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낙엽처럼 버려진 아이... 사랑에 허기진 삶... 정염과 애달픔의 상징...
붉디 붉은 낙엽으로 영면하다.
1915년 12월 19일, 굴곡많은 비련의 삶을 시작하는 에디뜨 삐아프.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파리의 벨베이르 72변가 길 한복판에서
출생신고를 치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무책임함 때문에 독일병사에게 사살된 간호원의 이름을 따
에디뜨란 이름이 붙여졌다.
또, 이탈리아 출신의 3류 가수였던 어머니는 두 달밖에 되지 않은 피덩어리를 두고
도망쳐 버린 건 물론, 떠돌이 서커스단의 곡예사였던 아버지는 아이가 버거워 외할머니 집에 맡겨 버리고 멀리 멀리 떠나 버렸다.
그만큼 인생의 첫 테이프를 끊는 순간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운명이었던 에디뜨 삐아프.
노래를 부르면서 삶을 구걸하던 비참한 어린 시절에서부터 캬바레를 경영하던 루이 르플레
(Louis Leplee)의 눈에 띄어 33년 무대에 서기까지 정말 한 순간도 파란만장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물론 가수로서 화려한 절정기를 구가하던 이후 30년간 역시도 천부적인 노래 솜씨와 열정적인
무대매너로 우리 영혼을 뒤흔들며 언제나 스캔들 한복판에서 염문을 뿌렸지만, 행복은 잠깐씩
스쳐갈 뿐 그녀의 삶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늘 목말랐다.
헤비급 복싱 챔피온인 마르셀 세르당(Maarcil Cerdan)과의 운명적인 사랑을 비롯해
이브 몽땅(Yves Montand), 가수겸 작곡가인 자크 필스(Jacques Pills)는 물론이고,
26살이나 연하인 그리스 청년 테오 사라포(Theo Sarapo)와의 결혼, 할 것 없이 나이를 초월한
불타는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소진시켰지만, 그 열정만큼은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던 삶 속에서 사랑에 울고, 웃고, 아파했던 에디뜨 삐아프.
그만큼 그녀에게 있어서 음악은 사랑의 찬가이자 곧 실연의 상쳐였던 것이 아닐까?
사랑이 없었더라면 그녀의 삶도 음악도 결코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남과 여'의 끌로드 를르슈 감독이 에디뜨 삐아프의 사후 20주년을 기념해 만든 영화 "에디뜨와
마르셀(Edith and Marcel)"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에디뜨 삐아프와 마르셀 세르당의 사랑은
세기를 초월할 정도로 열렬하고 비극적인 것이었다.
에디뜨가 마르셀의 사망소식을 듣고 쓰러져 있을 때 여류 작곡가인 마르그리트 모노(Marguerite Monnot)에게 준 사랑의 시가 있는데, 바로 그 마르셀을 향한 에디뜨의 한없는 사랑의 시에다 곡을 붙인 것이 다름아닌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이다.
이 곡은 50년 1월 플레이엘 음악당에서 초연돼 열렬한 사랑을 받았고, 곧 전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사랑을 앓는 연인들의 가슴에 그 숭고한 아름다움을 한올한올 새겨 넣게 된다.
HYMNE A L′AMOUR(사랑의 찬가) / EDITH PIAF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에 무너져 내린다 해도, 대지가 허물어질지 모른다 해도,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그런것은 아무래도 좋아요'라는
<사랑의 찬가>의 한 구절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도, 쓸쓸함도, 삶의 회한도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비련의 여가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누구와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최고의 여가수로, 또 간혹 영화배우로 활동
하면서 재능과 열정을 기꺼이 헌사했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1940년에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는 뽈 모리스라는 가수와 알게 되어 2년간 동거했다.
두 사람의 생활상을 듣고 쟝 꼭또(1889∼1963)는 그녀를 위해 1막짜리 희곡 [쌀쌀한 미남자]를
썼다.
삐아프가 꼭또를 알게 된 것은 1939년 악보 출판업자 라울 부르똥 집에서의 일이었다.
