밖으로 향한 증거 는 교회사와 교리사의 넓은 흐름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성서적인 성령론의 열려진 전망은 자주 가리워졌고 좁 혀졌다. 성령의 교리화, 개인화, 제도화는 저지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시대에 제약된 것을 혹은 유토피아 적인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의 역동성을 바르게 평가하고, 우리의 신학과 교회로부 터 영의 망각을 회복하려고 한다면 여러 사상가들의 신학적인 증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15.거룩한, 보편적인 교회를....
15.1.영의 첫걸음
사도신경이 성령에 관해서 말한 다음 곧 같은 조항에서 교회에 관해 말하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세째 조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나는 교회를 믿는다.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는 신앙의 고백에 속한다. 교회의 자리는 사도신경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성령에 대한 신앙의 계속성에서 바르게 보여진다. 성령은 궁극적으로 교회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이 진술이 성령론에 이어지는 것은 교회 론과 성령론에 아주 중요하다.
15.2.혼합된 모습 : 보일 수 없는, 보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카리스마적인 신비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시작된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신비가 기독론적 인, 성령론적인 차원에서 주목된다. 교회사와 오늘날의 신학에서 그렇게 많은 교회론적인 숙고들을 각인하곤 하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분의 자리는 바로 교회이 개념과 현실성의 "두 차원성"에 있다. 이 구분은 고정된 교회적인 제도들을 성령의 종말론적인 사건과 근시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막는다. 참된 교회를 위한 노 력은 피안에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쓰디쓴 환멸을 느낀 인간적인 인간적인 - 너무나 인간적인 지상의 교회에서 일 어난다.
15.3.참된 교회의 표지
"교회의 예배는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절실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 예배의 가 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고 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배의 본래적인 영역 에서 존재하고 이 예배는 어떠한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 교회의 본질에 상응하는 최대의 봉사는 생동하는 예 배를 위한 노력이다. 우리의 조항에 나타난 모든 개념들은 이 방향을 지시한다. "에클레시아" "거룩" "보편성"이란 개념들을 성서적으로 이헤한다면 세계의 지평에서 봉사하라는 부름이 들려진다. 그리고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전세계 안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이 들려진다.
15.4.하나님 나라의 기준선
교회의 열려있는 관계의 지평을 가장 잘 표현한 신학적인 개념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독점물이 아 니고 전 인류의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교회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미래이자 세계의 미래이다. 하 나님 나라의 현재는 교회의 현재를 폐기 시키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상대화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출발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정치적인 결단을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정치적인 당파를 신앙의 고백에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16.성도들의 사귐을 믿습니다.......
16.1.거룩한 것을 성도들에게
성도들의 사귐이 교회에서 엷어지고 사라진다면 교회의 이해는 천박해지고 교회의 삶은 빈곤해진다. 우리 모 드에게 주어진 거룩함에서의, 그리스도 은총에의, 성령의 은사에의 참여를 아는 것이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16.2.시간과 죽음을 넘어서는 사귐
성도의 사귐은 이 표어가 지시하는 해석보다 더 오래된 것은 거룩한 자들의 친교이다. 즉 거룩한 인간들과 존 재의 상호 관계이다.성도드르이 사귐을 진지하게 잡아들이는 것은 교회와 문화의 중요한 관심이어야 한다.
16.3.연대적인 형제 관계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면은 동시대인들과의 친교에서 드러난다. 신약성서적인 언어 사용에 의하면 성도는 구체 적인 교회의 구체적인 지체를 지시한다. 이로써 초대 교회의 신앙과 교회의 본질이 드러난 셈이다. 그것은 신앙의 공동체적인 형제적인 성격을 내용으로 한다. 초대교회의 운동은 분명히 형제적인 공동체였다(행2:42). 나는 성도들 의 사귐의 사회적인 면을 강조한다. 왜야하면 사도신경의 해석하에서 이 측면은 거의 간과 되었가 때문이다. 참된 교회의 표지가 정통적인 것의 바른 실현에서 규정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잃어버린 사회적인 측면을 회복 해야 한다. 성도들의 사귐은 이것을 넘어서서 사회 윤리적인 정치적인 현실성을 수반하는 임무를 갖는다.
