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꿈을 현실로 만든 이들의 무수한 사례가 우리의 삶에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글을 옮겨 봅니다. 자칫 살아가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잊고 살지나 않는지, 다시한번 자신의 꿈을 다잡을 기회가 되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오스트리아의 한 학교에는 ‘말라깽이’라고 놀림을 받는 빈약한 체구들의 소년들이 각 반마다 여러 명씩 있었다.
친구들로부터 ‘홀쭉이’‘말라깽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년들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심적 고통을 겪었다.
‘우람한 근육질의 몸매를 가지고 싶다’
놀림을 받을 때마다, 말라깽이 소년들의 가슴 속에서 외치는 무의식 세계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년들은 이 목소리를 부정하거나 그냥 흘려 버렸다.
극히 소수의 학생만이 이 목소리에 응답해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학생들마저도 점차 부정적이 되어 갔다.
체육관을 찾는 학생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단 한 명만 남게 되었다.
“너무 힘들다. 꼭 이래야만 하는 거니? 다른 친구들도 다 그만 뒀잖아. 여기서 그만 둔다고 누가 뭐라 하겠어. 그냥 옛날로 돌아가면 안 될까? 헤라클레스같은 근육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체육관의 헬쓰기구에서 풍겨나오는 이 쇠비릿내! 이젠 정말 싫다. 싫어!”
의식세계의 자아는 갖가지 현실적인 이유를 대며 소년에게 그만 운동을 포기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너 요즘도 매일 체육관에 다닌다며? 꿈깨라. 너는 체질적으로 보디빌더가 될 수 없어.”
“가죽에 바람 집어 넣는다고 그게 살이 되냐? 안쓰럽다, 안쓰러워. 너무 과도한 운동은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는 말도 모르니? 이러다 너 진짜 잘못되면 심장마비로 죽게 될지도 몰라! 적당한 선에서 그만 둬라.”
주위 사람들 역시 하나같이 소년에게 운동을 그만둘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소년은 무의식 세계가 보여주는 ‘꿈’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자신의 몸이 태산처럼 커지는 꿈에 취할 대로 취한 소년은, 전문 보디빌더들도 극심한 신체적 고통을 느끼고 휴식을 취하게 되는, 체력극한점을 도달하고도 매일 서너시간씩 운동을 더 했다.
한계를 초월한 소년의 노력은 무의식 세계가 그려내는 완벽한 신체를 점점 현실 속으로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소년은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의 우승자가 되고, 세계 육체미 대회를 10여 차례나 석권하는 꿈의 주인공이 된다.
그의 이름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이다.
한국의 성공자들 역시 벼랑끝에서 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불치병인 근육무력증에 걸려 5년간이나 침대생활을 할 때, 한국에서 가장 바르고 정직한 기업을 세우겠다는 꿈을 세웠다. 지금의 이랜드 박성수 사장이다.
또 어떤이는 사업에 실패한 뒤 해결사에게 언제 죽을지 몰라 가슴에 유서를 품고 다닐 때, 전국을 제패하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사업체를 세우겠다는 꿈을 세웠고 그 꿈은 결국 이루어 졌다. 해리코리아의 김철윤 사장이다.
또 다른 이는 한강 둔치에서 3년째 노숙생활을 할 때 세계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졌다. 지금의 에센시아 대표 신충식 사장이다.
다른 많은 성공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휠체어 소년과 한쪽 팔이 없는 남자.
몇 년째 휠체어에서 생활하는 소년이 있다. 아주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절대로 가져서는 안될 꿈을 갖고 말았다.
우연히 체육관에 들렀다가 높이뛰기 연습을 하는 선수들을 보고 “멋지다.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안타까운 친구야! 먼저 자네 병이나 나은 다음에 그런 생각을 해야지. 운동선수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도 되기 힘든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난 믿어요.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을요. 그러니 지켜봐 주세요.” 라고 대답하곤 하던 이 소년은 드디어 오늘 아침 체육관 문을 두드렸다.
한쪽 팔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막무가내다. 축구선수, 그것도 세계적인 선구가 되겠다며 그라운드에서 셔츠를 땀에 적셔 가며 매일 공을 차고 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마다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이렇게 충고한다.
“이봐요, 외팔이 아저씨, 정신 좀 차려요! 당신은 절대로 축구선수가 될 수 없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 사람은 어깨를 한번 으쓱한 뒤, 이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공을 쫓아 그라운드를 질주한다.
