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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중에서

명호경영컨설턴트 2012. 10. 13. 20:32

 

# 1

1. 마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마음이란 진아 안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이다.그것은 모든 생각을 일으킨다.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따라서 생각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또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현상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마음이 진아 밖으로 나올 때 현상계가 나타난다.따라서 현상계가 나타날 때 진아는 나타나지 않으며 진아가 나타날 때 현상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본질을 끝까지 파고들어가면 마음은 진아를 떠나서 사라져 버린다.진아가 바로 아트만Atman 이다.마음은 항상 무엇엔가 의존하고 있으며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



2. 어떻게 하면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계속 탐구해 들어감으로써 가능하다.<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계속하면 다른 생각들은 모두 사라진다.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마치 다른 장작들을 다 태운 뒤에 스스로도  타버리는 불쏘시개 장작처럼 사라지는 때가 온다.그러면 그때 깨달음이 드러난다.


3.<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마음은 점점 그 근원으로 향하게 되고 생각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4.사실 마음과 호흡의 근원은 같다.

마음의 본질은 생각이고 최초의 생각은 <나>라는 생각이며 이것이 바로 에고Ego인데,바로 이 에고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호흡도 시작된다.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되고,호흡이 조절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호흡은 거칠은 형태의 마음이다.
호흡조절 훈련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호흡조절과 마찬가지로 신의 형상에 대해 명상을 한다든가,만트라(주문)를 외운다든가,음식을 절제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5.진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오직 진아만이 실재하며 현상계,개아(個我),신 등은 진아 안에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이 셋은 동시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진다.
진아는 <나>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바로 그 곳이며 <침묵>이라고도 한다.진아가 곧 현상계이고 진아가 곧 개아이며 진아가 곧 신이다.진아는 모든 것이다.


6.어떤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입니까?
자기 자신을 진아,즉 신*에게 완전히 던져 버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다.자기 자신을 신에게 던진다는 말은 진아에 대한 생각 외에는 어떤 다른 생각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진아 안에 몰입한다는 뜻이다.

짐이 되는 것은 모두 신에게 맡겨라.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다.지고한 신의 힘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는데,왜 우리들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가?

기차를 타면 기차가 모든 짐을 다 운반해준다.그런데 무엇 때문에 계속 짐을 머리에 이고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왜 짐을 기차에 내려놓고 편히 쉬지 못하는가?

(*라마나는 신이라는 말을 두 가지로 사용하였다.하나는 구체적인 이름과 특성을 가지고 있는,인간과는 분리된 존재로서의 신이고,다른 하나는 인간들이 진아를 인격적인 관점에서 인식하는 개념으로서의 신이다.라마나는 이러한 개념으로서의 신을 진아와 동의어로서 자주 사용하였다.바로 위 문장에서는 후자의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다.)



7.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은 바로 진아의 본질이다.행복과 진아는 다르지 않다.현상계의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우리는 무지로 인하여 어떤 대상으로부터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그러나 마음이 밖으로 향할 때,그것이 경험하는 것은 불행뿐이다.

어쩌다가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달성되면, 그 마음은 제자리로 돌아와 행복을 즐기지만,그것 역시 진아의 행복이다.즉,깊은 잠을 잘 때,삼매에 들었을 때,기절했을 때,그리고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마음은 내면으로 향하면서 순수한 진아의 행복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행복과 불행을 번갈아 경험한다.뜨거운 태양 아래에 있다가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오면 시원함을 느낀다.그런데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그늘 아래에서 안주한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아를 떠나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현상계를 헤매며 불행을 느끼다가,어쩌다가 한 번씩 진아로 돌아와서 행복을 경험한다.

사실 현상계란 생각의 집합체에 불과하다.현상계가 사라질 때,즉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 우리는 행복을 경험하며 현상계가 나타날 때 불행을 경험한다.



8.해탈이란 무엇입니까?
구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탐구해 들어가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 2

 

1.<진아(眞我)>
라마나 마하리쉬는 감각적으로 또는 생각을 통해 체험하는 자기는 <진정한 나>가 아니며 스스로 자기라고 동일시하는 것들을 다 부정한 다음에 남는 순수한 각성이 <진정한 나>,즉 <진아>라고 하였다.

