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텍스트를 품다. : The adult's text.
제목 : 붉은 돼지 (紅の豚)
출시년도 : 1992년
상영시간 : 93min 18s
제작기간 : 1991년3월1일부터 1992년6월12일까지
감독,각본,원작 : 미야자키 하야오
프로듀서 : 타카기 모리히사/스즈키 토시오/미아자키 하야오
음악 : 히사이시 조
실제로 그는 붉은 돼지가 아니다. 그저, 붉은 비행기를 탄 돼지 파일럿일 뿐이다. 아니, 실제로는 붉은 비행기를 탄 돼지머리를 한 인간 파일럿 이다. 어찌됐건 이 작품 안에서도 그는 붉은 돼지라 칭하여져 있고, 작품의 제목역시 《붉은 돼지》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비행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비행기와 자신을 일치 시키는 이상과 열정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진정한 붉은 돼지가 되어버린 것이고... 《붉은 돼지》는 그의 다른 작품보다 상당히 어른의 텍스트를 품고 있다. 시간과 배경이 모호하지도 않고 줄거리 역시 그저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아주 구체적인 배경과 시간,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아닌 현실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줄거리 속에 파 묻혀있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붉은 돼지》를 그저 재미로 보는 애니메이션에 그치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인가? 그래서 《붉은 돼지》에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말 했던 것일까?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이 직접 붉은 돼지는 될 수 없었기에 그의 분신을 이 애니메이션에 담은 것이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동물 중에 왜 돼지일까?《붉은 돼지》를 보고 있자면 떠오르는 격언 하나.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이 격언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에 공감을 하는 듯하고, 자유에 대한 염언과 무정부주의적 공동체 지향을 뜻하기 위해 ‘자유로운’ 돼지를 택한 것 같다. 자유로운 ‘돼지’보다는 ‘자유로운’돼지에 초점을 맞춰야 이 영화를 읽는 늬앙스가 쉬워진다. 주로, 《붉은 돼지》를 본 후 남는 대사가 3개 정도 있는데 “날 수 없는 돼지는 그냥 평범한 돼지 일 뿐이야”나,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가 나”는 꼭 끼어있다. 여기서 ‘돼지’는 정확한 명사의 뜻인 포유류의 한 부분이 아니라, 문법상의 부드러움을 위해 비유한 단어라고 해야 옳을 것 이다. 그리하여 ‘돼지’는 현대인들에게 뉘우쳐야 할 청사진으로 비유된다. 그래서 전쟁과 파시즘에 시달리다가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돼지가 된 ‘마르코’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바타’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우선 영화를 이해하려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와 시대를 잘 읽어야 한다. 기본이 되는 정보들은 어린이보다는 어른들의 텍스트에 맞기 때문에, 《붉은 돼지》는 그 시대를 살았거나, 그 역사의 시대주의에 휩쓸렸던 중년층이 열광을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우선, 구체적인 공간 배경으로는 이탈리아의 근해인 아드리아 해, 밀라노의 비행기 공장 등이 주를 이루며, 그 이외의 장소는 국경 구분이 없는 하늘이다. 또, 제1차 세계대전 후이며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고 이제 막 전쟁의 불기운이 커져 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르코’가 돼지가 된 이유 또한 이 시대의 잔재물로 남아있다는 것에서 《붉은 돼지》는 환상적인 스토리를 구사하려 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실존 했던 흐름에 중점을 두고 환부를 치유하려 한다.《붉은 돼지》에서 역시 전쟁을 돈을 버는 악당 - 공적과 그 공적을 잡는 상금벌이, 그 외의 시민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면서도 전쟁으로 돈을 버는 것은 악당이지만, 상금벌이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무능력자라면서 상금벌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거둔다. 그것 역시 평화를 위한 수단이라고 보면서 《붉은 돼지》의 전체적인 관계는 붉은 돼지와 그의 친구들이 일구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만든다. 여기에서 그의 친구들이라고 모두를 싸잡아 부른 것은, 영화 마지막까지 절대 악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캐릭터’특징일지도 모르겠다. 절대 악은 없는 대신 상반되는 대립관계는 있다. 하지만 대립관계에 있다고 그들이 악한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타당한 다른 이유로 하여금 주인공의 반대편에 설 뿐이지, 인간성을 버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서는 악과 선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여 희화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붉은 돼지》초반 납치당하는 유치원아이들은 벌벌 떠는 대신, 몸값을 부르는 등 여유만만하게 해적들과의 조우를 하고 있고 반면 해적들은 그런 아이들을 호되게 몰아붙이지 못하는 선한 존재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화 결말에는 누가 이기며 누가 지는 등 하는 극단적 맺음이 없다. 희극도 비극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서 관객의 기대와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매듭을 지어놓는 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방식이다. 