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가 보장되려면 세 가지 원칙이 준수돼야 한다. 첫째, 모든 경제주체가 합리적인 의사결정(rational decision making)을 하야 하고 둘째, 모든 정보가 투명해야 하고 셋째, 공정한 경쟁이 이뤄져야 한다. 이 세 가지 원칙이 준수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시장경제가 성립한다.
이 세가지 원칙은 저절로 준수되지 않는다. 모든 경제 주체에게 엄포를 놓는다 해서 준수되지 않는다. 준수될 수 밖에 없도록 시스템이 가동돼야만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엔 시장 경제 시스템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 채 툭하면 "시장경제"에 맡기자고 주장한다. 시스템이 없는 사회에 "보이는 손"에 의한 통제력 마져 사라지면 이는 자유방임 사회다.
은행객장을 다시 상기해 보자. 순번 번호표 시스템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것이 있으면 청경들이 나서서 질서를 유지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순번번호 시스템이 없는데 청경마져 뒷짐을 짓고 있으면 객장의 질서가 어찌 되겠는가? 자유방임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기업 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스템이 바로 공인회계사 시스템이다. 선진국 공인회계사는 기업감시의 경찰권을 갖고 있다. 공인회계사의 공신력이 무너지면 시장경제도 무너지고 주식시장도 무너진다. 한국에서는 은행과 사채시장이 기업의 가장 큰 젖줄이지만 시장경제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주식시장이 가장 큰 젖줄이다. 주식시장이 건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시스템이 필요하다. 하나는 재무제표의 신뢰성을 보장해주는 공인회계 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증권시장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증권감독 시스템이다.
주가는 기업의 돈버는 실력이다. 기업의 실력은 재무제표에 나타나 있다. 그런데 그 재무제표가 가짜로 작성된다고 생각해보자. 누가 주식을 사겠는가. 미국인들은 공인회계사의 서명을 믿고 주식을 산다. 그래서 공인회계사는 재무제표에 관한한 무한 책임을 진다. 재무제표 항목에 관한 한, "기업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 기업은 "완전공개원칙"(full disclosure principle)의 원칙에 따라 공인회계사에게 모든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 만일 이에 저항하는 기업이 있으면 공인회계법인체로부터 "감사불가" 판정을 받게된다. 그런 기업은 그날로 끝장이다.
선진국 공인회계사는 공신력을 갖지만 한국에서는 기업과 유착돼 있다. 공인회계사의 공신력이 타락하면 미국의 경제라 하더라도 금방 타락한다. 공인회계사의 수임료에도 시스템이 있다. 한국에서의 수임료는 건당 무조건 정액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회계시스템의 신뢰성에 따라 기업마다 차등적으로 부과된다. 시스템의 신뢰성이 높으면 수임료가 적게 부과되고, 낮으면 수임료가 높게 부과된다. 따라서 기업은 수임료를 줄이기 위해 시스템의 신뢰도를 증진시키려 한다. 투명성이 자동적으로 증진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회계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려면 시스템공학 분야에서 개발한 수리공학 과정들의 상당 부분을 이수해야 한다. 수학의 깊이가 바로 능력이다. 그래서 수리공학 기법을 훈련받지 못하면 공인회계 법인체에서 고급 간부직으로 승진하기 어렵다. 지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전문분야의 인프라 건설을 외면한 채 적당히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개 공인회계 법인체는 수백 개 고객기업(client)에 대한 재무제표 감사(audit)를 의뢰받는다. 모든 고객들이 12월 31일부로 재무제표를 발표한다. 한국식으로라면 12월 말에 공인회계 법인체의 업무가 폭주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한. 미 간에 대조적이다. 한국은 1개 업체에 1-3명의 공인회계사를 배당한다. 그러나 미국은 1개 팀이 수십개의 기업을 동시에 감사한다. 여기에 시스템 기법이 동원되는 것이다.
기업에 마다 1-3명의 공인회계사를 배치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럼 미국은 수십명으로 구성된 1개 팀이 어떻게 해서 수십-수백개의 기업을 동시에 감사해서 12월 31일부로 발표되는 모든 기업의 재무제표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인가. 바로 그것이 시스템 기법이다. 이는 상식인들에겐 매직이다.
일단 회계법인체가 기업에 대한 감사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이 고객기업(client)의 회계 시스템을 평가하는 작업이다. 이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맥을 짚는다. 그 맥에서 산출되는 모든 통계자료를 현장에 상주하면서 수집한다. 이 자료를 가지고 회계시스템의 신뢰성을 평가한다.
그들은 이를 "내부통제 시스템의 평가작업"(preliminary evaluation of internal control systems) 단계라 한다. 이러한 신뢰성 평가는 재무제표 항목 전체에 대해 이뤄진다. 가장 어려운 분야는 제조 과정에 있는 재공품(work in process)에 대한 자산 평가 분야다. 이는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평가 기술의 문제다. 확률 모델과 시뮬레이션 기법들이 화려하게 등장된다. 회계 시스템의 신뢰성이 숫자로 계산되면 여기에 년간 예산을 투영한다. 그러면 비록 년말이 아니더라도 재무제표의 정확성이 평가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공인회계사의 회계지식은 빙산의 일각을 기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 회계법인체들은 미국의 회계법인체들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한국의 회계법인체는 아직은 "부기사"들의 집합체이지 시스템 분석가들의 집합체는 아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는 비록 한국에서 회계법인체의 권한을 미국 수준으로 올려준다해도 기업의 투명성을 보증할 수도 없고, 그래서 국제적 신인도도 얻을 수 없다.
우리 공인회계 법인체들은 하루라도 빨리 공신력 있는 미국의 유수 공인회계 법인체와 협력하거나 경험있는 외국의 시스템 분석가들을 고가로 유치해 고급 경영진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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