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3호 : 북한산 신라진흥왕 순수비 ↑
명칭:北漢山 新羅 眞興王巡狩碑 분류: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1기 지정일:1962.12.20 소재지: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 m 너비 69 cm이며,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국보4호 : 여주 고달사지부도 ↑
명칭:高達寺址浮屠 분류: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수량/면적:1기
지정일:1962.12.20 소재지: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이다.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있다.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 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돌은 8각이라기 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여 사실감이 느껴진다.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단한 힘이 느껴진다.가운데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지붕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듯한 보개(寶蓋)가 얹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 국보6호 : 중원탑평리 칠층석탑 ↑
명칭:聖住寺 朗慧和尙白月保光塔碑 분류: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1기
지정일:1962.12.20 소재지: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2 시대;통일신라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0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채 흙에 묻혀 있던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명칭: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분류: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수량/면적:1기
지정일;1962,12.20 소재지: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시대:백제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들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명칭:實相寺 百丈菴三層石塔 분류: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수량/면적:1기
지정일:1962.12.20 소재지: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 실상사 대장암 시대:통일신라
실상사는 지리산 천황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 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普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야기테크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국보 및 보물급의 조선백자 (0) | 2011.09.14 |
---|---|
[스크랩]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 (0) | 2011.09.14 |
[스크랩] [한글날] 잊혀져가는 옛날 말들 (0) | 2011.09.14 |
[스크랩] 우리나라의 등대 들 (0) | 2011.09.14 |
[스크랩] 전통 자료방 (0) | 2011.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