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공불락의 오사카성을 공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군의 대포
조·일전쟁이 낳은 전훈을 반영한 도쿠가와군의 일격
불타오르는 오사카성, 도요토미 가문의 몰락!
![아즈치성 덴슈카쿠](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2?1259487483.jpg)
센고쿠지다이 시절 축성술의 극치를 보여준 오다 노부나가의 거성 "아즈치성"의 덴슈카쿠 추정 복원도
단순한 망루와 장대의 임무를 수행하던 덴슈카쿠를 단숨에 성의 상징으로 급부상시켜 이른바 일본 성곽의 태평성대인 "아즈치-모모야마" 양식의 시조가 되었다.
당연히 성곽은 더욱 견고해졌고 적들은 이 견고한 성을 효과적으로 함락시킬 수 있는 무기의 개발에 착수했다.
![大阪城](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0?1259487483.jpg)
혼노지의 변 이후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군을 대파하고 부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성( 大阪城 )
오랜 실전경험을 통해 건축/토목/야전축성의 달인이 된 히데요시의 노하우가 십분발휘된 거대한 성곽으로 덴슈카쿠의 외관은 주군이었던 노부나가를 고려해 아즈치성보다 낮았다.
그러나 내부 층까지 합치면 오히려 아즈치성보다 높아 더욱 화려하고 웅장했으며 특히 어떠한 적이 공격하더라도 쉽게 함락이 되지 않도록 구획을 세분화하고 바위들을 대량으로 동원했기 때문에 공성이 더욱 어려웠다.
![오사카성](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17?1259487483.jpg)
덴슈카쿠까지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미로와 같은 통로를 화살과 뎃포 세례를 극복해가며 통과해야 한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4?1259487483.jpg)
일본 역사에 있어 지금도 추앙을 받고 있는 불세출의 전쟁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
오다 노부나가의 당번병으로 시작해 아사이 나가마사의 거성, 오다니성을 함락시키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주군이 자결하자 전광석화와 같은 대 퇴각전을 감행해 야마자키 전투에서 반역자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하고 실권을 장악해 8년 후에는 호조 가문까지 멸망시키며 일본 전역을 통일한 그야말로 불세출의 전쟁영웅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가히 가증스런 침략자에 불과하지만 지금도 일본에서는 경제가 불황에 처하면 그의 성공을 다룬 책들이 날개를 달고 있고 센고쿠,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의 만화는 물론 NHK 대하드라마 '무인 도시이에', '천지인' 등의 작품에서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히데요시가 끝내 꺾지못한 인물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미
카와, 도토우미, 스루가의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하루노부 신겐에게 대패한 이후 절치부심하며 전략과 전술을 확립하는 한편 맹호와 같은 직속부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인 결과 승승장구하던 히데요시군을 고마키-나카쿠테 전투에서 궤멸시켜버리는 대 전과를 거두는 통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게된 것.
결국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자신의 가신으로 만드는데 실패했고 두 사람은 사실상 대등한 동반자로서 일본 통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후 사무라이 집단이 너무나도 비대해져버려 이들에게 하사할 영지가 모자라게 되었고 때마침 일본을 통일한 김에 명까지 정복해보자는 히데요시의 정복욕으로 감행한 조선침공, 이른바 "조·일전쟁"이 발발했다.
120년에 걸친 센고쿠지다이를 통해 전투의 달인이 되어버린 일본군 앞에 조선군은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전투는 사실상 부산진성과 동래성에서의 저항을 제외하자면 거의 패퇴수준이나 다를 바가 없었고 일본군 1명이 전사할 때 조선군은 5~10여명 이상이 전사하는 비율이 발생하고 있었다.
결국 조·일전쟁을 통해 일본군은 7년 동안 13만명 가량의 전사자를 낸 반면 조선군은 30만명 이상의 전사자를 포함 200만명이 넘는 인명피해를 냈다.