“저런! 당신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군요! 잘 생각해 보세요. 난 팔 하나가 없어요. 그러니 난 그만큼 가볍고 그만큼 빨리 달릴 수 있죠. 내 몸은 엄청난 축구 경쟁력을 갖고 있는 거라구요.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뿐이랍니다.”
소아마비 장애인과 근육마비 청년
소아마비 장애인이 있다.
이 사람의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보다 6cm나 짧습니다. 게다가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다. 왼쪽 다리도 정상이 아니다. 안으로 묘하게 굽어져 있다. 한마디로 보호장비 없이는 걷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의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 확률 0.1%도 안되는 꿈을 세웠다.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꿈을 세운 것이다.
오늘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축구장으로 향한 이 사람은 연습을 하기에 앞서 자신의 신념을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0.1%를 쌓고 또 쌓으면 언젠가는 100%, 200%가 된다. 자, 그러니 부정적인 생각일랑 버리고 연습 또 연습을 하자.”
얼굴근육이 마비된 채로 태어나 말을 제대로 못하는 청년이 있다. 게다가 한쪽 귀마저 멀었다.
그런데 이 청년의 꿈이 말로 벌어먹고 산다는 정치가가 되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의 동정표를 기대할 수 있는 지역 의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나라의 총리가 되겠다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선거유세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사람들의 편견은 어떻게 극복하지요? 반대파 사람들의 인신공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대비책은 있습니까?”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 대신 활짝 웃는 얼굴로 응답한 이 청년은 오늘 총리로 향하는 첫 관문인 국회의원에 입후보했다.
반식물인간 대학생과 귀머거리 소녀
왼쪽 손가락 두 개와 얼굴 근육 일부분밖에 움직일 수 없는 대학생이 있다.
몇 달전 루 게릭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반식물인간이 된 이 대학생은 남은 평생을 휠체어에서 살아가야 한다. 잘못하면 1, 2년 사이에 죽을 수도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갑자기 닥쳐온 지옥 같은 불행 앞에서 그러나 이 대학생은 웃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내 몸은 매일 빠르게 죽어가고 있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박사학위를 따고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꿈이 있기에 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타악기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한 소녀가 있다. 당연히 이 소녀의 꿈은 타악기 연주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타악기 연주자가 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다. 귀머거리이기 때문이다.
모든 음악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타악기 연주는 극도로 섬세한 청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여러 가지 종류의 북과 각종 건반 악기,거기다 특수 타악기까지 무려 오십여 종이 넘는 악기들을 다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명백해 보이는 불가능 앞에서 그러나 이 소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어. 내 모든 것을 걸고 꿈을 향해 나가자. 그러면 언젠가는 문이 활짝 열릴 거야. 반드시 그럴 거야.”
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루어 질 수 없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이 사람들의 ‘꿈’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놀랍게도 이 사람들의 ‘꿈’은 전부 이루어졌다.
금메달리스트와 월드컵 우승선수
1900년 파리 올림픽에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높이뛰기 경기장에 휠체어를 탄 선수가 입장하더니 곧바로 경기에 출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레이 유리라는 이름의 이 선수가 높이뛰기, 세단뛰기에도 출전하더니 이 두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땄기 때문이다.
휠체어 위에 앉아서 꾸었던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레이 유리는 이후 3회의 올림픽에 더 출전했고 거기서 총 7개의 금메달을 땄다.
현재 그는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1930년 제 1회 FIFA 월드컵 대회 결승전, 매우 불안정한 포즈로 마치 광대춤을 추듯 좌우로 기우뚱거리며 그라운드를 내달리던 한 선수의 발에 공이 걸렸다.
공은 이내 역전 결승골로 연결되었고 이 골로 말미암아 우루과이는 제 1회 월드컵 우승국가가 되었다.
역전골을 성공시킨 영광의 주인공은 카스트로, 어릴 때부터 오른팔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와 총리
1962년 칠레 월드컵 브라질 대 칠레의 준결승전, 축구 황제 펠레가 부상을 당해 벤치에 앉아 있는 가운데 한 선수가 잔디 구장을 나는 듯이 달려서 연속적으로 두 골을 성공시키자 경기장은 관중들의 전율섞인 함성으로 달아올랐다.
브라질에 우승을 안겨 준 두 골의 주인공은 소아마비에 걸린, 달리는 모습마저 위태해 보이는 가린샤라는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보호장비없이는 걷기도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던 가린샤는 열일곱살에 국가 대표 축구 선수가 되었고, 총 3회의 월드컵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했으며 선수생활 11년동안 54경기에 출전하여 34골을 득점했다.
