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식 세계관을 구축하다 : Be fundamental.
제목 : 천공의 성 라퓨타
출시년도 : 1986년
상영시간 : 124min 4s
제작기간 : 1985년6월15일부터 1986년7월23일까지
원작, 각본, 감독 : 미야자키 하야오
프로듀서 : 다카하타 이사오
음악 : 히사이시 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시간과 노력은 비례한다. 자신만의 스타일, 그 아이텐티티를 만들기 위해서는 쌍방 간에 커뮤니티는 물론 장기간의 교류가 있어야 하고 그 수준이 향상되어야 한다. 업그레이드되지 않는 스타일은 쉽게 잊혀지거나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찾기 위해 노력을 한다. 여기, 어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을 띈 작품이 있다. 그가 처음 이 애니메이션을 세상에 내 놓았을 때는 그저 놀라운 작품이다, 혹은 그의 재조명이 되었을 것이다. 분명 그 한 작품으로 그의 스타일이 정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자꾸만 쌓여가는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통일과 규칙을 발견하게 되고 비로소 그의 스타일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 노력의 결실이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될 때, 그의 아이덴티티는 확고해지고 자존감은 높아진다. ‘미야자키 하야오.’ 그가 재패니션의 거장이 되기 전까지, 전 세계가 그의 네임벨류에 휩쓸리기 전까지 그의 기본사상이 담긴 애니메이션이 있다. 바로, 《천공의 성 라퓨타》가 그에 속한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이 말하길, 《천공의 성 라퓨타》를 가르켜 가장 ‘미야자키 하야오’다운 애니메이션이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성, 스토리방식, 캐릭터, 색채구성? 우선 크레딧에서 보다시피 그가 지금까지 함께 작업 해온 “다카하타 이사오”나 “히사이시 조”와의 앙상블이 여전하기 때문은 물론이나 이것보다 확실한 것은 그의 가치관이 뚜렷하게 나온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가치관이 무엇이냐? 짧게 비유를 하자면, 《천공의 성 라퓨타》작품처럼 파란하늘을 보고 있는 우리지만, 몸은 그 아래 폐허에 있다는 것이다. 즉, 그런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그런 목적을 지키면서도 가벼워 보이는 캐릭터들, 그러나 장엄한 뒷 주제, 슬픈 배경음악으로 재미를 더해간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미야자키’를 반영하는 상징적임이 충분히 들어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본 관객들은 ‘미야자키’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표현하였는지, 그의 인간상이 어떤지 확연히 알 수 있다. 한 애니메이션 하나로 어떤 사람의 가치관을 알게 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아주 직접적인 조합으로 간단히 해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직접적인 줄거리, 배경, 음악, 대사들로 주제를 쉽게 들어낸다. 선악의 이분법으로 선은 “땅을 떠나 인간은 살 수 없다”고 이야기 하며, 악은 떨어지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인간이 쓰레기처럼 보인다”라며 웃는다. 이처럼 선과 악의 캐릭터 구분은 어린아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며 결말부분에서는 권선징악이라는 교훈도 얻게 된다. 그러나 실은 이 교훈이 애니메이션의 목적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미야자키’는 애니메이션 그 이상의 무언가를 그려낸다. 마치 녹음으로 풍만한 자연의 공간을 그려낸 상층부와 언제라도 파멸시킬 수 있는 로봇의 격납고를 그린 하층부, 그리고 그 중심의 비행의 근원 비행석처럼 한 가지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권선징악이라는 간단한 주제를 바탕으로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함으로써,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어른들의 사회고발형 애니메이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2D라는 얇은 셀 애니메이션이 얼마만큼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냐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천공의 성 라퓨타》가 만들어질 당시 85년과 86년에는 첨단과학이 발달하고 있는 시대로, 미야자키는 첨단과학이 인간의 쓰임에 따라 얼마만큼 편리해지느냐, 위험해지느냐를 말하고 있다. 라퓨타는 첨단과학을 묘사하는 대상이며 그 중심에는 라퓨타인처럼 현대인이 서있는 것이다. 현대 과학발전에 쓰임에 대해서 ‘미야자키’는 묻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과연 올바른 사용을 하는 것인가, 오용인가, 남용인가. 올바른 쓰임은 마지막 해적들처럼 보물을 손에 얻게 해줄 것이고, 올바르지 않는 쓰임은 라퓨타인이나 무스카처럼 파멸을 당할 것이라는 아주 자연스러운 이야기지만 극단적인 주제, 그것이 《천공의 성 라퓨타》의 성질이다. 대게,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전 세계인의 공통적인 공감과 웃음을 위해 만들어지지만 확연하게 그 나라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는 남성 영웅주의적이거나 친미국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영웅이 승리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천공의 성 라퓨타》은 다르다. 그것은 간단하게《천공의 성 라퓨타》의 배경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미야자키’는 일본인이지만 그것을 굳이 일본이라는 자국 안에서 해결하지 않으려고 함이 보인다. 그것이 자신의 나라 일본만을 해당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천공의 성 라퓨타》의 배경은 유럽 어느 나라일 것이다. 범우주적으로 현대인의 이중성과 고찰을 담고 있는 이 애니메이션을 누가 우습게 여기겠는가. 이에, ‘미야자키’의 우수성이 다시 보이는 것이다. 그저 웃고 즐기며 영웅 심리를 주는 애니메이션과 달리 현대문명에 지쳐가는 우리에게 숨통을 주는 이야기를 그가 해주는 것이다.