그러나 조·일전쟁 기간 동안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을 비롯한 조선 함대가 동원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으로 대표되는 대포로 인해 도도 다카토라,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지마 미치후사 등의 수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음은 물론 제1, 2차 진주성 전투를 통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뎃포보다도 더 많은 병력을 살상할 수 있는 중화기( 重火機 )는 분명 만만치 않은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 일본의 대포 》
그렇다면 일본은 태초부터 대포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것은 아니다.
◀ 센고쿠지다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급된 뎃포
1543년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이래 19세기 중반까지 300년 이상 생산되었다.
구경은 평균 11~13mm 정도이며 길이는 130~135cm였다.
이미 일본은 무로마치 바쿠후 말기에 서양에서 청동제 대포인 불랑기를 들여온 바 있었다.
이 포의 특징은 모포와 자포가 분리된 점으로 오늘날의 후장식 포만큼은 안되더라도 포구 장전식 대포에 비해 연사력이 우수한 포였다.
![천지인](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20?1259487483.jpg)
![천지인](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18?1259487483.jpg)
조·일전쟁 직전까지 일본식 공성전에서는 대포가 아닌 단병접전과 집단전이 일반이었다.
![불멸의 이순신 옥포해전](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8?1259487483.jpg)
![불멸의 이순신 옥포해전](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7?1259487483.jpg)
![불멸의 이순신 옥포해전](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6?1259487483.jpg)
![불멸의 이순신 옥포해전](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9?1259487483.jpg)
![오사카성의 대포](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10?1259487483.jpg) 오늘날 오사카성에 전시되어 있는 대포 이 대포는 당시의 것은 아니지만 도쿠가와군이 동원한 대포와 거의 유사한 크기와 제원을 갖추고 있다. |
조·일전쟁을 통해 일본군은 대포의 위력에 경악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부터 대포를 우선적으로 생산해 배치하게 만들었다.
다만 이 포가 들어올 당시 일본의 전투 방식은 전형적인 기동전과 야전이었고 말은 기마대에게 할당되었기 때문에 운반이 대단히 불편했다.
또한 사용하는 포탄이 단순한 납덩어리에 불과해 성벽을 파괴하는 것을 기대하기가 어려웠고 특히 석성이 아닌 토성일 경우 성벽에 박혀버리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다이묘들에게 외면받기 일쑤였다.
결국 이 불랑기는 일본에 대포라는 중화기의 존재를 알리는 역할만 했을뿐 실제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반면 다네가시마로 전래된 뎃포는 급속하게 전국으로 보급되었고 조·일전쟁을 통해 그 위력을 확인한 수뇌부는 정유년 재침 때 더욱 많은 뎃포를 지급함은 물론 구경을 확장해 관통력과 살상력을 극대화시켰다.
이 때문에 육상전에서 우세한 전과를 거두었음에도 피해는 결코 만만치 않았고 특히 제2차 진주성 전투와 남원성 전투에서 대포를 동원한 조선군과 명군에 의해 상당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이를 보고받은 히데요시는 경악해 즉각 뎃포 생산지인 구니토모 지방의 기술자들에게 명해 대포를 생산하게 하여 이를 오사카성에 거치했다.
오늘날 오사카성에 남아있는 대포는 당시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형태나 크기는 히데요시가 제조할 당시와 유사한 형상이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 본국으로 귀국한 다이묘들은 워낙 전쟁 기
간 중 적자본 것이 컸기 때문에 대포에 큰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고 자연히 이 대포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녹슬어갔다.
