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맥을 잡는 최선의 방안
성경 조감의 필요성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컨대 기도와 전도 같은 특정 주제별로, 성경 책 한권씩 순서대로 혹은 선택해서, 기독교 교리만 따로, 제자 훈련을 통해 관련 성경 구절을 공부하는 등 얼마든지 다양하다. 신자들이 동일한 말씀으로 개적으로 묵상한 내용을 나누면서 은혜 받을 수도 있다. 자신의 형편과 적성에 맞는 공부를 하면 된다.
그러나 반드시 성경 전체의 맥을 잡는 공부를 가장 먼저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무만 보면 숲을 보지 못하지 않겠는가? 작은 퍼즐을 맞추어 큰 그림을 완성하는 경우 조각 하나씩 따로 봐선 도대체 전체 그림이 어떻게 생겼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반면에 전체 그림을 보고나선 비교적 쉽게 조립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의 퍼즐 조각만 만지작거리지 정작 큰 그림은 구경도 못하고 있다.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익히 들어서 아는 개별적인 성경 스토리는 많아도 그 이야기들을 구슬을 꿰듯 서로 연결해 보배로 만들 줄은 모른다. 많은 교회가 아주 기본적인 기독교교리 공부를 조금 시킨 후에는 바로 제자 훈련 코스를 거치게 한다. 물론 둘 다 필수적인 공부이긴 하다. 그러나 전체 그림을 보여주지 않은 상태에선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지겨운 성경이라는 미로에 남겨 두는 셈이다.
공중 높은 곳에서 새가 내려다보듯이 성경 전체를 관통해서 배우지 않은 신자는 흔히 하는 말로 “내가 복음”을 만들기 십상이다. 귀만 만져본 장님으로선 코끼리를 큰 부채라고 밖에 이해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당연히 이단의 가르침에 무엇이 잘못인지 분별할 수가 없어 그 꾐에 쉽게 빠진다. 심지어 스스로 혼자만의 이단이 되기도 한다.
이단 교파가 발생하게 된 이유 또한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판단하거나 특정 구절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부분만 강조하면 아무래도 전체 문맥보다는 문자적 해석에 바탕을 둔 무리하고도 비합리적인 교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예를 두 개만 살펴보자.
- 세 종류의 차별적 천국?
몰몬교에선 교회가 정한 여러 규정을, 예컨대 십일조를 바치고 술 담배 커피 같은 것들을 하지 않은 일 등을 잘 지킨 신자는 해의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그 정도로 신실하지는 않지만 몰몬교를 믿는 신자는 전부 달의 천국에 가며, 몰몬교인이 아니더라도 선행을 많이 하고 의로운 자는 별의 천국에 간다고 한다. 물론 그런 교리의 근거 규정은 몰몬경이 아닌 성경이다. 이단일수록 오히려 성경 인용을 더 많이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15:41)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각기 다르다고 설명한 이 구절이 마침 부활을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 있기 때문에 천국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강변한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7,28) 성경은 누구라도 지은 죄와 상관없이 예수의 은혜를 간절히 소망한다면 죽은 후의 심판에서 제외되어 구원 받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임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7,18) 죽은 후 구원과 심판의 둘로 나뉘는 기준은 오직 독생자를 믿었느냐에 달렸다. 이는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구원의 진리다.
예수 믿은 신자는 죽은 후에 모두 한곳의 천국으로 가서 면류관을 얻되(딤후4:8), 이 땅에서 사역한 열매에 따라 주님의 칭찬을 더 받느냐 못 받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4,15)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의 원리를 설명한 장이다. 특별히 35-58절 까지는 당시 사람들이 부활한 모습, 특별히 그 육체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 한 것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된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씨의 형체와 씨가 죽어서 열매 맺는 형체가 서로 다르고, 땅에 있는 육체가 다 다르며, 하늘에 속한 것들도 영광이 다 다른데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했다. 부활 형체를 설명하기 전에 이해에 도움이 되는 사전 지식을 말해 준 것이다.