이는 줄거리 뿐 만이 속하는 것이 아니다. 색채나 캐릭터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하늘을 좋아하는 ‘미야자키’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순간순간 빛의 파장에 따라 오묘한 색 변화를 시도하는 그의 하늘을 보고 있자면 행복해 진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특히나 하늘과 바다가 많이 나온다. 우연의 이치일까, 아니면 그의 취향일까. 혹은 파란색을 추구하여 평온함을 되찾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의 이상색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수많은 하늘들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더불어 그의 애니메이션과 딱 맞아 덜어지는 듯한 그런 느낌을 준다.《천공의 성 라퓨타》의 시작도 역시 하늘에서 시작한다. 어두운 밤의 하늘, 먹구름 사이로 비행정이 날아간다. 그 비행정 안에는 �고 �기는 사투가 벌어지다가, 비행석 목걸이를 가진 ‘시타’가 하늘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천공의 성 라퓨타》 타이틀 크레딧. 얼마나 많은 하늘이 나올 것인지 예시하는 것처럼 오프닝 크레딧에는 구름과 하늘, 풍차, 동력으로 날아가는 수많은 비행기들, 떠 있는 수많은 마을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다시 스토리로 돌아와서도 역시 하늘을 비춘다. 비가 온 후 구름사이로 비추는 햇살과 함께 ‘시타’는 떨어져 ‘파즈’의 두 손에 안기게 된다. 그것이 두 주인공의 만남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한 여자아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미야자키’를 표현하는 다른 존재인 하늘은 그래서 ‘시타’에게 여전사라는 이미지를 주는 것 일지도 모른다. 실제 알고 보면 ‘시타’는 그저 가냘픈 여성이 아니라 천공의성 라퓨타의 전통 후계자인 공주이며, 결말부분을 매듭짓는 것도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특수한 공간에 힘을 불어 넣는 만큼 특수공간을 능수능난하게 표현을 하는 것도 그의 몫이기에 그는 《천공의 성 라퓨타》이전부터 이후까지 그의 수많은 하늘을 그린다. 그사이에 《천공의 성 라퓨타》가 있다고 믿는 것은 그의 의도나 바람이 아니라, 나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라퓨타 신드롬”은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배경이 된 하늘의 아름다움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는 하늘에 혹시 있을 것 같은 “라퓨타”에 대한 이상과 《천공의 성 라퓨타》가 나타낸 평화로움, 그것이 “라퓨타 신드롬”의 연속됨이다.