《 이에야스군의 대포 동원 》
하지만 전쟁에 직접적으로 병력을 투입하지 않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대포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언젠가 도요토미 가문을 제치고 일본을 지배할 야심을 품고 있던 이에야스에게 있어 이 경이로운 중화기는 분명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히데요시 사후 그의 휘하로 돌아선 도도 다카토라,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호소카와 다다오키 등은 대포의 위력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었고 이들의 증언을 통
해 이에야스는 비록 뎃포에 비해 화약을 많이 먹고 비싸며 무겁고 운반하기가 어렵더라도 대포를 보유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주축으로한 서군이 동원한 조선과 명나라 노획 대포들로 인해 적잖은 사상자를 낸 동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측 )은 싫든 좋든 이 무기를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1614년 오사카성 공격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이제 대포라는 중화기가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와 같이 견고하고 웅장한 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할 무렵( 서양이나 조선, 명은 이미 200년도 더 전부터 시작된 기류지만 일본은 이제서야 흐름을 탄 셈이다 )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센고쿠지다이 방식에 익숙한 다이묘들은 오사카성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지만 축성의 달인 히데요시의 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 그 자체였고 특히 외곽의 사나다 마루와 같은 성채들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사상자를 내면서 도쿠가와군은 과연 천하인의 성이라는 이름이 결코 허
명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이에야스는 지금과 같이 정면 공성을 감행했다가는 사상자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혼마루( 본성 )에 은거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요도기미가 스스로 항복할 수밖에 없게할 묘안을 떠올렸다.
◀ 오사카성에 전시된 대포는 전장 348cm의 괴물이다.
바로 대포를 동원하는 것!
전투가 야전이 아닌 공성전으로 바뀐 이상 무겁고 운반하기 어렵다는 단점보다는 한방에 성벽을 파괴할 수 있는 화력이 강점으로 부각된 것이다.
무엇보다 성을 빈틈없이 포위한데다 수적으로도 압도적인 도쿠가와군의 입장에서는 대포를 설치하는 동안 오사카성내의 히데요리군으로부터 이렇다할 방해공작을 받을 일도 없었다.
이에 따라 이에야스는 구니토모와 사카이의 기술자들에게 대포를 생산할 것을 지시했다.
![오사카성](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14?1259487483.jpg)
오늘날 오사카성의 육중한 성벽
히데요시의 거성답게 정면 공격으로 함락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무모하게 정면 공성을 감행했던 도쿠가와군은 도리어 막대한 사상자를 내 결국 대포 공격으로 전환하고 말았다.
![오사카성](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15?1259487483.jpg)
오사카성의 성벽이 얼마나 공략이 힘든지 보여주는 사진
성벽을 기어오르기 어렵도록 아예 바위를 운반해 성을 쌓을 정도다.
![오사카성의 대포](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16?1259487483.jpg)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소장된 대포를 예로 당시 도쿠가와군의 대포 제원을 뽑아보면 전장 313cm, 구경 90mm 정도로 추정된다.
최대 사거리는 약 1km 이상, 유효 사거리는 500m 이상으로 뎃포의 사정거리를 훌쩍 뛰어넘어 성으로부터 이렇다할 반격을 얻어맞지도 않은 상태로 성벽을 공격하기에 적합했다.
또한 이에야스는 기존의 납탄으로는 성벽에 노크하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여 외국의 상인들로부터 서양제 대포와 탄약까지 구입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군은 성의 주요 방위시설 및 덴슈카쿠를 겨냥해 대포를 거치, 마침내 포격을 감행했고 오사카성은 졸지에 날벼락을 얻어맞게 되었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발사된 포탄들이 일제히 오사카성의 주요 성벽과 덴슈카쿠에 명중하자 성은 크게 흔들렸고 마치 지진이 난 것과 같은 진동에 시달렸다.
히데요시의 축성술도 새로운 신무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 셈이 되었으니 크게 겁을 먹게된 히데요리는 도쿠가와군과 화친을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산노마루( 셋째성 )와 니노마루( 둘째성 )의 성벽이 철거됨은 물론 성의 외부와 내부 해자가 모두 복개됨으로써 오사카성은 성으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상실해 1615년, 도쿠가와군의 총공세를 받아 함락되고 마니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는 자는 결국 망하게 된다는 진리를 보여준 셈이 되었다.
![오사카성 함락](http://img.blog.yahoo.co.kr/ybi/1/0b/0e/pershing11111/folder/1203275/img_1203275_1383432_19?1259487483.jpg)
오사카성의 함락 장면을 그린 기록화. 모든 것은 한순간에 결정되었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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