개체적 자아란 본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이 거짓되게 만들어낸 것이고 <진정한 나>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그는 진아는 항상 실재하며 우리가 늘 체험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때는 오직 스스로를 한계짓는 경향을 가진 마음이 사라졌을 때뿐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음이 영원히 사라져서 진아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상태가 바로 깨달음이다.


2.<신(神)>
라마나는 우주는 진아의 힘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하였다.유신론자들은 보통 이 힘이 신에게서 기인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는 신이라는 단어를 진아와 동의어로서 가끔 사용하였다.마찬가지로 그는 힌두교에서의 지고의 존재인 브라흐만이나 시바를 진아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때 라마나가 말하는 신이란 구체적인 이름과 형상을 가진 신이 아니라 우주를 유지하는 무형의 존재다.

신은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며 우주는 신의 본래적인 힘이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따라서 우주로부터 신을 분리할 수는 없지만,우주가 나타나든 사라지든 신은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3.<무엇이 실체입니까?>
항상 실재하는 것만이 실체다.그것은 형태도 이름도 없지만 모든 형태와 이름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그것은 제한되어 있는 것들의 근간을 이루지만 스스로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언어를 넘어서 있으며 <존재,비존재> 등의 표현조차 넘어서 있다.
이 실체가 외면으로 나타난 모습이 바로 침묵인데,깨달은 사람들은 그것이 진정한 지혜의 최종적 상태이며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상태라고 선언하고 있다.



4.<진아를 깨닫게 되면 무엇을 보게 됩니까?>
보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이 그냥 존재할 뿐이다.깨달음의 상태란 뭔가 새로운 것을 얻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그대가 지금 존재하고 또 항상 존재하여 왔던 그 상태로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다만 진실 아닌것을 진실로 고집하지만 않으면 된다.그때 그대는 진아를 진아로서 깨닫게 될 것이다.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대는 그토록 분명한 진아를 발견하려고 애썼던 그대 자신에 대해서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깨달음의 상태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을 초월해 있다.지금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그 <보는 자>가 사라지고 진아만이 남게 된다.



5.<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아(自我)들이 육체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어떻게 진아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인정하면 무수한 자아들이 있게 되지만,이 생각이 사라졌을 때 진아가 나타난다.그리고 그 상태에서는 진아와 분리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진아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하는 것이다.

진아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육체는 결코 실재하지 않으며,착각의 힘에 의해 왜곡된 마음의 외향적인 측면에서 볼 때만 육체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따라서 진아가 육체의 주인이라고 보는 것은 그릇된 견해다.이 세상은 육체를 통해 존재하고,육체는 마음을 통해 존재하며,마음은 의식으로 인해 존재한다.그리고 이 의식은 실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진아를 간파해 버린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진아 외에는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왜? 육체를 <나>와 동일시하던 에고가 사라져 버리고,그는 형태 없는 존재,즉 의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곧 진아라는 사실을 알며 진아 외에는 육체나 그밖의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이와 같은 사람에게 육체가 있고 없음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6.<우리의 본질이 행복 또는 지복이라고 하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입니까?>

진아의 본질이 바로 행복이다.진아는 완전한 행복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오직 행복만이 존재한다.이 사실을 깨달아 진아안에 머물면서 영원히 지복을 누리도록 하라.

사람은 깊이 잠들었을 때 아무런 재산도,그의 육체조차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그런데 불행해지기는 커녕 매우 행복감을 느끼며 누구나 다 깊이 잠들고 싶어한다.결국 행복이란 인간 속에 내재해 있으며 결코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서 생기지 않는다.그 무한한 행복의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결국 진아를 깨달아야만 한다.


7.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육체가 곧 나>라는 그릇된 생각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며 이 그릇된 생각이 사라지면 깨달음이 드러난다.깨달음이란 새로운 어떤 것을 얻는 것도 아니고 질이 변화 되는 것도 아니다.모든 그릇된 것들이 사라지면 깨달음이 자연히 드러날 뿐이다.

궁극적인 진리란 지극히 단순하다.그것은 원래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며 이 이상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다.