전문가가 아니라 자신감을 갖고 말할 수는 없으나, 《천공의 성 라퓨타》가 그리는 색채는 최근 작품보다 간단한 배색으로 이루어져있다. 많은 기교나 CG같지 않은 CG들의 덕분일지는 모르나, 라퓨타는 간단한 색채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어있다. 트렌지션이나 팬하는 카메라역시 지금보다는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하다 해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묘사할 부분은 묘사하고 아닌 부분은 충분히 날리는 것이라든가, 중간부분 로봇이 불길을 뿜는 부분에서의 뿌연 색감처리등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뛰어난 부분은 하늘과 비행정의 묘사이다.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그려내어 정말 있을 법한 비행정을 그려내며, 《천공의 성 라퓨타》에 등장하는 해적들이 타고 다니는 플랩터 역시 기발한 아이디어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미야자키’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인가. 비행석이 라퓨타가 떠있는 힘의 근원이며, 라퓨타인이라는 가상의 인류들의 삶과 멸망, 플랩터를 타고 다니는 해적들과의 교류 모든 것이 놀랍다. 현재 봐도 통통 튀는 소재들이 간질 나게 하는데, 그 당시는 어땠을지 더욱 놀랍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캐릭터 역시 지금과 별 다른 차이없이 흥미로운 요소거리다 된다. 평범한 남자아이인 ‘파즈’, 비밀스러운 물건을 지닌 여자아이인 ‘시타’, 강인하고 씩씩한 여성캐릭터 도라는 최근까지 이어져온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조금씩 변주되어 등장하는 주요된 캐릭터들이다. 특히, 자의식이나 책임감이 강한 ‘파즈’를 통해 우리는 모험심과 순수한 사랑을 엿볼 수 있으며, ‘시타’와의 믿음을 보여줌으로 영화의 농도를 더욱 높여준다. 초반부분 적으로 등장한 도라는, 후반부분 선으로 탈바꿈되어 나와 ‘시타’와 ‘파즈’를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라도 소개되는 도라는 ‘미야자키’가 직접 자신의 어머니상을 그렸다고 할 정도로, 현실감있는 생활력 강한 조력자라 할 수 있다. 간간히 웃음을 던져주는 그녀와 그녀의 아들들이 《천공의 성 라퓨타》의 막강한 조연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의 역할은 빛나는 진주처럼 크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입체적인 주연과 개성적인 조연들로 이루어 졌다 할 수 있다. 주연보다 더 흥미로운 조연들은 영화의 완성도를 더욱 높여주는 역할도 하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겠다. 음악은 어떠한가? 주제와 직결되는 가사는 완성도를 더욱 높여주고 관혁악, 오르골, 피아노로 연주되는 ost는 감성을 자극한다. 애니메이션이 끝나도 그 감동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의 중요한 힘이 청각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천공의 성 라퓨타》의 ost 마지막 곡 “너를 태우고”는 나무뿌리만 남은 라퓨타가 “시타”와 “파즈”, 그리고 거대한 비행석을 가지고 하늘을 날아가는 영상과 금상첨화를 이룬다 할 수 있다. 영화음악 자체가 아름다울 뿐 만 아니라, 영상의 연속을 도와줌을 짧게나마 알 수 있는 배경음악의 힘이었다. 애니메이션의 음악이라 해서 행진곡처럼 밝고 메이져가 아니라, 마이너로 작품 주제에 대한 슬픔역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된 결과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씁쓸함 마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천공의 성 라퓨타》가 왜 가장 ‘미야자키’다운 애니메이션인가 하는 문제의 해답은 바로 이것에 있다. 지금까지 《천공의 성 라퓨타》에 대해 쓰여진 모든 것들이 그의 전작에 기초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가 말하고자 하는,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과 자연친화적인 사고가 그의 애니메이션의 기초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단지, 80년대를 살고 있던 ‘미야자키 하야오’, 당신의 가치관에 대한 반성을 인류적으로 끄집어낸 가치관일 뿐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그에게는 이제 다른 가치관이 주를 이루고 있을 수도 있다. 기계문명을 반대하는 그가 아니라, 기계문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기초적인 요소란 이런 것을 말한다. “파즈”는 그저 이 애니메이션의 남자주인공도 아니고, “시타”역시 여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은 ‘미야자키’ 작품 속에서 조금씩 변주되어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스토리구성은 어떠한가? 배경이 일본으로 바뀌고, 혹은 땅위로 바뀐다고 해서 이야기가 달라질까?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은 변화하되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거장들의 작품 속 특징이 있다면 변주되어 가는 요소들의 재구성이라 하겠다. 그중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뛰어난 평가를 받는 것은 계속되는 시도를 한다는 것에 있다. 그는 되도록 다른 소재로 되도록 다른 주제로 되도록 다른 배경으로 이야기로 관객들과 소통을 하려한다. 그들의 인내심을 그는 알기에, 색다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야기꾼으로 우리에게 다가서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역시 그의 노력을 알면서도 눈을 가리고 그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와 우리는 범우주적인 소통을 나누며 웃는 것이 아닐까? 마치 《천공의 성 라퓨타》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인류의 염원을 가진 행복처럼 말이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하나하나는 그에게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일부분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2005)
'세상테크 > 영화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혈의 누 Blood Rain, 2005 (0) | 2008.09.04 |
---|---|
[스크랩] 미야자키 하야오 : Name Value (0) | 2008.09.04 |
[스크랩] 이웃집 토토로 となりの トトロ, 1988 (0) | 2008.09.04 |
[스크랩] 이웃집 토토로 となりの トトロ, 1988 (0) | 2008.09.04 |
[스크랩] 마녀배달부 키키 魔女の宅急便, 1989 (0) | 2008.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