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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던컨 암스트롱, 내 아이 위한 성공코치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6. 07:35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수영 200m 자유형 부문에서 무명의 한 호주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무도 그의 우승을 예상치 못했고 그 역시도 믿지 못할 인간 승리였다. 인생역전을 이룩했던 주인공은 바로 던컨 암스트롱(41). 그가 그때를 추억하며 2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열정은 그대로인 채로.


지난 3월 5일 서울 불광초등학교의 어느 교실 안 모습. 어린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외국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자신의 차례가 오기까지 기다렸다가 궁금한 것은 질문해보기도 한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로 인해 아이들 머릿속에는 벌써부터 꿈을 이룬 자신을 그리는 듯하다. 자신이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존재인지 다시 한번 깨달은 듯 약간은 상기된 표정들이다.

그들에게는 낯선 이이지만 던컨 암스트롱은 수영 금메달리스트다. 서울올림픽 당시 던컨은 호주에서 지금의 박태환 선수 못지않은 국민적 영웅이었다. 당시에는 미국의 매트 비온디, 폴란드의 아터 우닷, 서독의 마이클 그로스가 강력한 우승후보였으나, 그의 코치 로리 로렌스의 혹독한 훈련과 전략지도에 힘입어 결승점 50m를 앞두고 역전승을 거두며 호주 국민들에게 뜨거운 감동과 환희를 안겨줬다. 그가 출전했던 경기는 당시 서울올림픽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이듬해인 1989년 던컨은 올림픽 활약을 인정받아 국가에서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인 ‘올해의 젊은 호주인 상(Young Australian of the Year)’까지 수상하게 된다.

그런 그가 2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무엇보다 수영선수가 아닌 인재 개발 컨설턴트로의 변신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선수생활을 그만둔 뒤로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끄집어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로서 5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360번의 랩을 돌며 체력의 한계,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의 도전정신과 인내력, 의욕과 열정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 이를 활용해 현재 그는 학생이나 유명 기업의 직원들, 스포츠 선수, 심지어는 환자들까지 다양한 집단을 대상으로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 역시 한국 국민들에게 특별한 동기부여의 기회를 선물하고자 오게 됐다.

“1988년 이후 한국을 처음 찾았습니다. 저에게 영광의 시절을 줬던 그 도시에 다시 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새롭고 감회가 남다르네요. 20년 전 제가 섰던 수영레인에도 가봤습니다. 그때가 많이 생각나더군요.”

20년이란 세월이 지나면 여느 도시들이 그렇듯 서울도 많은 것이 변했다. 그 긴 시간 사이 그에게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많은 것이 변했다.

인생의 좌절을 맛보다

던컨은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수상 이후 인생 최고의 환희를 맛보게 됐다. 그러나 영광의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금메달리스트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과욕 때문이었는지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 와중에 1990년에 입은 어깨 부상은 점점 상황을 악화시켰다. 사람들의 실망도 컸고 그 부담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나는 뭘까, 이제는 무얼 해야 하나…’하는 생각에 시달렸어요. 자연스레 자기 관리가 소홀해지고 살도 많이 쪘습니다. 운동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아내와의 갈등도 커졌습니다. 그때 전 운동을 포기해야 했고 첫 번째 아내와의 이별도 겪었습니다. 그후 2년간은 우울증에 시달렸어요.”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지금 그의 직업이다. 웬만한 내공으로는 할 수 없는 이 일을 할 수 있게 된 바탕에는 바닥으로까지 내려가 본 최악의 순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힘들었던 그 시기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자기가 진짜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기회를 줬다.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굉장히 다양한 그룹의 각기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었죠. 너무나 달랐지만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일적인 면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죠. 제 모든 경험의 시작이었던 방송 일(스포츠 해설가)도 한 라디오 진행자에 의해서였습니다. 그 역시도 베트남 참전 용사여서 삶과 인생에 대한 색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죠. 이러한 사람들이 주변에 없었더라면 지금의 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가 제안하는 것도 스스로의 경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늘 강조하는 ‘자신 안의 최고를 찾아내라’의 중요한 방법은 바로 ‘롤 모델을 두어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한다. 

“돌이켜보면 수영선수일 때 선자 한 분이 옆에 있어서 ‘넌 잘하고 있다. 다 잘될 거다’라고 다독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 그 어린 시절에 수영 성적뿐 아니라 스폰서 문제, 명예 등에 대해 연연하고 초조해하며 괴로워했던 마음을 가졌던 걸 보면 말이죠. 박태환과 같은 젊고 유능한 선수들을 보면 분명히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릴 수 있는 기회가 도사리고 있지만 중요한 건 운동선수는 좋은 경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돈과 명예는 그후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죠. ‘경기에만 집중하라’, 인생에 있어 다른 것들도 다 똑같습니다.”
가족의 행복이 곧 성공

▲ 타고난 재능보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던컨 암스트롱. 어린 시절, 엄하고 혹독한 코치 밑에서 훈련받았다.

그를 이토록 긍정적인 풍요로움 속에 있게 한 가장 큰 지인은 바로 가족이다. 첫 번째 결혼의 실패를 딛고 새로운 사랑을 만난 그는 현재 세 명의 딸을 두고 있다. 가정을 꾸린 후부터는 좋은 아버지인 친구도, 좋은 남편으로 불리는 선배도 모두 그의 롤 모델이 됐단다. 꿈을 위해 그가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인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목표도 바로 가족이다. 지금 그에게 최고의 목표는 바로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는 것. 이처럼 그에게 가족은 자신의 모든 것이며 행복의 원천이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호주의 국기와 올림픽을 상징하는 월계관 문신이 있다.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아내와 세 딸 이름의 이니셜을 새겨 넣었을 정도로 가정적인 남자다.