8.그대는 그대의 무한한 본성에 스스로 제한을 가한 다음,자신이 제한되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슬퍼하고,그 존재하지도 않는 제한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런저런 수행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대는 무한하며 순수한 진아라는 사실을 알아라.그대는 항상 진아이며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본래 자유로우면서도 왜 저희들은 항상 구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항상 홀 안에 있으면서 왜 그대들은 세계일주를 떠나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고생고생하면서 헤매인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모두 마음이며 마야(maya 환영)다.


9.<이와 같은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계속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사나(vasana 개개인의 잠재적인 마음의 경향성)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그것이 있는 한,의심과 혼동은 남는다.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모든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며 그 뿌리를 잘라버려야 한다.

우선 진리를 들어야 하며,그 다음 진리를 되새겨 보고 진리에 대해서 명상해야 한다.이 두단계의 과정을 통해 마음의 경향성은 점차 뿌리가 뽑히고 무력하게 된다.

# 3

 

1.<마음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은 <나라는 생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마음과 에고는 똑같으며 지성,기억 등의 정신적 속성도 역시 마음이다.또한 개체적 영혼이라는 것도 마음과 다르지 않다.

2. 밖으로 향하려는 마음의 습성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바로 그 순간 이 질문을 함으로써 그 생각을 없애야 한다.비본질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이 바로 무집착 또는 무욕이며,진아를 떠나지 않음이 지혜다.


3.<저는 <나>가 일어나는 근원에 대해서 탐구하다 보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고요한 마음 상태에 도달합니다.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텅 빈 상태만이 있읍니다.은은한 빛이 충만하고 저는 그것이 육체가 아닌 상태의 저 자신이라고 느낍니다.저는 육체나 다른 형상들을 인식하지도,보지도 않습니다.그 체험은 거의 30분 정도 지속되며 제게 기쁨을 줍니다.영원한 행복(자유 또는 구원,뭐라고 불러도 좋지만)을 얻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경험이 몇 시간,몇 일,또는 몇 달 동안 지속되도록 계속 수행해 나가기만 하면 됩니까?>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그와 같은 상태를 <마노라야 Manolaya>,즉 <일시적으로 생각이 가라앉은 상태>라고 한다.마노라야는 일시적으로 생각의 움직임을 정지시킨 집중을 의미한다.이 집중 상태가 끝나면 바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그 전처럼 밀려든다.

이와같이 일시적으로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가 설사 천 년 동안 계속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탄생과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불리워지는 상태,즉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로 이끌지는 못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런 체험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그 즐거움을 아는 자가 누구인지 내면에서 탐구해야 한다.이런 탐구를 하지 않으면 그는 오랜 동안의 황홀경이나 깊은 수면 상태에 빠질 것이다.수행을 해 나가는 도중 이 단계에서 적절한 인도가 없음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자유에 속아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오직 소수만이 가까스로 무사히 목표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생각이 가라앉는 이러한 상태에 빠져서는 안된다.이 상태를 체험하면 즉시 의식을 회복해서 이 고요함을 경험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내면에서 탐구해야 한다.다른 생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동시에 이와 같은 깊은 수면 상태,혹은 자기 최면 상태에 빠져서도 안된다.
쉽고,직접적이며,가장 빠른 지름길은 자아 탐구의 방법이다.자아 탐구를 통하여 생각들은 점점 깊어지고,근원에 이르게 되며 그 근원 속으로 녹아들게 된다.그때 그대는 내면으로부터의 반응을 느끼게 될 것이며 모든 생각들이 일시에,그리고 영원히 사라짐으로써 그대가 그곳에서 휴식하고 있음을 발견 할 것이다.


4.인간이 스스로를 행위자라고 생각하는 점이 문제다.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모든 행위는 <더 큰 힘>이 하고 있으며 인간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만약 인간이 이와 같은 태도를 받아들이면 그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만,그렇지 않으면 그는 고통을 자초한다.

예컨대 어떤 사원의 탑은 밑부분이 사람의 입상(立像)으로 되어있는데,그 입상의 자세와 표정은 마치 그 사람이 탑 전체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그러나 생각해보라.탑은 땅 위에 세워져 있으며 땅 밑에는 탑을 받치는 기초가 되어 있다.따라서 그 입상은 탑의 일부분인데도 불구하고 탑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는듯한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다.우습지 않은가?자기 자신이 헹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5.깨어 있을 때,꿈꿀 때,잠잘 때의 어느 경우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수행이 최고의 수행이다.또한 수행은 <나는 지금 수행하고 있다>라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해야 한다.