해, 달,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 한 말씀에 바로 이어서 어떤 말이 나오는가?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인간이 부활한 육체의 모습도 앞에서 말한 원리와 같다는 뜻이다. 즉 씨와 열매가 다르듯이, 땅과 하늘의 형체와 영광이 다 다르듯이, 이 땅에서의 육체와 하늘에서 부활한 육체는 그 형체가 분명 달라질 것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입은 육체가 될 것은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부활한 육체의 모습을 이 땅의 것과 비교해서 설명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42-44절)
고린도 전후서 같은 신약의 교리서신의 경우는 진리를 선언하는 말씀과, 풀어서 설명하는 부분과, 또 비유나 예증으로 드는 구절들을 반드시 분별하여 그에 맞는 적절한 해석을 해야 한다. 몰몬교가 자기들 주장의 근거로 든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는 구절은 단순히 부활의 성격을 보충해서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말한 것일 뿐인데도 마치 진리 그 자체인 양 호도하고 있고 성경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 예수님께 전권을 받은 로마 교황?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6-18)
천주교에선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이 베드로라는 한 개인에게 교회를 세울 전권을 주셨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세웠기에 로마의 감독이, 나중에는 교황이 됨,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의 권위를 이어받은 교황 없이는 교회가 없고 오직 교황이 다스리는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예수님이 이어서 하신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9절)는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가 구원과 심판의 독점적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까지 강변한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천주교와 교황제도를 지목해서 세웠다는 것이다.
그들 변증의 핵심 근거는 그 중에서도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부분이다. 즉 ‘반석’이라는 헬라어가 베드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따져보면 사실은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그 믿음을 의미한다. 참 교회도 그런 믿음을 가진 자의 모임이다. 또 그런 믿음을 가진 자가 기도하면 하늘에서 들어주시고, 하늘에서 계획한 일들이 그들을 통해 땅에서도 이뤄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죄의 본성이 살아 있고 연약하며 불완전한 한 인간에게 교회를 세울 전권을 주실 리는 없다. 교회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 당신께서 직접 세우시고 또 그 머리가 되셨다. 물론 인간이 교회의 주역이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당연히 그 주역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스로 겸비하여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며 오직 주님의 은총과 권능에만 의지하는 자들을 들어서 예수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고 교회도 치리하신다. 신자는 그분의 일에 쓰임 받는 도구일 뿐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접하자 예수님은 비로소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깊은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 베드로는 인간적 생각으로만 그럴 수 없다고 성급하게 적극 만류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야단치셨지 않는가?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단이 심어준 생각과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수시로 사단에게 넘어갈 수 있는 인간이 교회의 전권을 가질 수는 없지 않는가?
그리고 베드로라는 한 인물을 지칭할 때는 남성명사로, 당연히 그는 남자였으므로, 표기하지만 본문의 페트라는 여성 명사다. 셈어족 계통의 언어에선 고백 같은 추상적 개념은 주로 여성명사로 표현하고 또 여성 대명사로 받는다. 천주교의 주장은 당장에 앞뒤 문맥 뿐 아니라 그 문장 안에서조차 전혀 지지 받지 못한다.
역사적 객관적 증거로 따지면 더더욱 그렇다. 우선 잘 알다시피 베드로는 주로 유대인들을 전도하는 사도였지 않는가? 로마인 같은 이방인의 선교는 주로 바울 사도가 도맡았다. 또 베드로가 한창 사역할 당시는 각 지역의 교회가 조직적 체계를 갖추기 전이었고 또 설령 그런 교회가 이미 생겼어도 아직은 집단 지도체제를 유지했었다. 그가 로마 교회를 세우고 초대 감독이었다는 주장은 이런 간단한 성경 상식만으로도 부인될 수밖에 없는 억지다.
또 로마서는 바울이 제 3차 전도여행이 거의 끝날 무렵인 주후 57년 경 고린도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 이미 그 때에 로마에는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조차 아직 방문하지 못했던 곳을 베드로가 먼저 가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억측이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2:8-11)
오순절을 지키려 천하각국에서 예루살렘 성전 앞으로 모인 사람 중에는 로마에서 온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도 있었다. 당연히 사도들이 라틴어로 복음의 비밀을 전파하는 것을 들었고 또 그날 회개하고 세례 받은 삼천 명 중에는 그들도 틀림없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도들이 방문하기 전에 이미 교회가 형성되어져 있었다면 바로 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가 세웠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바울이 특별히 로마서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장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소아시아의 다른 모든 교회들은 본인 혹은 사도들이 직접 가서 전도하고 가르쳤던 터라 구태여 다시 편지로 쓰서 복음을 가르칠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로마는 달랐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이미 교회를 세웠다면 로마서의 내용이 달라지거나 그에 대한 언급을 비췄을 것이며, 어쩌면 아예 기록할 필요나 그가 방문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님이 승천한 해 즉, AD 30-33 년경에 일어났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이미 그 해에 세워졌을 수 있고 최대한으로 잡아도 로마서가 기록된 57년까지는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사도 중에 가장 로마를 가장 먼저 방문한 자는 아무래도 바울일 것이다. 그것도 자유로운 선교사가 아니라 시저에게 항소하는 죄수라는 입장에서 말이다.
