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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돈 제대로 쓸 줄 모르면 ‘불행한 부자’

명호경영컨설턴트 2011. 6. 7. 08:18

 

 

돈 제대로 쓸 줄 모르면 ‘불행한 부자’

큰 부자에게 배우는 ‘이기는 기술’

53세 때 돈에 대한 집착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록펠러는 돈을 사회에 나눔으로써 다시 살아나 98세까지 살았다. 사진은 뉴욕의 록펠러 센터.

로마시대 아티쿠스라는 인물은 격동의 시기인 기원전 1세기의 로마를 살아가는 흥미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아티쿠스는 로마의 명문가에서 기원전 109년에 태어났다.

키케로보다 세 살 위, 카이사르보다 아홉 살 연상인데 키케로와는 아테네 유학 시절부터 우정을 나눴다. 카이사르와 키케로는 비운의 삶을 마감했는데 아티쿠스는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당대 최고의 부자였던 아티쿠스는 ‘처신의 달인’이었다. 그는 정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을 제일의 신조로 삼았다. 부모가 남긴 풍부한 유산을 바탕으로 금융업, 검투사 육성업, 출판업에 투자해 경제인으로 크게 성공했다.

정치인으로 개인적인 ‘축재’에 열심이었던 키케로에게 경제 고문과 같은 역할을 했지만 끝까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신조를 견지했다.

아티쿠스는 그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당대의 권력자인 폼페이우스는 물론이고 폼페이우스와 권력투쟁을 벌인 카이사르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권력의 한 축이었던 안토니우스와도 친밀한 관계였다. 정치인은 늘 자금난에 시달리고 돈이 필요하게 마련인데 아티쿠스는 정치인들을 후원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정치자금을 제공할 때는 신중에 또 신중을 기했다.

혹여 반대파들로부터 원성을 사지 않을까 자금을 줄 때도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원로원파인 키케로의 친구였던 아티쿠스는 그와 정파를 달리한 폼페이우스나 브루투스에게도 자금을 원조했다. 하지만 그뿐 표면적으로는 아무 관계를 갖지 않았다. 또한 자금을 준 것도 ‘융자’의 형태를 취해 반대파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해 두었다. 친구인 키케로에게는 필요한 물품이나 돈은 보내주면서 결코 직접 찾아가지는 않았다.

아티쿠스는 77세 때 불치병으로 쓰러져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격동의 시대에 재력가로서는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돈에 목매지 않아야 ‘행복한 부자’

재력가와 정치가의 결탁은 서로의 유익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익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에 사랑하며 쾌락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도 자신에게 유쾌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또한 그들은 상대의 인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유용하거나 유쾌한 범위 안에서 사랑한다. 따라서 이러한 친애는 다만 우연적일 따름이다. 한쪽이 더 이상 유쾌한 인물이 못 되거나 유익한 인물이 못 되면 다른 한쪽이 더 이상 그를 사랑하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익함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에게 얻을 어떤 좋은 것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자신이나 우리 사회에 그대로 대입해 놓고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줄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서로를 유쾌하게 생각한다. 무려 2350년 전에 쓴 이 글이 오늘날 인간관계의 핵심을 찌르고도 남는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대한 경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여기서 재력이나 권력의 정상에 오른 인간이 빠질 수 있는 오만, 즉 ‘히브리스(hubris)’에 대한 경계를 배울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비극에서 셰익스피어 비극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스’는 가장 낯익은 테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부와 명예에 도취되는 순간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벌을 받아 비극적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절대 강자에게는 대부분 이러한 히브리스가 있으며 분수를 모르는 오만으로 인해 파멸한다는 것이다.

‘석유왕’으로 불린 록펠러(John Davison Rockfeller, 1839∼1937)는 어쩌면 히브리스로 인한 파멸 직전에 극적으로 구원받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존 록펠러는 30세 때 이미 100만 달러를 가진 부자였고 40세 때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창립해 50세 때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됐다. 오늘날 빌 게이츠보다 무려 3배나 많은 재력을 보유할 정도였다.

