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심기도 소개 웍샾
후속 강의 집
한 국 관 상 지 원 단
첫 강의; 비밀로 하는 기도(prayer in secret)
향심기도 수련의 소개 웍샾의 후속 강의에 참석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이미 네 가지의 강의 즉 관계로서의 기도, 향심기도의 방법, 기도 중에 떠오르는 사고 때문에 겪는 어려움-즉 거룩한 단어의 사용, 그리고 일상 생활에 나타나는 기도 효과에 대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성서의 어떤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여기에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방법에 대하여 마태오 복음 6장 6절에 산상 수훈의 맥락에서 우리에게 권고하신 훌륭한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분명히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우리에게 소개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시절에는 ‘하느님’이라는 단어, 히브리어로는 야훼라는 단어를 존경심을 가지지 않고는 전혀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수로라도 이 칭호를 부르기만 하면 당장 문제가 생깁니다. 사해 문서인 쿰란에서도 실수로라도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부르는 사람은 당장 그 사회에서 쫓겨났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야훼’라는 이름에 아주 깊은 경외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함부로 쓰거나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아주 친근하고 개인적이며 사랑하시고 자상하신 분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아빠라는 말은 각 문화에 따라 아버지의 호칭으로 daddy, papa, old man등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하느님을 부르는 방법을 완전히 뒤엎어서, 아무도 감히 부를 수 없었던 거룩하고 엄청난 신비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를 하려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아버지께, 너의 아빠에게, 너의 파파에게, 너의 늙으신네에게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에 이것은 이 골방 안에서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엄청난 친밀이 이미 존재함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 골방이야말로 아주 친밀하고 가까우며 아주 부드러우시고 다정하신 궁극적 신비(하느님)의 현존을 만나는 곳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무섭고 떨리며 겁나서 머리가 솟을 정도로 두려운 기도의 관계가 즉시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기도의 관계는 편안하고 친밀한 관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비밀하게 기도하는 과정에 세 단계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첫 번 째는 일상적인 일과와 주변 환경,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떠나 보내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 심리적인 인식과 관심사를 넘어서 우리 심성의 내면으로 들어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존재의 영적인 수준으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골방이란 우리의 내면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 내면이란 우리의 일상적 심리적 기능들을 넘어선 곳으로서,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아버지, 아빠가 우리를 기다리시며 또 현존하시는데 그 현존은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했듯이, 비밀 속에 계신 하느님을 찾는 방법은 우리 또한 비밀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비밀 장소는 우리 존재의 영적인 수준을 말하며 그곳에서는 우리의 직관적 기능들 - 수동적 지력, 그리고 하느님께 향한 의지가 작용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기로 결정하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세부를 살펴봅시다. 우리는 문을 닫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외적인 일과와 주변 환경을 밖에 남겨 둘 뿐만 아니라 사고와 지각, 즉 분심이라고 말하는 내적인 대화(일종의 자신과의 대화)를 밖에 남겨두는 것입니다. 이 분심은 아주 많이 지나가는 데, 예를 들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분풀이를 할까? 나의 상사, 혹은 애들, 혹은 아내나 남편, 혹은 미국 대통령에게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등등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모든 끝없는 자신과의 대화를 내적인 대화라고 하는데 우리가 문을 닫을 때 이것을 밖에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문을 닫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우리의 일상적인 심리적 상상, 관심사, 합리화, 정당화 등에 커튼을 내리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골방은 점점 더 비밀로 되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완전히 비밀한 장소는,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일까? 이 골방에서 아빠가 나를 초대하시는 곳은 어디일까? 점심은 무엇으로 할까? 등과 같이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중단할 때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자아성찰 같은 것들도 우리가 문을 닫을 때에 밖에 남겨두는 것입니다. 어떤 번역에 따르면 문들 닫는 것을 ‘빗장을 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일상적인 사고와 관심사와 내적 대화로 되돌아갈 때, 이것은 마치 당신이 일어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과정을 되풀이 해야하는 것입니다: 다시 골방으로, 당신의 내면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다시 닫고 사고들을 떠나보내고, 친밀한 신비의 현존, 감추어진 현존, 비밀스런 현존이신 아빠에게 기도하는데 외부의 모든 것, 내부의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자아 성찰들로부터도 비밀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방에서 기도하는 과정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 중에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문을 닫으면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을 알고 말없이 입도 열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산상 수훈에서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 아빠와 관계를 맺는 깊은 내면에서 무엇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다른 훌륭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분심과 관심사를 쫓지 않고, 혹은 기도 중에 그 방에 있는 외적 소음 등에 주의를 주지 않는 내적 자유를 암시합니다. 여기에는 고독과 침묵이 내적 침묵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을 형성해 가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침묵이 일단 형성되면, 그 침묵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어떤 활동에로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점차로 소음과 활동이 있는 장소에도, 그리고 우리가 생각을 하도록 요구하는 상황에서 활동을 할 때에도, 우리는 같은 침묵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골방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곳으로 갈 수 있고 아빠를 만나는 장소인 골방은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현존은 점차로 습관화되어서 그 현존은 기도 중뿐 만 아니라 모든 일상생활에도 따라가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활동은 부드러운 아버지 아빠의 현존과 사랑과 애정과 영향이 있는 중심에서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향심기도를 정규적으로 수련하면서 이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 줄 어떻게 압니까? 방금 언급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더 나아가 이러한 예를 들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느냐?” 여러분이 부모라면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즉시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또 다른 이미지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자녀가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너희 중에 자녀가 계란을 달라면 독 있는 전갈을 줄 것인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문화에는 빵이 조금은 돌 같이 생겨서 요즈음의 피짜 빵처럼 넓적합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 안에는 뱀장어 같은 생선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주 실용적인 예로서 상상컨데 어떤 못된 부모라면 “그래 얘야 빵을 달라고 그랬지? 이것을 먹어라.” 하고 돌을 내어줄 것이며 생선을 달라면 “자 그래, 여기 좋은 독사를 좋아할지 보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는 약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은 예수님은 더 강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오 7장 10,11과 루가 11장 11-13을 복합하여 인용한 것임)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주시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에서 사랑의 인격체이며 삼위일체의 영성의 핵심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무조건의 사랑이며 한 관계에서 다른 관계로 모든 것을 부어주시는 분이시며 친밀하게 자신을 내어주시고 그분의 성질상 무 소유적이며, 보상을 구하지 않으시고 단순히 선이시며 자신을 소멸하면서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골방에 들어가 우리의 분심에 문을 닫아버리고 언어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단순히 동의한다는 지향으로 기도를 할 때에 성령이 바로 우리가 청하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중에는 다른 어떤 것을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의 최상의 선물인 이러한 성령을 받으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를 하는 시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청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를 하는 자체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청하기를 바라시는 그 모든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지 편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모든 이들과 함께, 그리고 모든 이들의 필요와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아빠가 계신 곳이고 아빠의 관심사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러면 우리가 관상기도로 불리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 그 자체가 관상기도로의 부르심입니다. 세례를 받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로서, 또는 하느님에 대하여 어떤 특정한 신앙을 갖기 전에라도 고독과 침묵에 대한 열망을 가졌다는 사실자체가 신성한 생명으로 들어오라는 확실한 부르심이며 이것이 바로 관상인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일상적인 기능들을 넘어서서 더 깊은 친밀로 들어가도록 하느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이 깊은 친밀은 신성한 생명과의 접촉뿐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영원히 흘러나오는 거룩한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체험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우리가 용기를 내어 그 흐름 안으로 들어갈 때에, 그 흐름은 우리를 하느님의 품안으로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따르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시지요. “나를 따르라”는 그 초대는 예루살렘으로 따라가고 십자가의 희생으로, 죽음으로 따라가며 마침내는 하느님의 품안으로 따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러 가지의 단계 모두는 이 세상에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나누는데 속하는 고통과 동시에 하느님의 현존의 체험에서 오는 기쁨과 영광을 예견하는 것이며, 이 현존의 체험은 우리의 내적인 부활을 통하여 미래에 올 우리의 부활을 예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지혜의 말씀을 적용하는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그것은 한 단계씩 우리의 골방 안으로, 세상에 대하여-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대하여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세속적이라는 의미의 세상에 대하여- 문을 닫는 능력 안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느님과 내적 침묵-침묵이 하느님 현존의 신비에 우리가 민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안에서 함께 있는 능력 안으로 들어 들어가는 움직임에 우리 자신을 동화하도록 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현존의 신비에 우리가 민감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영원으로부터 한 말씀을 하셨다. 그것을 영원한 침묵 속에서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 속에서 그 말씀을 듣는다.” 여기에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아버지의 움직임과 활동에 대하여 더욱 더 깊은 수준의 감수성을 가지고 들으라는 초대를 보십시오. 그리고 이 과정은 영적 여정이 기초들 두고 있는 기본적인 원칙을 되새겨줍니다. 어떠한 (관상의)전통도 궁극적 실재의 현존이 그 기초이며, 크리스챤 전통에서는 그 궁극적 실재를 가장 거룩한 성삼위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갈 다른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떠나보냄으로써 그 현존에 조금씩 조금씩 더 일깨워지고 그 현존 속에 더 깊은 참여로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밖으로는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시며, 성서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의 결과로 우리 안에서 샘솟는 것입니다. 더욱 깊어지는 수준에서의 하느님의 현존, 그리고 그 현존이, 심지어 우리 육신의 세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기능들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진정 크리스챤의 변형인 것입니다.
