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Bible Study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하는 이유?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 19:25

샬롬

성도여러분 새해 경인년에는 성경을 계획적으로 시간을 정하여 놓고 성경을 봅시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하면 좋겠읍니다.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하는 이유?]

1. 잘못된 동기


무슨 일을 하든지 꼭 그 일을 해야 하는 혹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목적과 당위성이 분명해야 한다. 거기다 정말로 하고 싶은 소원과 열정이 보태지면 금상첨화다. 성경 공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자신이 어떤 이유로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지, 사실은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분부터 그리 많지 않지만 그나마 배우고자 결심한 자들 중에서도, 명확하게 정리가 안 된 분들이 의외로 많다. 정확히 말하면 잘못된 동기를 갖고 공부하고자 하는 자가 대부분이다.

우선 기독교 신자니까 당연히 성경을 배워 봐야지 하는 단순한 생각을 한다. 기독교인으로서의 기초적인 의무 교육은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혹은 교회를 그렇게도 오래 다녔어도 주일 설교 중에 성경을 제대로 찾지 못해 최소한 각 책들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는 알아야겠다고 한다. 혹은 대표 기도할 때에 성경 말씀도 좀 인용하여 근사하게 하고 싶거나 성경을 잘 알면 아무래도 예배, 전도, 기도, 구역공부 등 모든 면에서 진전이 있을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아니면 정말로 성경에 어떤 내용들이 쓰여 있는지 궁금해서 지식적 탐구욕으로 문자 그대로 공부해 보려고 한다. 또 지극히 평범하게도 상처 받고 고달픈 일들이 생길 때에 말씀으로 위로 받고 힘을 얻기 위해서 미리 그런 말씀들을 알아 놓으려고 한다. 아무 문제없이 형통한 사람들은 성경에서 죄를 안 짓고 경건하게 살 수 있는 방안을 찾기도 한다. 안 믿거나 이단에 빠진 형제나 친구를 전도하려고 교리 중심으로 공부하려고도 한다. 이런 일반적인 이유 말고도 개별적으로 아주 특이한 이유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예들은 성경 공부에서만은 품어선 안 될 동기다. 그런대로 자기 성장이라는 선한 의도가 있고 또 실제로 그런 유익을 얻을 수 있지 않느냐라고 반발할 성질이 아니다. 예를 든 목적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신자에게 소원하시는 바와는 많이 혹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동기로 하는 성경 공부는 아무리 부분적인 유익과 성장이 있어도 통괄해서 볼 때는 부정적으로 작용하거나 심지어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경우마저 많이 발생한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신자 간의 인격적인 상호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든 동기들은 전부 신자 쪽에서 원하는 개인적인 욕구들뿐이다. 그런 동기를 갖고 성경 공부를 해서 소기했던 성과를 얻어 본들 결국은 자기 뜻을 이룬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 신자에게 가르치고 싶은 내용은 옳게 배우지 못한 셈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목표만 달성하고 치운 것이다.

성경은 종교적, 지식적, 도덕적, 심리적, 감정적, 경제적, 사회적 목적을 갖고 접근하는 것을, 하나님 쪽 이유가 아닌 인간 쪽에서의 여타의 어떤 목적이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동기로 성경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거나, 그렇게 보았다고 벌을 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이 신자에게 제공하는 진정한 유익과 풍성한 은혜를 제대로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셈이다. 성경은 반드시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 보존하여  신자에게 남겨 주신 목적에 순응하여 배워야만 한다.  