그는 늘 돈에 배고픈 부자였다. 어떤 돈벌이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를 빼고는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돈을 벌었을 때는 모자를 바닥에 내던지며 의기양양 좋아했지만 손해를 보았을 때는 금방 병이 나곤 했다.

한번은 가격이 4만 달러나 되는 곡물을 5대호를 경유해 실어 나르게 됐는데 보험료 150달러가 아까워 보험에 들지 않았다. 그날 밤 폭풍이 엄습했다. 그는 짐을 잃어버리지나 않았을까 몹시 고민했다. 다음날 아침에 급히 보험에 들었다. 그런데 아무런 피해 없이 짐이 무사히 목적지에 닿았다는 전보가 왔다. 그는 150달러가 낭비된 것이 아까워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몸져누웠다고 한다.

황금이 축적될수록 록펠러는 불면에 시달렸다. 또한 그의 왕국은 하루아침에 붕괴 직전에 놓였다. 언론이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탄핵하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번민이 극에 달해 죽어가고 있었다. 53세 때 번민·탐욕·공포가 그의 건강을 좀먹고 있었다. 마침내 의사는 “돈이든 번민이든 생명이든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은퇴하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은퇴를 택했다.

걱정은 빨리 늙게 만들고 마음을 어지럽히게 한다. 심장병은 미국에서 1위를 차지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전사자 수는 30만 명가량이지만 같은 시기에 심장병 사망자는 200만 명에 달했다. 절반은 고민과 극도의 긴장이 그 병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의사는 록펠러에게 번민을 피할 것, 편안히 쉴 것, 조금 더 먹고 싶을 때 그만둘 것 등 세 가지 규칙을 내렸다. 그는 이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반성하면서 남의 일도 생각했다. 골프도 배우고 이웃과 잡담도 하고 노름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마쯤 돈을 벌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돈이 사람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시카고대가 빚으로 차압당하자 이를 갚아주었다. 다시 태어난 그는 행복했다. 번민하지 않았고 잠도 잘 잤다. 록펠러재단은 5000개 교회에 기부했다. 50대 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그는 98세까지 살았다.

‘배고픈 부자’는 ‘철없는 부자’를 키운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는 우리나라 부자들은 ‘배고픈 부자’들이 많다면서 그 자녀들은 아버지와 달리 ‘철없는 부자’가 되는 경향이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버는데 집착한 나머지 인색한 부자, 돈에 배고픈 부자이지만 그 아들은 반대로 아버지가 벌어놓은 돈을 펑펑 쓰는 철없는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녀는 돈에 ‘인색한 아버지’를 존경하지도 않는다. 자녀를 ‘철든 부자’로 만들려면 아버지가 이웃을 배려하고 베푸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배고픈 부자(1대)’에 이어 ‘철없는 부자(2대)’가 되면 결국 3대만에 다시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돈만 악착같이 모으는 ‘배고픈 부자’라면 50대 초의 록펠러의 모습이 될 개연성도 있다. 그의 자녀는 ‘철없는 부자’ 티를 낼 확률이 높다.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준 록펠러의 삶은 진정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록펠러는 돈에 배고픈 부자에서 기부에 배고픈 부자가 된 것이다. 아울러 재력을 가진 기업가라면 아티쿠스에게 ‘처신의 기술’을 배워봄직하다.

‘석유왕’ 존 록펠러(1839~1937)는 98세,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는 84세까지 살았다. 록펠러와 카네기의 공통점이라면 미국에 기부 문화를 만든 원조들이라는 것이다. 존 듀이는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가장 깊은 충동은 ‘인정받는 인물이 되고자 하는 욕망(the desire to be important)’이라고 했다.

록펠러는 ‘돈의 축적’이 아니라 ‘돈의 나눔’으로 사람들에게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이게 장수의 요인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게 자신도 살고 사회도 사는 길이다.

오늘 자신이 가진 것에 불만족스럽다면 카네기가 욕실에 적어 놓고 매일 아침 면도할 때마다 읽는 경구를 떠올려 본다면 위안이 되지 않을까.

“나는 신발이 없다고 한탄했는데, 거리에서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났다.”

최효찬 소장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비교문학 박사.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

출처 : 부동산 투자 귀신들의 모임-부귀모
글쓴이 : 강공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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