그래서 골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진행하느냐 하는 방법에 대한 예수님의 제안이며 향심기도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이든지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는 현대인들에게 적절한 방법입니다. 현대는 계란을 요리하고, 타이어를 바꾸고, 컴퓨터를 사용하고, 약을 복용하는 것들에 대하여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향심기도는 오직 한가지 방법이며 현대에는, 초기 크리스챤시대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어떤 기도를 표현하고 그 기도 안으로 움직여 들어가도록 제시하는 방법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지는데 예를 들면, 믿음의 기도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향심기도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한가지 다른 점은 이러한 과정에 대하여 우리가 적용하는 방법입니다. 위에서 본 성서상의 골방은 실은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혹은 하나의 파라다임으로서 크리스챤 전통에서 나타났던 모든 방법들이 다른 세기와 시기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적절하게 생겨나고 포함하고 그리고 표현하게 하였던 파라다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는 그 기도를 표현하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받아들인 단지 하나의 방법으로서 크리스챤 전통 안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기도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단순한 바라봄의 기도’로 이것은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고 계시며 하느님은 그분의 사랑의 현존으로 우리를 감싸고 계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전통 안에 다른 이름으로 ‘단순성의 기도’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사고와 특별한 의지의 행위(반복하는 헌신의 기도)를 줄이는 것을 뜻하며 이 모든 것들은 비밀 속의 기도에 포함됩니다. 향심기도는 아마도 가장 수용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하는 하느님의 현존에 안에 있겠다는 지향과 그분이 우리 안에서 사랑으로 활동하심에 대하여 우리를 열어드리겠다는 지향을 유지하는 것 말고는 우리편에서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단지 정적인 혹은 받들어 모시는 현존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으로서가 아니고 침묵이라고 하는 훌륭한 하느님의 언어로서 우리에게 오시는 역동적인 현존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첫 번째 언어는 침묵이며 그 외의 모든 언어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깊은 수준에서 듣는다는 것은 가장 깊은 침묵의 수준에서 듣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가슴은 하느님께 온전히 열려있고 우리의 마음은 어떤 특정한 내용에 대하여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현존에 주의를 줍니다. 우리 존재의 영적인 수준에 있는 내면의 방이 우리가 향심기도 중에 일구어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언제나 우리에게 열려있습니다. 그것은 (말로 한다면 우리가 말이나 아이디어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우리에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우리를 살짝 밀어주심으로써 그리고 감각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다른 기능들을 통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선함을 통하여, 심지어는 사람들의 악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과 악함의 밑바닥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며 이것은 내적인 방에서 일구진 믿음의 눈을 통하여 투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조금씩 우리의 일상생활의 일부가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에서 일종의 4차원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례 때에 받았고, 견진 때에 강화되었고, 그리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이러한 관계를 증진하기 위하여 골방에 들어갈 때마다 강화되는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이것을 암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가, 그리고 얼마나 부드럽게 가까이 계신가를 실감하게 하는 것으로 결론을 짓겠습니다. 여기에 한 부부가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살아오고 서로 사랑하며, 자녀문제와 파산하는 경제적 어려움과 질병 등과 같은 모든 어려움 중에도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잘 알고 있으며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어서 언어를 넘어서 단지 함께 앉아서 자신의 단순한 현존을 선물로서 서로가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석양을 바라본다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하면서 단순한 경험을 함께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주의가 조금 산만해지면 ‘나 아직 여기 있소’하는 뜻으로 손을 잡는다든지 서로 눈을 바라본다든지 합니다.
이처럼 대화에서 통공으로 옮겨가는 이 움직임이 내면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관계를 맺어 가는 다른 방법들을 손상하지 않습니다. 향심기도는 관계를 증진하며 그 관계에 더 높은 차원을 부가합니다. 이 차원이란 단지 함께 있음으로서 침묵 안에서 사랑이 내어줄 수 있는 온전한 선물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둘째 강의 - 향심기도의 훈련
지난 강의에서, 이 골방에서 특히 우리가 비밀로 기도하는 것을 배울 때에 골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특히 강조를 하였습니다. 이 비밀 속이 바로 하느님을 가장 잘 찾을 수 있는 곳처럼 보입니다.
이 강의에서는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그것은 향심기도를 어떻게 적절하게 하면 관계가 진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향심기도의 훈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온전히 그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대화에서 통공으로, 능동적인 기도에서 아주 수용적인 기도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필요하다면 문을 잠그고, 우리가 얼마나 불편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자세를 취한 다음, 우리의 지향과 일반적인 사랑의 주의를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돌리고 그 현존과 활동에 동의를 합니다. 골방에 앉아서 우리의 온 존재로 하느님께 자신의 현존을 온전히 드리면서, 지난 강의에서 본 노부부처럼 우리를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드립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겠다는 원래의 지향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중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등등의 분석은 아주 적절치 않습니다. 이것은 연구과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과 친밀한 대화, 특히 통공의 대화로 들어갈 때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심리 상태를 분석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당신이 사랑을 느끼면 그 사랑을 그저 느끼십시오. 그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할 필요도 없고 분석하거나 그 의미를 알아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감각의 밤에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많은 사고가 떠 오르는 것을 보면 이 기도가 나에게는 맞지 않는 기도는 아닌지?’와 같이 기도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무시해야 합니다. 어떠한 종류의 분석도 하지 마십시오.