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성경공부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지당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직접 개인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성경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실감나는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대통령에게서 금박 문장이 박힌 커다란 봉투에 두툼한 내용의 편지가 자기 개인 명의로 왔다면, 누구라도 다른 모든 일은 제쳐두고 그 편지부터 아주 찬찬히 읽고 또 읽지 않겠는가? 거기다 아주 큰 보상이나 특혜를 주겠다는 내용이라면 아마 줄줄이 외울 정도로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고 또 당장에 그대로 시행할 것이다. 그럼 성경이 그런 편지보다 못하겠는가? 아니 감히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고 보라는 뜻은 그런 열정과 소망을 품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우주 만물의 주인이자 운행자이신 하나님이 나를 직접 찾아 오셔서 말씀하고 있다면 그 앞에 완전히 엎드려 혹시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모든 지정의를 동원해 세밀하게 경청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분 앞에 내 쪽의 의심, 반발, 불만, 불신은커녕 개인적 욕구를 섣불리 꺼내 놓을 수 있겠는가? 오직 듣기만 할 것 아닌가? 나의 생명까지 완전히 주관하시는 그분의 뜻을 잘못 알았다간 자칫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다는 각오이어야 한다. 너무 과장한 이야기가 아니다.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을 맞대면 하면 살아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럼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는 신약 신자로선 과연 어떤 마음으로 성경을 대할 것인가 말이다.    

영어로 “뭐든지 말씀하시라. 나는 듣기만 하겠다.”는 뜻으로 “I am all your ears."라는 관용구가 있다. 흥미롭게도 직역하면 ”나는 오직 당신의 귀일뿐입니다.“라는 뜻이다. 최소한 바로 그와 같은 자세로 성경을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을 볼 때만은 인간적인 동기나 욕구는 모두 다 내려놓고 완전히 비워진 마음이 선결되어야 한다. 성경을 정말 있는 그대로 성경으로, 즉 100%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접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 없이 성경 공부를 시작할 수는 있다. 또 솔직히 말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 믿음을 갖고도, 심지어 구원을 얻고도 그런 자가 꽤 많다. 그러니까 더더욱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반드시 갖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한다. 항상 겸비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확신이 들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공부해야 한다. 또 그러면 어느 순간 그런 확신이 들게 해주신다.

이런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부터 확실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또 가능하면 그런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어떤 성경공부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만약 그런 확신이 없으면 아무리 규정된 코스의 진도가 많이 나가도 성경에 대한 종교적 지식만 쌓인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씀이 하나도 없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종교적 실력만으로는 결코 영성을 성숙시키지 못한다. 영성이 자라려면 오로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겸비해져서 그분의 말씀을 순수하게 듣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 또 진정한 갈급함이 있으면 당연히 말씀을 들려주신다. 물론 갈급함만으로 그쳐선 안 된다.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 즉 하나님과 대면하여 교제하며 동행한 인격적 체험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어그스틴의 알기 위해 믿는 것이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는 유명한 말은 성경을 공부하려는 오늘 날의 모든 신자가 반드시 참조해야할 경구다. 다른 모든 종교는 교리를 배우고 신조를 외워야 믿음이 생긴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먼저 얻어 믿음이 생긴 후에 이왕에 얻은 구원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또 그런 사후적인 배움을 통해서 믿음이 더욱 견고해진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되는데 그 두 번째의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근거한다는 것이다.    

3. 신자 된 신분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성경공부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필연적으로 두 번째 이유를 파생한다. 그분이 과연 나에게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말하자면 신자가 된 후에 나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이 과연 무슨 의미와 목적을 갖는지 알기 위해 성경을 배워야 한다.  

신약 시대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즉 은혜의 시대다. 하나님의 왕국은 이 땅에 이미 도래했지만 완성은 되지 않았다. 그 완성의 기간까지 최후의 심판은 보류되었다. 현대의 신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직접 육안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경을 읽음으로써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인류 전체와 자기 개인을 향한 계획과 뜻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인류 전체의 재림을 위한 대비와 자기 개인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성경을 배워야 한다. 흔히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신자들마저 심판으로만 예측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예수님의 초림은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한 가지 목적이었지만 재림 때는 그 목적이 둘로 나뉜다. 불신자에게는 최후의 심판이며 신자에게는 구원의 최종적 완성이다. 따라서 그 때까지는 신자는 불신자와는 아주 다른 독특한 신분과 특권과 임무를 지니게 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1)

한 마디로 신자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 받아 성령이 내주하는 하나님의 전으로 이미 바뀌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분의 성품에 참예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을 사모하게 된다. 나아가 그분의 일을 하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과 소망에 사로잡힌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처럼 전 생애를 바쳐 그분의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기까지 충성하여서 그분의 자신을 향한 계획을 이룰 수 있다. 그럴 때까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 신자와 함께 해주신다.