베드로는 감옥이나 자택에 구금되어 있는 바울을 방문하러 로마에 갔을 확률이 가장 높다. 반면에 바울은 그런 상태에서 오히려 더 로마의 왕족, 귀족, 관리들을 접촉하는데 아무 장애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예수님이 처음에 그를 부를 때에 주신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소명을 당신께서 실현시킨 놀랍고도 신비한 섭리였다.
결국 베드로와 바울은 둘 다 AD 67년경에 일어난 네로의 일차 박해 때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이전에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세웠고 감독이 되어 있었다는 기록은 성경이나 세속의 역사 어디에도 없다.
위에 든 두 가지 예는 사실은 성경을 잘못해석 했기에 나온 오류가 아니다. 자기들 종교의 교리를 먼저 세워놓고 그에 맞는 성경 구절을 찾아서 억지로 갖다 부친 것이다. 미처 잘 몰라서 범하는 잘못은 무지나 실수이지 죄는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단은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면서까지 자기들 주장을 변호해주는 방패막이로 삼는다. 그야말로 여호와를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한 것이다.
지금 특정 종파의 잘못을 꾸짖으려 뜻이 아니다. 신자가 범하는 잘못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다는 것이다. 교리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이 심지어 아주 간단한 성경공부에 참석해 본 적도 없이 성경을 읽을 수는 있다. 또 나름대로 열심히 묵상하여 특별한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나아가 그 깨우침이 때로는 불완전하거나 틀릴 수 있지만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역사할 수 있다. 진정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사모했다면 성령이 모든 과정에 내주 교통 간섭하는 데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정해놓은 계획의 정당성을 입증하거나 자신만의 독선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을 부분적 문자적으로 채택해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동일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이단으로 떨어지고 또 그 이단이 옳다고 주위에 선전하는 셈이 된다. 이런 잘못을 방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성경을 관통하는 맥을 잡아야 한다.
성경 조감의 두 종류
성경을 조감하는 데는 크게 봐서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주로 성경의 구조를 알아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내용을 탐구하는 것이다. 전자는 우선 신구약 성경의 구성을 살핀 후에 각 책별로 저자,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 저작 목적, 중요 내용, 신학적 메시지 등을 공부하는 것이다. 후자는 외형적 구조나 개별 책별로 신경 쓰기보다는 신구약 전체에 나타나는 주제 혹은 교리를 중심으로 배워나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는 전자에 주력해 왔다. 물론 두 가지 방식이 다 장단점은 있다. 그러나 전자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구약 개론을 축소해서 배우는 셈인데 필연적으로 지식적 공부로 흐르기 쉽다. 또 각 권별로 배우기에 비록 단어, 문장, 문단, 문맥을 뛰어넘는 이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체도 하나의 작은 숲일 뿐이다. 비유컨대 한국 전체의 지도는 제쳐두고 경상도, 전라도 같은 지역별 지도만 여러 장 보고 그치는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배운 내용들이 신앙생활에 실제적 은혜나 능력으로 승화되기는 상당히 힘들다. 종교적 실력이 높다고 하나님이 은혜를 더 베푸시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신학자가 목회한다고 부흥한다는 법이 없다. 또 신학자의 설교나 책보다는 목회 현장에서 체험으로 겪은 목사의 것이 훨씬 은혜가 된다. 한 마디로 공부 잘한다고 사업까지 잘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솔직히 말하면 목회자들도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운 내용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한다. 목회자가 그런데 일반 신자를 대상으로 꼭 그렇게 가르칠 이유는 크지 않다. 그런 공부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또 반드시 그런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껏 그런 공부에만 너무 치중해온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성경의 전체 구조와 각 권별로 공부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게 다루어도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오바댜서가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은 에돔의 멸망을 예언한 책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과연 신앙 성숙의 측면에 어떤 힘을 발휘할지는 의문이라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성경적 상식을 많이 알게 된 것이지 하나님 말씀 자체를 더 깊이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제는 성경의 맥을 잡는 공부도 성경 전체에 일관된 주제나 교리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공부하는 것도 단점은 분명히 있다. 진짜 머리만 커져서 교만에 빠질 수 있다. 심지어 목사의 설교를 비평 분석하고 작은 실수까지 꼬집어 내기에 은혜를 도리어 못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 크진 신앙 머리만으로는 현실에서 날마다 직면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벅차다. 천국 가는 확신은 잘 붙들었는데 삶에선 힘이 빠지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숲만 보았지 나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 결과다.