그녀의 친구였던 부르똥 부인이 딴전을 부리는 삐아프를 그와 만나도록 주선해 준 것이다.
꼭또는 입을 열자마자 '우리는 두 사람 모두 시(詩)에 소속된 인간이로군요.'하고 말했다.
그것으로 딱딱한 분위기는 누그러지고, 두 사람은 순식간에 '쟝', '에디뜨' 하고 서로 부르는
사이가 되었고, 그들은 평생 굳은 우정으로 맺어졌다.
그 후 1963년 10월 11일 삐아프의 사망 소식을 들은 꼭또는 '그녀는 위대했다.
삐아프와 같은 여성은 이제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불과 그 네 시간
뒤에 심장 발작을 일으켜 뒤를 따르듯이 세상을 떠났다.
'쌀쌀한 미남자' 는 전화를 소도구로 사용한 1인 연극으로, 여주인공 외에 시종 말이 없는
한 사나이가 등장한다. 초연 때 상대역을 연기한 것은 뽈 무리스 였다.
1940년 봄, 부프 파리지엥 극장에서 상연되어 3개월간 롱런한 이 희곡에 의해 삐아프는 연기에
눈을 떴다. 그 후 53년에 마리니 극장에서 재상연 되었는데, 그 때 상대역을 맡은 것은 당시의
삐아프의 남편이었던 쟈끄 필스(Jacques Pills)였다.
또한 꼭또는 삐아프를 위해 그 밖에도 [마르세이유의 망령]이라는 모놀로그 극을 썼으나,
이것은 끝내 상연되지 않았다. 1941년, 삐아프는 두번째의 영화를 찍었다.
(첫번째는 1938년의 [라 갸르쏜느]). 조르쥬 라꽁브 감독의 [몽마르트르 쉬르 세느]라는 영화로서, 공연은 쟝 루이 바로 뽈 무리스 앙리 비달 등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 촬영 중에 스튜디오에서 라꽁브로부터 앙리 꽁떼(Henri Contet)를 소개받았다.
그는 저널리스트였으나, 이후 작사에 주력하여 <빠담 빠담> 등을 썼다.
나찌 점령하의 파리에서도 삐아프는 계속 노래를 불렀다. 독일인들은 그녀의 재능을 인정하여
노래를 금지하는 것이 상책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삐아프는 당당하게 ABC 극장과 보비노 극장에서 포로 구제의 자선 연주회를 열었고,
독일내의 수용소까지 찾아가 위문 콘서트를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레지스땅스 운동에도 힘을 빌려 주어 투사들을 구했다.
1944년에 파리가 해방되자 연합군 장병들은 삐아프의 노래에 흠뻑 취했다.
같은해 7월 물랭 루즈의 무대에 섰을 때, 그녀는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었던 이브 몽땅 (Yves Montand)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직 무명으로 무대위에서 완전히 얼어버렸는데, 네 곡의 노래를 다 불렀을 때 그녀는 무대 옆으로달려가 '당신은 멋져요.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라고 말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사랑의 시작이었다.
삐아프는 그를 사랑했고, 어떻게 해서든지 널리 선전하려고 힘썼다.
레퍼터리를 바꾸도록 권하고, 영화계에도 소개했다.
그 결과 몽땅은 1945년 마르쎌 브리스띤느 감독의 [빛 없는 별]로 스크린에 데뷰했다.
주연은 삐아프 외에 세르즈 레지아니, 미라 파렐리 등이었다.
명곡 <장미빛 인생>이 만들어진 것은 바로 몽땅에 대한 애정이 타오르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노래가 그에 대한 사랑을 담아서 쓴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장미빛 인생>의 작사는 에디뜨 삐아프 자신이었고, 작곡은 삐에르 루이기(Pierre Louiguy)였다. '
이 샹송이 태어난 것은 1944년 10월 12일이었다.'고 작곡자 루이기는 말하고 있다.
그는 후에 <장미빛 벚나무와 하얀 사과나무> 등을 작곡한 사람으로, 당시 에디뜨 삐아프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 날은 바로 그의 딸 쟈닌느의 세례일이었고, 대모(代母)는 삐아프였다.