6.<세속의 일 가운데에서 분주하면서도 삼매를 즐길 수 있습니까?>
<내가 일한다>는 느낌이 장애다.스스로에게 <누가 일하는가>라고 물어보라.그대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그러면 일은 그대를 속박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진행될 것이다.일을 하겠다는 노력도,출가를 하겠다는 노력도 하지 말라.그대의 그 노력이 장애가 된다.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은 일어날 것이다.그대의 운명이 일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면 그대가 아무리 일하려 해도 안 될 것이요,일하게 되어 있으면 어쩔 수없이 일하게 될 것이다.그것을 <더 큰 힘>에게 맡겨 버려라.그대는 그대가 바라는 대로 출가할 수도 없고,남아 있을 수도 없다.



7.<저는 다른 사람보다 머리를 많이 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어떻게 하면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을가요?제가 지금 맡고 있는 이 직책을 포기하고 홀로 있고 싶습니다.>
아니다.그대는 지금 다니는 직장에 계속 다니면서 그 일을 계속해도 괜찮다.마음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만드는 내면의 흐름은 무엇인가?그것은 진아다.따라서 진아가 그대 행위의 진정한 근원이다.일하는 동안에 진아를 놓치지 않도록 하라.일하는 동안에도 그대 마음의 배후에 주의를 기울여라.서두르지 말고 그렇게 하면서 일하는 시간을 그대의 시간으로 만들어라.

일하는 동안에도 그대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주의를 놓치지 말고 또 서두르지 말라.서두르면 그대는 놓치게 된다.일을 하고 있는 것이 그대라고 생각하지 말라.일을 하고 있는 것은 내면의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그대 자신을 그 흐름과 동일시하라.그대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해 나가면,그대의 일이 장애가 되지 않는다.


8.<초기 단계에서는 홀로 있으면서 외부적인 의무를 포기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포기라는 것은 항상 마음 속에 있는 것이지 숲속 같은 조용한 장소에 간다거나,의무를 포기하는 데에 있지 않다.중요한 것은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고 안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여기로 오든 저기로 가든,또는 의무를 포기하든 포기하지 않든,그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다.

그런 모든 것들은 운명에 의해서 진행된다.육체를 통한 모든 행위는 육체가 처음 탄생했을 때에 이미 결정지워져 있다.그대가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상관이 없다.그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유는 그대의 마음을 안으로 향하게 하여 거기에서 행위자를 포기하는 것이다.

 

# 4

 

1. 삼매(Samadhi 三昧) - 실체에 대해 각성하고 있는 상태가 삼매다.
(1)본연적 무상(無相) 삼매 - 이는 완전하게 자신의 에고를 제거한,깨달은 사람의 상태다.인위적인 노력은 전혀 없는,원천적이고,순수하며,자연스러운 상태이다.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보통사람들과 어울려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살아나갈 수 있다.자신이 진아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이 삼매를 얻은 사람은 자신과 타인,그리고 자신과 세상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는다.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진아 아닌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2)일시적 무상 삼매 - 이는 깨달음 이전의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진아를 각성하는 상태가 있다.그러나 아직 에고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이 단계의 특징은 육체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점이다.비록 진아를 일시적으로 각성하기는 하지만,감각을 느낄 수도 없고 제대로 생활해 나갈 수도 없다.육체에 대한 의식이 되돌아 오면 에고가 다시 나타난다.실체에 몰입되어서,현상계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3)유상(有相) 삼매 - 이 단계에서는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진아에 대한 각성 상태가 유지된다.이 삼매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잇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얼마나 노력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진아에 대한 주시가 흔들리면 진아에 대한 각성 상태가 흐려진다.



2.<언제부터 본연적 무상 삼매를 위해 수행해야 합니까?>
처음부터 해야한다.일시적 무상 삼매는 설사 수십 년 동안 계속된다 하더라도 바사나(마음의 경향성)가 뿌리뽑히지 않는 한,결코 자유를 주지 못한다.