두 번 째로 어떠한 종류의 기대도 해서는 안됩니다. 아주 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큰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신성한 성삼위의 현존이 우리 안에 있으면서 온전히 우리에게 열려있습니다. 그리고는 온전히 우리에게 현존을 내어주시면서, 말하자면, 마치 세상 모든 창조 중에서 유일한 존재인양 우리에게 당신의 주의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러한 현존에 대하여 얼마나 우리가 현존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대는 현존에 방해가 됩니다. 왜냐 하면 기대는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존은 현재의 것입니다. 기대는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반면에 동의는 현재의 순간에 속한 것이며 하느님의 온전한 현존에 현재의 순간을 드리는 것이 참다운 동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온전히 찾아내기 위하여서는, 말하자면, 우리 자신 또한 현재의 순간에 점차로 빠져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비밀 속의 기도가 그 일을 아주 크게 도와줍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더 원하는가 덜 원하는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가, 아니면 잘못하고 있는가?’와 같은 것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긴박과 강박과 습관과 중독 등은 모두 하잘 것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이러한 통공과 친밀의 수준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순간은 마치 하느님의 품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도대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이것은 키스와 같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키스하는 시간은 날씨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사실상 이 시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무슨 말을 한다면, 짐작하건대, 키스의 친밀성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에는 어떤 목표나, 목적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목적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사랑의 이유입니다. 사랑은, 성 베네딕또가 어느 책에서 말했듯이, 그 자체가 보답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면 당신은 다른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특히 여러분이 사랑 받는다는 경험을 하는 순간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이 시간은 그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침묵이 골방에서 가져야 하는 적절한 태도입니다. 향심기도는 그에 대하여 이 시대에 그저 적절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침묵의 기도 중에 선택한 거룩한 단어를 거룩한 상징으로 계속 반복한다는 다른 목표도 가질 수 있습니다.(이 거룩한 단어는 침묵 속에 성령께 청하여 선택한 단어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그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간을 하느님과 함께 보낸다는, 하느님과 통공 하겠다는, 그리고 온전히 하느님께 열어드리고 자신의 현존을 내어드리겠다는 당신의 지향을 나타낼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함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어떤 분별을 가지고 사용하라고 권고합니다. 거룩한 단어를 쉬지 않고 계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별을 가지고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라는 말은 그것을 필요로 할 때에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때는 의식의 흐름을 타고 사고나 지각이 내려올 때입니다.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향심기도의 내용에서, 사고란 어떠한 것이든 기억, 계획, 외적 감각, 내적 감각, 개념, 정서 등과 같은 지각 내용을 말합니다. 감각적이거나 정서적이거나 영적이든 어떠한 개념도 향심기도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볼 때 사고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상상에서 다른 상상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이 필수적으로 오는 사고들처럼 어떤 사고들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무관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고에 대하여 친근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사고에 빠져드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특정한 사고나 지각 내용에 대하여, 이끌림으로 하든지 아니면 싫어하는 감정으로 하든지 흥미를 갖기 시작하였음을 알아차릴 때에, 우리는 사고에 저항하지 않고, 사고에 매달리지 않고, 사고에 대하여 정서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만트라 기도라고 하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기도와 크리스챤 전통에서도, 특히 예수 주님 기도에서,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주님 기도는 때로는 단어를 가지고, 혹은 단어를 가지지 않고, 혹은 호흡에 맞추어 하거나 맞추지 않고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만트라 기도는 향심기도와는 구별되는 수련입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우리는 향심기도가 유일한 기도 방법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20세기말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인간 조건을 고려해 볼 때 이 시대에 적절한 방법이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꼭 하시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한번 시도해 보라고 권합니다. 향심기도는 골방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만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그곳으로 가느냐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여간, 향심기도는 거룩한 단어나 다른 상징을 항상 계속 반복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상징에는 거룩한 바라봄이 있고 또 거룩한 호흡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룩한 호흡은 호흡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호흡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의 지각입니다. 당신의 주의를 끄는 어떤 사고가 떠올라서 당신의 내적 의식의 중심으로 들어 올 때에 여러분이 호흡하고 있음을 아주 가볍게 단순히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적 대화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고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으므로 처음 시작할 때에는 거룩한 단어로 계속 돌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거룩한 단어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향심기도를 하려고 골방에 들어가 앉아서, 사고에 대하여 문을 닫고 기도를 시작할 때에 여러분이 가졌던 원래의 지향을 단지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문을 닫아도 사고는 다시 끼어 들게 마련입니다. 사고는 문이나 창문이나 문을 잠갔다고 해도 그것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의를 끄는 사고가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면 우리는 거룩한 단어로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일상적인 사고들이 폭격처럼 쏟아지기 때문에 지향을 유지하게 위하여 거의 항상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참을성 없이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아주 부드럽게 합니다. 그것은 이러한 사고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부정적인 태도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고는 없앨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고를 갖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고에 대한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진전하고 있다는 표시이며 사고들에 대하여 전혀 주의를 주지 않고 모두 떠나보내는 것이 적절한 태도입니다. 이렇게 하는 능력이 습관으로 자리잡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습관들은 과거 10년, 20년, 30년, 40년 혹은 더 이상 걸려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과 우리의 현존의 만남을 기다리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심에 동의한다는 지향을 가지고 우리가 하느님을 기다릴 때에 우리의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는 흥미를 끄는 사고들에게서 내적으로 초연해지는 새로운 능력, 혹은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능력을 갖는 데에는 몇 주, 몇 달이 걸릴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피해야 하는 목적은 사고를 갖지 않는다는 순진한 희망입니다. 향심기도 중에 사고가 없는 시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시간은 짧은 시간이며 그러기 위하여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이성의 기능들을 중지시키시어 생각할 수도 없고 상상력이 활동할 수 없게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신비주의 크리스챤 전통에서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고 고려됩니다. 성녀 데레사는 이것이 아주 길어야 아마도 30분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3세기에 평신도 운동이었던 베긴(Beguine)의 전통에서는 황홀경이나 사고기능의 중지가 때로 몇 시간 혹은 몇 일도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아 둘만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바라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일어나는 일일뿐입니다. 향심기도에서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충실하게 정규적으로 기도를 수련하는 것이 핵심이며 이것이 일상 생활에서 태도의 변화를 가져다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향심기도의 수련과 그 수련이 이끌어주는 관상기도는 일상생활에 대한 준비이며 일상 생활이 진정한 변형과 하느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고가 없게 된다는 것은 아주 순진한 생각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아마도 죽은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다는 표시 중에 하나는 생각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고 분심은 언제나 문제 거리이고 나쁘다는 부정적인 아이디어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아주 획기적인 진화는 인간의 성찰에 의하여 전 우주가 스스로 의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고에서 초연해진다는 것의 요점은 이것이 여정의 끝이 아니며, 사고를 갖지 않는다는 태도는 우리 존재의 깊은 수준인 영적인 수준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에 그리고 더 깊은 수준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과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에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 존재의 모든 수준; 즉 신체적, 정신적, 영적 수준에 매 극소 순간마다 우리의 존재가 솟아나는 원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고를 환영하지만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사고들에 대하여 아무런 주의를 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고들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무사고의 태도는 이 기도가 진행되는 것을 막을 것이며 사고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사고에 동의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고나 지각에 대하여 동의하면 우리를 기본적인 지향에서 아주 섬세하게 벗어나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겠다는 원래의 지향을 다시 쇄신해야 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세 번째 지적할 점은 어떤 사람들은 거룩한 단어나 거룩한 상징을 사용하여 마음을 공백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은 건전하지도 않고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공백이 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고를 비운다는 것이 사고를 전혀 갖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목적은 언제나 사고로부터 초연해진다는 것이며 그리고 기도 중에 하느님의 현존에 동의한다는 우리의 지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는 관상기도를 준비시켜주는 아주 수용적인 방법입니다. 