그럼에도 전체 주제를 공부해야만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스라엘에 한정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삶과 역사를 통치 주관하는 그분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사실은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근본 원리를 알면 현실의 어떤 문제라도 신앙적으로 접근하여 해결책마저 더 잘 구할 수 있다.
나아가 성경 각권 별로 의미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단순히 각 책의 내용을 아는 것을 넘어서 그 책이 성경의 그 자리에 꼭 그런 내용으로 기록되어 포함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성경의 통일된 주제에 입각하여 개별 책들을 상호 비교 연결할 수 있다. 그야말로 여러 색깔과 모양의 구슬들을 하나씩 보는 것도 좋지만 꿰어서 하나의 큰 보배로 만들면 더 진가가 드러나는 것과 같다.
성경의 맥을 잡는 두 가지 공부 방식을 건물에 비유해 보자. 성경의 구조만 보는 공부는 건물의 외관만 살피는 것과 같다. 실내를 보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실내든 외부벽면이든 간에 눈에 보이는 부분을 대충 훑어보아서 건물의 전체적 특성을 아는 것이다. 반면에 전체적 교리를 배우는 것은 건물의 눈에 안 보이는 내부 구조를 설계도에서부터 시작해 조사하는 것이다. 오히려 건물의 실질 구조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반면에 주일 설교나 큐티는 서두에서 퍼즐 조각 하나씩 만지작거리는 셈이라고 말한 대로 문짝 하나씩, 바닥자재 하나씩만 살펴보는 것에 불과하다. 신자가 주일 설교만 들으면, 아무리 큐티를 열심히 해도 평생을 두고 건물 전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수 있다. 한 건물의 특성을 정확하게 다 규명하려면 이 세 가지 접근법을 다 병행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설계도에서 시작해 내부 구조부터 살피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는가?
성경을 배우기 전에 통독부터 하라.
그런데 성경의 맥을 잡는 공부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는 기실 따로 있다. 성경의 구조와 내용 중에 하나만 살피든 둘 다 알아보든 간에 실제로 성경 전부를 읽어보지 않은 신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무엇보다 공부의 효력이 오르지 않는다. 오바댜가 성경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 대충 무슨 내용인지도 전혀 모르는데 그 책의 저자, 저작 목적, 신학적 메시지 등을 배워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그 책이 성경 전체의 주제 및 교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 또한 별무 소용이다.
어떤 공부라도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해야 하지 않는가? 최소한 배워야 할 부분을 미리 읽어 보기라도 해야 한다. 그럼 성경을 관통하는 공부를 하려면 당연히 성경 전부를 읽어 봐야 할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면서 최소한의 요구다. 성경 통독을 한 번이라도 하지 않은 채 성경의 맥을 잡는 공부를 한 자는 실제로 골프 스윙은 한 번도 해보지 않고 이론만 배우는 꼴이다.
그런데도 솔직히 성경 통독을 평생에 한 번이라도 해본 신자가 의외로 드물다. 성경은 역사적으로 항상 베스트셀러이지만 가장 안 읽히는 베스트셀러다. 책장에 고이 모셔 놓는 장식용이나 수면제로 사용하다가 주일 날 어쩔 수 없이 들고 나온다. 요즘은 교회마다 비디오 영상으로 말씀을 띄어주니까 주일날 한 번 주인의 손을 타는 일마저 아예 없어졌다. 요컨대 성경의 맥을 잡으려면 그런 공부를 하기 이전에 본인이 성경을 천천히 통독하며 묵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뜻이다.