3.자아 탐구를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며,진아를 깨닫게 되면 모든 세계가 다 진아 안에 있음을 볼 수 있다.만물의 근원은 진아이며 진아를 깨달으면 진아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4.<때때로 저는 내면에서 나는 소리를 듣습니다.이런 일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이 소리를 듣는 자가 누구인가>라는 식으로 자아 탐구를 계속해야 한다.그러면 결국 실체에 이를 것이다.

5.<저는 수행 도중 무념(無念)의 상태에 이르면 상당한 즐거움을 만끽합니다.그러나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어떠한 체험을 하더라도 그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즐거움을 느끼든,두려움을 느끼든 그것들을 느끼는 자가 누구인지를 물으면서 수행을 계속해 나아가,즐거움과 두려움 등을 모두 초월한 경지,즉 모든 이원성이 사라지고 실체만이 남은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거나 또는 그런 체험을 하는 데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그러나 거기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예컨대 생각이 가라앉을 때에 경험하는 라야(laya)의 즐거움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모든 이원성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탐구해 나가야 한다.

6.수행의 마지막 장애가 황홀경이다.사람들은 그 상태에서 커다란 행복을 느끼고 그 상태에 머무르려 한다.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고요함이 충만한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그 고요함은 황홀경보다 더 높은 차원이며 삼매 속으로 흡수된다.

삼매에 들어가면 깨어 있으면서 잠자는 듯한 상태가 나타나며,그 상태에서 그대는 그대가 항상 의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의식은 그대의 본성이기 때문이다.실제로 인간은 항상 삼매 속에 있으나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며,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장애물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7.<생각이나 욕망의 유혹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또,생각을 조절하려면 어떻게 제 생활을 통제해 가야 합니까?>

그대가 진아에 고정되면 될수록 다른 생각은 저절로 사라져 간다.마음이란 생각의 다발일 뿐이며,<나라는 생각>이 모든 생각의 뿌리다.이 <나>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를 발견하면, 모든 생각이 진아 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린다.

생활을 통제하는 것,즉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목욕하고 주문을 외우며 의식(儀式)을 집행하는 그런 것들은 자아 탐구의 방법을 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택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지,자아 탐구의 방법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규칙이나 훈련들은 다 필요가 없다.

8.<계속 노력을 하는 데에도 마음이 내면으로 향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꾸준히 그리고 냉정하게 계속해 나가야 하며,그 효과는 점차적으로 나타난다.
자기가 들어가 있는 외양간에 풀이 잔뜩 쌓여 있음을 모르는 암소는 자꾸 외양간 밖으로만 나가려고 하는데,마음이 꼭 그와 같다.암소 주인이 아무리 달래고 끌어도 암소는 말을 듣지 않고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고 한다.어쩌다가 풀을 한입 먹게 되어도 지금까지 해오던 버릇이 있어서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 하지만 계속 주인이 달래면서 풀을 조금씩 자꾸 먹이다 보면 암소는 점차 풀맛에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외양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마음도 마찬가지다.일단 내면의 행복을 발견하면 결코 밖으로 헤매지 않는다.


9.<그렇다면 이 현상계는 꿈과 다를 바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대가 꿈을 꾸는 동안 느끼는 실체감에 잘못된 것이 있는가?그대는 완전히 불가능한 꿈,예컨대 죽은 사람과 행복하게 대화를 나누는 꿈을 꿀 수도 있다.꿈 속에서도 잠시 동안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던가?>라고 의심할 수도 있으나 그대의 마음은 다시 꿈 속에 빠져 버리고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과 똑같이 보인다.다시 말해서 꿈은 그대가 그 꿈의 실체를 의심하도록 그냥 놔두지 않는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마찬가지다.깨어 있는 동안에는 또 그 세계의 실체를 의심할 수가 없다.그 세계를 만들어낸 바로 그 마음이 어떻게 그 세계를 실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할 수 있겠는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세계와 꿈꿀 때의 세계를 비교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둘 다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며,마음이 어느 하나에 몰두해 있는 한,그것의 실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마음이 꿈꾸는 동안은 꿈 속 세계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으며 마음이 깨어있는 동안은 그 상태에서 나타나는 세계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내면으로 돌려서 내면에 머무르게 한다면,다시 말해서 모든 것의 근원인 진아에 대해서 항상 주의를 놓치지 않는다면,그대는 지금 그대가 보고 있는 세계가 마치 그대가 꿈 속에서 보았던 세계처럼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 5

