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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의 내습이후 가마쿠라 막부의 쇠락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3. 10:18

원의 내습이후 가마쿠라 막부의 쇠락

 가마쿠라 막부는 고시라카와 상황을 지지하던 미나모토노가문의 요리토모가, 안토쿠 천황을 지지하던 다이라씨정권을 타도하고 가마쿠라지역을 기반으로 삼아1185년부터 세운 일종의 무인정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문내의 죽고죽이는 복수전의 전개된 결과 3대로 미나모토씨의 정통은 끊어지고, 요리토모의 외가였던 호조씨[北條氏]가 1221년부터 실권을 장악하여, 그 밑에서 싯겐[집권執權;쇼군을 보좌하고 정무를 총할하던 최고직]정치가 시작되었다.

 특히 호조씨의 집권체제는 1274년과 1281년 원제국의 내습을 막아냄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호조씨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었다. 막부체제의 기본구조는 쇼군과 고케닌(어가인御家人, gokenin-일종의 지역 무장세력)간의 쌍무관계(雙務關係)로부터 출발하는데, 쌍무관계란 고케닌이 막부에게 충성과 각종역을 받치는 대가로 여러가지 은상을 받은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원제국의 내습은 일본이 국가가 탄생한 이래 최초로겪은 대규모 국가간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비록 승리를 거두었지만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막부정권은 이런형태의 국가적 총력동원체제를 경험한 일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재정운영능력도 다소 미숙하였을 것이고, 아무런 대가없이 충성해야되는 상황이 고케닌에게는 매우 낯설었을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막부와 고케닌간의 쌍무관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구나 원의 내습이후에도 재침에 대비하여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야 했으므로, 호조씨는 점점더 궁핍해졌고 1294년에는 원제국 내습에 대한 은상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이며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문제는, 바로 일본이 섬나라였다는 것이었다. 호조씨에 대한 은상이 중단되자 각지역의 고케닌은 더욱 궁핍해 질 수 밖에 없었다.더구나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마쿠라 분할상속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고케닌의 영지는 차츰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가난에 시달린 고케닌들은 영지를 고금리로 저당잡히거나 헐값으로 매각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은 부익부 빈익빈현상을 부채질하였다.  힘을 가진자가 더 큰 힘과 더 많은 부를 갖게 된다면, 그만큼 호조씨정권을 휘협할 세력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호조씨정권은 이러한 현상을 막기위해 1297년 덕정령을 발표, 영지를 저당잡히거나 매매하는 일을 금지하고, 20년 내에 저당 혹은 매각된 토지에 대해 무상으로 환원하는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지까지 저당잡힌 고케닌들이, 원금을 상환할 여력이 있을리 없었다. 영지를 파는 방법외엔 달리 생활방도가 없었던 영세한 고케닌은 물론, 정당한 돈을 주고 땅을 사들인 부유한 고케닌까지 모두에게 불만을 사게되자 이 제도는 흐지부지 되었다.

 결국 이 제도는 얼마가지 못하여 흐지부지 되었으며, 지방행정 책임자였던 슈고중에는 대거 몰락한 고케닌을 편입시켜 새로운 세력가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호조씨는 이런 총체적인 막부체제의 쇠퇴와 몰락을 막기위해 전제정치를 더욱 강화하였지만, 전제정치는 오히려 호조씨를 점점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었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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