《붉은 돼지》는 실제 역사를 이야기함으로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펴낼 수 있었지만 이런 ‘미야자키 하야오’의 방식으로 자유로운 힘을 애니메이션 내내 방치하여, 어른과 어린이 모두 미간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 채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영리하게도 푸는 것과 조이는 것을 잘한다. 이렇게 풀어 헤침으로서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는 그가 바라는 사상을 다 받아들인 채로 영화관에서 나오게 된다.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결코 거부감이 들지 않는 세계를 만드는 것, 그 일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법이 아닌가 싶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하늘의 공간은 《붉은 돼지》에서 주된 공간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역시, 《붉은 돼지》의 첫 시퀀스와 마지막 시퀀스는 높은 하늘에 떠있는 작은 비행기로 묘사 되어 있다. 층층 겹친 바다의 돌들이나 물결들의 흔들림은 진짜와 다름없는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밀도는 맑지만 가볍지는 않다.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선의 공중 씬은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치밀함이 돋보이며, 그가 어느 정도 비행의 모든 것을 꿰뚫었는지 실감하게 해준다. 공황도 파시즘도 포획할 수 없던 유일한 공간 하늘과 바다를 나타내기 위해 그는 갖갖은 노력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한 부분 같아 보이지 않는 배경들은 튀지도 죽지도 않게 영화 부분 부분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미세한 흔들림까지도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도와주는 것 같았다. 특히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보았던 하늘은 황혼이 가득한 저녁노을이었는데 상층부는 회색으로, 하층부는 점점 황색으로 가는 오묘한 그라데이션의 효과였다. 그러나 왼쪽으로 떠가는 비행기와 함께 이동되는 하늘은 어느 색 하나같지 않고, 청 녹색부터 짙은 블루 등 갖가지 색이 표현되었다. 그는 비행만큼이나 수채화의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어느 색으로 하늘을 칠했을 때 가장 아름다운지, 분위기 있는지, 맑은지 모든 것을 꿰뚫는 그의 솜씨는 하늘을 만들어낸 신과 같아보였다. 또한 애니메이션의 거의 모든 부분을 함께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파란 하늘과 바다 위에 떠다니는 붉은 비행기였다. 붉은 색상이 대비 되어서 더욱 주 소재처럼 보였던 것 같은데, 그 붉은 색은 촌스러운 붉은 색도 어두운 붉은 색도 그렇다고 튀는 붉은 색도 아니였다. 정말, 있을 법한 그런 붉은 색이었기에 우리가 붉다는 것에 더욱 호감이 갔을 수도 있다. 그리고 최고의 부분이라고 일컫을 수 있는 정도의 한 컷은 구름사이를 이동하다가 바다에 가까이 닿으면서 나는 비행 씬이었다. 그 씬은 구름과 구름 사이로 비추는 태양, 그 빛에 반사되어 자글자글 비추는 물결들이 실제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었다. 절대 손으로 그리지 않고 바다를 옮겨온 듯한 그 느낌. 그 느낌은 지금 눈을 감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니 대단한 묘사력, 혹은 감성이라 할 수 있다.
《붉은 돼지》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캐릭터처럼 특별난 캐릭터가 유난히 많았는데, 우선은 돼지인간이라는 ‘마르코’, 가장 어른적인 여성으로 표현되었던 ‘지나’, ‘마르코’를 다시 인간화 시킨 ‘피오’, 야심찬 사나이지만 알고 보면 진실된 ‘커티스’. 이 네 명의 과거/현재/미래사를 이야기 한 다고해도 이 영화는 정말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특히, ‘마르코’와 ‘피오’의 순수한 인간애가 넘치는 흐름들은 보고 있는 나까지 가슴 뛰게 만들었다. 결국, ‘피오’의 진실된 마음으로 ‘마르코’는 ‘인간’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피오’는 어린 여자아이였던 것이 아니라 《붉은 돼지》에서 가장 인간다운 열정을 가진 소녀였던 것이다. ‘지나’의 아름다움보다도 뛰어난 열정이 그의 마음을 열어 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진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동료를 잃은 슬픔’이라든가 ‘인간에 대한 염증’으로 마법이 걸린 ‘마르코’까지 돌려버리다니. 그러고 보면 《붉은 돼지》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캐릭터는 역시 여성캐릭터인 ‘피오’가 아니었나 생각도 든다. 반면에 주인공인 ‘마르코’는 버버리코트와 중절모, 담배를 입에 문 고독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간 세상에 대한 염증’들이 나에게 까지 전달되어 오는 듯했다. 그를 이해하고 나 역시 그랬을 것이라는 그런 합리화적인 생각들이 오고갔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랬듯 그래서 그에게 ‘자유’라는 이름하에 무정부주의론은 조금 더 특별한 배경이 하늘로 옮겨짐으로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것 같다. 속박에 구속받는 긍정의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자유를 찾는 돼지가 되어버린 ‘마르코’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트라우마를 지닌 채, 곪은 상처를 자꾸만 건드리는 현대인의 아픔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어 보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붉은 돼지》는 그가 어찌하여 무정부주의적 공동체 삶을 지향했나라는 자기 합리화적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외피는 그야말로 ‘차가운 세계들 가운데 따뜻한 이상과 열정으로 지내보자’라는 뜻을 지닌 작품이지만 그 속은 정말 냉담해진 한 남자의 세계관이 깔려있는 듯하다. 이렇게 보니 정말, 《붉은 돼지》는 어른들의 텍스트로 가득한 애니메이션 같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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