여기서 내가 준비라고 한 말에 주의를 주십시오. 여기서 한가지 더 첨가하겠습니다. 관상기도는 언제나 순수한 선물이라고 가르쳐 온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다른 신비가들에 따르면, 향심기도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관상기도는 아닙니다. 향심기도는 장애를 줄여주고 성령의 섬세한 움직임에 민감해지도록 우리의 듣는 기능을 도와줌으로써 관상기도를 준비시켜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움직임은 골방 즉 깊은 침묵 중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상기하십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특별히 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령의 움직임을 직접 감지할 수 없습니다. 은총이 강한 경우라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어떤 일시적인 만족이 아니고 영구한 변형의 상태로서, 이 변형의 상태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매일의 인식의 부분이 되어서 일상생활 중에 일어나는 실제적이고 세부적인 일들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대려 가고 대려 오고 혹은 다른 일상적인 일들 중에서도, 여러분 활동의 효율성에서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의 현존이 언제나 함께 하는 인식으로서 여러분에게 섬세하게 현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존 의식에 대하여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현존인식이 더욱 깊어지면 여러분이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해야 하는 네 번째 목표는 감정이나 감각적인 위안입니다. 그렇지만 가끔 기도 중에 향심기도의 즐거움이 우세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관상기도 선물의 움직임이 우리를 움직이거나, 하느님께 드리고 승복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께서 잡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현존의 감각, 평화의 감각, 편안한 감각들이 우리의 감각 안으로 들어와서 심장박동을 빠르게 하거나 약간의 에로틱한 감각을 가지게도 합니다. 이 에로틱한 감각은 하느님에 대한 커다란 열망입니다. 우리는 에로틱한 사랑을 단순히 성기의 활동으로만 보면 안됩니다. 에로스는 하느님께로 가는데 디딤돌이 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큰 열망을 뜻합니다. 불행하게도 거짓자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쾌락을 하느님 대신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 중에 가끔 쾌락을 맛보는 것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방향을 잡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집중하도록 도와줍니다. 기도 중에 정서의 개입은 집중의 큰 원천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의존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생활이 깊어지면 감각적 위안 같은 것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상 거기에 대하여 거부감도 생기는데 그 이유는 기도하는 사람의 순수한 사랑, 하느님 사랑을 순화하는데서 그 사람의 지향을 차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러한 쾌락에 저항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심리적인 역사(살아온 과정)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이러한 종류의 확증을 얻을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확증은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온, 예를 들어 거부되었다는 감정과 같은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 문화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낮은 자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위안, 특히 감각적인 위안의 한 가지 목적은 어떤 사람들에게 거부되었던 것을 보충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껴안아 준다는 것은 사랑함을, 귀여워함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랑과 귀여워함은 어린아이들에게 소속감, 환영받는다는 감각, 사랑 받는다는 감각을 주는 것입니다. 사실상 인간에게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 인간을 온전히 인간답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심령의 어느 부분 안에 항상 의혹이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가 살아 있는가, 혹은 인간인가 하는 의혹이 큰 문제로 대두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영적 여중 중에 아주 훌륭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부족하였던 것을 채워주십니다. 그 결핍이 아주 심각하였다면 그 충족이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위안에 대하여 저항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도의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위안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안절부절못하고, 그리고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하느님께서 나를 이렇게 취급하신다면 나도 잊어버리자. 이제 그만 기도할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어린이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에게 투사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당신에게 이렇게 취급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친구가 되고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되었는데, 그 사람이 아무런 이야기도 해 주지 않고 먼 여행을 떠났다든지, 아니면 어느 기간 동안 여러분에게 아무런 주의도 주지 않거나, 당분간 다른 사람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질투가 나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 세상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왜 내가 이 여자, 혹은 이 남자에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단 말인가” 이처럼 우리도 하느님에게 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이 감각적 위안에 집착되어 있으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 받는 대로 주는 거지. 하루에 두 번씩이나 엄청난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데, 만일 하느님께서 나를 위안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내가 기도하기를 하느님께서 바랄 수 없지...”
여하간에, 이와 비슷한 목표로서 다섯 번째 목표를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영적인 경험입니다. 이것은 앞의 것과 약간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순전히 영적인 것으로서 더욱 심오하고 더욱 일치적인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감각적인 체험보다 더 깊은 것이지만 때로는 이 체험이 감각으로 흘러 들어오기도 합니다. 성녀 데레사는 ‘내면의 성’에서 이 체험의 원천은 아주 깊은 곳에서 나오며 아주 실제적이고 아주 변형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영적인 관계로 향하게 하는데 하느님이 바로 우리가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것이며 그 효과는 감각적 위안보다 월등히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향심기도의 수련에서 일반적으로 세 수준의 움직임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려고 할 때에 일상적인 심리적 인식을 골방에 가지고 들어가는데, 기도하는 도중에 하느님의 현존에 우리의 의지를 향하게 하려는 지향을 가지고 이러한 인식들을 떠나보냅니다. 그러고 나면(두 번째 수준) 사고들이 필연적으로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내려오고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이러한 것들에 주의를 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간 특히 처음에는 사고들이 우리에게 아주 주의를 주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을 건드립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는 무의식적인 동기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애정과 존중, 힘과 통제, 안전과 생존으로서 아동 초기의 본능적 욕구들입니다. 우리 삶의 초기에 이러한 모든 것에 우리의 쾌락과 행복이 의존하던 것이었으므로 아주 깊이 뿌리 박힌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고가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면 이러한 욕구나 우리의 문화 안에 있는 어떤 상징과 연결된 프로그램의 하나를 건드리고, 그러면 그것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사고에 흥미를 갖게 되어서 배(우리는 이것을 사고와 지각이라고 부른다.)에 올라타고는 흐름을 따라 내려갑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지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또 다른 사고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단지 그 배에서 내리고 전혀 실망이나 자책감을 가지지 말고 다시 시작하라고 우리가 언제나 말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향심기도입니다. 이러한 습관이 형성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거룩한 단어로 계속 다시 돌아가는 일을 계속하고 난 후에는, (이렇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이 20분 중 19분반이나 이렇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도 아주 좋은 기도가 됩니다. 왜냐하면 아마도 여러분이 수천 번이나 사랑의 행위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행위의 반복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나며, 복음 삼덕의 다른 덕인 믿음과 희망도 이처럼 자라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수준의 움직임이 여러분의 기도 중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어떠한 사고에도 흥미를 갖지 않게 되었음을 인식할 것입니다. 그것은 관상기도의 선물이 여러분을 깊은 곳에서 움직여서 여러분의 의지를(아주 단단하거나 아주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는 사고들에게 흥미를 갖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여러분은 단순히 하느님의 현존 안에 휴식을 할 수 있고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은 이미 거룩한 상징이 여러분을 이끌어가도록 되어 있는 곳-그 곳은 지나가는 사고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곳-에 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향심기도에서 지향이 우리의 수련의 주요 초점입니다.