16.4.성찬식의 초점
교회생활에는 성도들의 사귐의 약속의 현실이 강하게 나타나는 장소 즉 성례전이 있다. 성탄식의 축제에선 이 주제의 삼화음이 문제이다. 교회의 선교에서, 성도들의 친교의 약속과 의무에서, 이 세 관점이 충분하게 드러나느 냐가 문제이다.
17.죄를 용서를
17.1.나는 세례를 받았다.
사도신경 형성기에 죄에 용서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의 삶의 자리를 표현하는, 전적으로 특별한 계기와 관련된 다. 죄의 용서는 오늘날까지 타당성을 지닌다. 이와 관련하여 세례는 기독교인의 삶의 참된 표지이고 전조이다. 세례는 과거에만 그 빛을 비추는 참된 표지이다.
17.2.기독교인의 공통분모
세례의 진리는 구체적이다. 즉 죄의 용서이다. 죄 용서의 많은 성서적인 증언들을 볼때,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 은 죄의 용서를 부수적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바르트는 죄의 용서의 조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낟. "그것은 진지 하게 기독교적인 삶으로 불리워지는 모든 것의 공통분모이다"
17.3.죄와 용서에 대한 오해
죄의 용서라는 말은 오해되고 혐오를 받는다. "죄"라는 개념에서 우리는 오늘날 도덕작으로 인간을 싫어하는 경향을 발견한다. "용서"라는 말은 불신을 조장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독교적인 죄론을 부정의 이데올로기로 서 혐오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의 신학과 교회의 프락시스는 죄의 용서의 조한을 신빙성 있게 설명해야 하고, 프락시스를 통해서 그 신빙성은 증명되어야 한다.
17.4.단지 죄의 용서뿐인가 ?
기독교인은 죄의 용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기독교인의 삶은 획일화된, 규범에 의해서 지배된 삶이 아니 다. 그것은 미리 계획된 율법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자유의 양식이고, 풍부한 관심을 알고 있다.
17.5.악순환으로부터의 탈출
사도신경에 있어서 죄의 용서라는 진술이 인간 존재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 ? 나는 먼저 인간의 구원과 파 멸이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사도신경은 악의 근거가 죄의 상태와 행위에서 나타난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실제로 죄의 근본과 본질을 하나님과 계약의 파괴로서 이웃과의 관계의 단절로서 자기 중심적인 마음의 무자비로서 성격화한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래적인 공헌과 봉사가 아니다. 물론 성서적인 사 신은 이점을 말하지만 죄는 구원사와의 관련에서만 논의된다.
17.6.사죄의 창조적인 새로운 시작
사도신경이 죄의 용서에서 강조하는 역점은 인간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물음을 위해서 특별한 해방의 전망을 제공한다. 기독교적인 죄의식은 자아 부정과 삶의 원수의 표현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왜곡된 삶을 직면할 지라도 사죄에서 삶은 긍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용서하려고 하는 기독교인의 삶은 죄를 경시하거나, 모순과 갈등을 숨 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갈등을 억누르는 것도, 죄를 망각하는 것도 아니다.
18.육의 부활을.......
18.1.미래의 정신
사도신경의 마지막 진술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살고 죽을 우리 모두에게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문제를 다룬다. 교의학적인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둘째 조항에서는 기독론적인 미래와 그 주제가, 세째 조항에서 는 인간학적인 주제와 그 미래가 문제이다. 세째 조항의 해석의 맥락에서 그 대답이 서너 군데의 중요한 귀절에 서 성령론적으로 형식화되어 있는 것을 주목할 만하다(롬8:11).
18.2.왜 영혼불멸이 아닌가 ?
영혼불멸의 사상은 고대 전승의 신비적, 종교적인 사고에서 시인한다. 무엇보다 이 사고는 플라톤에 의하여 죽 음에 대한 철학적인 희망의 놀라운 이념이 되었다. 후기에 가서는 교회와 신학은 영혼불멸을 교리적으로 받아들 이게 되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는 그러한 수용은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는 이미 주어졌다. 그 것은 기독교의 희망이 전적으로 다른 관련에 기초되어 있기 때문이다.