신자가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고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의 인도를 따르면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시고야 만다. 신자를 향해 태초부터 마련해 놓으신 계획을 신자의 믿음과 소원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열심과 권능을 동원해 그분께서 반드시 이루신다. 신자의 신분은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영원한 계획 가운데로 부름 받은 그분의 동역자라는 것이다. 특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영원토록 떠나지 않는 것이며, 그래서 신자가 할 의무는 오로지 그분을 의지하여서 자신의 일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선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동역자란 그분이 세상 역사를 반드시 신자를 통해서 이끌어 가신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구원 이후의, 즉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의 각 자의 역할과 신분을 너무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아예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작금의 교회들은 그런 부분을, 가장 중요한 성경의 메시지임에도, 거의 가르치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실정이다. 단순히 기도해서 자기 고통과 문제만 해결 받으려 하며 오직 그럴 목적으로 교회에 모여서 열심히 종교생활에 집중한다. 대부분의 성도가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목적이 앞에서 예를 든 정도의 수준 밖에 되지 못한 것도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성경은 인류의 기원에서 종말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 역사를 이뤘는지, 이루고 있는지,  이루실지에 관한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어 영원까지 이르도록 인간을 간섭하고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뜻과 계획을 드러낸 그분의 말씀이다. 그분에 의해 지음 받은 인간이 그분을 배반한 후에는 그분의 뜻과 계획을 알 길이 없어졌다. 아니 그분과 원수가 되어 죄악에 탐닉하고 있었다. 그러나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과 화목할 길을 여시고 당신의 십자가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는 자에게는 성령을 주셔서 모든 죄를 사해주신 후에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우셨다. 신자는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즉 개인적으로는 죽어 천국이 가는 날까지, 인류 전체로는 재림으로 최후의 심판이 이뤄지는 날까지,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이다.  

다른 말로 신자가 성경을 알지 못하고는 그 인생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름답고도 풍성하게 가꿔 나갈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를 향한 그분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단순히 예수를 믿어 천당행 티켓을 얻은 것 같은 믿음 외에는 불신자 시절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여전히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며 허공을 치는 듯한 삶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교회는 열심히 다녀도 삶이 메마르기는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뒤처지기에 어떤 면에선 불신자보다 더 못한 것 같다.

다시 강조하건대 신자는 반드시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을 하나님 뜻 안에서 거룩하고도 신령하게 가꿔 나가기 위해 성경을 배워야 한다. 자신을 향한 그분의 계획을 발견하는 것이 절대 우선이다. 또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그 계획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동기와 소원과 열정 없이 배우는 성경공부는 단순히 종교적 실력으로 자신을 치장하려는 악한 욕심 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기도나 전도나 성경 지식에 전문가가 되더라도 그렇다.

요컨대 하나님이 죽으면 기꺼이 죽으리라고 언제 어디서든 고백하고 헌신할 수 있기 위해 성경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성경이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나에게 절대적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절대적 확신이 선결 과제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배우고 깨달은 뜻은 마땅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의 은혜와 섭리와 정확하게 상통해야만 한다.

물론 기도, 전도, QT, 내적치유, 예배 등 어떤 특별 주제로 성경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주제의 성경공부가 되었든 궁극적인 목적은 동일하다. 주 예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부름 받은 신자로서 앞으로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배우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과정의 성경을 배우더라도 반드시 이사야가 겪었던 아래와 같은 영적 체험을 해야 하며 또 그가 했던 고백과 동일한 고백도 절로 따라 나와야 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火箸)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