셋 째 강의 - 향심기도가 아닌 것과 향심기도인 것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골방 안에서 기도할 때, 다시 말해 향심기도를 할 때 세 단계의 체험이 있다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향심기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볼 때에, 관상기도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향심기도가 관상기도의 첫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관상기도를 성령의 관상 선물을 준비하는 혹은 그 선물에 감수성이 생기게 하는 것을 포함하여 넓은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관상선물은 지식, 이해, 그리고 지혜입니다.
여기에 다시 지나가는 사고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 외에, 하느님의 활동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강해져서 처음에 지나가는 사고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들었던 우리의 의지를 잡아버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상과 기억 그리고 우리의 사색하는 기능까지 일시적으로 중지시킨다는 것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느님께 깊이 현존하며,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고, 때로는 자신을 온전히 잊어버리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단순히 일치의 경험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험은 상당한 양의 수련을 하고 오랜 향심기도의 훈련을 한 사람들에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경고하고 싶은 것은, 관상기도를 시작할 때에, 주입된 관상이라는 엄격한 의미에서, 언제 성령이 당신을 움직이기 시작하며 당신이 아주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행위가 현존하는지, 아니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는 당신의 의지의 단순한 움직임의 더욱 섬세한 활동-이것이 세 번째 단계로서 지나가는 사고에 관심을 갖지 않는 영역-이 자리를 잡는지를 언제나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주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더 자세하게 계속하려고 합니다. 이 강의에서는, 향심기도가 아닌 것에 관하여 먼저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나서 향심기도인 것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이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기술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떤 수련이나 훈련을 하면 다소간에 어떤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향심기도는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일종의 방법이 없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할 때에 발전시키는 것과 같은 종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커다란 개방적이며 융통성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관계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말하려고 대화를 가질 때에 당신은 아마도 의논하기를 원하는 몇 가지 내용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대화는 당신이 지향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 관계를 유지하고, 상호간에 개방성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이야기하려는 것에 대하여 서로 양보해야 합니다. 그래서 향심기도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일구어나가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일구어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가장 요구되는 특징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여기에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것이며 관계를 유지하려면, 예를 들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엽서를 보낸다던가, 당신이 동네에 들렸을 때에 어떻게 지내는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든지, 축일에 선물을 보낸다든지 와 같은 사려 깊은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술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며, 방법은 관계를 일구어 가는 것이지만 결과를 얻지 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친구관계가 끝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향심기도의 방법은 어떤 특정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아니면, 최소한도 예측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측한 결과를 얻지 못하면 사람들은 속을 태우기도 합니다. 어떤 결과는 그 관계가 현존과 현존, 통공, 일치 혹은 시간이 지나면서 합일의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관계가 깊어지면서 단순히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를 하여 어떤 특정한 것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 특히 향심기도시간 중에 기대를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향심기도의 가치나 목적이나 진보를 오직 일상생활에서 얻는 효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오로가 열거한 성령의 열매-사랑, 기쁨, 평화, 온유, 절제, 인내, 친절, 진실, 선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면의 방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성장하면, 그리스도의 마음-혹은 그리스도의 현존의 영향이 우리 안에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아이디어나 우리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기 중심적인 행복을 위한 프로그램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움직임 안으로, 인간 가족이 하나라는 것과, 모든 창조의 아름다움, 우리 환경에 대한 책임감, 정의와 정직성과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욕구에 대한 관심을 인정하는 움직임 안으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용서하고, 화해하고, 정직하려는 등과 같은 분명한 노력에 의해 도움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이렇게 하면 저런 결과가 온다는 연관성은 없습니다. 당신이 향심기도를 하면 무엇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오랜 동안 아무 것도 일어날 수도 있고 어려움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가 비교적 빠르게 신성한 치유의 과정으로 옮겨가면서, 예수께서 우리의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계속 올라가서 우리의 정서적 문제가 사실상 시작되었던 초기 아동기부터 가져온 인간 조건의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하시기 시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 향심기도가 아닌 것은 이것은 긴장이완 훈련이 아닙니다. 혼자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은 긴장을 이완시켜 줍니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들을 갖지 않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휴가는 얼마동안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며 마이아미 해변가로 가거나 스노매쓰로 스키 타로 가는 것 보다 더 좋습니다. 당신은 단지 잠시만이라도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분을 새롭게 해 준다. 그것은 우리의 활동에 아주 새로운 차원을 제공하며, 소음과 걱정과 관심사와 행복을 위한 자기 중심적 프로그램에서 해방을 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수 효과로 일종의 긴장이완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만일 당신이 정기적으로 향시기도를 수련하면, 하루에 두 번이라는 것을 기억하지요, 거기에서 더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덜 수면을 요할지도 모릅니다.
하루에 두 번 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에 맞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긴장이완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 아주 힘들고 지치게 하는 가운데서 평화를 갖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 아주 많은 사목 활동들은 극단적으로 에너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활동들은 그만큼 균형과 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기분전환과 긴장이완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인간의 비참함을 보면서 사는 사람들은 어느 기간동안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인간이 기능 하도록 만들어 주신 하느님의 아이디어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는 대신에 하느님의 선하심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기도를 하루에 한번만 하면,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긴장을 하며 사는가에 따라 하루의 반이나 혹은 4분지 3에 그 기도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사무실에서, 가정에서, 아니면 사목 활동 중에 새로운 위기가 일어날 때마다, 평화의 저수지-다른 말로 하느님의 신성한 현존의 싱싱한 물이라고 할 수 있는 실로(Siloe)-에 있는 평화의 수위가 바닥이 나고 맙니다. 이것은 마치 언덕 위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탱크의 물이 흘러 나와서 마침내는 바닥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에너지 수준이 아침에는 아주 넉넉하였다하더라도 오후 네 시쯤이면 끝이 납니다. 그럴 때에 집으로 오는 중에 아주 큰 위기가 닥쳐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때가 성령의 열매가 작동하고 당신의 안절부절이나 분노를 통제해야하는 시간인데 당신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아침에 즐겼던 그 많던 평화는 희미한 기억 속에만 남아 있고 모두 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저녁 식사 전에 다시 기도를 하는 것이-그것을 점심때나 이른 저녁에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저수탱크를 다시 채우는 길입니다. 이것은, 기억하시겠지만, 감각적인 평화는 아니지만 이것은 진정한 영적인 원천이므로 기도를 다시 하면 기도로 얻은 평화가 남은 저녁이나 밤 동안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셋째로 향심기도는 물론 자기 최면인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황홀의 상태가 아닙니다. 이것으로 일종의 긴장이완의 도움을 얻는 것 외에는 이익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자조적인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나 기도기간 중에 우리가 다루는 것은 자조 프로그램이 아니라 여기서 상호작용, 그리고 대화를 넘어가는 아주 섬세한 활동이 관련된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아시다시피, 그 관계는 향심기도의 효과로 인해 하루 동안에 하느님의 그 현존의 감각을 지속하도록 노력하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골방에서 비밀하게 기도한 효과가 일상생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후에 우리 전통 안에 이러한 효과를 가져오게 하는 여러 가지 과정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이 중에는 ‘영감’이라고 불리오 온 것으로서 하루 중에 자주 능동적 기도어를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이 있고, 화살기도와 ‘가슴을 보호하기’로서 향심기도 중에 정화되었던 우리의 행동 동기가 행복을 찾는 자기 중심적인 낡은 습관-애정과 존중, 힘과 통제, 그리고 안전의 요구들에 지배받는 프로그램-에 다시 지배받는가를 살피는 기도 등이 있습니다.