에뜨왈 광장과 가까운 아나똘 들 라 뽀르뜨 거리에 있었던 그녀의 집에서 세례 후의 잔치가 벌어져,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모두 잘 먹고 잘 마셨다.
잔치가 끝날 무렵에 삐아프는 일어나 루이기에게 '이리 오세요. 샹송을 만듭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옆 방의 피아노로 루이기는 몇 개의 음표를 쳤는데, 갑자기 영감(靈感)에 사로잡힌 것처럼 삐아프는 큰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장미빛 인생을 봅니다.'로 시작해서 샹송 <장미빛 인생>은 겨우 15분 동안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편 삐아프 자신의 전기(傳記)에 의하면, 그녀는 이 노래의 작사·작곡을 모두 자신이 했다고
말하고 있다. 작곡자 협회의 회원으로 인정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루이기의 이름을 빌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정설(定說)은 다음과 같다.
1945년 5월 여성 가수 마리안느 미셸이 삐아프에게 새로운 샹송이 필요하다고 부탁하러 왔을 때, 그녀는 이미 <장미빛 인생>의 최초 멜로디를 다 썼으나 가사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겨우 당일 마음에 떠오른 '그가 나를 껴안으면, 나에게는 사물이 장미빛으로 보이네'라는 가사를 보여 주었는데, 미셸은 '나에게는 인생이 장미빛으로 보인다.' 라고 고쳤다.
이리하여 불후의 명작 <장미빛 인생>이 태어났다.
마르그리뜨 모노는 가사가 시덥지 않다고 혹평했으나, 이것을 가지고 돌아간 마리안느 미셸은 1945년 11월 에뜨왈과 가까운, 자기가 경영하는 꺄바레에서 이 노래를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삐아프 자신도 46년에 녹음했고, 악보는 47년에 출판되었다.
영어 가사는 48년에 맥 데이비드가 붙여서 같은 해에 데니스 모건 주연 영화 [The Dicky Bird Song To The Victor]에 사용되었다.
1954년의 영화 [아름다운 사브리나]속에서는 주연인 오드리 햅번이 불렀다.
내 시선을 내리깔게 하는 눈동자. 입술에 사라지는 미소.
이것이 나를 사로잡은 그 분의 수정하지 않은 초상화예요.
그가 나를 품에 안고 가만히 내게 속삭일 때, 나에게는 장미빛으로 보이지요.
그가 내게 사랑의 말을 할 때는, 언제나 같은 말이라도 나는 정신이 어떻게 되고 말지요.
내 마음 속에 행복의 분신(分身)이 돌아온 거예요.
그 까닭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나를 위한 그, 그를 위한 나라고 그 분은 내게 말했고, 목숨을 걸고 맹세해 주었지요.
그를 언뜻 보기만 해도, 그 때 나의 내부에서는 맥박치는 심장을 느끼는 거예요.
끝 없는 사랑의 밤은 커다란 행복이 넘쳐서 지루함과 슬픔은 사라져 버리지요.
행복으로 죽을 것처럼 되지요. 그분이 나를 품에 안고 가만히 속삭일 때, 나에게는 인생이
장미빛으로 보여요….
1963년 10월 11일,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접한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의 위대한 예술가인
장 꼭또(Jean Cocteau)는
'그녀는 위대했다.삐아프와 같은 여성은 앞으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회환에 젖은 말을 남긴 채 그녀를 따라 저세상으로 떠났을 정도로 전세계로부터 수많은
애정공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사랑에 굶주렸던 것은 왜일까?
[퍼온글]
80년대초 대학의 학창시절
내가 몹시도 좋아했었던 에디뜨 삐아프 !
그녀의 굴곡 많았던 온갖 역경과 슬픔의 삶이
가슴을 파고드는 이런 애절한 음율의 노래를
부를수 있게 했었나보다
예전의 어린 학창시절때보다
지금 훨씬 더 감동깊게 들려오는 삐아프의 목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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