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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세유럽의 무법시대...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3. 09:34

카롤링 르네상스 이후 특히 중세 프랑스에서 12세기까지 남아 있는 사료의 양이란 극히 적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부르고뉴 등의 몇몇 지방에 남아있는 사료들조차 다른 시대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고, 아예 남서부 등의 낙후된 지역에서는 남아 있는 사료가 거의 없다 할 정도다. 필리프 근엄왕 이후 12세기 후반부터 폭발하듯 늘어나는 각종 연대기며 특허장 등과 비교해서도 너무 빈약해서 당시의 시대상은 지금에 있어 거의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럼 과연 원래 사료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여러 이유들로 인해 망실된 것일까? 물론 그런 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좀이 슬었을 수도 있고, 습기로 인해 양피지 등의 사료 자체가 썩거나 곰팡이가 피어 파괴되었을 수도 있다. 바이킹이며 마자르의 침입도 있었고, 또 각 제후간의 전쟁도 잦았으니 그 사이 어떤 자료들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 파괴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말했듯 다른 시대에 비교해서도 이 시기의 사료만이 유별나게 적다. 왜일까?

사실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이전 시대와는 달리 유독 그 시대에만 사료가 적다. 그렇다면 답은 멀리 갈 것 없이 하나다. 원래부터 그 시대에 사료가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 시대에 사료라는 자체가 아주 적은 수만이 만들어졌다는 것.

실제 당시 중세 유럽의 사회에서는 문맹율이 경악스러울 정도로 높았다. 그나마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었던 성직자들이나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을까, 심지어 귀족들 가운데서도 - 아니 왕이며 황제 가운데서도 글을 전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라 무식을 자랑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말 그대로였다. 당시는 문맹이 결코 수치가 아니었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것은 오히려 기사에게 있어 용맹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었고, 그래서 당시의 귀족 가운데는 일부러 글을 배우지 않고 그것을 과시하는 경우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왕들이 흔히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바람에 루이 1세니 2세니 뒤에 숫자가 늘어지도록 붙게 되는 이유가 워낙 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이름을 지을 때조차 기존의 다른 가족이 쓰는 이름을 다시 돌려쓴 때문이었다던가?

더구나 이 시기는 법률이 아닌 관습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원래 성문법이 제 역할을 하자면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다. 당연한 것이 중앙정부차원에서 법을 정했는데 지방정부가 그것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중앙정부는 이렇게 하라고 하고, 지방의 영주들은 저렇게 하겠다고 하고, 거기다 영주 자신이 문맹자이기까지 하니 법이 있어도 그것을 읽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읽지도 못하는 법률이 실제 재판에 활용될 리도 없고. 아니 무엇보다 영주 자신도 문맹이지만 대부분의 영민 역시 문맹이었기에 영주가 문서로 뭔가 작성한다고 그것을 무지랭이 영민들이 읽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래저래 문자로 기록된 성문법이란 영주들에게 있어 별 쓰잘데기 없는 것에 불과했는데...

그래서 이 시기 법률관계에 대해서도 주로 문서와 같은 기록물에 의지하기보다는 관습이 정한 의례적인 행위와 의례적인 말로써 대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노예가 해방되는 데에는 왕의 앞에서 동전을 던져 자유인임을 선언하면 되었고, 어떠한 거래를 할 경우 그를 증언할 목격자를 사이에 세우고 그로 하여금 증인으로 삼았다. 이때 증인으로 선택된 사람은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어린아이들인 경우가 많았는데, 본 것을 잊지 말라고 선물을 주거나 뺨을 때려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했었다. 즉 서로간에 어떠한 법률적인 행위가 있어도 그것을 기록으로 남길 이유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 누구도 법을 읽지 않았고, 누구도 법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배우려는 사람도 없었다.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어져 온 법률가의 전통은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고, 세속의 재판관들 가운데서조차 로마법이나 게르만법과 같은 옛법들은 그 권위를 잃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심지어 당시 프랑스의 국왕들은 아예 법 자체를 더 이상 새로이 정하지 않고 있었다. 말했듯 법을 만들면 뭐하는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고, 누구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왕이 법을 만들었다고 봉건영주들이 그것을 따를 것도 아니고.

그런데 관습법이라는 것이 인간의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다 보니 프랑스 안에서도 각 지역마다 적용되는 규칙이 달랐고, 또 같은 영지 안에서도 영주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혀 다르게 적용되곤 했었다. 더구나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인 영주 개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오용되는 경우마저 있었으니, 사실상 법이라기보다는 영주 자신의 폭력과 권위에 의한 강제였고,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당시 중세의 프랑스사회가 적잖은 변화를 겪게 되니, 아무래도 성문법에 비해 시대의 변화를 바로바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가운데서 반영할 수 있는 관습법의 장점이라 할 것이다. 덕분에 당시 프랑스의 관습법은 지역마다, 시간마다, 영주 개인의 취향과 개성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고, 그래서 관습법이라 해도 어느 한 순간에 고정되는 사회적 변화를 흡수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문맹이던 영주들의 귀차니즘에 의해 법이나 제도, 관습 등이 최소화되어 간략해지면서 혼란스런 가운데 어떠한 최소한의 공통된 부분을 갖게 되었고.

즉 관습에 의한 지배는 보수적인 주재자에 의해 사회를 경직시키고 정체시킬수도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변화를 그때그때 실시간으로 적용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고정된 성문법보다 유연할 수 있었던 것이 당시의 사회를 정의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얼핏 정체된 듯 보이면서도 마침내 긴 암흑기를 끝내고 르네상스의 문예부흥을 일구어냈던 데에는 그러한 내적인 변화가 큰 역할을 했었던 것이었고.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암흑기라고 해서 중세가 아무것도 없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던 그런 시대였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이전의 로마시대와 이후의 르네상스와 비교했을 때 정체된 듯, 아니 오히려 퇴보한 듯 보이더라는 것 뿐이다. 그러나 중세가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다. 아마 로마와 같은 성문법의 시대였다면 유럽세계는 그뒤로도 상당히 오랜 시간을 성문화된 법을 지키려 들었을지도 모르니.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라. 단점이 때로 장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번 경우처럼.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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