넷째로 향심기도는 은사적 선물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요즈음에 많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향심기도는 이상한 언어의 선물,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선물, 치유의 선물, 다른 사람들의 속생각을 알아차리는 선물, 그리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는 선물들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선물들은 값진 것이지만 그 전부가 크리스챤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을 반드시 변형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러한 선물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면의 방으로 가는 내적 움직임이나 거룩한 치유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무의식의 정화를 하지 않으면, 세속적인 관점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태도가 이것으로 전이되어 당신의 가르침을 선망하고, 당신의 기적을 보고 싶어하고, 당신의 이상한 언어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칭찬과 선망으로 옮겨가기 쉽습니다.
향심기도와 관상기도의 목표는 영적인 여정에 있음을 주시하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깊게 하고 그 관계를 다른 성삼위 즉 하느님과 성령과의 관계 안으로 깊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성삼위는 언제나 하루에 24시간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이 현존에 자신을 내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향심기도는 유사-심리현상이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적지 않은 심령가들이 있습니다. 어떤 인류학자들과 초월심리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것은 인류가 정신자아적 이성의 의식 수준에서 직관적 의식 수준으로 옮겨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심령의 선물은 단지 인간 두뇌의 진화적 발달의 한 부분일 것이며 앞으로 더욱 많은 심령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느 해 한 해 동안에 아마 열두 명 정도의 심령가들을 만난 것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후광-그것이 무엇이든지 어떤 에너지를 알아보는 것-을 본다든지, 기도 중에 여러 다른 색깔을 본다든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의 통신을 인식한다든지, 신체의 어느 부분에 질병이 있는지를 알아낸다든지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모두는 건강과 행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만, 이것들은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영적 여정의 어떤 수준의 발달로 향하도록 되어 있으며 계속해서 발달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이러한 종류의 선물에 심리적으로 그리고 기질적으로 맞는 어떤 사람들에게 날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들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선물에 집착이 되어버리면 영적인 교만을 가지기 쉬워지고 이러한 선물로 인하여 초대받은 영적인 여정을 나가는데 걸림돌이 되어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더욱 섬세한 것으로서 향심기도와 관상기도는 부양, 현시, 내적 음성-외적이거나 내적이거나, 그리고 지적이거나 영적인-신비현상이 아닙니다. 영적인 교신의 경우에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암시하였듯이, 하느님과의 일치에 가까운 것이며 하느님과의 일치와 거의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황홀경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어떤 신비현상들이 일어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골방에서 관계를 계발하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골방에서는 아무도 보는 이도 없고 외부 환경에서부터 비밀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거기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일 황홀경을 가지면 골방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것은 향심기도의 핵심이 아니며 다만 발달하고 있다는 징조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그 사람이 영적인 여정이 열정으로 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향심기도에서 우리가 구하려고 하는 것은 변형으로서, 하느님과의 영구한 관계이며 아무리 그것이 환희적이라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영적 여정의 경험이나 신비적 경험을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향심기도 중에 하느님 오른 편에 영광 중에 계신 예수님의 현시를 보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그러한 경험때문에 압도당하지 않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단순한 행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여정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압도당하지 않게 되면 즉시 당신이 가진 거룩한 상징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이 하느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순수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러면 또 당신은 처음으로 궁극적인 회두의 부르심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영적 여정에 진보할 때에 우리는 많은 회두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포기할 용의를 가지는 회두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사랑 자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면서 하신 것이며, 하느님께서 품안에 계신 아드님을 보내시면서 하신 일입니다. 가장 큰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떠나보내는 것 이것이 사랑을 위한 순수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향심기도가 아닌 것은 느껴지는 하느님 체험입니다. 만일 체험을 느낀다면 그래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기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받아드리고 떠나보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언제나 현존하시기 때문에, 손을 펴듯 우리의 가슴을 열어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손을 언제나 펴고 있으면 언제나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영적인 체험이라도 만일 그것을 잡으면 손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다음 선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언제나 손을 편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면 감사하게 받아드리고 떠나보냄을 뜻합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삶 안에서 전개되는 하느님의 뜻에 지향과 동의를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향심기도는 논리적 묵상이나 정감적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느님과 더 깊은 수준에서 통공하고 합일하도록 우리의 심리적 기능들을 준비시켜주는데 매우 값진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향심기도는 사고와 감정과 개념화와 모든 행동을 넘어가고, 의식 속에 무엇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 이외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구별을 단단히 간직하십시오. 우리는 항상 사고와 지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고를 피할 수는 없지만, 지나가는 사고와 지각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시장에 장보러 온 사람처럼, 들려오는 배경 음악을 듣기는 하지만 당신은 시장 보러 온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 음악에 주의를 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기도 중에 심리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하느님 자신이 아니고 우리가 도달한 영적인 수준에서 그 체험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간단히 그러면 향심기도는 무엇인가를 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하셨던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관계를 일구어나가는 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정말 기술이 아니고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이 훈련이 자동적으로 관계를 형성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분이 느끼시기에 적절한 때와 양을 결정하여 선물을 주십니다.
향심기도는 대화에서 통공으로 넘어가는 움직임입니다. 이것은 다른 형태의 기도를 제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향심기도는 단지 다른 기도들을 새로운 각도에 놓아줍니다. 내가 앞에서 말한 그 노부부처럼, 우리가 어느 기간의 통공을 가진 후에는, 아침에 커피를 따르고 하루 중에 다른 대화를 합니다. 그것은 단지 대화하는 것보다 더 큰 만족을 주는 더 깊은 수준으로 우리의 관계를 움직여 가는 능력을 뜻합니다.
이것은 능동적 기도나 논리적 묵상으로부터 더 깊은 곳으로 옮겨가는 움직입니다. 이것(능동적 기도)을 정감적 기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의지의 행위이며-그 말이 뜻하는 것처럼 정서가 관여되는 것은 아니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저것을 해 주십시오.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을 존경합니다.’ 하는 것처럼 시편이나 다른 정감적 기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의지의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향심기도가 발달하면 당신은 능동적 기도를 하면서 동시에 내면의 방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지향은 그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로 나타내는 하느님의 현존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다른 모든 종교적인 행위와 헌신은 새로운 빛과 시각이 유입되어 그것들을 마치 내면의 방에 있을 때처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고를 떠나보내는 것이 내적 침묵을 개발하는 것이고 독방의 훈련이기는 하지만, 그 독방의 효과가 다른 종교적인 행위들로 옮겨가서, 노래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우리 영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고 그분의 현존을 즐길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 향심기도 중에 내적 침묵에 습관들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수준의 기능들을 계발하는 방법이며 하느님의 첫 번째 언어인 침묵을 배우는 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훈련입니다. 이것들은, 영성 신학에 의하면, 변형하게 하는 덕이며 왔다 갔다 하는 하느님의 심리적인 체험보다도 엄청난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믿음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첩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념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적인 의미에서의 신뢰, 성서적 의미에서의 하느님께 온전히 승복한다는 뜻에서 믿음을 의미합니다. 분명히 그 승복의 깊이는 더욱 더욱 증가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감각의 밤에서 정화되고 영의 밤에 더욱 깊어집니다. 이전의 믿음의 수준, 믿음의 체계를 지탱해 오던 모든 인간적인 장식들이 무너지고 무산되면서 영의 밤에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데 그러기에 감각의 밤은 매우 마음을 괴롭히는 경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하여 지금까지 의존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그 대신 중재 없이 직접 하느님께로 가게 하는 순수한 믿음으로 대치됩니다. 현존과 현존, 존재와 존재, 하느님께서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중재 없이 순수한 믿음으로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현재의 순간에 머물도록 해 줍니다. 신학적인 희망(향주망덕)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같은 정서적인 희망과는 다릅니다. 제가 말하려고 하는 신학적 희망은 관상기도 중에 발달하는 것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무한하신 힘과 자비에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과거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좋은 일, 나쁜 일을 했던지 간에 우리가 한 일과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누구인가, 지금 당신이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얼마만큼 완전하게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가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희망은 우리를 현재 순간으로 데리고 오고 거기에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인내와 같습니다. 그 인내는 우리가 골방에서 지루하고, 피곤하고, 아프고, 사고가 폭포처럼 내려오고, 또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온 소화 안된 정서적 자료들이 원시적인 감정과 함께 솟구쳐 오르며 우리 인격의 어두운 면들이 의식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참고 그 골방에 앉아 있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향심기도인가 하면, 무지로 가는 여정이고 믿음으로 하는 모험이며, 세상의 구원이라고 하는 커다란 프로그램에 참여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향심기도를 하면 온 제상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향심기도를 할 때에 어떤 다른 특정한 지향으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선물을 청하는 기도의 하나의 열망 안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강의-향심기도의 기본 원칙
지난번에, 기억하시겠지만, 향심기도인 것의 하나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훈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물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신학적 덕(향주 3덕)이 하느님께서 기본적으로 사용하시는 변형의 도구인데 이러한 덕들과 관련하여 향심기도 안에 세 가지 활동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의 것은 향심기도 중에, 아마도 여러 해가 걸릴지도 모르는 것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에 믿음으로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의와 상응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할 때에 우리가 하는 기본적인 활동은 하느님의 현존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상징, 거룩한 단어로 계속해서 돌아가는 전 목적은 우리의 의지가 그 움직임에 습관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지향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그러고 나면 그 움직임은 언어를 넘어가고 그 다음으로 앞에서 말한 대로 향심기도 중에 세 번째의 수준으로 들어갑니다.
