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에게 로맨스만 있었을까
[오마이뉴스 김홍주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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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는 영화의 내용을 암시하는 스포일러가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BBC에서 시리즈 드라마로 제작하고, 영화에서도 다른 수많은 작가들을 제치고 몇 번씩 영화화됐다.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엠마> <설득> 등 지금까지 두루 읽히는 명작들이다.
제인 오스틴이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상류층의 예법과 삼각관계, 재기넘치는 심리묘사와 대사를 지루하지 않게 담았던 까닭이다. 이와 더불어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는 늘 계급을 뛰어넘는 인간성의 제시가 등장하며 부모의 사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던 작가 자신의 경험이 풍부하게 녹아있다.
스무 살의 로맨스, 탁월한 감성
<비커밍 제인>은 연애 소설에 능했던 한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연애 이야기다. 18세기 후반의 영국 시골을 영화적 기법으로 재현해낸다. 하얀 기둥의 나무들, 안개 낀 숲 사이 청명한 얼굴, 18세기의 드레스, 이들이 역상으로 비치는 호숫가에 이르기까지, 소장하고픈 동화책처럼 매 장면이 빛난다.
'너무 예뻐서' 유족들의 캐스팅 반대에 부딪쳤다는 앤 해서웨이(제인 역)의 클로즈업 화면은, 빗방울 떨어지는 창밖으로 초점이 바뀌어 줌 아웃된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와 재치있는 대사에 능했던 제인 오스틴이 살아 돌아온다면, "영화, 그것이야말로 종이 밖의 무한대"라고 펜을 내던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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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서 살겠다(I'll live by my pen)"라고 주장해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던 당돌한 처녀 제인.
"당신의 소설은 시골의 유치한 자아도취다"라고 오만하게 깎아내리던 세련된 도시 청년 리프로이가 제인의 마음을 얻게 된다. <오만과 편견>의 남자 주인공 다아시가 리프로이의 초반에 덧입혀져 있다면, 제인 오스틴 사후 발표작 <설득>의 남자 주인공이 리프로이의 후반에 덧입혀진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단골로 등장했던, 돈 많은 청혼자는 <비커밍 제인>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선택을 하라는 어머니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제인은 무일푼에 가족까지 줄줄이 딸린 리프로이와 사랑의 도피를 한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여러 번 어긋난 연인의 백발의 조우 앞에, 관객의 가슴 한 켠이 애틋하게 무너진다.
누구라도 사랑의 도피를 하고 싶어질 듯한 하얀 나무 숲에서, 감정에 휘둘리고 마는 그들의 청춘은, '소금에 절여진 듯한' 로맨스 그 자체다. 노동의 고됨, 계급과 돈의 현실성을 알기 이전에 사랑에 갇힌 한 쌍 연인들의 이야기는 스무 살 그 나이에 꼭 맞도록 처연하고 안타깝다. "아니 저런 정신나간 딸을 봤나"라며 제인 어머니의 잔소리에 더욱 공감하는 현실적인 관객일지라도, 리프로이의 푸른 눈에서 옛 연인의 얼굴을 만난다.
18세기에 태어나, 시대를 앞서 펜을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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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아름다운 영화에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프랑스의 스탕달, 남자로는 셰익스피어'에 비유된다는 한 여성 작가를 단지 '연애담'에 초점 맞춰 조명했다는 사실이다.
제인이 살았던 1775년에서 1817년의 영국은 여성작가들이 호락호락하게 활동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가 펜을 쥐기에는 여성의 뇌도 손가락도 너무 연약하다는 편견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비커밍 제인>에도 등장하듯이, 당시의 영국은 여성이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하며, 글을 쓸 경우 '괴팍한 성격의 여류 작가'라고 비난받았다.
"괜찮다면 책에 나온 예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남성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늘 우리 여성들을 이용해왔지요. 교육도 남성들의 훨씬 더 많이 받았고 펜 또한 늘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죠. 나는 책이 무언가를 증명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 제인 오스틴 <설득> 중에서
조지 엘리엇이, 세간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남성의 이름을 필명으로 써야만 했던 때로부터 바로 전 세대. <폭풍의 언덕> 히드클리프가 탄생하기 한 세대 전.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가 "남성중심의 사회와 평생을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라는 유서를 썼던 때로부터 한 세기 이전이었다. 제인 자신은 오빠 에드워드에게 말년을 의탁하며 소설을 쓰다가 42세의 나이에 홀로 죽었다.
결혼을 통해서만 재산과 가족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시절, 작가의 고군분투. 이를 연애담으로만 기린다는 건, 무덤 속의 작가에게 참된 위로는 못될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를 현재의 문제의식으로 재해석했던 <디아워스(The Hours)>가 비교되어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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