 

1.<신지학(神智學)에서는 죽은 다음 다시 태어나기 까지에는 50년내지 10,000년이 걸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왜 그렇습니까?>


어떤 의식 상태를 측정하는 기준과 다른 의식 상태를 측정하는 기준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따라서 그러한 측정의 척도는 절대적이지 않다.다시 태어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해해야 될 것은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개체적 영혼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각자의 생각하는 마음이 그런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는 사실이다.마음은 어떠한 상태,어떠한 차원에 있든 거기에 맞는 체(體,body)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즉,물질 세계에서는 물질적 육체를,꿈의 세계에서는 꿈의 체를 만들어내는데,이 꿈 속에서의 체는 꿈 속에서 비가 오면 젖고 꿈 속에서 병이 들면 아파한다.물질의 육체가 죽으면 마음은 일정 기간 동안 마치 꿈 없는 수면 상태에서처럼 정지하는데,그때에는 물질 세계도 없고 육체도 없다.그러나 곧 다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체(아스트랄 세계에서의 아스트랄 체)를 받아 활동하게 되며,그러다가 다시 물질적 육체를 받아 재생한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사라져 버린 깨달은 사람은 죽음에 의해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다시 생겨나서 탄생과 죽음을 일으키지 않는다.그에게 있어서는 환상의 고리가 영원히 풀어져 버린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탄생도 죽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탄생과 죽음이 실재한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계속 유지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며,이는 깨달음에 의해서 완전히 사라진다.



2.나무의 가지를 잘라도 다시 가지가 자라나는 것을 보아라.뿌리가 다치지 않고 남아 있는 한,나무는 계속 자란다.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아 일시적으로 가슴 속에 가라앉은 업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때가 오면 다시 재생을 일으킨다.그와같이 하여 인간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3.<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영혼들과 이 드넓은 우주가 어떻게 가슴 속에 가라앉은 그 미세한 업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습니까?>
거대한 보리수가 아주 작은 씨앗에서 생겨나듯이,이 수많은 영혼들과,온갖 이름과 모습으로 가득찬 이 드넓은 우주도 미세한 업으로부터 생겨난다.



4.그대가 이번에 탄생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를 계속 파고들어가다 보면 그대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며,그 진리가 그대의 모든 업을 태워 버려 그대를 탄생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이다.산더미처럼 쌓인 화약도 성냥불 하나로 순식간에 다 타버리듯이 무수한 생에 걸쳐 쌓아온 과거의 업도 아주 작은 깨달음의 불꽃에 의해 타버린다는 사실이 경전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거대한 현상계와 이 거대한 현상계를 연구하는 그 방대한 학문의 지식은 모두 에고에서 기인한다.자아 탐구에 의해서 에고가 사라지면 이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진아만이 남는다.



5.<그렇다면 인간의 자유란 무엇이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유는,깨달음을 추구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육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뿐이다.육체는 프라라브다 카르마(현생에서 받아야 하는 과거생에 의해 축적된 카르마들의 일부.운명으로 인식되기도 한다.)에 의해 이미 결정된 행위들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이때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그 육체의 행위에서 파생되는 열매에 집착할 것인지,아니면 동일시로부터 벗어나서 단순히 그 육체의 행위들을 지켜보는 자로 남을 것인지,그 선택에 있어서 인간은 자유롭다.



6.<이 세상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그리고 그 고통을 벗어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개인 또는 집단으로서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진아를 깨달아라.그것이 필요한 전부이다.