두 번째 것은 관상의 은총이 우리 안에 전개되는 것으로서 오랜 기간 걸쳐 발달되는 것인데 희망을 가지고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희망은 지난번에 설명한대로 현재의 순간에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지금부터는)우리의 지나간 삶에 대하여 돌이켜 생각지 않을 것을, 그리고 과거의 잘못이나 죄에 대하여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것을 권고합니다. 그 자리에서 오직 하느님의 처분에 자신을 맡긴다는 사실로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분리시켰던 모든 것은 지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떤 장소에서, 어느 때건, 임종시라도 하느님께 자신을 드리기로 결심하면 당신의 생애동안 하느님의 뜻에 반대하여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즉시 지워집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것에 대하여 기억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온전히 현존하시는데 이것에 대한 상징은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집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집으로 오는 길로 접어들자마자’ 라고 하는 말은, 아빠이신 아버지께서 그가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분명히 그를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반응은 회개나 화해를 청하지 않으시고 그가 집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면서 받아주신 것뿐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의 비참한 처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와는 관계가 없고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느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또한 우리가 선행을 한 것에 대하여서도 기대하는 어떤 가정(假定)도 지워버립니다. 우리가 늘 해온 기도들, 늘 해오던 선행에 대한 어떤 보상들 말입니다. 희망은 현재 순간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재 순간 속에 하느님께서 평생 동안 우리가 하도록 영감을 주신 선행들이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더 이상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그러한 것에 대한 소유도 없고 미래의 보상에 대한 집착도 없습니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사랑은 그 자체가 보상입니다. 그래서 향심기도를 오랜 동안 수련하면서 자라나는 두 번째 성향은 정확히 말해 자기 승복입니다. 먼저 동의가 있고 다음으로 자기 승복이 따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변형입니다. 이것 과정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깊은 정화의 순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변형을 우리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정화란 우리 안에 이미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데 장애가 되는 것에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래서 향심기도의 수련으로 충만한 관상생활이 전개 되어감에 따라 희망으로 하느님을 기다리고 사랑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 우리가 점차로 수련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기본적인 원칙, 더 정확하게 말해 향심기도의 신학적 원칙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원칙은 관상을 위하여 사용하는 다른 어떠한 준비의 형식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기에, 내가 생각하기에는, 모든 세대에 위대한 크리스챤 신비주의들에 대한 가르침에 공통된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우리 안에 거룩한 삼위가 내재하고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불행하게도 영적 여정의 실제적인 기초인 이 원칙,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 그렇게 잘 그리고 많이 가르쳐져 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신학 공부는 고사하고, 성서공부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말을 거듭 거듭 얼마만큼이나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세례를 받거나 받기를 원할 때에 언제나 받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사실은 우리가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차고 넘치는 은총을 모두 우리 안에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렇게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낀다면, 일치를 넘어서서 혼례적 신비로 비유되는 둘이 하나가 되는 데(둘이 아니고 하나임)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즉 그리스도와 하느님께 온전히 승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일치도 그것이 영정의 끝이 아닙니다. 그래서 혼례적 일치를 넘어가서, 말하자면, 더욱 심오한 일치의식이 있는데, 이 의식 안에서는 우리는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인식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상당히 그리스도로 변형되었고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 기쁨, 평화 등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더 심오하게는 진복팔단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부활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복은 간단히 말해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생명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 안에 하느님의 성삼위께서 현존하신다는 인식을 계발하는 것은 우리가 정규적으로 매일 하루에 두 번 혹은 그 이상 수련함으로써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현존의 인식은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의 삶의 상태나 직무 속에서 우리를 따라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 내가 움직이면 누가 움직입니까? 내가 움직이면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내가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면, 아스펜(Aspen) 나무가 마치 나를 향해 손짓을 하는 것같이 바람에 따라 흔들림을 볼 때에 그것은 나를 향해 손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에 손짓을 하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정말은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이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에게 손짓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은 영원히 하느님께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창조 안에 계신 삼위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창조 안에 완전히 현존하십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만은 하느님께서 그러한 현존을 인식하고 그 현존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처럼 향심기도는 온전히 우리가 무엇이 되도록 하는 일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칙은 언제 어디서나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향심기도를 하려고 앉을 때마다, 여러분이 의자에 앉거나 바닥에 앉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내재에 온전히 잠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삼위의 생명,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성삼위의 내적 생명이 여러분 안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성삼위의 온전한 자기 증여, 온전히 비 소유적인 태도가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면서 우리에게도 하느님 사랑의 충만한 흐름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성삼위에서 끊임없이 흘러 나와서 창조를 통하여 흐르고 모든 창조를 하느님의 품안으로 다시 불러들이시는데 특히 의식적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아빠의 품으로 다시 모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내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아빠이며 파파이고 대디이며 노친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호흡보다, 우리의 생각함보다, 우리의 의식 그 자체보다도 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실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향심기도의 수련이 바탕을 두고 있는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이것과 동등하며 적어도 실제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향심기도의 두 번째 원칙은 향심기도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빠스카 신비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우리가 집단으로 이 기도를 할 때라도, 우리는 외적인 환경과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감각적인 현존을 추출하여, 그것을 하느님께서 각자 안에 계시는 영적인 현존으로 합하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임을 경험하는 수준에서 우리가 하나라는 것에 민감하게 합니다. 그래서 형제자매가 하나가 되는 깊이는 적보다 그리고 친구보다 더 깊습니다. 우정은 훌륭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인 이유는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놀랍게도 우리의 적까지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앉아서 향심기도를 하면 우리가 혼자서 기도를 할 때에도 개인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받아들인다는 우리의 움직임은 여러분이 하느님과 생명과 모든 창조의 궁극적 실재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앉으면 여러분은 의도적으로 은유적으로 모든 인류를 당신과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며, 여러분이 열어드림과 기다림을 넘어서 하느님과 하나됨으로 더욱 더 깊이 들어갈 때에 이것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리고 향심기도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개인 기도는 개인 기도가 아닙니다. 이러한 수준의 기도에서 개인기도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앉아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와 동일시를 하면 모든 인류의 욕구가 우리와 함께 합해집니다. 