“항상 제 심장에 있다는 의미예요. 어딜 가나 따라다니며 함께 있다고 느끼죠. 가족은 나를 가장 나답게 하고 내 안의 최고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성공한 사람은 바로 가정을 화목하게 이끄는 사람이 아닐까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 혈기의 수영선수에서 시간을 가지고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체득한 중년으로 변신한 그가 보인다. 늘 다른 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의 동기가 부여되는 모습을 보니 그는 천생 동기부여자(그는 스스로를 motivator라고 부른다)다. 그의 도전과 열정을 통해 올림픽의 가장 큰 정신인 ‘불가능은 없다’를 또 한번 느낀다. 그의 말처럼 빌고 그치는 허망한 소원 대신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꿈을 오늘부터 꾸어야 할 것 같다.

던컨의 성공 노하우

“세상의 최고는 모두 당신 안에 있다”
-3월 4일 국민대 강연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200m 자유형에서 우승하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여주며 강연을 시작함.)

제가 영상을 보여주는 이유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한순간에 호주의 영웅이 되었던 스무 살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함입니다.

저는 현재 살고 있는 브리즈번이라는 도시에서도 1000km 더 떨어진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자라났습니다. 열네 살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는 제가 수영에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느끼시고는 농장도 팔고, 집도 팔고, 직업도 바꾸면서 전 가족을 이끌고 브리즈번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호주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수영 코치 로리 로렌스에게 저를 맡기기 위해서였죠.

로리 로렌스는 소문으로 듣던 것처럼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저를 처음 보자마자 “넌 누구냐, 여기 뭐 하러 왔느냐”며 소리를 질러댔죠. 그러고는 “Are you hungry son? Are you hungry?”라 말했고, 저는 어린 나이임에도 기죽지 않고 “점심을 먹어 배가 부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로리 로렌스는 혹독한 코치였지만 저에게서 최고의 실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8km 수영을 했고, 학교가 파하면 다시 수영장으로가 18km를 더 수영했습니다. 360랩을 매일같이 5년 동안 돌았습니다. 처음엔 코치가 너무 무서워 울었고,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싫어서 울었고, 학교가 끝나면 수영 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차에서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어요. 로리가 무서웠지만 저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고, 그에게 기쁨을 안겨주고 싶어 더욱 열심히 했습니다.

결국 처음 출전한 올림픽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경기는 2분 안에 끝났고 그 2분을 위해 저는 5년을 준비한 것이었어요.
출전할 때만 해도 저는 사람들의 관심에도 없는 랭크 아웃사이더, 무명 선수였습니다. 어렸을 때도 1년에 한번 1등을 할까 말까 할 정도였기에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어요. 그저 훌륭한 멘토(로리 로렌스)를 만났고, 참고 노력한 것뿐이었고, 결국 호주 최고의 수영 선수가 된 것이죠.

윌마 루돌프라는 세계 최고의 여성 운동선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1920년대 미국 텍사스에서 가난한 농부의 22명의 자식 중 20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소아마비로 인해 날 때부터 걷지도 못하고 일곱 살까지 휠체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조기구를 끼고 걷기 시작했고, 열두 살이 되면서 겨우 혼자 걸을 수 있게 됐죠. 그런 그녀가 걸음마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육상선수로 올림픽 대회에 출전해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세계 최초의 여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습니다. 가난했고, 못 배웠고, 인종차별에 시달리고, 여성이라 무시당했습니다. 무엇보다 걸을 수 없는 장애가 있었지만 그녀는 세계 최고의 여성 육상선수가 됐습니다.

세계 최고의 모험가, 탐험가, 도전가로 불리는 마일스 바버라는 사나이도 있습니다. 그는 에베레스트를 제외한 모든 산을 정복했고, 북극 남극 탐험에도 성공했어요. 마흔의 나이에 양쪽 시력을 모두 잃고 나서 해낸 일이었습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참가했던 아프리카 탄자니아 마라톤 대표 존 아크와리는 대회의 꼴찌로 결승점에 들어왔습니다. 마지막 선수가 들어오고도 두 시간이 지나서야 결승점에 들어와, 이미 그가 들어왔을 때는 경기가 끝나고 관중도 모두 떠난 후였었죠. 경기가 시작되고 2km 지점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지만 나머지 40km를 완주했습니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기고, 걷고를 반복해서…. 결승점에서 그를 반긴 두 명의 기자가 어차피 우승하지 못할 걸 알면서 왜 완주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 국가는 나에게 경기를 시작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경기를 완주하라고 보낸 것이다”라고요.

여러분에겐 윌마 루돌프보다 더 심한 장애와 역경이 있습니까? 역경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말이죠. 마일스 바버처럼 시력을 잃고 나서 더욱 뛰어난 도전정신과 위대한 탐험정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여러분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존 아크와리는 평범한 선수였지만 그가 보여준 진정한 리더십은 모두에게 감동을 줬던 것처럼 리더십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시작됩니다.

성공을 위해서 단 하나의 행동, 태도, 목표면 충분합니다. 꿈과 목표를 정하고 좋은 이야기들과 습관, 태도를 통해 매일 자신에게 동기부여를 해나가세요. 세상의 최고는 모두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 여성조선
취재 박주선 기자 | 사진 안호성

출처 : 닥터상떼
글쓴이 : 닥터상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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