1963년 캐나다 퀘백주, 한 젊은이가 눈에 뜨거운 물줄기를 가득 담은 채 지지자들의 손을 일일이 맞잡으며 당선사례를 하고 있었다.
스물아홉 살인 이 청년의 이름은 장 크레티앙, 언어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꿈은 정치가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국회의원에 입후보했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정치경력도 없고 거기다 언어장애까지 있는 사람이 국회에 나가서 대체 뭘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반대파의 집요한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러분,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맞서며, 선거유세를 훌륭하게 치러 냈던 장 크레티앙은 그 뒤로도 16년간이나 정부요직을 두루 거치며 유능한 정치가로 활동했고 부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1993년, 드디어 총리에 당선된 장 크레티앙은 그 이후로 세 번이나 총리에 당선되었다.
캠브리지 대학교 교수와 타악기 연주자
1997년 캠브리지 대학교, 강의를 마친 한 교수가 학생들의 경외심어린 기립박수를 받으며 교수실로 향했다.
교수의 이름은 스티븐 호킹, 14년 전 루 게릭병에 걸려 반 식물인간이 되고서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던 바로 그 대학생이었다.
스티븐 호킹은 휠체어에 앉게 된 뒤 박사 학위를 땄고, 영국 학술원 최연소 회원이 되었으며 캠브리지 대학 중력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1990년대 후반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회장, 각종 타악기들이 빼곡히 들어찬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뉴욕 필하모니 연주단이 U자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맨발의 타악기 연주자와 뉴욕 필하모니의 협연이 이루어졌다.
뉴욕 필하모니는 천상의 선율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이에 맞춰 타악기 연주자가 무려 50여 종에 이르는 타악기를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타악기 연주자는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북과 징을 쳤고 마람바와 비브라폰을 두드렸으며 심벌즈와 케스트네츠를 쳤다.
한 곡 한 곡 연주가 끝날 때마다 관객들은 뜨거운 기립박수로 화답했고 뉴욕 필하모니와 타악기 연주자는 더욱 신명나게 음악을 연주했다.
이날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타악기 연주자의 이름은 애블린 글레니.
20여 년 전, 소리를 들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믿으며 매일같이 타악기 연주실로 향했던 바로 그 귀머거리 소녀였다.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몸으로 소리를 듣는 법을 터득했다.”고 말하는 애블린 글래니는 삼십대 중반에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자의 반열에 올랐고, 10장 이상의 음반을 냈으며, 매년 120회 이상의 타악기 연주회를 갖고 있다.
당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다.
당신이 ‘이것 때문에.... 나는 안 돼’라고 생각하는 것이 위의 사람들이 처했던 조건보다 더 심하지만 않다면, 지금 바로 도전하라.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반드시...
포기하지만 않으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주변에서 ‘꿈’의 성취를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게 된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꿈은 꿈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을 더 많이 접하게 된다.
“나는 할 수 있어. 너도 할 수 있어. 우리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나는 안 돼. 너라고 될 줄 알아? 우리는 전부 다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을 더 많이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갖기를 두려워 하고, 꿈이 생겨도 적극적으로 추구할 용기를 갖지 못하고, ‘꿈’을 가졌다가도 이내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과연 부정적인 사람들의 의견이 옳은 걸까?
‘꿈’의 성취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안 돼”라고 씌여진 검은 안경을 쓰고 ‘꿈’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간절하게 ‘꿈’을 가져 본 적도, 끝까지 ‘꿈’을 믿어 본 적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꿈’을 추구해 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꿈’을 이룬 사람들은 그들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지만...
강영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전공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교수, 인디애나 주정부 특수 교육 부장, 루즈벨트 재단 고문, 백악관 정책 차관보, 유엔 장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시각장애인의 몸으로 이 모든 일을 해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나는 열세 살에 시력을 잃고 열여덟 살에 중학교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여러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김태연
1985년, 40세의 나이로 세 아들을 데리고 버몬트로 떠나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실리콘밸리를 주름잡고 미국 최대의 태권도 도장을 세우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였다.
겨우 85명의 수련생으로 시작한 태권도 도장 ‘정수원 아카데미’는 현재 미국 서부 최대의 태권도 도장으로 성장했고, 집을 팔아 마련한 사업자금 6만불을 날리는 대실패로 시작한 컴퓨터 회사 ‘라이트 하우스’는 현재 미국에서 단일 회사로는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했다.