어떤 고고학자는 예수님의 시대에 십자에는 툭 불거진 부분들이 있어서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안간힘을 써야 하고 그래서 고통은 더 연장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십자가에 그저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앉아서 기도하면 은유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 들어가서 동참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그리스도께서,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를 속속들이 치유하시는 것뿐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계시면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도 하느님의 구원의 온전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란 우리 그리고 우리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리의 모든 기능들 속속들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변형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크리스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의 신체, 우리의 신체는 하느님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고 신체의 최소 입자에 이르기까지 변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 기도는 개인 기도가 아니므로, 우리가 치유와 기쁨을 경험하지만, 이 치유와 기쁨은 우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고, 우리가 기도를 끝내고 나왔을 때에 사람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대하도록 만들 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능에 따라, 사목에 따라, 우리가 가진 은총의 수준에 따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자신을 맡겨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일상의 생활은 하느님을 들어냅니다. 그러므로 아스펜 나무가 여러분에게 손짓을 하고, 여러분이 그것에 답으로 손짓을 할 때에 여러분이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신이 손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는 사시나무가 어느 정도의 의식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사시나무들은 확실히 열정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안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자신 것만은 아닙니다. 이 과정이 진전하면서 여러분은 신성한 치유를 경험하는데 이것은 거룩한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으로 가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의 치유입니다. 이 순수한 사랑은 비 소유적이며 완전히 자신을 내어주면서 성삼위 안에서 서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에는 어떤 에너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그래 너는 좋은 사람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에너지, 엄청난 에너지, 때로는 무서울 정도의 에너지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하느님의 사랑이 잠시 절제를 잃어버리시면 당신을 껴안아 주실 뿐만이 아니라 곰처럼 껴안아 주십니다. 그래서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들이 인간일 뿐이라는 점을 개의치 않으시고 껴안아 주신다면 사랑으로 하시는 이러한 일에 여러분은 부셔져서 죽음을 경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의 열정으로 너무 꼭 껴안아 주시면 여러분은 아마도 고통이나 처벌이나, 질책이나 혹은 두려움과 공포를 경험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해석일 뿐입니다. 이러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의식을 덜어내면서 아픔을 겪고, 우리 인격의 어두운 면을 바라보고, 어디에서 오는지 조차 모르는 원시적인 감정들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경험할 때에 우리는 단지 희망을 가지고 기다릴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영의 어두운 밤에-그리스도의 고난-일종의 죽음으로 갑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이 온전히 진전되면서,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우리 거짓자아의 진정한 죽음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행복을 위한 정서적 프로그램에 사용하였던 에너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얻으려고 문화적인 조건화에 집착하였던 것들은 모두 상대화되고 사라집니다.
물론 이러 저러한 것들을 원하는 움직임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몰아대는 에너지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좌절을 하면 ‘아마 오늘은 내 날이 아닌가보다’하고 말하는 것으로 끝내고 여러분을 사로잡지도 깊이 들어가지도 않아서 그것들이 여러분 안에 적개심이나 분노나 좌절감이나 탐욕이나 혹은 다른 상처받은 정서들을 갖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향심기도의 커다란 초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도 중에 어려움을 경험하면 여러분은 그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고통을 받으면 그것은 여러분의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고통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어떤 신비한 방법으로,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고통을 받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고통에 대하여 갖는 태도는 바뀌게 됩니다. 여기에서 모든 비극 안에서 희망이 솟아나고,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간의 파괴와 폭력 안에서도 평화를 발견합니다. 동시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 하느님의 사랑을 원치 않는 많은 곳 안으로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오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헌신의 기도는 아닙니다. 헌신의 기도는 일주일에 한번 하거나 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공로를 쌓아서 이것으로 여러분의 잘못을 지워버리기를 희망하면서 하는 그러한 수련은 아닙니다. 이 기도는 그러한 관심을 넘어가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이제 우리의 앞날이나 운명 같은 것에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 관심을 갖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것에 적응하고 다른 이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엄청난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수련으로 점차 생겨나는 세 번째 원칙은 이 기도로 자연히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향심기도는 개인기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나누는 다른 사람들과 깊은 연대를 느낍니다. 그리고는 더욱 더욱 모든 사람들과 연대를 느끼면 그리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표현인 모든 창조와 모든 자연과도 연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극대에서 극소까지, 우주에서 가장 작은 생물적 단위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일깨우고 알아보도록 도와줍니다. 어느 날 핀의 끝에 100억의 바이러스 균을 올려놓을 수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화기관인 위장에는 100억의 바이러스들이 공존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들이 위장의 벽을 손상할 때만 여러분은 병들고 앓게 되는 것입니다.
변형은 헌신과는 다릅니다. 헌신은 우리의 공로를 쌓음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입니다. 변형은 완전한 자기 승복에 자신을 투신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것이 우리 삶에 있어서, 우리의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된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신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과정인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를 우리가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부활하시는 내적 부활은 관상기도의 효과가 매일의 삶 안에서 즉 성령의 열매와 진복팔단으로 나타납니다.
향심기도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을 껴안는 충만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가장 심오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현존과 관련시키고 그리스도의 희생의 신비와 관련시키는 것입니다. 이 희생은 아주 훌륭하게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내어주신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우리도 그 사업에 들어오라고 부르십니다.
방법의 한 부분으로서의 거룩한 단어는 향심기도의 첫 단계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우리를 열어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희망으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잡히지 않고 우리의 의지가 때로 어떤 사고에 대하여 흥미를 가질 때에 우리는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 방법으로서 거룩한 단어는 그것이 끝입니다. 만일 기도가 잘 안 되는 날 거룩한 단어를 계속해서 사용하지만 그것을 계속해서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선의식(先意識)으로 점차 들어가서 일종의 자동적으로 그것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점에서 그 끝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가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감에 따라 우리의 의지는 영적으로 습관적으로, 지향을 나타내기 위하여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가 없이, 항상 하느님께로 향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는 영적인 의지가 하느님의 현존과 조율이 되어서 단순하게 항상 하느님께로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점에 이르면 그 움직임을 지탱하기 위하여 거룩한 상징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필요하더라도 그러한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그래서 이후의 기도는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령께 점차로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완전하게 넘겨받으시고, 그리고는 더욱 더 의견의 선물(성령의)을 통하여서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를 아주 자세하게 일러주십니다.
향심기도는 아주 전통적인 기도입니다. 이것은 크리스챤 전통에서 존중되어온 기도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통신하는 방법으로서 방법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방법을 필요로 하는 현대의 요구에 어떤 방법으로 제시하도록 적용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향심기도가 새로운 것은 우리 자신 대신 하느님과 함께 영적 여정을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준비하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등의 주의를 우리 자신에게 주게 하는 경향이 있는 어떤 다른 기능을 계발하는 대신, 향심기도는 하느님의 내재로서 영적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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