물론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통독해보려 시도는 한다. 특별히 정초 결심에 들어가는 단골 메뉴다. 그러나 얼마 못가 금방 실패한다.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 때문이 아니다. 성경을 통독하는 요령을 모르기 때문이다. 통독은 정독과 다르다. 신구약 전체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보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성경을 정말 통달하려는 결심은 당장 버려야 한다.
다른 말로 첫 통독에는 그냥 설렁설렁 스토리만 아는 정도로 읽어도 된다. 대부분의 신자가 걸려 넘어지는 창세기의 족보나, 레위기의 복잡한 제사법이나, 민수기의 지파별 계수 같은 내용들은 꼭 다 안 읽어도 된다. 대충 그런 내용인가 보다 눈으로 훑고 지나가도 된다. 성경을 읽는 재미를 진짜 알고 난 뒤에 다시 천천히 읽으면 된다. 또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부분도 나름대로 적당히 줄거리만 알고 넘어가면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항은 하루나 이틀을 빠트리면 그 부분을 보충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못 읽은 부분은 건너뛰고 그날에 할당된 부분만이라도 읽어야 한다. 읽지 못한 부분이 누적되고 또 그것이 부담이 되기 시작하면 당장에 지쳐 버린다. 첫 번 성경 통독에서만은 한 번이라도 끝까지 읽었다는 실적이 제일 중요하다. 인간은 보상이 있어야 무슨 일이든 잘 하는 법이다. 중간에 며칠 빠진 부분이 있더라도 독서의 진도가 이미 상당히 나간 것을 알면 신이 나게 마련이다. 첫 통독에는 반드시 읽고 치운다는 목표만 세우고 달성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가능한 쉬운 번역본을 택하는 것이 낫다. 한국 교회가 대다수가 사용하는 한글개역본은 한자와 고어식 표현이 많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상당히 많다. 비록 가장 은혜가 되는 번역본이긴 하지만 뜻을 몰라 읽기 어렵다면 현대식 표현에 맞는 쉬운 번역을 읽으면 된다. 재자 강조하지만 한 번이라도 통독하여 성경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고 또 성경 읽는 습관과 재미를 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간혹 성경이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 같아 읽기에 싫증 내지 짜증내는 사람도 있다. 구약성경의 역사서나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대표적 예다. 또 구약의 경우 시대적 순서에 따라 편집이 되어 있지 않기에 성경 전체의 맥을 잡으려 한 것이 오히려 혼란이 가중된다는 불평도 나온다.
이런 두 가지 불만을 동시에 잠재울 수 있는 성경이 따로 있다 모든 성경의 기사를 동일한 내용들을 하나로 묶어서 시대적 순서에 따라 배열해 놓은 것이다.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읽기에 딱 좋게 365 등분해 놓았다. 말하자면 일반 성경처럼 66권 책별 편집이 되어 있지 않고 사건별로 시간적 순서에 따라 모든 성경 기사를 재배열한 것이다. 영어로 책을 읽을 줄 안다면 "the Daily Bible in Chronological Order 365 Daily Readings"를, 그렇지 않다면 한국어판 “연대기성경”(두란노 출판사간)을 구해서 읽으면 된다.
당연히 이런 연대기 성경을 읽으면 성경 전체가 말하는 내용과 시대적 순서는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내용이 어느 책에 있다는 것은, 기사마다 기록은 되어 있지만 일일이 외울 수 없으니까, 잘 기억하지 못하는 단점도 있다. 어쨌든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용이하게 읽기에는 가장 좋은 역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 통독의 문제는 결국 본인의 결심 여부에 달렸다. 아니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소망과 열심의 세기다. 무엇보다 진지하고도 순수하게 열린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심지어 ‘벤허’와 ‘누가 돌을 옮겼는가?’를 지은 작가들은 기독교에 대해 닫힌 마음을 갖고 단순히 진위여부를 가리고자 읽었어도 은혜를 받아 신실한 신자로 바뀌었지 않는가? 그럼 이미 신실하게 믿고 있는 자가 성경을 통독하고자 하는데, 그래서 성경의 맥을 잡아 보고자 하는데 성령의 놀라운 인도와 간섭이 일어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성경을 스스로 통독만 잘해도 얼마든지 성경의 전체 맥을 잡을 수 있다. 교회 다닌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그러지 못하는 원인은 그럴 마음이 아예 없거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실감하지 못하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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