18.3.끝없는 희망
⑴"육의 부활"은 기독교적인 구원에 대한 기대의 전체성을 나타난다. 성서적인 사고는 인간과 세계의 이해에 있어서 전적이고 통일적이다. ⑵"육의 부활"이란 이 형식으로써 기독교 희망의 전체적인 현실관계가 결정적으로 강조된다. ⑶사도신경은 단순히 "몸의 부활"이 아니라 "육의 부활"을 말한다. 우리 구원의 이해를 오늘날 의미있 게 관찰한 의미있게 관찰한 한 중요한 지시가 "육의 부활"이란 형식과 관계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우선 요한 복음에서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의 사건이 이 개념으로써 표현되어 있는 것을 생각한다. 이로써 우리의 구원의 기 대의 관련성에서 복음이 말해질 것이다. 종말론적인 희망이, 육체적인 것까지 포함한 전적인 희망의 우리의 소외 와 억압의 깊이에로 스며든다.
18.4.폐기될 수 없는 계약 : 죽음을 넘어선 대화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 사도신경의 본문은 시종일관 개인적인 삶에 관계되고, 개인적인 결단, 특히 세 례를 받는 상황과 일치한다.그러나 부활의 희망은 단순히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의일이다. 그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의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고, 인격적이고 대화적인 사건이다. 주관 주의와 객관주의를 넘어서서 부활은 대화적인, 인격적인 사건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18.5.모든 주들의 주에 대한 저항
"오늘의 신학은 기독교의 부활이란 말을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비신화한다. 그리고 영혼 불멸의 이념 과는 달리 사도신경은 부활 희망을 인간적인 전체 현실성과 관계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관점은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강조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죽음의 그늘레서 살지만, 죽음을 믿지 않는다. 그는 뉵의 부활 을 믿는다. 이 신앙의 결단이 사도신경의 부활의 진술에선 문제이다.
19.영원한 삶을......
19.1.영원한 상 아래서
기독교의 신앙에는 생이 문제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지시를 따르려면 우리는 전체적인 의미에서 이 종말론적 인 생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상적인 삶과 영원한 삶을 일반작으로 대조시키는 것은 성서적인 사고에 전적으로 일 치하지 않다. 또한 희랍적인 사고와는 달리, 시간과 영원은 성서적으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론적인 근거에 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19.2.하나님은 우리의 피안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역사를 향해서 온다. 지상적인 삶과 영원한 삶 사이의 이 순위 질서는 성서적으로 분명 하다. 영원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영원히 가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최후의 진술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첫 진술없이 이해될 수 없다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없는 영 원한 삶을 성서는 알지 못하다. 하나님과 생명의 해체될 수 없는 이 밀접한 결속은 생명의 시초에만 관계되는 것 이 아니라 생의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방향과도 관계된다.
19.3.은혜의 빛 속에서 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해에서 빛과 생명의 본질적인 관계가 정립된다. 하나님 자신이 빛이다. 그의 빛은 "영원 한 삶의"빛이다. 그리스도, 성육신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빛으로서 알려진다. 어듬에서 비치는 이 빛은 오늘의 삶, 내일의 죽음과 사후의 존재를 위한 약속이다. "어둠 이후의 빛"이라는 제네바 종교 개혁의 문장은 기독교적인 삶의 이해와 인간 역사의 근본적인 상황에 일치한다.
19.4.그러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다.
영원한 삶은 사랑이 없이 생각될 수 없다. 사랑은 영원한 삶의 기초이고, 근본 성격이며 규정?. 영원한 삶에선 하나님?? 문제이므로 그러므로 사랑이 문제이다라는 결론은 정당하다. 나는 사랑의 이 중심을 영원한 삶의 지평 에서 명시하고 싶다. 왜야하면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과 나의 사적인 일로서 또는 정신적이고 내적인 일로써 오해하는 것이 저지되기 때문이다. 오늘과 마지막 날에도 이웃이 없는 영원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사랑만이 가실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기독교 교의학 목표는 맞았는가, 혹은 실패했는가의 사고 밖에 있다.