7.<수많은 제약으로 가득찬 이 삶 속에서 제가 진아의 지복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진아의 지복은 언제나 그대와 함께 있다.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진정으로 찾고자 노력한다면,그대의 힘으로 그것을 찾을 수 있다.그대의 불행의 원인은 그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내면,즉 에고에 있다.그대는 스스로 자신에게 한계를 지어 놓고 다시 그것들을 넘어서려고 애쓰고 있다.
모든 불행은 에고 때문이며,에고와 함께 모든 문제가 생긴다.불행의 원인이 그대의 내면에 있기 때문에 세상탓을 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그대의 바깥에 있는 것들로부터 무슨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설사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그대가 에고를 부정하고 무시함으로써 에고를 없애면 그대는 자유를 얻을 수 있으나,에고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대를 제약하고 그대로 하여금 그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헛된 노력을 하도록 만들 것이다.

진정한 그대 자신인 진아를 깨닫는 것만이,항상 그대와 함께 있는 지복을 깨닫는 유일한 방법이다.



8.<진정한 의미에서 구속도 자유도 없다면 실제로 여러 가지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에만 그것들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그것들은 실재하지 않는다.


9.<저희들은 이 세상 속에서 고통을 봅니다.어떤 사람이 굶주리고 있을 때,그 굶주림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실재적입니다.그런데 그것을 단순히 꿈이라고 하면서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깨달음,또는 실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대가 말하는 그 고통은 분명히 하나의 꿈이다.꿈 속에서도 그대는 배고픔을 느끼며,다른 사람이 배고픔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본다.또 그대는 자신의 배고픔을 채우기도 하고,다른 배고파하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한다.
꿈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그 꿈 속의 배고픔이 마치 그대가 지금 이 세상에서 배고픔을 느끼듯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그 꿈 속의 배고픔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대가 깨어난 다음이다.

배부르게 먹은 다음 잠자리에 들어가서는,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하루 종일 일을 열심히 해서 매우 피곤하고 또 배가 고파 잔뜩 먹고 싶어하는 꿈을 꿀 수도 있다.그러나 꿈을 깨어 보면 그대의 배는 불러 있고 그대는 침대에서 나오지조차 않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꿈을 꾸는 동안에 그 꿈 속에서 느끼는 고통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꿈 속에서 느끼는 배고픔은 꿈 속에서의 먹을 것으로 해소해야 하며,꿈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보면 꿈 속에서의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꿈 꾸는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를 섞어 놓을 수는 없다.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하여 이 환상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사회적 봉사를 해야 한다.그러나 그렇게 할 때에도 <내가 행위자>라는 느낌을 갖지 말고,<나는 신의 도구>라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결코 자신에게 속아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 주고 있다.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며 나는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다.나는 우월하고 그는 열등하다.>
그대는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신을 경배하는 수단으로 그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한다.이런 모든 봉사도 결국 그대를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그대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을 돕고 있을 뿐이다.



10.<결국 항상 내면만을 봐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
<현상계는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됩니까?>
현상계에 대해서 눈을 감아 버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단지 <먼저 그대 자신을 보고 그리고나서 현상계 전체가 진아임을 보라>는 의미다.그대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고 있는 한은 현상계가 외면적인 것으로 보이지만,그대가 진아가 되면 현상계는 브라흐만으로 나타난다.


11.<자신이 그릇된 행위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더 큰 악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면, 그 행위를 해야 합니까,하지 말아야 합니까?>
무엇이 옳고,무엇이 그른가?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기준이란 없다.개개인의 기질에 따라,그리고 상황에 따라 의견들은 서로 달라진다.또한 그것들은 결국 생각일 뿐이다.옳고 그름에 대해서 신경쓰지 말고 대신 생각을 없애라.그대가 진정한 옳음에 안주할 때,그 옳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12.<올바른 행위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까?>
구원을 바라는 자는 누구이며 구원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또,올바른 행위란 무엇인가?아니,행위란 무엇이며 올바름이란 무엇인가?올바름과,그름을 판단하는 자는 또 누구인가?

인간들은 각자 자신의 카르마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만,실체를 알아야만 옳고 그름에 대한 진리도 알 수 있다.가장 좋은 방법은 구원을 바라는 자가 누구인지를 찾는 방법이다.누구에게나 공통적인 올바른 행위란 바로 이 <누구>,또는 에고의 근원을 추적하는 행위다.

 

 

 

출처 : 부동산 투자 귀신들의 모임-부귀모
글쓴이 : 강공석(Yes! 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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