잇따른 사업실패로 끼니도 잇기 어려워 들에서 쑥을 뜯어다 먹고, 정육점에서 버리는 소뼈를 먹어야 했던 시절, 아들들마저 자신의 ‘꿈’에 회의 섞인 반응을 보이는, 더할 수 없이 아프고 힘든 순간이면 김태연은 목욕탕으로 들어가 물을 최대로 크게 틀어 놓고 통곡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내가 가진 꿈이 1%고 주위환경이 99%라고 해도 난 포기하지 않아. 언젠가는 이 1%의 꿈이 99%의 환경으로 변하게 될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 테니까. 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나라고 왜 못해!’
윤생진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전남 곡성에 위치한 금호타이어 공장에 취직했다. 거기서 하루종일 등을 구부리고 앉아 타이어 고무를 붙이고 잘라내는 일을 했다.
1999년 12월 31일, 윤생진은 금호그룹 부장에서 상무이사로 승진했다. 대한민국 30대 그룹 중, 고졸 생산직 근로자에서 출발해 부장이상으로 승진한 사람은 윤생진 한 사람밖에 없다. 그는 현재 조선대학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1978년 입사 면접 시험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꿈’은 금호타이어 부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보시오, 고졸 출신은 기껏해야 ‘반장’밖에 못 올라가. 부장은 서울대 출신도 되기 힘들다고.”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18년 동안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매일 부장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 ‘꿈’은 부장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반드시 되고 말 것입니다.”
박숙경
중학교를 중퇴하고 미용실에서 하루종일 손님들의 머리를 감아주고, 미용실 바닥을 청소하는 미용 보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현재 그녀는 영국런던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세시 헤어’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영국 킹스턴 대학의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세계 최초의 사이버 미용 대학인 I.B.C의 학장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밥’을 먹고 살지 않았습니다. 나는 ‘꿈’을 먹고 살았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도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꿈’은 이루어 집니다.”
오대규
서강대학교에 수석 입학했고 수석 졸업했다. 대학생 시절 ‘주식 전도사’로 이름을 날리며 10억 원 규모의 사설 펀드를 운영했다.
AIG생명에 입사해 6개월만에 최연소 팀장이 되었고 연속 영업실적 1위를 기록했다.
스물아홉살에 유망 벤처기업 ‘노리넷’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한쪽 팔을 쓰지 못한다. 더구나 뇌한쪽이 죽어 있는 뇌성마비 장애인이기도 하다.
그는 5수 끝에 대학생이 되었고, 50군데의 회사에서 퇴짜를 맞은 후 취직했으며, 40군데가 넘는 투자사로부터 거절을 받은 뒤에 노리넷을 설립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계란으로 계속 치면.... 바위는 깨집니다.”
이 빚을 언제 다 갚습니까?
‘이 빚을 언제 다 갚습니까. 하나님, 오늘도 어머니는 사방으로 돈을 빌리러 다녔고, 저는 전화통을 붙잡고 빚쟁이들에게 기한을 하루만 연기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이렇게 빚쟁이들에게 시달린 날이면 저의 몸과 마음은 부서질 듯 아파옵니다. 밤에도 쉬이 잠들지 못하고 잠들었다가도 헛소리를 하며 깨어나기 일쑤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영원히 잠들게 해 주십시오.’
1959년 청주, 회사 설립자인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충북 제도회사에 총무과장으로 입사한 김동수는, 직원들의 월급을 3개월이나 연체한 상황에서 회사 매출액의 40%를 사채이자를 갚는 데 지출하면서, 이 세상을 하직하게 해달라고 매일 밤 하나님께 빌고 있었다.
.....15년 뒤, 그는 300개나 되는 사채 카드를 완전히 정리하고 국민은행 상도동 지점에 100만원이 예금된 보통예금 통장하나를 만들게 된다.
이 통장은 후일 한해 매출액(2001년 기준) 750억원에 순이익 77억원이 들어오는 통장으로 변하게 되고, 충북 제도회사는 미 식품의약국(FDA) '생체 무공해 위생 식기‘승인을 받은 세계 최초의 도자기 회사, ’국제 도자기 쑈‘에서 세계 최고의 판매계약고를 올린 회사, 세계 5대 도자기 메이커 회사인 한국 도자기로 성장하게 된다.
- 18시간 몰입의 법칙 중에서 -
부자마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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