사도신경 해설을 읽고
기독교는 2000년의 역사를 가졌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2000년동안 현실의 어떠한 위협과 고난에도 불구 하고 그의 생명성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지해 왔다. 어느 시기에는 국가에 직면하여, 어느 시기에는 기독 교를 배타시하는 파당에 직면하여, 어느 시기에는 다른 종교에 직면하여, 그리고 어느 시기에는 기독교 내 부 자신에 직면하여 기독교는 끊임없이 그의 정체성과 고유한 사명을 지켜내려 노력한 숭고한 역사적 종 교이다. 그러한 끈질긴 저항과 보존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우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 만큼 기독교인으로서의 우리 신앙인은 그 역사적 기독교의 노력과 흔적을 덧입고 이 자리에 이른 것이다.
기독교는 어느 종교보다 그의 역사적인 좌초를 많이 경험하였고 그의 갈등과 투쟁의 상처가 많이 배어 있는 종교이다. 또한 초기에 있어서 기독교만큼 일촉즉발 그의 신앙공동체가 변화되고 불이 붙고 확산된 세력은 없었으리라고 여겨본다. 그만큼 기독교는 정열의 종교이며, 궁극적인 회심의 종교이며, 확신의 종교 이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가 매주 하나님을 만나면서 읊는 사도신경해설은 바로 그 2000년 기독교 신앙공동채가 감내해 왔던 소중한 땀과 피가 면면히 배어있는 순결한 언어이자 고백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일 수 있는 가장 강력 한 증거는,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하여 현재 이자리 에서 2000년 전부터 이어내려오는 신앙공동체의 선배들과 하나가 되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오늘과 기독교역사 안에 흐르는 그 신앙정신을 합류시키는 우리의 보석과 보배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책이 그렇지 않으랴만은, 이 사도신조해설은 1학기 책을 읽은 것 중에서 가장 절박 하고 절실하게 다가온 내용들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서있는 나에게 기독교인의 사명과 역사 적 책임, 하나님에 대한 나의 자세 등등 가장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 무게있는 서늘한 책이었기 때문 이다. 특히 평범한 기독교인의 자리를 일단은 넘어서야 할 사명이 있는 신학을 하는 나 자신의 실존에 있 어 그러한 질문은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 된다.
특히 로흐만 교수는 바젤에서 칼 바르트의 신학과 칼 야스퍼스의 철학, 이 두 날개를 동시에 사용하여 기독교의 정수를 향해 우리를 매혹적으로 인도하는 베아트리체였다. 기독교의 중심수맥을 이어오는 칼바르 트의 신학적 자세와 역사와 우주를 향해 탐구적 시선으로 응시하는 칼야스퍼스의 철학적 자세를 통하여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리고 사도신경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한 발자욱 더 알게 된 귀한 계절이 된 듯 하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요약할 수 있을까. 본인이 생각컨데,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은 이미 그 자신이 신앙의 역사를 정제하고 압축하고 증류하여 놓은 빛나는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신앙의 역사의 최종적 요약본이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신앙의 역사가 하나로 아우러져 배어 있 음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신앙의 역사, 하나님의 구원사, 신앙을 통한 현실과의 끊임없는 대항, 역사 의 종말론적심판 등등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의 화려한 편린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민중신학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현대신학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최신의 신학에 우리의 실존이 맺 혀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실존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라는 질 문을 해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현대적 논의와 그 신학의 뿌리들은 수천년을 내려온 신앙의 역사의 든든 한 뿌리에 비하면 일천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신앙은 무엇인가. 신학은 무엇인가. 기독교진리의 근원과 뿌리를 추적하는 과정이 아닌가. 본인은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적이고 표피적인 관심사에만 머물러 있었던 지금까지 나 자신의 신학적 촉수의 한계를 이 책을 통하여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더 근원적인 신학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야 함을 깨닫게 하였다.
몇 십년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느꼈던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신학적 사유보다는 좀 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독교의 온 역사를 껴안고 씨름하면서 느끼는 이 신학적 사유의 보 람과 환희를 어떤 언어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으리요. 앞으로 좀 더 이러한 기독교신앙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많았으면 좋겠다. 동시에 로흐만의 다른 책, 말하자면 Vom Sinn der Feste (축제의 의미에 대 하여)와 같은 책도 이번 방학에 정독하여 로흐만의 신학적 깊이와 그의 신학적 궤적을 하나 둘씩 알아나가 는 귀한 계절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1996년 4월 8일
출처 :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 글쓴이 : e-nock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